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148)

* * *

메르디에스를 떠나온 아리아드네 일행이 두 개의 작은 영지를 통과하는 데는 일주일이 걸렸다.

소르체로 가는 길은 몹시 단조로웠다.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대지에는 바위와 퍼석한 모래만이 가득했다. 메르디에스에 비치는 햇볕이 따스한 느낌이라면 이곳의 태양은 피부에 내리꽂히는 것처럼 따가웠다.

여름이 아니라 덥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긴 했지만, 건조하고 마른 공기를 들이마실 때마다 목 안이 간지러웠다. 어디를 봐도 세상은 온통 황무지였다. 쓸쓸하고 서러운 풍경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얼굴을 가린 베일로 다시금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게 한나절을 이동한 끝에 자그마한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경계의 시선들이 날카롭게 따라붙었다. 아직 소르체의 영지에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인적이 드문 곳에 세워진 이 마을은 소르체의 전초 기지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벌써부터 이런데 정말 소르체에 들어서면 어떤 분위기인 거야.”

달로아가 주위를 둘러보며 몸서리쳤다. 달로아의 불평에 햇볕 한 점 닿지 않도록 꽁꽁 싸맨 코라가 뒤돌아보며 대답했다.

“밖으로 나와 있는 곳이라 더 그렇다고 보면 돼.”

“엄밀히 말하면 이곳부터 소르체의 영역이라는 거지?”

“소르체에 기대어 생활하는 곳이니까 그렇다면 그런 거고.”

아리아드네 일행은 입구에 서서 마을을 둘러보았다. 폐쇄적인 소르체는 영지의 관문에 해당하는 통로에 몇몇 마을을 만들어 두고는 그곳을 통해 필요한 물건을 사고팔았다. 이곳 또한 그런 마을 중 하나였다.

차분하게 주위를 살피던 유진이 코라에게 물었다.

“얼마나 남았지?”

“길만 열리면 곧 도착해. 다 왔어.”

“길만 열리면?”

“여기서부터는 허락된 자만이 소르체로 향하는 길을 밟을 수 있거든.”

소르체의 폐쇄성은 가히 강박적이었다. 외부인을 꺼리는 것은 리뮈르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리뮈르의 폐쇄성은 그들이 원한 것이라기보다 혹독한 환경과 마물의 출현이라는 외부적인 요인 때문이었다.

땅이란 무릇 사람이 드나들어야 발전하는 법이었다. 더구나 소르체의 힘은 병을 다스리는 데 있었다. 사람을 치료하는 이들이 사람을 이토록 꺼리는 것은 쉽사리 납득하기 어려웠다.

“진짜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달로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힘을 탐내는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지.”

“백자(白者)의 피? 그게 정말 영생을 가져다줘?”

소르체가 가진 성물인 백자의 피는 죽음을 막아 주는 성물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백자의 피를 마시면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뜬구름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했다.

코라가 주위를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은밀하게 소곤거렸다.

“당연하지. 그래서 소르체에는 태초부터 살아온 유령들이 득실득실해. 그러니까 소르체에 들어서면 모두 조심해야 해. 태초부터 목숨을 이어 온 그들은 사람의 피를―”

꿀꺽,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멈췄던 코라의 말이 이어졌다.

“마시거든.”

긴가민가하는 사람들을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코라가 아리아드네와 눈이 딱 마주쳤다.

“…….”

“아, 아리아드네 님만 아니었음 거의 다 넘어왔는데…….”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 코라가 제 거짓을 실토하자.

“뭐야, 거짓말이었어?”

달로아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로아, 그걸 믿는 게 이상한 거야.”

“뭐라는 거야, 너도 움찔하는 거 내가 다 봤거든.”

달미에르의 핀잔에 달로아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 뒤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리카르도가 슬그머니 제 목을 감싼 손을 밑으로 내렸다.

코라는 비슷비슷한 건물들 사이에서 익숙하게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관처럼 보이는 건물 앞에서 멈춘 코라가 그 안으로 쑥 들어갔다. 일행은 코라의 뒤를 쫓아 들어갔다.

머리를 짧게 자른 여자가 지루한 얼굴로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다. 카운터로 걸어간 코라가 제 몸을 휘감고 있던 천을 풀어내며 짤막하게 말했다.

“여자 셋, 남자 넷. 그리고 소르체에 연락을 넣어 줘. 붉은 눈의 코라가 귀환한다고.”

‘붉은 눈의 코라’라는 말을 들은 여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우선 쉬실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식사는 어떻게 준비할까요?”

“적당히 알아서. 여기 내 손님들이니까 괜찮은 방으로 내주고.”

코라가 일행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코라의 눈은 붉은 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밝은 갈색이었다.

“다들 그만 쉬어. 연락이 오려면 좀 걸릴 테니까.”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킨 코라가 여자를 따라 사라졌다. 잠시 뒤, 다시 나타난 여자가 일행을 꼭대기 층으로 안내했다. 일행은 각자의 방으로 사라졌다.

탁, 방문을 닫은 아리아드네는 그대로 스르르 미끄러졌다. 비로소 혼자가 되었다. 꼿꼿하게 버티던 몸이 순식간에 모래처럼 무너져 내렸다.

제 내면은 이토록이나 형편없었다. 무력한 자신이 끔찍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늘어진 제 머리카락 사이로 목이 긴 신발이 보였다. 아리아드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언제, 왔어?”

소리 없이 그녀의 방에 들어온 유진이 아리아드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손으로 아리아드네의 눈을 덮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왜 혼자 이러고 있어?”

아리아드네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팔을 뻗었다.

“이젠 혼자 아니잖아.”

그녀를 일으켜 줄 것처럼 팔을 감싸 쥔 유진이 천천히 몸을 굽혔다. 어느새 바닥에 무릎을 꿇은 그가 조심스럽게 아리아드네를 감싸 안았다.

“혼자 감당하려 들지 마.”

“응. 고마워.”

아리아드네는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로 대답했다.

“무사하실 거야.”

“응.”

자신을 걱정하는 그의 마음이 눈에 잡힐 듯이 보였다.

“아무도 죽지 않아.”

“응.”

그는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들켰으니 제 속을 드러내도 될 것 같았다.

“나 불안해.”

우는 것처럼 웃는 아리아드네 얼굴 위로 유진의 손가락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알아.”

아리아드네는 그의 손가락이 제 목숨줄인 것처럼 부여잡았다.

“……아버지께 무슨 일 있으면 나 정말 어쩌지.”

제 두려움이 어떤 힘을 가질까 봐 생각하는 것조차 억지로 막았던 속내가 그 앞에서는 너무도 쉽게 까발려졌다.

“아버지가 반대하실 때 떠나지 말 걸 그랬어.”

레너드의 말처럼 엘바로 떠나지 않았다면 하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모두 무사했을까.”

이 모든 것이.

“또 내 욕심 때문에 모두를 위험에 빠뜨린 거면 나 정말 어떡해.”

제 잘못인 것만 같아서.

“나 이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못 하겠어. 정말, 정말 모르겠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가 또다시 잘못된 선택을 하면, 그래서 모두 죽어 버리면 어떡해. 그때처럼 다 죽고 나만 살아남으면 어떡해.”

그 끔찍했던 과거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나…….”

흙먼지와 서러움이 엉긴 목이 간지러웠다. 팽팽하게 당겨진 목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너무 무서워.”

제가 무너지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두렵다는 마음조차 먹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억지로 묻어 둔 불안은 언제나 자신을 따라다녔다.

“괜찮아, 다 괜찮아.”

아리아드네는 자신을 위로하는 그의 품에서 끝없이 눈물을 쏟아 냈다.

“응, 괜찮을 거야. 나 아무것도 포기 안 할 거야. 아버지도, 성도, 내 사람들도 모두 되찾아 올 거야.”

아리아드네는 주문처럼 괜찮을 거란 말을 되뇌었다. 그것만이 지금 그녀를 버티게 하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 * *

문 너머에서 희미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달미에르의 예민한 귀에는 그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내내 망설이다 겨우 잡은 문고리에서 그의 손이 떨어져 나왔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무장하고 있어도, 아리아드네의 마음이 몹시 괴로울 거란 것은 모두가 짐작하는 바였다. 하지만 위로조차도 자신의 몫은 아니었던가. 달미에르는 벽에 기댄 채로 씁쓸하게 웃었다.

위로조차도 건넬 수 없다면 자신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녀가 필요로 하는 무력도, 애정도, 힘들 때 의지하는 것조차도 유진, 그 하나로 충분했다. 자신이 설 자리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 기척을 죽인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 소리는 달미에르의 앞에서 우뚝 멈추었다. 달미에르의 예민한 청력은 어렵지 않게 소리의 주인공을 구별해 냈다.

“리카르도 경, 경께서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발소리의 주인공은 성 상티모니아의 성기사 리카르도였다.

“그, 그러는 리뮈르 공자께서는 왜 여기에…….”

리카르도가 더듬거리며 아리아드네의 방문을 힐끗댔다.

‘그걸 물어야 아나.’

달미에르는 어이가 없어 픽 웃음을 흘렸다. 같은 처지인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데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제 감정에만 푹 빠져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눈치 없단 소리 안 듣습니까?”

달미에르의 직설적인 물음에 발끈한 리카르도가 주먹을 꽉 쥐었다가 천천히 내렸다. 리카르도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기어들어 가듯이 대답했다.

“……그런 말은 처음입니다.”

그것을 순순히 믿을 달미에르가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연이은 공격에 리카르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달미에르가 벽에 기댄 몸을 일으키며 덧붙였다.

“아버지께서 보낸 전언이 있어서 왔는데, 지금은 때가 아닌가 봅니다.”

달미에르가 이 자리를 떠날 듯이 굴자 리카르도가 티 나게 기뻐했다. 하지만 달미에르는 이곳에 리카르도를 남겨 둘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내려가서 저랑 술이나 한잔하시죠.”

달미에르가 리카르도의 뒷덜미를 잡아채더니 질질 끌며 복도를 걸어갔다. 리카르도는 뒤꿈치를 세워 한껏 버티며 반항했다.

“제가 공자와 왜 술을 먹습니까?”

“성기사들은 원래 이렇게 눈치가 없습니까?”

눈치 없는 것도 저 정도면 병이었다. 달미에르의 구박에도 리카르도의 눈치는 돌아올 줄을 몰랐다.

“아, 저는 식전에 술 같은 거 안 먹습니다.”

리카르도가 제 뒷덜미를 움켜쥔 달미에르의 손을 쳐 내며 씩씩댔다.

“그럼 식사부터 하시죠.”

쳐 내기가 무섭게 다시금 목에 감긴 달미에르의 팔이 리카르도를 질질 끌었다.

‘아, 그러니까 내가 왜 너랑!’

리카르도는 차마 뱉지 못한 말을 웅얼거리며 달미에르의 손에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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