* * *
“하암.”
늘어지게 하품을 한 살라가 삐죽삐죽 사방으로 뻗친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어뜨리며 나타났다. 얌전히 고개를 숙인 채 살라를 기다리던 알버트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잠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나타난 살라는 앞이 반쯤 열린 가운 차림이었다. 벌려진 가운 사이로 살라의 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알버트는 이성의 몸에 낯을 붉히기도 전에 감탄부터 나왔다. 살라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꽉 짜인 근육들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평생 몸을 단련해 온 알버트는 알았다. 저런 몸은 타고나는 것만으로도, 노력해서 만들어 내는 것만으로도 불가능했다. 타고난 신체에 뼈를 깎는 노력이 더해져야 가능한 일이었다.
“나한테서 눈을 못 떼네.”
살라는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으며 알버트의 팔을 끌어당겼다. 흐트러진 가운이 더 벌어졌다. 알버트는 그제야 눈 둘 곳을 몰라 고개를 돌렸다.
“순진하기까지 하네.”
살라는 붉어진 알버트의 얼굴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소르체에서 여자의 몸은 일부러 드러낼 필요도 구태여 숨길 필요도 없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니 허리를 졸라매거나 가슴을 부풀리는 것 같은 의복은 입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체를 드러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숨기지도 않았다.
더구나 살라는 백자로 각성한 순간부터 여러 사람의 시중을 받으며 생활했다. 그중에는 남자도 있었다.
살라는 그들의 손이 제 몸에 닿는 것을 한 번도 신경 쓴 적 없었다. 그들 중 누구도 제 몸을 보고 이렇듯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지만.
“치료를 하실 게 아니라면 저는 이만 가 보겠―”
“앉아. 아직 내 힘이 필요하잖아?”
살라의 입꼬리가 비웃듯이 올라갔다. 다음으로는 잡고 있던 알버트의 팔을 확 끌어당겼다. 알버트가 균형을 잃고 살라의 몸 위로 쓰러졌다.
“내 손이 닿고 나면 하루하루가 다르지? 완치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지? 여기서 그만둘 거야?”
살라의 손이 미끄러지듯 다친 알버트의 팔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알버트는 살라에게 잡힌 제 팔을 쉽사리 빼내지 못했다. 살라에게 치료를 받을수록 깨달았다. 살라가 아니면 누구도 자신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을.
고민하는 알버트의 머리 위로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쏟아져 내렸다.
“내 기사가 이렇게 지내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새파란 눈동자가 반쯤 헐벗은 살라와 뒤엉켜 있는 알버트를 냉랭하게 바라보았다. 캐롤린과 함께 왕도 릭센으로 떠났던 아리아드네였다. 알버트는 난데없는 아리아드네의 등장에 놀라 눈을 끔벅였다.
“아, 공녀 저하께선 여기 어떻게…….”
놀란 알버트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살라가 꽉 붙든 팔을 놔주지 않았다. 알버트는 그제야 제 꼴이 아리아드네에게 어떻게 보였을지 짐작했다. 캐롤린에게 이 모습을 보인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니 눈앞이 새까맣게 변했다.
“이, 이건 그런 게 아닙니다. 이건 그러니까 팔을 치료, 치료하려고…….”
“치료?”
가당찮은 변명을 더 해 보라는 듯 아리아드네가 냉기를 뚝뚝 흘리며 되물었다.
“정말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알버트는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굴리며 고개만 숙였다.
“뭐야, 메르디에스 공녀가 네가 선택한 사람이었어?”
그 꼴을 보던 살라가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저기 쟤가 기사님 치료 중인 게 맞긴 맞아.”
아리아드네가 알버트를 보러 가겠다고 할 때부터 내심 이런 것을 걱정했던 코라가 나섰다.
“치료해 주는 것에 다른 마음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코라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렇게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느슨하게 벌어진 가운을 정리하던 살라가 아리아드네를 보며 조롱이 섞인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아리아드네를 알버트의 정인으로 오해하고 도발하는 모양새였다. 아리아드네는 픽 웃으며 알버트를 꾸짖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알버트, 그새 주인을 대하는 예도 잊어버렸나?”
메르디에스 기사단의 주인은 당연히 메르디에스 공작인 레너드였다. 하지만 알버트만은 달랐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알버트를 내 호위로 삼을 거야. 리스벨 백작께서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할 분이 아니라는 건 잘 알지만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알버트가 호위로 임명되면 내 승인 없이는 그를 기사단에서 내보내지 못할 테니까.
아리아드네는 기사단장인 커티스로부터 알버트를 지켜 주기 위해 그를 제 직속 호위로 삼았다. 알버트의 처분은 오로지 아리아드네에게 달려 있었다.
찌를 듯이 차가운 시선이 알버트에게 내리꽂혔다. 하얗게 질린 알버트가 그대로 부복하며 고개를 숙였다.
“기사 알버트, 메르디에스 공녀 저하를 뵈옵니다.”
아리아드네는 제 앞에 무릎 꿇고 고개 숙인 기사를 제법 오랫동안 그대로 두었다. 긴장한 알버트의 턱 끝에서 흘러내린 땀이 바닥에 고였다.
“그래, 다행히도 그것까지 잊은 건 아닌 모양이야. 팔을 고치라고 보냈더니 그새 다른 주인을 섬겨서야 곤란하지.”
싸늘한 질책에 알버트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했다.
“일어나.”
조금 누그러진 듯한 목소리가 알버트를 일으켰다.
“팔은?”
아리아드네가 알버트의 팔과 손 따위를 꼼꼼히 살펴보며 물었다.
“소르체에서 치료를 받은 덕에 많이 나았습니다. 이대로라면 곧 복귀할 수 있을 듯합니다.”
오랫동안 검을 잡은 알버트의 손은 마디가 굵고 피부가 두꺼웠다. 하지만 훈련을 쉬는 사이 손바닥 안쪽에 박인 굳은살은 말랑해지고 늘 달고 다니던 자잘한 흉터는 모두 사라진 듯했다.
“그동안 검을 잡거나 한 것 같진 않네.”
아리아드네는 깨끗한 알버트의 손을 유심히 관찰하더니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가 다시 다치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요.”
자리에서 일어난 살라가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알버트의 정인이라던 여자가 메르디에스 공녀는 아닌 것 같은데…….’
아리아드네가 알버트를 보는 눈빛은 지나치게 담백했다.
“벌써 알버트의 예후까지 걱정해 주시는 건가요?”
“제 것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전 아끼는 건 오래 곁에 두는 편이라.”
“알버트에게 소르체는 거쳐 가는 곳에 불과할 텐데요.”
“어차피 지킬 집도 잃은 개 처지 아니던가요? 알버트를 넘겨주시면 제가 좀 도와드릴 수도 있는데.”
코라가 소르체의 가주에게 메르디에스 성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할 때 살라도 그 자리에 있었다. 살라는 제 제안이 아리아드네에게 퍽 요긴할 거라 자신했다. 그녀가 소르체를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말이지만.
“내 기사를 개 취급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궁색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살라의 제안 따위 재고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단칼에 거절했다. 살라의 제안에 정신이 나간 것 오히려 알버트였다.
“저, 지킬 집을 잃었다는 게, 공녀께서 지금 여기 계신 이유가…….”
캐롤린과 함께 왕도로 떠났던 아리아드네가 소르체에 나타난 이유. 알버트는 그 이유가 제 짐작만은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
“맞아. 네 짐작대로 메르디에스 성이 함락되었어.”
그렇게 말하는 아리아드네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처럼 담담한 목소리였다. 알버트는 제가 들은 것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함락이라니요?”
“자세한 건 나도 정확히 몰라. 다만 큰 전투가 있었던 것 같진 않고, 성 안의 사람들이 인질로 잡혀 있는 듯해.”
알버트는 인질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눈앞이 점멸하듯 깜박였다.
“그럼, 아가씨께서는! 캐롤린 아가씨께서도 지금―”
“아, 캐롤린은 안전해. 가장 높은 배신자는 어디서든 대우받는 법이니까.”
가장 높은 배신자. 그것이 캐롤린을 가리키는 말일 리 없다. 알버트는 캐롤린을 알았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가씨께서 그럴 리가…….”
캐롤린이 가진 저울에서 절대 넘어설 수 없는 것이 메르디에스와 아리아드네였다. 캐롤린은 제 목숨조차도 그것들 앞에서는 너무도 가볍게 취급했다.
벌벌 떠는 알버트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리아드네가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알버트, 넌 리스벨의 종자(從者)인가?”
―알버트, 나는 언제든 메르디에스를 지키는 첫 번째 손이 될 거야. 우리는 같은 것을 지키겠구나.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바라보던 보랏빛 눈동자가 이렇듯 생생한데.
“메르디에스에 주인의 말을 믿지 못하는 기사는 필요 없는데.”
알버트가 마주한 새파란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베어 낼 듯 날카로웠다. 아리아드네가 거짓을 말하는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진실 앞에 알버트는 무엇을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살라는 당장이라도 필요 없으면 놓고 가라는 말이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아리아드네가 반색하는 살라를 향해 눈짓하며 물었다.
“소르체에 남고 싶어?”
“아닙니다.”
망설이면 자신을 버리고 가기라도 할까 알버트는 황급히 부정했다. 아리아드네의 입술 사이로 한숨 섞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네 자리는 네가 만드는 거야. 스스로 떳떳할 수 없다면 언제든지 그만둬도 좋아. 어중간한 마음으로 내 곁에 남는 건 이쪽에서 사양이야.”
못 박힌 듯이 그 자리에 선 알버트를 뒤로하고 아리아드네는 살라의 처소를 떠났다.
아리아드네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마구잡이로 나부꼈다. 날리는 제 머리카락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리아드네가 코라에게 물었다.
“코라, 메르디에스에 있을 때 네 머리카락 말이야. 염색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한 거야?”
“아― 님, 그거는…….”
재잘거리는 코라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흩어졌다.
* * *
길게 목을 뺀 푸른 델피니움이 밤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렸다.
풀숲에 몸을 숨긴 사람들은 자그마한 기척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파스락,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에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날짐승이 나뭇가지에 내려앉았다 제집으로 돌아가는 소리였다.
‘아, 진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사람들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코라가 투덜거리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오늘도 허탕인 듯했다. 코라는 빈 덫을 확인한 사냥꾼처럼 실망을 감출 수가 없었다.
‘1왕자가 정말 이곳에 다시 올까?’
의심하는 코라를 내려다보는 하늘에 걸린 달이 유난히도 밝았다. 그 시각, 코라가 숨어 있는 곳과 정반대의 풀숲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빛이 잦아들자 아무도 없던 풀숲에 사람 몇몇이 별안간 나타났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이들의 엄지손톱에는 그믐달 모양의 문신이 선명했다.
그리고 복면을 쓴 검은 달의 부축을 받는 한 남자가 있었다. 1왕자 카이엔이었다.
첫 번째 실패로 예민해진 그는 두 번째의 시도가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번만큼은 절대로 실패해서는 곤란했다.
‘혹시나 검은 달이 백자의 피를 구하고도 모라의 통로가 열리는 때를 맞추지 못해 그것을 도로 빼앗기기라도 하면…….’
그것이 염려스러웠던 그는 아예 자신이 소르체에 동행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가 함께라면 언제든 모라의 통로를 열 수 있으니까.
“백자의 피를 찾는 대로 이곳으로 복귀하라.”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카이엔이 귀찮은 듯 손을 휘젓자 복면을 쓴 남자들이 소리 없이 사방으로 사라졌다. 카이엔을 지키기 위해 두 명의 검은 달이 그의 곁에 남았다.
거친 숨을 내쉬던 카이엔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주저앉았다. 격통이 다시 찾아와 그의 가슴을 헤집어 놓았다.
모라의 힘을 끌어 쓸수록 제 남은 생명이 깎여 나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이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백자의 피만, 백자의 피만 손에 넣으면…….’
그러면 이 모든 고통도 끝이었다. 백자의 피를 손에 넣고 이곳에서 감쪽같이 사라지면 된다. 그 모든 화살은 소르체에 체류 중인 외부인이 지게 될 터였다.
‘아리아드네, 당신이 잘못한 거야. 전부 날 선택하지 않은 당신 잘못이야.’
카이엔이 한 짓을 뒤집어쓰는 것도, 메르디에스 성문 앞에서 말머리를 돌려야 했던 것도 전부 그를 배신한 아리아드네가 자초한 일이었다.
카이엔은 누군가 나타나기라도 할까 품 안의 흰 뼈를 꽉 움켜쥔 채로 주변을 주시했다. 빳빳하게 윤이 나는 초록 잎 사이로 새빨간 꽃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빨간 꽃의 정체는 베고니아였다.
‘촌스럽긴.’
키우기 쉽고 번식력이 좋은 베고니아는 왕도에서는 평민들의 거리에나 심는 꽃이었다. 이런 꽃을 가주가 거주하는 거처에 심다니 소르체의 심미안도 알 만했다.
소르체 내부에 왕도와의 통로를 두 개 만들어 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첫 번째 통로로 보낸 자들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같은 통로를 또 사용하는 것은 위험했다.
털끝만 한 것이라도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다. 그에게 이것은 마지막 기회였으니까.
‘어서, 어서 빨리 백자의 피를…….’
카이엔은 검은 달 중 누군가가 백자의 피를 구해 오는 대로 왕도로 사라질 생각이었다. 남은 자들이 어떻게 되든 그것은 제 알 바가 아니었다.
정말 위험한 순간이 오면 호위들을 미끼로 던져 주고 혼자라도 몸을 빠져나가면 된다. 본디 호위란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었다. 그만한 계산도 없이 소르체에 직접 발을 들인 것은 아니었다.
“크, 크헉…….”
하지만 누구도 그의 고통을 대신 짊어질 순 없었다. 가슴을 헤집고 온몸을 조각내는 듯한 고통이 다시금 재발했다.
“허억.”
그는 온몸이 갈가리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가슴을 누르며 몸을 숙였다. 이 고통이 그를 찾아올 때마다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제발, 제발 나를 이 고통에서―’
열망이 지나쳐 헛것을 본 줄 알았다. 고통으로 흐릿해진 시야에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백자의 피를 지닌 소르체의 혈족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과 피처럼 붉은 눈을 지닌 소르체의 혈족. 백자의 피를 지닌 그들을 사냥하던 시절에는 그것을 토끼 사냥이라 불렀다.
온기가 채 식지 않은 팔딱팔딱 뛰는 토끼의 심장이 그의 손 위에 올려진 것만 같았다. 그는 백자의 피를 손에 넣었다는 기쁨에 순간 고통마저 잊었다.
아아, 카이엔은 홀린 듯이 새하얀 머리카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새하얀 머리카락을 스치자 백자의 피가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 아래 숨겨진 겨울 호수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기다렸습니다, 1왕자 전하.”
아름다운 붉은 입술이 조소를 머금고 휘어졌다. 지금쯤 그가 놓은 덫에 걸려 발버둥을 치며 피 흘리고 있어야 할 여자였다. 공기처럼 두른 오만함을 벗어던지고 제 발밑에서 자비를 구해야 할 여자였다.
그의 전 약혼녀, 아리아드네 메르디에스는 조금도 상처 입지 않은 모습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아리아드네의 손에는 한 뼘만 한 길이의 단검이 들려 있었다. 푸른 델피니움이 심어진 풀숲에서 발견된 검집과 한 쌍인 바로 그 단검이었다.
‘어떻게 저것이 그녀 손에…….’
카이엔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숨이 턱 막혀 왔다.
“전하, 백자의 피를 찾으십니까?”
단검을 손에 든 아리아드네가 카이엔을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소리가 모조리 사라진 듯한 적막 속에 아리아드네의 목소리만이 선명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그녀는 평소보다 훨씬 크게 느껴졌다. 컥컥, 막힌 숨을 토해 낸 카이엔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리, 아드네? 어떻게 그대가 지금 여기에…….”
카이엔이 처음 소르체에 보낸 자들이 실패했다면 이곳에 체류 중인 아리아드네가 무사할 리 없었다. 소르체가 아리아드네를 가만히 내버려 뒀을 리가.
“전하께서 절 소르체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좀 더 숙이자 새하얀 머리카락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카이엔을 홀렸던 백자의 상징이 그의 눈앞에서 하늘거렸다.
“그 머리는 대체…….”
아리아드네가 왜 이렇게 자유롭게 다니고 있는지, 머리카락 색은 왜 저런 건지 카이엔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소르체는 모발의 색을 바꾸는 방법이 유달리 발달한 편이지요. 왜 그렇겠습니까?”
백색증을 앓는 소르체의 피가 영생을 이루게 해 준다는 믿음은 꽤 오래 이어져 내려왔다. 한때는 백색증이라면 소르체의 혈족이든 아니든 마구잡이로 사냥하는 일마저 빈번히 일어났을 정도였다.
―코라, 메르디에스에 있을 때 네 머리카락 말이야. 염색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한 거야?
―아, 그거? 아리아드네 님 그거 되게 예민한 질문인 거 알아? 소르체 밖을 나가려면 당연히 바꿔야지. 날 잡아가라고 소리칠 것도 아니고.
―혹시 내 머리카락 색도 잠깐 바꿀 수 있을까?
―님, 이게 무슨 드레슨 줄 알아? 내키는 대로 갈아입게?
―…….
―알았어, 알았다고. 무슨 색으로?
―너처럼 하얀색으로.
코라가 약초를 넣어 끓여 준 물로 머리를 감자 머리카락 색이 옅어졌다. 아리아드네의 옅은 금발은 금세 하얀색을 띠게 되었다.
―안구색까지 바꾸고 싶으면 약을 먹어야 해. 그건 필요 없지?
―머리카락이면 됐어.
아리아드네는 거울에 색이 변한 제 머리카락을 비춰 보았다. 머리카락 색이 변한 것뿐인데 소름이 돋았다. 카이엔이 그녀의 머리를 움켜쥘 듯 손을 뻗었을 때, 소르체의 혈족들이 느꼈을 공포의 아주 작은 단면을 엿본 기분이었다.
“덫을 놓고 기다린 건 전하가 아니라 이쪽이라는 말입니다.”
어둠 속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하얀 얼굴이 흉포한 포식자 같았다. 카이엔은 그를 짓누르는 아리아드네의 태도에 고통마저 잊을 만큼 강한 분노를 느꼈다.
힘없는 왕자로 태어나 살아남기 위해 사랑마저 이용해야 했다. 평생 떠받들려 산 아리아드네는 죽어다 깨어나도 그가 겪었던 비참함을 알지 못했다.
꽉 다문 카이엔의 입술 사이로 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분노로 일렁이는 카이엔의 눈동자를 본 아리아드네가 픽,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지고한 몸이 어쩌다 이렇게 상하셨나요?”
우아하게 발을 든 아리아드네가 그대로 카이엔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겨우 지탱하고 있던 몸이 무너지며 카이엔이 기침과 함께 연거푸 피를 쏟아 냈다.
“무렉스가 전하께 남긴 상처가 제법 깊었나 봅니다.”
겨우 기침을 멈춘 카이엔이 아리아드네 말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무렉스, 그의 이부동생 루안 옆에 붙어 있던 기이한 여자아이. 아리아드네도 그것을 아는 것이 분명했다.
“그 기이한 것을 그대도 만났나?”
“렉사는 제 친구였으니까요.”
―이 몸은 바다를 다스리는 위대한 신 테티스의 마지막 권속 무렉스이니라.
겨우 새끼손가락만 한 주제에 까칠하고 오만했던 테티스의 마지막 권속 무렉스. 렉사가 들었다면 누가 네 친구냐고 길길이 날뛰었을지도 모른다.
―잠깐. 네게 선물 하나를 주마. 가지거라. 그게 있으면 물에 빠져도 한 번은 살 수 있겠지.
하지만 먼 길을 떠나는 자신을 염려하던 렉사의 마음을 친구가 아니면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아리아드네는 알지 못했다.
“그 기이한 것과 친구였다니 참으로 걸작이군. 안타깝게 됐어.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됐으니 말이야.”
이죽대며 비아냥거리는 카이엔의 말에도 아리아드네는 담담하게 물었다.
“렉사의 마지막은 루안과 함께였습니까?”
―다른 욕심은 다 버렸는데, 렉사만은 제가 없어도 계속 웃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바스러질 듯이 웃던 루안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들이 함께였다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것 같았다.
“그걸 함께라고 표현하나? 한 자리에서 죽긴 했지.”
“그랬습니까?”
표정 없는 얼굴로 다가온 아리아드네가 그의 손등을 꾹 눌러 밟았다. 손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아픔에 카이엔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대체 무얼 하기에!’
카이엔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남은 검은 달이 제 임무를 다하지 않음을 책망하며 주위를 살폈다. 새까만 어둠 속에 그보다 더 어두운 사내가 형형히 빛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이계의 방문자이자 성물 카푸트의 주인인 유진이었다. 유진의 손에는 하얗게 질린 카이엔의 호위들이 제압당한 채 묶여 있었다.
남자의 회색 눈동자가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카이엔을 버러지 보듯 바라보았다. 그는 단단히 묶인 카이엔의 호위들을 힐긋 눈짓하며 아리아드네에게 물었다.
“죽일까?”
“아니, 살려 둬.”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 듯 유진이 작게 인상을 썼다. 보지 않고도 그의 불만을 알아차린 아리아드네가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살려 둬야 더 좋은 값을 받을 수 있거든. 아주 비싸게 사 줄 사람이 있어. 혈족을 향한 위협이라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이 자리에서 그것이 누구를 뜻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소르체는 자신들의 혈족을 향한 위협에 무엇보다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중에서도 백자의 피를 탐낸 자들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싶을 정도로 잔인하게 대했다. 그것만이 탐욕에 눈이 먼 자들에게서 혈족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고통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이들이 모여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소르체였다.
유진에게 붙잡힌 자들이 공포에 질려 덜덜 떨었다. 아무리 훈련된 자들이라 해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고통이 두렵지 않을 리가 없었다.
카이엔은 이 지경이 되어서도 제 살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리아드네, 잘 생각해. 메르디에스 공작이 무사하길 바라면―”
하지만 카이엔이 채 말을 마치기도 전이었다. 그의 얼굴로 아리아드네의 발이 날아들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고개가 돌아갔다.
아리아드네 신발에 달린 장식물이 그의 뺨을 엉망으로 찢어놓았다. 고통 다음으로 찾아온 것은 모멸감과 분노였다. 그는 페렌트의 1왕자였다. 발로 얼굴을 걷어차이는 것 따위 상상도 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고개 숙인 카이엔 위로 벼린 칼처럼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아파?”
카이엔이 고통을 아는 사람이었던가.
“겨우 이까짓 게 아파?”
고통과 분노로 일그러진 카이엔의 얼굴이 익숙했다.
“아니, 넌 이게 아프다고 하면 안 되지.”
그 얼굴은 탑에 갇혀 그를 증오했던 과거의 제 얼굴이기도, 또다시 그의 손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지금의 제 얼굴이기도 했다.
“네 손에 죽은 사람이 몇인데! 네가 내게서 뺏어간 것들이 얼만데! 너 때문에 내가 잃어야 했던 것들이 무엇인데!”
사랑한 사람들을 모조리 잃어야 했던 때가 있었다. 탑에 갇힌 채로 수도 없이 곱씹었다.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잃지 않겠다고, 모두를 지켜 주겠다고.
그렇게 수백, 수천, 수만 번 맹세했는데. 렉사와 루안의 죽음도, 아버지와 기사단의 실종도, 메르디에스 성의 함락도, 자신은 또다시 아무것도 지켜 내지 못했다.
“그런데 네가 감히 그 입으로 내 아버지를 들먹여?”
미칠 듯한 이 분노가 카이엔을 향한 것인지 자신을 향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네가 한 짓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게 해 줄게.”
하지만 분노로 녹아내릴 것 같은 머리 한구석에서는 냉정하게 손익을 따지고 해법을 찾는 자신이 있었다.
“오늘 네가 이곳에 온 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그렇지?”
아리아드네가 카이엔의 머리카락을 틀어쥐어 위로 잡아당겼다. 그나마 봐줄 만했던 얼굴이 피와 땀으로 엉망이었다. 뺨 위에 세로로 길게 난 흉터는 조금 전 그녀의 발에 걷어차인 자리였다.
“내가 널 소르체에 넘기면 어떻게 될까?”
아리아드네는 화사하게 웃으며 그의 뺨 위에 난 흉터를 손톱으로 긁어내렸다. 카이엔은 고통에 몸을 떨면서도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머리를 굴렸다.
“소르체로선 굳이 1왕자의 신변을 구속했다는 말을 하지 않겠지. 오늘 소르체가 얻은 건 정체 모를 침입자일 뿐이야.”
소르체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이들이었다. 소르체에 넘겨진 그의 미래는 뻔했다.
“네 존재는 세상에서 이대로 지워지는 거야. 소르체에 있는 한 죽지도 못하는데.”
죽음보다 더한 고통. 그럴 순 없었다. 카이엔은 눈앞에 있는 아리아드네의 손목을 꽉 틀어쥐었다. 핏줄이 다 터진 그의 흰자위는 마치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귀 같았다.
“백자의 피를 구하지 못한다면―”
카이엔이 품속의 흰 뼈에 왕궁의 위치를 나타내는 별자리의 마지막 점을 찍은 그때였다.
“너라도 데려가야겠어.”
눈이 멀 정도로 환한 금빛이 터져 나왔다. 아리아드네는 눈앞에서 터진 빛에 순간 시야를 잃었다.
자신을 붙든 카이엔의 손이라도 뿌리치려 했지만 사력을 다하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카이엔이 단단히 틀어쥔 손목이 끊어질 듯 아팠다.
“아리―”
자신을 부르는 유진의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그리고 한 줄기 바람과 함께 황금을 녹인 것처럼 출렁이는 금빛 속에서 사선으로 움직이는 검은 물체를 보았다.
“끄아아아악!”
고통에 찬 괴성이 들리더니 아리아드네의 손목을 붙들고 있던 것이 사라졌다.
“괜찮으십니까?”
그렇게 물은 것은 정중한 목소리의 여자였다. 빛이 차차 잦아든 뒤에야 아리아드네는 제 앞을 가리고 선 사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아리아드네를 지키듯 서 있는 사람은 바로 시안이었다.
소르체가 끝까지 숨기려 한 가장 희귀한 백자의 피를 지닌, 과거 카이엔의 두 번째 왕비였던 여자. 카이엔은 그토록 원했던 사람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시안의 얼굴 위로 핏자국이 마치 붉은 점처럼 찍혀 있었다. 시안은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눈가에 튄 핏자국을 닦아 내더니 몸을 숙였다.
시안이 발치에 굴러다니는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건 손목 아래로 잘린 남자의 손이었다.
그것이 누구의 몸에 달린 것이었는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손이 아니라 목을 잘랐어야 했을까요?”
어떤 망설임이나 아쉬움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래, 과거에도 지나치게 표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리아드네가 시안을 본 건 카이엔의 두 번째 결혼식에서였다. 새하얀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채 카이엔 곁에 서서 인형처럼 손을 흔들던 소르체의 여자.
카이엔은 탑에 갇힌 아리아드네에게 무슨 말이나 꺼리지 않고 지껄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아리아드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부인, 내가 무엇을 얻었는지 아십니까? 모두가 전설이라 여겼던 진정한 백자의 피, 그것이 내 손에 들어왔습니다. 이제 나를 해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떤 질병이나 상처도 나를 죽이지 못한다 이 말입니다.]
시안을 두 번째 왕비로 맞아들이기로 한 카이엔은 몹시 들떠 있었다.
[이렇게 쉬울 줄은 몰랐습니다. 겨우 아이 몇 명 데려온 것뿐인데 백자의 피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다니.]
카이엔은 소르체의 아이들을 납치하여 시안을 얻었다고 했다.
과거에는 백자의 피니, 소르체의 힘이니 하는 것들을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결혼 행렬 위로 몸을 날렸을 때, 지나치게 담담한 시안을 보고 이상하다고 느낀 것이 전부였다.
소르체의 연회장에서 흰 머리카락에 붉은 눈이 아닌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을 한 시안을 처음 보았을 때는 카이엔이 감쪽같이 속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코라나 살라와 같은 진짜 백자의 피를 지닌 이들을 숨기기 위해서 내놓은 가짜에 그가 속은 것이라고.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시안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며 자연스럽게 알아챘다.
‘아, 이쪽이 진짜구나.’
코라나 살라조차 시안을 숨기기 위한 여러 개의 장치 중 하나였다. 삶과 죽음을 다스리는 소르체의 진정한 주인은 바로 시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