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148)

* * *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소르체의 집사 아귈라라고 합니다.”

자신을 집사 아귈라라고 소개한 여자가 소르체에 들어선 일행을 향해 깍듯하게 인사했다.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여자였다.

아귈라와 코라는 제법 친근한 사이인 듯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그것을 지켜보던 아리아드네가 싱긋 웃으며 아귈라의 인사를 받았다.

“반가워요, 아귈라.”

“저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럼 소르체에 계시는 동안 머무르실 거처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리아드네 일행은 아귈라의 안내를 받아 준비된 거처로 발을 옮겼다.

소르체의 건물들은 분지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인지 바람이 잘 통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는데,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어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시원했다.

마치 부드러운 천을 걸어놓은 것처럼 유려하고 완만한 곡선을 이룬 건물들은 대체로 회백색의 색깔을 띠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것은 회백색의 기둥에 미술품처럼 장식된 잘게 쪼개진 타일이었다.

석양에 물든 회백색의 기둥에 장식된 색색깔의 타일에서 반사한 빛이 무지개처럼 공중에 흩뿌려졌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나 여기 마음에 들어. 아주 합리적인 곳이야.”

눈을 반쯤 감은 채 바람을 쐬던 달로아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달로아는 소르체에 들어선 뒤로 내내 저 이야기였다.

소르체의 권력층이 여자라는 것은 사회가 여자가 바라는 모습을 하게 된다는 말이었다. 미남이 유난히 많은 것도 그런 결과 중 하나인 듯했다.

“그렇지?”

코라의 붉은 눈동자가 동의를 구하듯 깜박였다.

“응, 미남이 이토록 이로운 존재인 줄 몰랐어. 그렇지 않아?”

달로아가 꿈꾸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 당연한 걸 이제야 알았어?”

코라가 뽐내듯 가슴을 쭉 내밀며 대꾸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달로아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 중 달로아는 누구보다 빠르게 소르체의 문화에 동화되고 있었다.

폐쇄적인 소르체는 외부와 단절된 채로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해 온 듯 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 의복 같은 외형적인 것들이었다.

소르체의 의복은 다른 곳과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몸을 조이고 화려한 장식이 달린 종류는 보기 힘들었다.

대신 부드러운 천이 자연스럽게 몸을 감싸는 형태의 옷이 주를 이루었다. 여자 옷이나 남자 옷이나 마찬가지였다.

성별 간의 차이가 없는 것은 의복만이 아니었다. 소르체 곳곳을 지키는 병사들 중에도 여자가 드물지 않았다.

바깥에서도 여성인 기사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재능이나 신분이 특출난 어떤 개인이 특별히 이룬 성취에 불과했다. 소르체처럼 무력 집단 내에서 여성의 비율이 의미 있는 곳은 흔치 않았다.

코라의 말을 들었을 때도 충분히 놀랐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느끼는 충격은 또 달랐다.

아리아드네는 낯선 소르체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아귈라를 따라 걸었다. 정원을 지나 따로 마련된 독채 앞에 멈춰선 아귈라가 독채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서 쉬시면 됩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아귈라가 막 물러나려던 순간이었다.

“아귈라,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소르체의 땅을 열어 주신 가주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요.”

아리아드네가 가주와 만나기를 청했다. 아귈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리아드네를 빤히 바라보다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말씀은 전하겠습니다.”

짧게 고개를 숙인 아귈라가 그대로 독채를 떠났다. 어쩌면 가주를 만나는 일조차 쉽지 않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지. 당장은 기다리는 수밖에.’

아리아드네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코라는 집에 돌아온 것이 기쁜지 기지개를 늘어지게 켜면서도 노래를 흥얼거렸다.

“아리아드네 님, 그럼 쉬어. 나도 오랜만에 내 집에서 두 발 뻗고 자겠다.”

코라가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떠나려는 찰나, 아리아드네가 그녀를 붙잡았다.

“코라, 나 소르체에 체류 중인 신시아와 알버트를 좀 만나고 싶은데…….”

소르체 가주를 만나는 일도 중요하지만, 지금 가장 급한 건 이곳에 있는 메르디에스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그, 기사님도?”

알버트 이야기에 코라가 난처한 얼굴로 물었다.

“당연히 봐야지.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알버트는 아리아드네의 호위 기사이기도 했다. 주인이 제 기사를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없지. 문제없어.”

양손을 마구 흔들던 코라가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그 미친 것이 벌써 무슨 짓을 저지른 건 아니겠지?”

“미친 것이라니?”

“있어. 그런 애가.”

어색한 미소를 지은 코라가 힐끗 뒤를 보며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코라는 알아보겠다는 말만 남기고는 부리나케 사라졌다.

가주를 만나는 일도, 알버트와 신시아를 만나는 일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조셉.”

“네, 말씀하십시오.”

“신시아와 알버트가 어디서 지내고 있는지 찾아봐. 찾는 대로 내가 보잔단 말도 전하고.”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조셉마저 사라지자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 왔다.

“다들 먼 길 오느라 수고했을 텐데 그만 쉬어.”

아리아드네가 겨우 정신을 붙잡은 채로 인사를 건네자.

“그래, 너도.”

“그럼.”

달로아와 달미에르가 가볍게 대꾸하며 각자 방으로 사라졌다.

“…….”

리카르도가 무언가 망설이는 듯한 눈치로 복도를 서성였으나, 유진의 손에 간단히 제압당해 복도 저쪽으로 반쯤 날아갔다. 자각 없이 맴도는 날파리를 간단히 정리한 유진이 아리아드네에게 다가갔다.

“당신은 안 가? 피곤하지 않아?”

지친 얼굴로 유진을 힐끗 올려다본 아리아드네가 물었다.

“…….”

유진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방문을 연 아리아드네가 안쪽을 향해 눈짓하며 물었다.

“아니면 방에 들어올 테야?”

갑작스러운 제안에 그는 목울대가 짧게 움직였다.

“아니.”

“그럴 줄 알았어.”

단호한 그의 대답에 아리아드네가 작게 웃으며 발끝을 들어 그의 입술 끝에 제 입술을 살짝 붙였다 떼어 냈다. 솜털처럼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잘 자, 내일 봐.”

짧은 인사를 남긴 아리아드네가 탁, 소리와 함께 방문 너머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유진은 방문에 기댄 채 잠시 숨을 골랐다. 평소에는 그 존재조차 알기 어려운 심장이 쿵쿵, 제 위치를 알려 왔다. 이 심장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언젠가부터 그의 심장은 제 것이 아니었다.

* * *

같은 시각, 페렌트 왕궁의 별의 홀.

“그래. 아리아드네가 소르체에 도착했다니 이쪽도 움직여야지.”

카이엔이 복면을 쓴 채 무릎을 꿇은 남자들을 바라보며 비틀린 얼굴로 웃었다.

그는 소르체에서 가져와야 할 것이 있었고, 소르체에는 그 대신 누명을 써 줄 사람이 있었다. 오늘 같은 기회는 두 번 오는 것이 아니었다.

“너희들이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잔뜩 쉬고 갈라진 카이엔의 목소리가 복면을 쓴 남자들 위로 송곳처럼 내리꽂혔다. 복면을 쓴 그들은 케이루스의 어둠 속에서 모든 악행을 처리하는 검은 달의 일원이었다.

그들은 세상에 드러날 수 있는 것이라곤 이름조차도 갖지 못했다. 얼굴마저 시시때때로 바꾸어야 했다. 그들이 가진 것이라곤 엄지손톱 밑의 그믐달 문신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들은 케이루스의 영광이 제 영광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살아왔다. 케이루스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벌레가 되어 어둠을 기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케이루스의 영광만을 바라고 모든 것을 바쳤건만……. 그들의 수장 제프리가 죽었다.

―제프리, 그녀가 네게 뭘 약속했지?”

―네가 배신한 것이 아니라면 내 완벽한 계획이 실패할 리 없잖느냐.

그것도 가장 치욕스러운 누명을 쓰고.

영광으로 향하는 길에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죽음의 끝에 그토록 바라던 영광이 있음을 믿기에 두려움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길 끝에 정말 그들이 바라던 영광이 있을 것인가. 그들은 이젠 확신할 수 없었다. 작은 의심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망설임이 되었다.

“내 피가 너희를 소르체의 땅으로 인도할 것이다. 소르체에 도착하여 백자의 피를 찾아와라. 내일 자정 다시 문을 열겠다. 하지만 백자의 피를 손에 넣지 못한다면 돌아올 필요 없다.”

하지만 세뇌되다시피 각인된 관계였다. 막 싹이 돋은 의심은 오래된 주종 관계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명 받들겠습니다.”

그들은 짧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카이엔은 케이루스의 성물 ‘별의 그릇’을 든 채로 제 손목을 그었다. 그의 손목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는 제 피를 묻힌 손가락을 들어 흰 뼈 위에 소르체에 만들어 둔 신전의 위치를 알리는 별자리를 그렸다.

강렬한 빛과 함께 어둠 속에 잠겨 달빛을 받은 푸른 델피니움의 꽃대가 하늘거리는 소르체의 땅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복면을 뒤집어쓴 네 사람은 어렵지 않게 소르체의 땅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소르체에서 그들의 ‘길잡이’ 역할을 해 줘야 할 인물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대장, 소르체를 빠져나가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초조해진 복면인 하나가 릭센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했으나.

“우리가 받은 명은 백자의 피를 찾으라는 것이다. 그것을 손에 넣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르체가 처음인 그들이 이곳에서 누군가의 도움 없이 백자의 피를 찾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대로 죽는 것인가.’

1왕자에게 자신들은 쓰고 버리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익히 알고 있었던 일이지만 그것은 더 이상 그들의 영광이 되지 못했다. 배신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쓴 누군가의 죽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때, 푸른 델피니움의 긴 꽃대가 사라락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누구냐?”

복면인 중 대장이라 불린 자가 뒤늦게 인기척을 알아차리고 경계했다. 마음에 싹튼 불안이 그의 신경을 무디게 만들었다.

푸른 델피니움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행히도 젊은 여자였다. 칠흑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을 하나로 틀어 올린 여자는 유리알처럼 매끈한 검은 눈동자로 그들을 쓱 훑어보며 물었다.

“그것은 이쪽에서 물어야 할 말입니다. 대체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대장이라 불린 검은 달이 여자를 빠르게 살펴보았다. 가냘픈 체형의 젊은 여자였다. 허리춤에 얇은 검을 차고 있었지만 호신용일 것이 분명했다.

자신들과 맞닥뜨리고도 지나치게 침착한 것이 조금 수상했지만 이쪽은 건장한 사내 네 명이었다. 여자 하나를 조용히 처리하는 것은 숨쉬기만큼이나 간단한 일이었다.

대장은 여자를 향해 검을 겨누며 말했다.

“백자의 피를 찾으러 왔다. 그것이 어디 있는지만 알려 주면 네 목숨은 살려 주마.”

저 여자를 인질 삼아 백자의 피를 구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릭센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나로 묶은 여자의 검은 머리카락이 어둠 속에 나부꼈다. 여자는 복면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가 바로 했다.

“물어야 할 사람을 잘못 찾으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죽고 싶으냐?”

“아니요. 저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어서 말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마치 벽을 보고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일분일초가 다급한 상황에 이상한 여자를 만나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대장이 여자를 향해 눈짓했다. 남은 세 사람이 여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대장은 이제껏 자기가 본 칼의 움직임 중에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보게 되었다.

여자가 만든 칼의 궤적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그것은 이제껏 그가 숱하게 해 온 살인 같은 것이 아니었다. 여자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선은 그것 자체로 예술이었다. 여자가 만들어 낸 유려한 선이 공중에 붉은 핏방울을 뿌렸다.

그것은 제 목에서 터져 나온 붉은 물감이었다. 제 목이 잘리는 순간을 제 눈으로 목도하는 것. 그것이 소르체가 그에게 선사한 삶과 죽음의 경계였다.

붉은 핏방울이 여자의 창백한 피부 위에 점점이 튀었다. 소란을 감지한 사람들이 사방에서 달려왔다. 바닥에 쓰러진 시체들과 여자의 얼굴에 튄 피를 본 사람들이 기절할 것처럼 경악했다.

“시안 님.”

시안이라 불린 여자는 제 얼굴에 튄 피를 닦으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시안 님은 무사하십니까?”

사람들은 시체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시안이라 불린 여자부터 살폈다.

“네, 저는 괜찮습니다. 혹시 제가 놓친 자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좀 더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인형처럼 변함없는 표정을 짓고 있던 시안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시안이 고개를 돌린 방향에서 체구가 작고 온화한 인상의 여자가 나타났다.

“가, 주님!”

여자의 모습을 확인한 사람들이 놀라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바로 소르체의 가주 이엘라였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소르체의 땅을 침입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침입자라는 말에 이엘라의 낯이 서늘하게 변했다.

“메르디에스 일행이 도착한 날에 맞춰서 말인가?”

시안이 처리한 시체를 힐끗 내려다보던 이엘라가 픽 웃으며 덧붙였다.

“이것이 우리가 베푼 호의의 대가인가? 바깥 것들의 탐욕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군.”

그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던 시안이 작게 눈가를 찌푸렸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이엘라가 시안의 얼굴을 살피며 다급히 물었다.

“혹시 어디 다치셨습니까?”

시안은 고개를 젓더니 손을 들어 코와 입을 막았다.

“바람에서 피 냄새가 납니다. 아주 역겨운.”

시안의 말에 이엘라가 시체를 향해 고갯짓을 하며 당장 치울 것을 명했다. 순식간에 시체들이 사라지고 붉은 피가 점점이 떨어진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엘라가 차갑게 말했다.

“지금 당장 백자 회의를 소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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