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148)
  • * * *

    릭센의 왕궁은 주인인 다그마르의 죽음 이후,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분위기였다.

    와장창! 날카로운 것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주각궁에서 피범벅이 된 시종이 실려 나왔다. 주각궁의 사용인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흩어졌다.

    “허억, 헉, 헉헉― 크윽…….”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든 고통이 카이엔을 잠식했다. 고통은 예고 없이 그를 찾아왔다. 갑자기 호전되는가 하면 다음 날은 장기가 모두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고, 또 다음 날은 몰라보게 괜찮아졌다.

    카이엔은 날마다 죽느니만 못한 고통 속에서 헤매었다. 몸 상태가 호전되는 날조차 안심할 수 없었다. 이것은 그를 더욱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기 위한 농간이었으니까. 고통의 격차가 벌어질수록 그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냈다.

    “……진통제를 가져와라.”

    “이렇게 드시면 뇌에 이상이 생길 수도―”

    팟, 만류하던 의원의 목이 데구르르 바닥을 굴렀다. 사람의 피를 뒤집어쓰자 고통이 좀 가시는 것 같았다.

    피가 튀어 옷이며 얼굴이며 온통 붉게 물든 카이엔이 칼을 든 채 기괴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젠 좀 가져올 마음이 드느냐?”

    죽은 제프리를 대신하여 새로이 그의 수족이 된 제롬이 서둘러 진통제를 가져왔다.

    카이엔은 잔에 담긴 진통제를 허겁지겁 삼켰다. 입가로 흘러내린 흰 액체가 가슴팍을 적셨지만 그는 이조차 느끼지 못했다.

    “더, 더 가져와!”

    진통제를 한 컵 가득 마셨건만 그의 고통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내장을 찢어발기는 듯한 고통은 점점 심해져 진통제조차 듣지 않는 날이 늘었다. 카이엔은 제 몸을 뒤틀며 침대를 쥐어뜯었다.

    “소, 르체……. 소르체가 필요해.”

    고통에 헐떡이는 카이엔의 눈은 핏줄이 죄다 터져 온통 붉은색이었다.

    “백자의 피를 가져와.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 말을 끝으로 카이엔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까무룩 눈을 뒤집으며 실신했다. 소르체의 성물, 백자의 피만이 그를 이 고통에서 구해 줄 수 있었다. 그것만이 카이엔의 희망이었다.

    * * *

    아리아드네의 색색 고른 숨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유진은 자신의 소매를 붙든 채 잠이 든 아리아드네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리아드네는 식사도 하지 않은 채로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이렇게라도 속을 털어놓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비워 낸 만큼 다시 그 자리에 무언가를 채울 수 있을 테니까.

    아리아드네는 그가 본 중에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어떤 순간이 와도 포기하지 않는다. 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제 다리로 바라는 세상을 향해 걸어간다. 슬픔도, 기쁨도, 괴로움도, 사랑도 모두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여자.

    그는 발갛게 부은 아리아드네의 눈가를 천천히 쓸었다. 내일이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무리할 그녀를 알았다. 잠시라도 마음 놓고 쉬게 해 주고 싶었다.

    그녀가 자신을 마음껏 사용했으면 했다. 언제까지나 아리아드네 손이 닿는 곳에 머물고 싶었다.

    그는 뻐근한 제 가슴을 문질렀다. 타우루스의 날카로운 집게발에 찢어진 상처가 아직도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아무리 심각한 상처도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깨끗이 나았던 괴물 같은 몸이었는데…….

    그는 고개를 숙여 제 손바닥에 남은 희미한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케이루스의 성물을 마주한 날, 유리에 손이 찢어졌던 흔적이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멈췄던 그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건 케이루스의 성물에 손을 댔기 때문일까. 카푸트가 그것을 찾아 헤맨 것은 죽기 위함이었나.

    유진은 한숨을 내쉬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 몸의 유효 기간은 과연 얼마나 남았을까. 그녀가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때까지라도 살아남아야 할 텐데…….’

    유진은 아리아드네의 손을 들어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천천히 입술을 눌렀다. 그의 영혼은 이미 그녀의 것이었다. 그러니 그의 모든 것도 응당 그녀의 것이었다.

    ‘부디, 이 몸이 내 효용이 다하는 날까지 버텨 주기를.’

    그가 가진 것들이 그녀에게 쓰인다면 그것으로 제 삶은 충분했다.

    유진은 아리아드네가 덮은 이불을 여며 주고는 그 방을 나왔다. 그는 제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관의 지붕에 훌쩍 올랐다.

    4층짜리 여관은 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그는 여관의 지붕에 올라 주위의 지형과 마을 사람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때, 익숙한 뒷모습이 여관을 나섰다. 어깨까지 오는 갈색 머리를 질끈 동여맨 자그마한 여자가 마을 외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진은 아리아드네가 잠든 방을 힐끗 쳐다보았다가 여자를 따라나섰다. 그는 여자가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지붕을 디디며 조심스레 뒤를 밟았다.

    여자의 발걸음은 마을 외곽의 작은 샘 앞에서 멈췄다. 그 앞에서 쭈그려 앉은 여자는 제 얼굴을 샘에 비춰 보기도 하고, 주위 풀을 뜯어 물에 흔들며 놀다가 별안간 샘에 고개를 처박았다.

    ‘그냥 기행이었나?’

    유진은 여자의 해괴한 짓거리를 지켜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만 아리아드네에게 돌아갈 생각이었다.

    “푸하!”

    그때, 여자가 숨이 모자랐던지 크게 숨을 내쉬며 샘에 처박았던 고개를 들었다.

    상의와 머리카락이 물에 흠뻑 젖은 여자는 다시금 샘에 제 얼굴을 비쳐 보았다. 오랜만에 마주한 ‘진짜’ 제 얼굴이었다. 여자는 물에 비친 제 모습이 어색해 샘을 마구 휘저었다.

    물결에 흐려진 풍경 사이로 새까만 그림자가 비쳤다. 여자는 천천히 일어나 제 뒤를 쫓아온 사람과 마주했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유진은 물에 흠뻑 젖은 코라의 모습을 보며 그렇게 물었다.

    “지금 내 모습을 보고도 할 말이 그것뿐이야?”

    코라가 자신을 가리키며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유진은 코라의 모습을 무심한 눈으로 확인했다.

    흠뻑 젖은 코라의 머리카락은 짙은 갈색이 아니라 눈처럼 흰 빛깔이었고, 눈동자 또한 평소의 갈색이 아니라 기이할 정도로 붉은색이었다.

    “그게 왜?”

    하지만 그것은 유진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코라의 외형이 어떤 모습이든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심드렁한 유진의 반응에 잠시 당황했던 코라는 곧 알 만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방문자님께선 이방인이었지.”

    이방인이라는 단어에 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매번 이런 식으로 제 위치를 확인받는 것이 유쾌하지 않았다. 코라가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백색증이라고 알아? 백색증은 선천적으로 색소가 옅은 유전성 질환이야.”

    그리고 다음은 제 눈을 가리켰다.

    “내 눈이 붉은색인 건 홍채의 색이 없기 때문이야. 안구 아래의 혈액이 비쳐서 붉게 보이는 거지.”

    유진은 코라가 여관에서 자신을 ‘붉은 눈의 코라’라고 칭했던 것을 떠올렸다.

    “피부도 약해 빠져서 햇빛 아래 오래 서 있으면 안 돼.”

    코라는 오는 내내 강박적으로 해를 가렸다. 그런 모습은 유진에게도 퍽 익숙했다. 그가 깨어난 외곽의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은 무엇 하나 해롭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토록 허약한 몸뚱이가 사람들에게는 경외심을 일으키는 거야. 신기한 모습이니까. 백색증에 걸린 뱀, 물고기, 사슴, 사람들은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지. 그렇게 잡아들인 짐승들은 때론 경외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어떤 효험이 있지 않을까 잡아먹히기도 하고 그랬어.”

    유진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아마 시작은 그러지 않았을까? 어떤 권력자가 흰 사슴의 피를 마시고 우연히 병이 나은 거야.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흰 사슴을 찾아 헤맸겠지. 그런데 이번에는 흰 사슴을 잡아 그 피를 마셔도 낫지 않는 거야.”

    코라는 자신이 그 이야기 속의 권력자가 된 것처럼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뭐가 부족했던 걸까. 아, 더 희귀한 피를 마시면 나을지도 몰라.”

    그녀의 붉은 눈이 기이하게 빛났다. 희귀한 피, 사람의 혈액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저 눈이 유일하지 않을까. 유진은 그 생각을 떠올린 순간 등골이 섬뜩해졌다. 굳은 그의 얼굴을 보며 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처럼 백색증에 걸린 인간이라거나.”

    인간 사냥. 비슷한 일은 유진이 있던 외곽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은 어떤 미친 짓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말 있었던 거야. 무슨 병이든 낫게 하는 기적적인 피를 가진 인간이.”

    모든 병을 낫게 하는 기적의 피, 사람들은 그것을 하얀 피라고 불렀다.

    하얀 피를 타고난 최초의 인간은 이 땅에 남은 신이 인간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라 했다. 그것이 소르체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신의 몸에서 태어난 인간은 핏속에 흐르는 권능으로 인해 인간들의 사냥감이 되었다.

    “그렇게 소르체의 혈족은 인간의 사냥감이 되었다가 어찌어찌 노력해서 한 권력 차지하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야.”

    소르체의 혈족들은 자신들을 쫓는 사람들을 피해 숨어 살며 제 피를 팔아 그들의 터전을 마련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을 지키는 방법으로 독을 선택했다.

    소르체의 의술은 병을 고치기 위한 것과 독으로 적을 죽이기 위한 것 두 가지 방향으로 발전했다. 소르체의 문장인 두 마리의 뱀이 각각 삶과 죽음, 수호와 저주를 의미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잠자코 코라의 설명을 듣던 유진이 입을 열었다.

    “소르체가 가진 성물이 죽음을 막아 주는 백자(白者)의 피라 했던가?”

    백자(白者), 흰 사람의 피. 그제야 유진의 눈에 코라의 새하얀 머리카락이 달리 보였다.

    “맞아. 내가 바로 소르체의 성물이야.”

    유진의 물음에 코라가 싱긋 웃으며 자신의 새하얀 머리카락을 비비 꼬며 대답했다.

    “방문자님께서는 성물을 찾아다닌다지? 어때? 살아 있는 성물을 본 소감이.”

    소르체의 성물이 사실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니. 성 상티모니아 최고의 성물이라 불리는 카푸트도 잘린 머리였으니, 어쩌면 이 정도는 예상했어야 하는 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유진은 성물이라 불리는 무엇이 사람이라는 그 자체에 알 수 없는 거부감을 느꼈다. 이 세계에서 성물이라 불리는 것들은 하나같이 기괴한 구석들이 있었다.

    그것이 정말 신의 축복인가? 그는 도무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눈앞의 코라만 해도 자신의 머리카락과 눈을 꽁꽁 감춰야만 하지 않았던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유진은 문득 어떤 의문점이 들었다.

    “소르체의 성물이 십 년이 훨씬 넘는 시간을 소르체 밖에서 보내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유진의 질문에 코라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며 말했다.

    “뭐, 소르체에 백자의 피를 지닌 사람이 나뿐이었다면 몰라도 그런 건 아니라서. 혈족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는 것이 소르체의 기본 방침이기도 하고.”

    “소르체에는 너 말고도 그런 이가 더 있단 말인가?”

    코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백색증이라고 모두가 백자의 피를 가지고 있진 않아. 한 세대에서 그런 힘을 가진 사람은 서넛에 불과해.”

    치유의 힘을 지닌 백색증의 소르체 혈족 백자. 한 대에 서넛에 불과한 백자의 수는 대가 바뀔수록 점점 줄고 있었다.

    어쩌면 이는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대를 반복할수록 신의 힘이 깃든 피는 옅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내 피를 마신다고 영생이니 뭐니 하는 건 터무니없는 이야기고. 전설의 하얀 피 같은 건 소르체에서도 사라진 지 오래인걸.”

    백자의 피가 흐르는 이들은 노화가 더딘 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영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백자의 피가 흐르든, 그 피를 마시든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 최초의 소르체를 낳은 신조차도 소멸을 피하지 못했다.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이유가 뭐지?”

    그렇게 묻는 남자의 얼굴은 정교하게 깎아 낸 조각상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살리바 대신전 깊숙한 곳에 걸려 있을 것 같은 얼굴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 신기했다.

    신의 힘이 점점 사라지는 이때, 신의 현신이라 불리는 남자가 이 땅에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까지 뭘 들은 거야. 백색증의 소르체가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건 여기에선 상식이야. 내가 그중 하나라는 게 비밀이었던 거지.”

    코라는 소르체를 떠나온 13년 전부터는 한 번도 ‘진짜’ 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눈처럼 하얗게 센 머리, 피처럼 붉은 눈. 가면을 벗은 제 모습이 자신조차 낯설었다.

    그런 모습을 들켰는데 왜일까,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코라는 제 눈가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어 갔다.

    “난 선천적으로 시력이 약해. 대신 내 눈은 좀 다른 걸 봐.”

    백자의 피를 지닌 자들은 저마다 다른 치유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붉은 눈’의 코라라 불리는 그녀의 능력은 이질적인 것을 찾아내는 데 있었다. 그녀는 질병이나 독처럼 부자연스러운 것들을 힘들이지 않고 그저 보는 것만으로 걸러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뭐가 보이지?”

    “방문자님께서 가진 것과 찾아야 할 것.”

    “내가 가진 것?”

    유진이 그렇게 되묻자 코라의 손가락이 그의 왼손을 가리켰다.

    “왼손에 그거 머리잖아.”

    유진은 천천히 제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왼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알았다. 코라가 말하는 머리가 무엇인지.

    “방문자님은 그것의 남은 조각을 찾아야 해. 왼손에 갇힌 그것이 다른 조각들을 부르고 있어.”

    성 상티모니아 최고의 성물 카푸트, 머리만 남은 성물이 찢어진 제 몸을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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