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148)

* * *

성 상티모니아의 살리바 대신전 지하에는 타락한 성도들을 가두는 오래된 감옥이 있었다. 하지만 그 쓰임이 애매하여 살리바 지하 감옥은 좀처럼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신분이 높은 죄인은 끽해야 수도원에 유폐하는 정도에서 끝나고, 신분이 낮은 죄인은 교황의 거처인 살리바 대신전 지하에 하옥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랭스턴 공작 시몬이 의도적으로 마물을 만들어 내고 이를 악용해 온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며 살리바 지하 감옥은 한동안 죄인들로 가득했다.

그렇게 감옥을 채운 죄인들이 하나둘 처형당하고, 살리바 지하 감옥에는 오직 한 명의 죄인만이 수감되어 있었다. 양팔과 다리에 쇳덩이가 매달린 노인은 몸을 둥글게 만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바스락, 바스락, 찌익 찍찍. 정체를 알 수 없는 벌레가 바닥을 기고 시궁쥐가 소리를 내며 돌아다녀도 노인은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벌써 익숙해진 걸까, 아쉽게도…….’

노인을 지켜보던 여자가 손을 들자 사방에 횃불이 걸렸다. 밝아진 사위에 눈이 부신 듯 팔로 얼굴을 가린 노인이 비척비척 일어났다. 밝아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노인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아그네스!”

노인은 쇳덩이를 매단 채로 기어 나와 쇠창살을 마구 흔들었다. 쇠창살이 덜컹덜컹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가운데, 성 상티모니아의 교황 아그네스가 요요한 웃음을 흘렸다.

“평안하셨나요? 랭스턴 대부인 마님.”

아그네스의 태연한 인사에 시몬의 모친, 루이제의 발악이 더욱 거세졌다. 루이제가 마구잡이로 팔을 뻗으며 몸부림쳤다.

“악독한 것! 지금 널 그 자리에 올려 준 게 누군데 감히! 네가! 네가 어떻게!”

탁, 아그네스가 몸부림치는 루이제의 양팔을 낚아챘다. 선대 교황 테오도로의 공식 정부와 그의 사생아가 철창을 사이에 두고 얼굴을 마주했다.

“그러길래 얌전한 말로 잘 골랐어야지. 내가 언제까지 그대가 두려워 시키는 대로 하는 어린아이일 줄 알았나?”

“놔! 이 천한―”

루이제는 악담조차 채 끝맺지 못하고 퍽 소리와 함께 뒤로 나동그라졌다.

아그네스가 벌레처럼 바닥을 기는 루이제를 내려다보며 한쪽 입가를 끌어당겼다. 그녀의 얼굴에 명백한 조소가 어렸다.

“내가 천하면 너도 마찬가지야. 신을 섬기는 성직자와 일평생 몸을 섞은 너나, 성직자들의 교합으로 태어난 나나 뭐가 그리 달라서.”

바닥을 기던 루이제가 분노에 찬 눈으로 아그네스를 쏘아보았다. 기개만큼은 대단한 여자였다. 욕심만 많고 멍청한 아들보다야 어미 쪽이 훨씬 상대하는 재미가 있었다.

“좋은 소식을 들려줄까 했는데…….”

아그네스가 느릿한 어조로 말을 끌자 별안간 어떤 희망을 발견한 루이제가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노파의 주름진 얼굴에는 환희가 넘쳐흘렀다.

“시몬, 내 아들……. 내 아들이 살아 있는 거지? 그래! 죽었을 리가 없지! 엘바에서 랭스턴이 죽는 일 따위―”

툭, 루이제의 얼굴 위로 자그마한 무언가가 떨어졌다.

“엘바에서 도망간 랭스턴의 잔당을 모두 처리했다 하더군. 이것이 마지막 랭스턴의 흔적이라는데……. 알아보겠어?”

루이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얼굴을 맞고 바닥으로 떨어진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이었다.

반지에 남겨진 흔적으로 루이제는 어렵지 않게 손가락의 주인을 알아차렸다. 이것은 제 조카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분명했다. 죽은 조카의 손가락을 쥔 루이제 위로 꿀 같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러니까 이젠 당신이 유일한 랭스턴의 혈통이야.”

“그, 그럴 리가, 그럴 리가…….”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루이제는 잘린 손가락을 아그네스를 향해 던졌다. 잘린 손가락이 아그네스의 어깨를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랭스턴이 그렇게, 그렇게 쉽게……. 도미니코는 대체 무얼 하고!”

성 상티모니아의 최고 의결 기구인 멘술라 전 의장 도미니코는 루이제의 오랜 벗이었다.

“지옥 불에서 그대를 기다리고 있지.”

아그네스가 꽃 같이 웃으며 대답했다. 도미니코는 랭스턴과 결탁했다는 죄목으로 잔혹하게 처형당한 지 오래였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루이제는 바닥을 기며 절규했다.

“살아야지. 그대는 위대한 랭스턴의 마지막 핏줄이니까.”

아그네스가 감옥 구석으로 기어가는 루이제의 머리채를 틀어쥐었다. 아그네스는 아버지의 정부가 가장 아름다웠던 때를 기억했다.

누구보다 강인하고 악랄했던 루이제 랭스턴. 아그네스는 루이제를 이대로 죽일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어때, 이젠 좀 살고 싶은 마음이 들어? 살고 싶으면 이제부터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해야 할 거야.”

아그네스의 핏빛 눈동자가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루이제는 아직도 제 절망이 끝나지 않았음을 절감했다.

“랭스턴이 찾아낸 신의 유해는 어디에 있지?”

아그네스의 질문에 루이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겁에 질린 루이제는 아그네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렸다.

“200년 전, 페렌트의 왕궁에 나타났던 신의 육체가 갈가리 찢어지고 그 유해를 차지하기 위한 다툼이 벌어졌지. 그중 머리는 성 상티모니아의 차지가 되었고. 랭스턴은 다른 유해라도 가지고자 모든 수단을 동원했지.”

200년 전의 일이었다. 페렌트에는 마치 이 땅을 떠난 신이 강림했대도 믿을 만큼 강대한 힘을 가진 존재가 나타났다.

―본디 내 것이었던 물건을 되찾으러 왔다. 그것의 주인은 너희 같은 강탈자가 아니다.

그가 원한 것은 케이루스의 성물 ‘별의 그릇’이었다. 하지만 그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제 몸이 조각나고 말았다.

케이루스는 그날의 공적(功績)을 인정받아 페렌트의 왕가가 되었고, 성 상티모니아는 그 존재가 남긴 일부를 취해 자신들의 성물로 삼았다.

랭스턴은 살리바의 교황이 신의 유해를 독점한 것에 불만을 품고, 사라진 신의 유해를 찾아 대륙 곳곳을 헤매고 다녔다.

“그리고 그 노력은 당신에 이르러 빛을 보았지. 아닌가?”

아그네스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잘린 손가락을 들어 그것으로 루이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루이제는 목이 졸린 듯 컥컥 숨을 몰아쉬었다.

“죽음의 땅 아르체, 그곳에 있던 세 개의 팔. 대사제의 관문을 치르는 날 위해 당신이 준비한 선물.”

스물이 된 아그네스는 대사제의 관문을 치르기 위해 살리바를 떠나야 했다.

―아그네스.

―네, 랭스턴 대부인.

―아르체, 그곳에 가면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게다. 무슨 말인지 알겠니?

―알겠습니다.

루이제를 몹시 두려워하던 그때의 아그네스에게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아그네스는 죽음의 땅 아르체에서 ‘그것’과 마주했다.

눈을 감으면 지금도 그날의 광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질척질척한 잿빛 세상에 점처럼 박힌 새까만 어둠. 루이제 앞에 무릎 꿇은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의 여자.

―나쁜 짓을 하려는 게 아니다. 너 같은 이는 꿈도 꿀 수 없는 높은 지위를 준대도.

다문 입을 벌려 오던 악귀 같던 손길. 끝끝내 입 안으로 밀어 넣어진 누군가의 손가락.

―먹어. 그럼 다 편해져. 너도, 그리고 나도.

루이제가 기껏 먹인 손가락을 뱉지 못하도록 여자의 입은 두꺼운 천으로 막혔다.

여자는 발버둥 치며 하루를 버텼지만 끝내 그것을 삼키고 말았다. 여자의 발버둥은 괴물을 탄생시키는 것을 고작 하루 늦추었을 뿐이었다.

“네가 먹인 그것이 랭스턴이 찾은 신의 유해가 아니었나?”

“네, 네가 그것을 어떻게……. 그때 너는―”

“글쎄…….”

천천히 목을 타고 올라온 잘린 손가락이 루이제의 입술 근처를 맴돌았다. 루이제는 두려움에 질려 입을 다문 채로 고개를 저었다.

“으읍, 읍읍, 제발, 읍읍…….”

아그네스는 손아귀에 힘을 줘 다문 루이제의 입을 억지로 벌렸다. 언젠가의 그녀처럼.

“루이제, 잠든 괴물을 깨운 건 바로 당신이야.”

* * *

겨울이 한창인 살리바에도 온통 흰 눈으로 세상이 덮였다. 지하 감옥에서 막 빠져나온 아그네스는 갑작스레 쏟아진 햇빛에 눈을 깜박였다.

새하얀 눈밭 위로 복슬복슬한 금발이 통통 뛰어다니고 있었다. 황금을 그대로 녹여 부은 듯한 금발. 가공할 성력을 타고난 성 상티모니아 유일의 성녀, 베아트리스.

성 상티모니아 역사상 살아 있는 사람이 성인으로 추대된 것은 베아트리스가 유일했다. 유일의 성녀라는 것은 그런 정도의 무게를 지닌 호칭이었다.

처음 눈을 본 강아지처럼 뛰어다니던 베아트리스가 마주 본 누군가를 향해 새하얀 눈을 뿌렸다. 금발의 사내가 제 위로 쏟아진 눈을 털어 내며 웃었다. 아직 여물지 못한 풋정이 듬뿍 담긴 얼굴이었다.

메르디에스 공녀의 사촌이라 했던가. 엘바의 사후 처리를 위해 살리바에 남은 줄 알았더니 다른 속셈이 있었던 모양이다.

베아트리스가 벌써 저럴 나이가 되었던가. 살리바 대신전에서 갇혀 지내다시피 자란 아이였다. 아무리 꼭꼭 숨겨도 틈으로 새어 드는 바람까지 막을 순 없다는 건가.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마치 액자에 걸린 그림처럼.

레이먼드와 어울려 환하게 웃던 베아트리스가 아그네스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제 딸은 어쩔 줄을 모르고 우왕좌왕하더니 쭈뼛쭈뼛 고개를 들었다.

“베아트리스.”

아그네스가 선선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눈을 깜박이며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한 베아트리스가 아그네스를 향해 달려왔다. 아그네스 앞에 멈춰 선 베아트리스는 할 말을 찾지 못해 한참을 망설였다.

“……어머니, 눈이에요.”

오래 망설인 끝에 내놓은 말은 고작 그런 것이었다. 아그네스는 부드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래, 아름답구나.”

“네, 정말 아름다워요.”

아그네스의 별거 아닌 대답에도 베아트리스의 두 볼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아이란 어쩜 이렇게도 맹목적인지. 열 번 내친 것은 금방 잊고 한 번 안아 주면 그것에만 매달렸다.

“이런 날은 바깥에서 차를 마시는 것도 제법 운치 있지. 같이 하겠니?”

아그네스의 제안에 베아트리스의 황금빛 눈동자가 기대로 반짝였다.

“정말요?”

“싫으니?”

“아니, 좋아요. 너무 좋아요!”

붕붕 고개를 저은 베아트리스가 아그네스의 마음이 바뀔까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아그네스는 홀로 남은 레이먼드를 생각하며 소리 없이 웃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녀의 딸은 좀 더 제 품에 남아 있어야 했다.

* * *

“소르체에서 허락이 떨어졌어. 한 시간 뒤에 출발하면 돼.”

입구 마을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새벽같이 쳐들어온 코라가 아리아드네를 깨우며 말했다. 비몽사몽간에 일어난 아리아드네가 부은 눈을 힘겹게 뜨다가 눈앞의 코라를 확인하고는 놀라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코라, 너 눈과 머리카락이…….”

새하얀 머리카락과 붉은 눈. 페렌트에서 그것이 뜻하는 바를 모를 사람은 없었다. 소르체의 성물 백자의 피는 치유의 힘을 지닌 백색증의 소르체 혈족을 이르는 말이었다.

아리아드네의 반응에 대수롭지 않은 듯 피식 웃은 코라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맞아. 내가 바로 소르체의 백자야. 아리아드네 님도 백색증의 소르체 혈족을 보는 건 처음이려나?”

“……당연히 처음이지.”

소르체의 혈족들이 백자의 피를 탐내는 이들에게 얼마나 잔혹하게 구는지, 또 백자의 피를 지닌 이들을 얼마나 강박적으로 보호하는지는 세 살배기 아이도 알 정도였다.

13년을 알고 지낸 아리아드네에게도 감쪽같이 숨겼으면서 갑자기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왜 갑자기 정체를 드러냈냐는 아리아드네의 시선에 코라가 한쪽 볼을 긁적이며 대꾸했다.

“어차피 소르체에 가면 알게 될 일이고 해서. 어서 준비해. 늦지 않게 출발하려면.”

아리아드네는 코라의 재촉에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는 여관 밖으로 나왔다. 1층에서는 코라의 성화에 준비를 모두 마친 일행들이 아리아드네를 기다리고 있었다. 코라의 정체가 이미 일행들 사이를 한바탕 쓸고 지나갔는지 다들 얼이 반쯤 빠진 얼굴이었다.

“이쪽으로. 길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리아드네까지 일행이 모두 모이자 여관의 책임자인 듯한 여자가 일행을 안내했다. 여자의 안내에 따라 마을 뒤쪽 산어귀에 있는 짧은 굴을 지났다.

그곳을 빠져나온 일행 앞에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흙먼지가 나부끼는 건조하고 마른 땅. 다시금 베일로 얼굴을 감싼 일행은 말없이 황량한 땅을 건넜다. 그렇게 반나절을 이동했을 때였다.

“우와―”

달로아가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감탄사를 뱉었다. 마치 환상처럼 무성한 숲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소르체로 통하는 이 숲은 ‘흰 뱀의 숲’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저기만 지나면 소르체야.”

일행은 코라의 인도에 따라 숲으로 발을 옮겼다. 숲의 입구에 도착하자 코라는 일행에게 검푸른 액체를 건네주었다.

“이것부터 먹어. 소르체를 둘러싼 흰 뱀의 숲에는 유난히 독초가 많아서 내성이 없는 사람들은 중독될 수 있어.”

일행은 코라가 건넨 약을 군말 없이 삼켰다. 허락받지 않은 자는 소르체의 땅에 발을 들일 수 없다는 것은 페렌트 사람들에겐 상식이었다. 약을 삼킨 일행은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곳은 마치 딴 세상 같았다. 긴 꼬리를 가진 붉은 새가 일행을 스쳐 지나갔다. 처음 보는 새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뿌리 하나에 금보다도 비싸다는 희귀한 약초들이 잡초처럼 널려 있었다.

홀린 듯이 주위를 둘러보던 달로아가 손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덥다.”

“그러게.”

달미에르가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동의했다. 소르체로 향하는 신비한 숲은 이 계절에도 후끈한 열기로 가득했다. 땅 아래에서 불이 흐르는 것 같았다. 습기를 머금은 더운 공기가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리뮈르 남매는 더운 공기가 숨 막히는 듯 연신 손부채질을 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건조하고 추운 리뮈르에서 평생을 살았으니 이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일행 중 가장 힘들어한 것은 리뮈르 남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

“얼마나 남았습니까?”

성도 살리바 출신인 리카르도가 헉헉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일행은 벌게진 얼굴로 땀을 뚝뚝 흘리는 리카르도를 애매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기사 체력이 뭐 저렇지? 쟤는 리뮈르에서도 춥다고 그렇게 야단이더니.’

그런 함의가 담긴 시선이었다.

“리카르도 경은 추위도, 더위도 참 많이 타시는군요.”

달로아는 인내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가지지 않은 것 같은 성기사의 모습에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성기사 리카르도에게는 인내심만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말은 처음 듣습니다.”

눈치도 없는 성기사는 단박에 그 말을 부정했다. 조금도 거리낌 없는 표정으로 보아 제 딴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랬을 리가요.”

리카르도의 눈치 없음을 익히 경험한 달미에르가 나섰지만.

“정말입니다.”

그는 여전히 고장 난 오르골처럼 굴었다.

‘저런 눈치로 성기사단 부단장이라는 자리에는 어떻게 올랐지?’

진짜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어이없어하는 일행 사이로 코라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기사님,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소르체에서 살 생각 없어?”

“……없습니다.”

“그렇구나. 소르체 여자들한테 인기 많을 타입인데…….”

리카르도의 거절에 코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달로아가 어이없다는 듯 둘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리카르도 경은 성기사단 부단장이라고. 성직자한테 대체 뭘 권유하는 거야?”

그제야 리카르도의 신분에 생각이 미친 듯 코라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사과를 했다.

“아, 그렇게 되나? 미안해. 내가 기사님께 어떤 개인적인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 소르체에 도착하면 이런 제안 숱하게 받게 될 테니까 미리 의사를 물어본다는 게 그만.”

“이런 제안이라니?”

달로아의 물음에 코라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게 그러니까 소르체에서는 여자들이 남자에게 이성적인 관심을 드러내는 게 바깥보다 많이 자유로운 편이거든.”

“이성 교제야 페렌트 어디에서든 일상적인 일이잖아.”

페렌트 사교계에서 성년끼리의 이성 교제야 흔한 사교 행위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런데 거기서 더 자유로울 게 있나?”

달로아의 의문에 코라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소르체는 좀 달라. 소르체에서 이성에게 어떤 제안을 받는 건 남자들뿐일 거야.”

“뭐? 저렇게 사기적인 미모의 소유자가 있는데도?”

달로아가 아리아드네를 가리키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소르체에서 남자는 이성의 선택을 받는 존재지, 선택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서.”

“그게 무슨 말이야? 왜?”

“소르체에서 가문에 남을 수 있는 건 여자뿐이라서 그래. 병을 다루는 것도, 후계를 낳는 것도 여자에게만 가능한 일이니까.”

이제까지 소르체의 성을 단 페렌트의 왕은 모두 여섯이었다. 그리고 소르체 출신의 왕은 모두 여자였다.

모든 것이 비밀에 싸인 소르체이지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소르체의 가주는 여자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였다. 리카서스가 남자만을 예주로 삼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병을 다루는 게 여자에게만 가능한 일이라고?”

아리아드네가 코라를 돌아보며 물었다. 후계를 낳는 것은 그렇다 쳐도 병을 다루는 것이 여성에게만 국한된 일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 보았다.

“소르체의 치유력은 모계 유전을 통해서만 전승되니까. 당연히 병을 치료하는 것도 여자에게만 허락되는 일이지.”

“소르체의 의원이라 해도 모두가 치유력을 가진 건 아닐 텐데.”

소르체의 혈족 가운데 특별한 치유 능력을 가진 사람이 드물게 존재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이야기였다. 하지만 소르체 밖으로 나오지 않는 그들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아리아드네조차 치유력을 가진 소르체의 혈족을 만난 것은 코라가 처음이었으니까. 코라가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오늘 아침이었고.

“소르체에서 의술은 일종의 특권이야. 그 특권을 누릴 대상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지. 치유력이 있거나 치유력이 발현될 가능성이 있거나.”

한마디로 치유력이 발현될 가능성이 있는 여자에게만 소르체의 의술이 허용된다는 이야기였다.

백색증 자체는 모계 유전이 아니나, 백색증을 지닌 자 중 일부만이 발현되는 치유력은 혈족의 여아들에게서만 나타났다. 그렇기에 소르체의 의술이란 혈족의 여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런데 소르체에 도착하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할 거란 말은 뭐야?”

달로아가 물었다.

“딸을 낳아야 가전 의술을 물려줄 거 아냐. 그런데 아이를 가지려면 남자가 필요하잖아.”

“그, 렇지?”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 도리어 그 의미를 알기 어려웠다.

“그러니까 소르체 여자들은 괜찮은 남자에 늘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야.”

코라의 설명을 들은 달로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는 외부인인데? 소르체를 떠날 사람에게서 아이를 봐서 뭐 해?”

달로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코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음에 든 남자면 조금 서운하기야 하겠지?”

무엇을 묻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 코라가 눈을 깜박이며 느릿하게 대꾸했다. 어딘가 엇나간 대화가 빙빙 맴돌았다. 달로아가 조금 높아진 목소리로 제 답답함을 토로했다.

“아니, 그럼 아이 호적은? 아이는 사생아가 되잖아.”

귀족 간의 혼인에서 가장 예민한 것 중 하나가 사생아 문제였다. 정식 혼인을 통해서 태어난 아이만이 가문을 이을 수 있었다. 아리아드네 일행은 소르체에 잠깐 들르는 것뿐이었으니 혼인 상대로 삼기에는 여러모로 적합하지 않았다.

“낳은 사람이 멀쩡히 있는데 왜 사생아야? 어차피 아이를 낳고 키우는 건 전부 여자 몫인데.”

무슨 말을 하냐는 듯 인상을 찌푸린 코라의 콧잔등에 잔주름이 잡혔다.

“……그건 사생아를 낳아도 비난받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이야기를 듣던 리카르도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아리아드네는 리카르도의 혼란을 짐작했다. 성직자의 사생아로 태어나 탄생의 순간부터 부정당한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이었으니.

―그런 일이야 참고 넘긴다 해도 ‘저’ 같은 부정할 수 없는 흔적이 남으면 성직자로서의 삶이 끝나는 겁니다.

―다시 묻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잡아먹고 태어난 제가 정말 더럽지 않으십니까?

그는 자신을 성직자의 부정을 증명하는 증거로, 제 어미를 성직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린 족쇄로 여기며 살아왔다.

그가 경험한 세상에서는 오직 사생아를 낳은 여자와 사생아로 태어난 아이만이 존재했다. 사생아를 만든 누군가는 아무런 비난도 받지 않았다.

그런데 어딘가에는 사생아를 낳아도 아무런 흠이 되지 않는 세상이 존재하고 있었다. 리뮈르에서 한 번 무너졌던 그의 세계가 또다시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사생아 같은 건 없다니까. 어차피 아이를 낳는 건 여자잖아. 그러니까 아이에게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여자뿐이야.”

코라의 설명을 들은 리카르도는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반쯤 넋이 나갔다. 사생아를 낳아도 비난받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평생 그를 괴롭혀 온 사생아라는 개념 자체가 소르체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계 혈통은 출산으로 증명되는 것이고, 부계 혈통은 어떻든지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 그러면 소르체에서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사회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겠네?”

아리아드네의 추측에 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가 마음에 들어서 오래도록 일대일 관계를 유지한다면 태어난 아이도 제 아버지가 누구인지 정도는 인지하겠지. 하지만 그런 일은 매우 드무니까.”

“당연히 혼인 제도도 없을 테고.”

“그렇지. 그냥 동하면 하룻밤 자는 거고, 그러다 마음 맞으면 좀 더 오래 연애할 수도 있고. 남자가 동의하면 여자 집에서 몇 개월 머무르기도 해.”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오직 여자에게 귀속된다.

“여아만 태어나는 건 아닐 거 아냐?”

“남자는 성인이 되면 독립해야지.”

“독립하면?”

“자기 힘으로 사는 거지. 소르체라고 모두가 의원인 건 아니니까 할 일은 얼마든지 있어.”

코라와 달로아의 대화를 들으며 아리아드네는 생각에 잠겼다. 생각지도 못한 생활 방식이었다.

페렌트를 지배하는 귀족들의 힘은 가문을 통해 확장된다. 가문이 권력의 처음이고 끝이었다. 그렇기에 혼인과 혈통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혼인을 배제한 사회 구조라니. 코라에게 직접 듣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여자 중에서도 의술을 전수받는 건 소수에 불과해. 나머지는 약의 원료를 채집 가공하거나 영지에 필요한 다른 일을 하며 살아가.”

살랑, 어디에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흘러내린 땀이 바람에 식어 갔다.

“이곳 소르체에서 제 몫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필요 없어.”

숲이 끝나고 노을에 잠긴 도시가 드러났다. 산으로 빙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 잡은 도시에 석양이 비스듬히 내려앉았다. 마치 여러 빛깔의 천을 걸어 놓은 것 같은 풍경이었다.

“여기가 삶과 죽음의 경계 소르체야. 내 고향에 온 것을 환영해.”

소르체의 문장은 지팡이에 감긴 두 마리의 뱀이었다. 그것은 각각 삶과 죽음, 수호와 저주를 의미했다.

아리아드네 일행이 삶과 죽음, 수호와 저주의 땅에 도착한 것은 해가 지고 달이 뜨는 낮과 밤의 경계 무렵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낮과 밤의 경계에 잠기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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