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148)
  • * * *

    코라의 이야기가 끝나자 숨이 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다. 무거워진 분위기에 답답함을 느낀 달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아까 본 그 여자가 외부 사람을 끌어들여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감금했단 말이야?”

    ―처음 뵙겠습니다. 리스벨의 캐롤린입니다. 함께 귀환하신단 말은 들었는데, 지금은 손님을 대접할 상황이 아니라서요.

    마치 깊은 수렁에 빠진 듯한 아득한 눈동자, 배신한 주인 앞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던 태연한 얼굴. 달로아는 캐롤린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 안을 잘게 씹었다.

    ―뭐, 메르디에스도 곧 끝날 거라지? 안에서 새기 시작하면 끝이지. 리뮈르나 메르디에스나.

    달로아는 달리오스 기억에서 읽은 ‘안에서 새기 시작하면’이라는 말이 내부의 배신자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배신자가 리스벨일 줄이야.

    “그건 나도 모르지. 침입한 사람들이 리스벨 영애를 회유한 건지, 리스벨 영애가 애초부터 그 사람들을 끌어들인 건지는.”

    코라는 이야기를 전할 때와 마찬가지로 시종 차분한 말투였다.

    “넌 어떻게 그곳에서 탈출한 거지? 내부 사정을 아는 사람이니 그들이 내보내 줬을 리는 없고, 자력으로 탈출할 만한 몸도 아닌 것 같던데.”

    내내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유진이 물었다.

    “아아, 소르체의 혈족이라는 게 들켜서 엄청 이용당했거든. 진짜 골수까지 뽑히는 줄 알았다니까.”

    유진의 물음에 코라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내가 부상자 치료 때문에 상대적으로 거동이 자유로워지니까 린즈 부인이 날 내보낼 생각을 했던 것 같아. 비밀 통로를 알려 주며 계속 외우게 했어. 아리아드네 님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소란스러워진 틈을 타 냅다 도망쳤고.”

    글레나 린즈, 아리아드네는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비 전하께서, 아리아드네 님께서 잘못하신 게 아닙니다. 그러니…….]

    글레나의 목이 잘리고 남은 시신마저 불탔던 과거도.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또 모두 죽어 버렸잖아요.’

    불타는 성에서 걸어 나오던 꿈속의 글레나도, 모두 현실이 아니었다. 아직은, 아직은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뭐, 마지막에 잡혀서 죽을 뻔했지만. 린즈 부인이 아리아드네 님께 이 말을 전하랬어.”

    코라의 얼굴 뒤로 제게 이 말을 전하라고 한 글레나의 모습이 눈에 잡힐 것처럼 떠올랐다.

    “갈라진 나무는 다시 붙일 수 없다고.”

    코라의 입을 통해 전해진 그 말이.

    ‘공녀, 갈라진 나무는 다시 붙일 수 없습니다.’

    마치 바로 옆에서 글레나가 속삭이는 것처럼 생생했다. 날카로운 칼이 제 가슴을 헤집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고통 따위에 심취해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조셉, 지금 신시아가 어디에 있지?”

    메르디에스 상단주인 신시아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상단주님께서는…….”

    “지금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해. 신시아와 합류하는 게 우선이야.”

    성 안에 억류된 남부 귀족들의 숫자가 얼마인지, 성을 침입한 것은 어디의 누구인지, 침입한 세력들이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레너드와 커티스가 정말 성을 비운 것인지 확인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선 정보를 다루는 신시아가 필요했다.

    “상단주님께서 릭센을 벗어났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후 동향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알아보려면 시간이 좀 걸릴 듯합니다.”

    케이루스와 메르디에스 간의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올랐으니, 얼굴이 알려진 신시아가 릭센에 남을 순 없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리아드네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이었다.

    “메르디에스 상단주라면 지금 소르체에 있을걸?”

    신시아의 소재는 의외의 곳에서 들려왔다. 그 말을 한 것은 코라였다. 아리아드네가 코라를 돌아보며 물었다.

    “신시아가 소르체에?”

    “응, 그 곱상하고 청초한 기사 있잖아.”

    “…….”

    “사슴 같은 눈망울에 머리카락이 밀처럼 옅은 갈색이었는데……. 왜 그 팔 다쳐서 돌아온―”

    팔을 다쳐서 돌아왔다는 말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알버트?”

    “응, 그런 이름이었어! 그런데 골절은 내 전문이 아니라서 내가 소르체 영내에 있는 치료사를 소개해 줬거든. 내가 애쓴 덕에 그 친구는 지금 소르체에서 치료 중이야.”

    “그런데?”

    아리아드네가 알기로 알버트와 신시아는 얼굴 한 번 맞댄 적 없는 사이였다. 알버트가 소르체에서 치료를 받는다고 신시아가 그곳에 있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

    “메르디에스 상단주가 상단원들을 구하려다 다친 사람이니 소르체에 방문해서 치료 과정을 직접 보고 싶다는 거야. 엄청 간곡하게 부탁하길래 들어줬지.”

    그제야 아리아드네는 신시아의 속내를 일부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알버트는 엘바에서 실종된 상단원들을 찾으려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상단주인 신시아가 그런 알버트를 위로하고자 소르체에 방문한다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것이 외부인의 출입을 극도로 통제하는 소르체만 아니라면.

    “그게 가능했다고?”

    소르체의 외부인 출입은 원칙적으로 소르체 가주의 초청이나 허락이 있어야 했다. 이조차도 소르체에서 제한적으로 받아들인 환자가 대부분이었다.

    소르체는 혈족 중심의 매우 폐쇄적인 사회였다. 페렌트에서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는 메르디에스 상단조차 발을 들이기 어려운 땅이었다. 그러니 신시아의 목적은 소르체에 발을 들이는 것, 그 자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는 아리아드네 생각보다 소르체 내에서 코라의 영향력이 훨씬 대단하다는 말이었다. 아리아드네가 말없이 바라보자 제 발이 저린 코라가 자백하듯 말했다.

    “매년 푸른 피 오십 병을 우선 제공한다길래……. 이건 정당한 거래였어!”

    푸른 피란 투구게에서 뽑아낸 혈액을 말하는 것으로 각종 질병을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약품이었다. 그 가격이 어마어마할 뿐만 아니라 이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워 소르체 내에서 고가로 거래되는 것 중 하나였다.

    “코라, 네가 말하면 소르체에서 우리도 받아 줄까?”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코라가 눈을 깜박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코라는 설명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턱을 긁적이며 덧붙였다.

    “음, 그게 소르체 가주가 우리 어머니거든.”

    저 또라이가 가주의 딸이라고? 깜짝 놀란 달로아가 코라를 돌아보며 물었다.

    “너 소르체 후계였어?”

    “아니, 그건 아닌데 엄마가 가주이긴 해.”

    하긴 다른 자식이 있다면 그쪽을 후계 삼는 게 정상이겠지. 달로아는 혼자서 결론을 내린 다음 아리아드네에게 물었다.

    “아리아드네, 소르체에 갈 거야?”

    “그쪽에서 받아들여만 준다면 나쁘지 않아.”

    메르디에스 서쪽 경계가 리카서스와 맞닿아 있다면 동쪽 경계는 소르체였다. 소르체가 워낙 폐쇄적이라 평소에 그것을 실감하지 못할 뿐.

    성을 지켜 내지 못한 이때, 케이루스와 리카서스의 연합에 대항하려면 소르체와의 연대가 우선이었다.

    “리뮈르는 메르디에스를 돕기 어려우니까요.”

    달미에르의 말대로였다. 리뮈르는 우선 메르디에스와 거리가 너무 멀고, 더구나 겨울은 디움의 마물이 가장 극성인 시기였다. 리뮈르의 지원은 겨울이 끝나는 시기가 되어서야 기대해 볼 수 있었다.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지. 지금 상황에서 더 좋은 수란 없어.”

    소르체에만 가면 신시아와 합류할 수 있을뿐더러 메르디에스를 경계로 메르디에스-소르체-리뮈르까지 연합 전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안 될 수도 있어. 내가 사람을 너무 많이 들여서. 지난번에도 이게 마지막이라고 혼났거든.”

    대화를 지켜보던 코라가 조금 머뭇대며 말했다.

    “코라, 부탁해. 매년 네게 푸른 피 백 병을 무상으로 제공할게.”

    “백, 백 병?”

    한 해에 채집되는 푸른 피는 오백 병을 채 넘지 못했다. 일 년 채집량의 1/5이라니, 코라의 눈동자가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그게 끝이 아니야. 이번 일만 잘 해결되면 메르디에스가 확보한 모든 푸른 피의 우선 구매권은 소르체가 가지게 될 거야.”

    그리고 메르디에스는 푸른 피의 유일한 유통망이었다.

    “난 아리아드네 님이 이렇게 통 크게 굴 때가 너무 좋더라.”

    ‘푸른 피’ 소리에 눈이 반쯤 돌아간 코라가 아리아드네 팔에 답삭 매달리며 눈웃음을 쳤다.

    “이게 얼마 만에 집에 돌아가는 거람. 그럼 가 볼까?”

    고개를 까딱한 코라가 앞장서서 걸었다. 푸르스름한 달빛이 일행이 가는 길을 비추고 있었다.

    * * *

    타박타박 벽을 울리는 발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캐롤린은 성벽을 내려오다 벽에 기댄 채 숨을 골랐다. 활시위에 찢어진 손바닥에서 피가 흘렀다. 쓰라린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캐롤린 리스벨, 아무것도 늦지 않았어. 후회할 일은 하지 마.

    흔들림 없는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직시했다. 그대로 뛰어내려 아리아드네 곁에 서고 싶었다. 하지만 늘 제 차지였던 아리아드네 옆자리는 이제 제 것이 아니었다.

    ―저 여자 뭐야? 리스벨이라며?

    회색 눈동자, 저녁놀처럼 선명한 붉은 머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거리낌 없이 할 말을 쏟아 내던 불같은 성격.

    달로아 리뮈르, 그녀가 아리아드네에게 큰 힘이 되어 줄 사람이라는 것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리아, 결국 해냈구나.’

    아리아드네는 기어이 리뮈르를 그들의 땅 밖으로 끌어냈다.

    뚝뚝, 찢어진 손바닥에서 흐른 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돌바닥에 떨어진 피가 작은 원을 그렸다. 아, 이대로 온몸의 피가 모두 사라졌으면, 차라리 그렇게 죽었으면……. 캐롤린은 제 피를 흘려보내며 울지 못해 웃었다.

    그때, 딱딱 마치 송곳으로 내려찍는 듯한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캐롤린 앞에 멈춰 선 여자가 입을 열었다.

    “소르체의 혈족이라는 여자가 성에서 탈출했어요. 혹시 리스벨 영애께서 하신 일인가요?”

    여자의 입술 끝에 자리한 붉은 점이 유난히도 선명했다.

    ―셀레나라고 합니다, 리스벨 영애.

    ―너희 같은 것들에게 진짜 이름이 있긴 한가?

    여자는 자신을 셀레나라 소개했으나 캐롤린은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캐롤린은 찢어진 손을 꽉 움켜쥐었다. 고통과 함께 술렁이던 슬픔이 차츰 가라앉았다.

    “남 탓도 정도껏 해야지. 얼마나 허술하게 관리했으면……. 무엇보다 코라가 필요한 건 너지, 내가 아니잖아?”

    캐롤린의 빈정거림에 성큼 다가온 셀레나가 제 입가를 쓸어내리며 웃었다.

    “아무래도 믿을 수가 있어야죠. 그 리스벨인데…….”

    “날 성벽 위에 세운 건 너야.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나도 같이 가두지 그랬어?”

    캐롤린을 믿지 못해 아리아드네와 마주하도록 밀어붙인 건 다름 아닌 셀레나였다.

    “그럴 수야 있나요, 영애가 이제껏 해 준 게 있는데…….”

    날 선 대답에 한발 물러선 셀레나가 속삭이듯 덧붙였다.

    “곧 원군이 도착할 거예요. 그때까지만 도와주시면 폐하께서 그 공을 잊지 않으실 거예요.”

    “폐하? 하!”

    코웃음을 친 캐롤린이 조롱하듯 물었다.

    “승하하신 다그마르 폐하께서 죽음의 강에서 돌아오셨다던가?”

    그 말에 내내 웃음을 머금고 있던 셀레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잊지 마세요. 아버지 목숨은 영애가 하기에 달렸다는 거.”

    셀레나의 손이 캐롤린의 목을 조를 것처럼 감싸자, 여자의 엄지손톱 밑에 자리한 그믐달 모양의 문신이 캐롤린의 목깃을 스쳤다. 캐롤린이 셀레나의 손을 매섭게 쳐 내며 짓씹듯 말했다.

    “제 이름조차 밝히지 못하고 평생 어둠에 기생해 사는 쓰레기. 그 냄새 나는 손으로 날 만지지 마!”

    셀레나는 케이루스의 어둠 속에 사는 찌꺼기 같은 존재였다. 그림자 속에서 그들의 모든 악행을 대신하는, 진짜 이름은 고사하고 존재조차 없는 이들.

    캐롤린의 힐난에 셀레나의 입가가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저야 더럽혀질 이름도 없다지만 그 이름이 시궁창에 처박힌 건 리스벨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캐롤린은 더는 대꾸하지 못하고 그렇지 않아도 갈기갈기 찢어진 손을 꽉 움켜쥐었다. 엉망이 된 손바닥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럼 실례.”

    셀레나가 싱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혼자 남겨진 캐롤린은 피를 뚝뚝 흘리며 제가 머무르는 방으로 돌아왔다. 캐롤린을 위해 메르디에스 성에 마련된 이곳은 리스벨 백작저에 있는 그녀의 방과 비교해도 조금도 모자람 없는 방이었다.

    휘청이며 방문을 닫은 캐롤린이 책상 서랍 깊숙이 넣어 둔 오르골을 꺼냈다. 뒤쪽의 태엽을 감자 맑은 음악 소리와 함께 오르골 위에 자리한 순백의 말들이 뱅글뱅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네 인생을 타인에게 맡겨 버리면 너에게 무엇이 남지?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구나.

    언젠가 캐롤린에게 이것을 주었던 사람이 그렇게 말했을 때.

    ―저는 리스벨이고, 리스벨에서 태어난 책임을 다하고 싶어요. 제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메르디에스를, 아리아드네를 지킬 거예요. 이게 제 선택이에요.

    자신은 그것이 제가 원하는 삶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제는 무엇이 옳은지 점점 알 수가 없어졌다.

    ―저야 더럽혀질 이름도 없다지만 그 이름이 시궁창에 처박힌 건 리스벨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셀레나가 남긴 그 말이 캐롤린에게 마치 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아버지, 대체 어디 계세요? 제발 살아만 계셔 주세요. 그러면, 아버지만 살아 계시면 전…….’

    캐롤린은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지금의 자신에게는 눈물조차 사치이기에. 흘리지 못한 눈물 대신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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