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148)
  • * * *

    코라의 자그마한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 움직였다. 얼굴을 가린 천을 벗겨 내자 생각보다 앳된 얼굴이 드러났다. 이제 막 성년이나 되었을까 싶은 얼굴이었다.

    색색 평온한 숨소리가 이어졌다. 마비산에 중독되어 기절한 것인지, 그저 잠이 든 것인지 도무지 구분이 어려웠다.

    “소르체의 치료사라길래 나이가 좀 있을 줄 알았더니……. 대체 몇 살이야?”

    달로아가 유진이 구해 낸 소르체의 혈족을 힐긋대며 물었다.

    아리아드네는 평온하게 숨을 내쉬는 코라의 얼굴을 잠시간 쳐다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아득한 그녀의 눈이 떠나온 방향을 보고 있었다.

    “글쎄, 13년 전에도 저 얼굴이었으니까 생각만큼 어리진 않을 거야.”

    “뭐? 그럼 저 얼굴이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거야?”

    “아마도.”

    그 답을 끝으로 아리아드네는 다시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어색한 공기를 견디지 못한 달로아가 불평하듯 투덜거렸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달로아는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곤히 잠이 든 건지 기절한 건지 알 수 없는 코라의 코와 입을 슬그머니 막았다.

    평온하던 얼굴이 손바닥 아래에서 꿈틀꿈틀 움직였다. 눈꺼풀이 들썩이는 신호에 맞춰 달로아가 잽싸게 손을 떼어 냈다.

    그와 동시에―

    “푸하!”

    요란한 소리를 내며 소르체의 혈족이 정신을 차렸다. 소르체의 혈족이자 메르디에스 주치의인 코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익숙한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앗, 아리아드네 님이다!”

    아리아드네를 향해 발을 떼려던 코라는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으며 제 머리를 감쌌다.

    “아아, 머리 아파…….”

    끙끙대는 코라를 지켜보던 아리아드네가 말했다.

    “지금 그 두통, 마비산 때문이 아닐까?”

    그 말에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앓는 소리를 내던 코라가 발딱 일어났다.

    “아, 맞다. 마비산! 망할, 왜 하필 바람이 그렇게 불어서!”

    발을 구르며 억울해하던 코라는 제 짐을 뒤져 몇 종류의 약을 꺼내더니 익숙한 손길로 조합한 뒤 그것을 꿀떡 삼켰다. 잠시 뒤, 고통이 가신 듯 상쾌한 얼굴로 돌아온 코라가 발랄하게 물었다.

    “아리아드네 님이 나 구해 준 거야?”

    “아니, 유진이.”

    아리아드네가 유진을 향해 눈짓하며 대답했다.

    “아하, 그 방문자님?”

    메르디에스 성에서 서로 안면을 익힌 적은 없지만 이름 정도는 들은 모양이었다.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끄덕이자 코라가 유진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으음,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코라가 손을 내밀었다.

    “소르체는 결코 은원을 잊지 않아. 내 목숨을 구해 준 값은 반드시 갚을게.”

    페렌트에는 언젠가부터 다섯 가문과 관련된 불문율이 전해 내려왔다. 그중에서도 소르체와 관련된 불문율은 ‘소르체를 만나면 반드시 은혜를 베풀고 절대로 원한을 사지 마라.’는 것이었다.

    이는 은혜든 원한이든 반드시 배로 갚아 준다는 소르체의 원칙 때문이었다. 그런 소르체의 혈족에게 목숨을 구해 준 값이란 말을 들었으니 유진에겐 여분의 목숨이 생긴 셈이었다.

    “그러든가.”

    하지만 유진에게 그것이 얼마나 유용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심드렁한 유진의 대답에 도리어 당황한 건 코라였다.

    “……그게 다야? 좀 더 감동해도 괜찮은데.”

    소르체의 약속이었다. 설사 자신이 지키지 못한다 해도 소르체는 혈족이 입은 은혜를 결코 모른 척하지 않는다.

    코라의 말에 유진은 내내 옆을 보고 있던 얼굴을 돌렸다. 비뚜름하게 얼굴을 기울인 남자가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여기서 누군가 감동을 해야 한다면 그게 나는 아닐 텐데. 죽다 살아난 건 그쪽 아닌가?”

    소르체의 혈족이라 그러면 어디에서든 귀빈 대접을 받았다. 떠받들리는 것에 익숙한 코라는 모처럼 겪는 푸대접이 신선하기까지 했다.

    “와, 되게 뻣뻣하다.”

    코라는 혀를 내두르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일행을 쓰윽 훑어보다 달미에르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흐음, 저기 저분이 아리아드네 님이 편지로 말했던 그 리뮈르 공자님이신가?”

    아리아드네가 리뮈르에서 달미에르의 병증에 관해 적어 보낸 편지를 코라가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코라의 눈이 달미에르의 희뿌연 눈을 빤히 바라보며 고민스럽다는 듯 한쪽 볼을 부풀렸다.

    “으음, 이런 눈은 나도 처음 봐. 제대로 된 진료를 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코라의 말에 달미에르가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제 눈이야 급한 일이 아니니 나중에 상황이 되면 그때 봐 주셔도 됩니다.”

    어차피 나을 거라고 기대한 적도 없는 눈이었다. 이런 상황에 한가하게 자신의 눈이나 진료받고 있을 여유도 없었고.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따로 있으니까요.”

    달미에르의 고개가 아리아드네를 향했다. 자신을 향하는 사람들의 시선에 아리아드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때, 바람이 불어와 아리아드네의 옅은 금발을 흩트려 놓았다. 추수가 채 덜 끝난 들판에 남은 황금색 밀들 또한 바람에 흔들려 제 몸을 뉘었다.

    “코라, 성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하아, 깊은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 올린 코라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여느 때처럼 제 방에서 잠이 들었던 코라는 잠결에 달콤한 냄새를 맡았다.

    깊은 잠을 자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반쯤 깨어 있는 것 같은 각성 상태가 이어졌다. 하지만 온몸이 끈적한 설탕 시럽에 푹 빠진 것처럼 축 늘어져 조금도 움직이고 싶지가 않았다.

    ‘오늘은 더 잘래. 그런데 이건 무슨 냄새지? 너무 좋다.’

    다디단 냄새를 조금이라도 깊게 들이마시기 위해 입을 벌렸다. 어쩐지 입 안이 바짝 말랐다. 더, 더, 더, 참을 수 없는 갈증에 허공을 낚아챈 순간, 절그럭! 하는 소리와 함께 코라는 의식을 차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코라는 움직임이 불편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제 한쪽 손이 부드러운 구속구에 묶인 채로 대리석 기둥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게 뭐지?’

    그런 생각을 하던 코라는 옆에서 당황한 듯 울먹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 이게 무슨……”

    막 정신을 차린 여자가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손목에 연결된 쇠사슬을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여자가 그럴 때마다 손목에 연결된 쇠사슬이 다시금 절그럭 소리를 내며 따라붙었다.

    “셸란 부인, 깨어나셨네요.”

    코라는 그제야 제 옆에 있던 여자가 셸란 자작 부인임을 알았다. 셸란 부인이라 불린 여자가 자신을 부른 사람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타드 백작님?”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셸란 자작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그녀의 몸을 구속하는 쇠사슬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스타드 백작도 셸란 자작 부인과 마찬가지로 손목에 구속구가 채워진 상태였다.

    셸란 자작 부인은 제 기억의 마지막이 추수제 연회임을 깨닫고는 허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것이 메르디에스의 뜻인가요?”

    셸란도, 스타드도 메르디에스와 뜻을 같이하는 굳건한 우방이었다. 연회에 참석한 자신들을 인질로 삼는 것이 메르디에스의 뜻이라면, 셸란 자작 부인이 이를 꽉 물었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때, 낮고 침착한 목소리와 함께 절그럭 소리가 났다. 셸란 자작 부인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린즈 부인! 부인께서도…….”

    글레나가 자신의 양손을 들어 보였다. 메르디에스 내정을 책임지는 글레나 역시 그녀들과 마찬가지로 구속된 상태였다.

    “셸란 부인께서도 깨어나셨으니 하던 이야기를 마저 정리하도록 하지요.”

    글레나의 말에 셸란 자작 부인이 스타드 백작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안심하라는 듯 셸란 자작 부인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셸란 부인, 정신을 잃기 전 어떤 것을 느꼈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저는 마치 설탕을 졸인 듯한 달콤한 냄새와 함께 주위의 사물이 제게 다가오는 듯한 환각을 보았습니다. 그러곤 의식을 잃었죠.”

    글레나가 담담한 목소리로 의식을 잃기 전 느꼈던 것들을 풀어놓았다. 셸란 자작 부인은 한결 진정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그런 냄새를 맡았어요. 디저트 냄새라기엔 지나치게 강렬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춤을 출 때도 감각이 좀 이상했어요.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건 아마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자주색 꽃에서 나는 냄새였을 거예요. 못 보던 것이라 궁금해서 하녀에게 받아 확인해 봤거든요.”

    평소 원예에 관심이 남다른 스타드 백작이 덧붙였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글레나가 멀뚱멀뚱 앉아 있던 코라에게 물었다.

    “코라, 혹 짐작 가는 것이 있나요?”

    코라는 머리가 아파 작게 눈을 찡그렸다. 메르디에스 주치의인 코라는 연회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평소처럼 제 방에서 자고 일어나니 이곳에 감금당한 상태였다.

    “달콤한 냄새가 나는 자주색 꽃이라면 아마도 피피일 거야.”

    “피피요?”

    낯선 이름에 글레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코라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모르는 것도 당연해. 나도 본 적은 없고 말로만 들었어. 피피는 서대륙의 동부 사막에서 자생하는 선인장인데 십 년에 한 번 자주색 꽃을 피운다고 해. 봉오리가 맺힌 꽃에 열을 가하면 달콤한 냄새를 피우며 개화하는데 그 냄새가 사람의 감각을 둔하게 만들고 깊은 잠에 빠지게 하지. 사막 부족의 의식에 쓰이는 것이라 구하기 쉽지 않다고 들었는데…….”

    설명을 모두 듣고 난 글레나는 이 상황을 더욱더 이해할 수 없었다.

    “추수제 연회에 쓸 물건은 모두 제 확인을 거쳤습니다. 그런 해괴한 물건을 들였을 리가 없―”

    그 순간, 글레나의 머릿속을 섬광처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린즈 부인, 화훼가 도착했습니다. 지금 확인해 주셔야…….

    ―그건 제가 확인할게요.

    ―아, 죄송해서 어쩌죠. 리스벨 영애께서도 바쁘실 텐데…….

    ―잠시 쉬러 갈 참이었어요.

    연회에 쓸 화훼를 확인한 것은 글레나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

    하얗게 질린 글레나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마구잡이로 떨리는 통에 글레나의 손목에 달린 쇠사슬이 절그럭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리스벨 영애, 리스벨 백작님께서 계시지 않은 이때 성 내 경비는 영애의 몫임을 알고 있지만 기사의 수가 너무 부족하지 않나요?

    예년보다 추수제 규모는 키웠는데 성 내 경비 인력이 지나치게 허술했다. 그중에서도 요충지를 담당해야 할 기사들이 연이어 성을 빠져나갔다.

    ―부인 말씀대로 그건 제 일이에요. 기사들은 다른 시급한 일이 있어 부득이하게 성 내 인력을 줄인 것이니 그렇게 아세요.

    글레나는 캐롤린의 처사를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지금 메르디에스에 추수제 연회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까?

    ―다 잘 끝날 거예요. 그러니 부인은 부인께서 맡은 일에 신경 써 주세요.

    그것조차도 의도된 것이었을까. 일부러 성 내 무력을 담당하는 기사들을 외부로 빼돌린 것이었을까.

    ―성주님과 아버지께서는 급한 일로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두 분의 부재가 알려져 좋을 것이 없으니 고용인들 입단속 시키세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이 끼익, 끼익 나쁜 소리를 내며 맞물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리스벨 영애, 안색이 좋지 않아요.

    ―연회가 끝나고 좀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연회만, 연회만 지나면, 전부 다 괜찮아질 거예요.

    캐롤린은 며칠 전부터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무척이나 불안해했다. 그것에 다른 이유가 있었던가. 글레나는 좀처럼 진정할 수 없어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이것을 지켜보던 스타드 백작과 셸란 자작 부인이 시선을 교환했다.

    “린즈 부인, 숨기는 것 없이 말씀해 주세요. 메르디에스 연회에 참석했다 일어난 일이니 저희에게도 그 정도를 요구할 권리는 있지 않나요?”

    그렇게 채근한 답을 듣기도 전에 달칵 소리와 함께 굳건히 잠긴 문이 열렸다.

    “제가 곧 괜찮아질 거라고 했잖아요.”

    청량한 목소리에 글레나의 떨림이 뚝 멈추었다. 천천히 고개를 든 글레나 앞에 굽이치는 까만 머리카락이 늘어져 있었다. 조금 더 시선을 올리자 자수정 같은 보랏빛 눈동자가 곱게 휘어졌다.

    “제게 협조해 주신다면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목숨보다 더 소중한 건 없잖아요?”

    ―이 땅의 풍요로움이 모두에게 영원하기를.

    그렇게 말하며 추수제 연회의 시작을 알리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얼굴을 한 캐롤린이 그곳에 서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