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148)

* * *

그 뒤로도 잦은 사고가 끊이지 않아 아리아드네 일행은 추수제 연회가 끝난 나흘 뒤에야 겨우 메르디에스에 들어설 수 있었다.

추수제 기간 동안 프레모 대륙의 온갖 사람과 물자가 메르디에스로 모여들었다. 평소에도 활기가 넘치는 땅이지만 추수제 전후로는 더욱 그러했다.

시끌벅적한 소음도, 가득 쌓아 둔 곡식과 과일에서 퍼지는 냄새도, 조악한 거리의 물건들도. 아리아드네는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해 마지않았다.

“원래 이래?”

달로아가 황량한 거리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그럴 리가.”

추수제를 보내는 메르디에스의 모습이 이상했다. 대로 양쪽으로 빼곡히 들어찬 간이 상점들은 뼈대만 흉물스럽게 남아 있었다. 몇몇 상점들은 물건마저 고스란히 남아 있어 스산하기까지 했다.

탁탁, 낯선 사람들이 거리로 들어서자 잔뜩 경계하고 있던 사람들이 덧창을 닫아걸었다. 메르디에스는 교역과 무역의 도시이기도 했다. 사람을 꺼려서는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나고 자란 제 땅이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가슴이 거세게 뛸수록 손끝은 차가워졌다. 아리아드네는 성을 향해 빠르게 말을 몰았다.

성벽에 세워진 깃발은 떠날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메르디에스 일가의 부고를 알리는 깃발도, 성의 주인이 바뀌었음을 알리는 깃발도 올라오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제 불안이 기우이기를 바랐다. 그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성문에 다다른 아리아드네가 멈춰 섰다. 불안으로 수런대던 가슴이 마침내 잠잠해졌다.

자신의 불안은 현실이었다. 아리아드네는 굳게 닫힌 성문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늘 드나드는 사람들로 북적였던 메르디에스 성이 주인의 귀환에도 굳게 닫혀 있었다.

“물러나.”

유진이 아리아드네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아리아드네가 유진을 바라보았다. 늘 생기로 반짝이던 그녀의 눈동자가 텅 빈 채로 그를 응시했다.

“왜? 이제야, 이제야 집에 돌아왔는데…….”

제 시작이 이곳임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엘바로 떠난 것도, 릭센으로 향한 것도, 리뮈르를 거친 것도 모두 메르디에스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해?”

아리아드네의 입술 끝이 바르르 떨렸다. 늘 깊이 뿌리박은 나무처럼 굳건했던 그녀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유진이 아리아드네를 향해서 팔을 뻗었으나 그녀를 태운 말이 뒤로 물러서는 바람에 그의 손은 허공만 스치고 말았다.

“내가 여기서 물러나면 저기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데?”

아리아드네가 굳게 닫힌 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여기서 물러날 수 없어.”

그녀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성 안에는 그녀의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말릴 새도 없이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따라 내린 유진이 그녀를 붙잡았다.

“또다시 모두를 잃을 순 없어.”

자신을 붙든 유진의 손을 떼어 낸 아리아드네가 성을 향해 달려갔다. 모두가 죽은 세상에 혼자만 살아남는 건 싫었다. 그딴 경험은 한 번으로 충분했다. 성 안이 불구덩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아리아드네가 성문에 한 발짝 더 다가간 그때, 쐐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성벽에서 붉은 깃이 달린 화살이 날아왔다. 화살은 정확히 아리아드네의 발치에 박혔다.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들어 성벽 위에 선 인영을 확인했다. 마치 굽이치는 물결처럼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바람에 날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그녀가 여느 때처럼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무 늦었어, 리아.”

보랏빛 눈동자가 곱게 휘어지자 눈꼬리에 매달린 점이 따라 움직였다.

‘지금, 내가 꿈을 꾸는 걸까.’

악몽 같은 얼굴이었다. 지겹도록 원망하고 원망했던 그 얼굴. 원망하면서도 끝까지 버리지 못해 제 속을 파먹었던 지난 삶의 악몽.

“캐롤린.”

메르디에스의 첫 번째 손, 리스벨의 후계자 캐롤린 리스벨이 그곳에 서 있었다.

캐롤린의 검은 머리카락 뒤로 메르디에스의 문장이 그려진 녹색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가시나무에 둘러싸인 방패. 리스벨은 메르디에스의 문장에 있는 방패를 제 가문의 표식으로 삼았다. 그들 스스로가 메르디에스를 지키는 방패가 되기를 자처한다는 뜻이었다.

성이 불타는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이런 상황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캐롤린과 이런 식으로 재회하게 될 거라고는.

“캐롤린, 이게 무슨 짓이야.”

꿈에서조차…….

“이런 짓.”

쌔애액, 탁! 탁! 다시금 붉은 깃이 달린 화살이 연달아 날아와 아리아드네 발치에 박혔다.

“네가 너무 늦어서 전부 엉망이 되어 버렸잖아.”

아리아드네는 제 발치에 박힌 화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시금 날린 두 대의 화살 가운데 하나는 깃대가 갈라진 채였다. 아리아드네는 그것이 캐롤린과 제 미래를 의미하는 것일까 봐 두려웠다.

“캐롤린 리스벨, 아무것도 늦지 않았어. 후회할 일은 하지 마.”

서로를 원망하고 후회하는 건 지난 삶이 마지막이었으면 했다. 아리아드네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캐롤린을 바라보았다.

“리아, 난 후회 안 해. 난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똑같은 선택을 할 거야.”

캐롤린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아찔할 정도로 환한 웃음이 쏟아졌다. 봄볕처럼 따스하고 다정한 얼굴을 한 캐롤린이 천천히 시위를 당겼다.

“아무도 믿지 말았어야지. 다 네 탓이야. 네가 사람을 너무 잘 믿으니까 이런 일이 생긴 거야.”

캐롤린이 시위를 팽팽하게 당긴 그때, 타앙! 매캐한 연기와 함께 우레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유진이 어느새 풀멘을 꺼내 캐롤린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절 죽인다고 해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텐데요.”

웃음기가 섞인 청아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서 차를 마시거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비밀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목소리였다.

“리아, 네가 선택해. 성주님을 살릴 건지, 날 죽일 건지.”

캐롤린이 레너드의 생사를 입에 올리자 아리아드네는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아리아드네,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부모는 자식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갚을 수 없는 빚더미에 앉은 셈이란다. 평생 퍼 줘도 충분하다는 생각은 안 들 게다.

‘아버지…….’

그것이 레너드의 유언이 되게 할 순 없었다. 아리아드네가 풀멘을 든 유진의 손을 잡아끌었다. 유진은 그녀의 뜻에 따라 천천히 제 손을 내렸다. 그것을 지켜본 캐롤린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하셨어요. 성주님이 돌아가시면 리아가 많이 슬퍼했을 거예요.”

생각만으로도 아득한 말을 캐롤린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뱉었다.

“아버지는 어디 계셔?”

꽉 막힌 목구멍이 조이는 것처럼 아팠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걸. 그건 네가 찾아야지.”

“리스벨 백작께선?”

아리아드네는 커티스의 부재를 반쯤은 확신하고 있었다. 캐롤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너만 이곳에 돌아오지 않으면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리아드네와 캐롤린의 대치를 지켜보고 있던 달로아에게서 당혹스러운 물음이 터져 나왔다.

“저 여자 뭐야? 리스벨이라며?”

고생하며 달려온 손님에게 이런 취급을 하는 것도 황당한데, 그 상대가 리스벨이라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리뮈르에서 평생을 자란 달로아도 저 두 가문의 관계는 알았다. 메르디에스와 리스벨의 유대는 그만큼이나 특별했다. 자수정 같은 보랏빛 눈동자가 달로아를 향했다.

“리뮈르 공녀와 공자이신가요?”

그들을 훑어보는 캐롤린의 눈동자가 헤아릴 수 없이 깊고 아득했다. 배신한 주제에 오히려 제가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달로아는 분기가 차올라 성벽 위의 캐롤린을 노려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리스벨의 캐롤린입니다. 함께 귀환하신단 말은 들었는데, 지금은 손님을 대접할 상황이 아니라서요.”

금세 쓸쓸한 표정을 지우고 사교적인 미소를 띤 캐롤린이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해 왔다.

‘뭐, 이런 또라이가…….’

달로아가 제 동생을 돌아보며 빈정거렸다.

“우리도 인사해야 해? 지금 사이좋게 인사 나눌 때야?”

달미에르가 한숨을 쉬며 자신의 누이를 뒤로 숨겼다.

“아, 왜!”

달로아는 달미에르가 잡은 팔을 거세게 뿌리치며 말했다.

“로아, 제발…….”

“됐어.”

여전히 내키지 않는다는 듯 뚱한 얼굴을 한 달로아가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달로아 남매를 가만히 지켜보던 캐롤린이 아리아드네에게 물었다.

“리아, 너 페렌트의 왕이 될 거야?”

그 물음에 작은 숨소리마저도 뚝 멎었다. 달로아의 시선이 아리아드네에게 박혔다. 그녀 또한 어쩌면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

아리아드네의 침묵에 캐롤린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그마르 폐하께서 승하하신 이때, 성주님께선 보란 듯이 추수제를 진행했지. 너는 리뮈르를 이끌어 냈고.”

그 모든 것이 가리키는 답은 오직 하나였다.

휘이잉, 서늘한 가을바람이 그들 사이를 스쳐 갔다. 바람에는 메르디에스의 흙냄새가 가득했다. 아리아드네는 언제나 기꺼웠던 이 냄새가 오늘따라 버겁게 느껴졌다.

“나한테도 미리 말해 주지 그랬어. 그러면 나도 왕이 될 네 손을 잡았을지 모르는 일이잖아.”

캐롤린은 활을 잡은 제 손을 내려다보며 쓸쓸한 얼굴로 웃었다. 이 손으로 이런 일을 하게 될 줄은 캐롤린 역시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네 곁에 이젠 내 자리는 없는 것 같아.”

캐롤린의 시선이 노을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매와 곱상하게 생긴 성기사, 잔뜩 긴장한 길잡이 사내와 자신을 향한 경계를 조금도 늦추지 않는 검은 머리의 사내를 차례로 훑었다.

“그러니까 난 여기 있을래.”

성 안이 제자리라는 듯, 한 발 뒤로 물러난 캐롤린이 시위에 세 대의 화살을 걸었다. 티잉― 불협화음 같은 소리를 내며 쏘아진 화살이 비틀대며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또 보게 될 거야.”

이젠 끝이라는 듯 활을 늘어뜨린 캐롤린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안녕, 리아.”

들릴 듯 말 듯 한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캐롤린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젠 어떻게 해?”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달로아였다. 달미에르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떠나야지.”

“그러니까 어디로?”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제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헝클어뜨린 달로아가 아리아드네에게 소리를 질렀다.

“정신 차려! 언제까지 정신 빼놓고 있을 거야?”

아리아드네가 받았을 충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일행의 구심점은 어디까지나 아리아드네였다. 그녀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가야 할 방향을 정할 수 없었다.

달로아는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답답해 미칠 것만 같았다.

“로아, 그만해. 우선 여기를 벗어나자.”

달미에르가 제 누이를 진정시키는 와중에 눈치를 보고 있던 리카르도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메르디에스 공녀께서 원하시면 성 상티모니아에서 공녀를 보호하겠습니다.”

성기사단의 부단장인 리카르도와 신의 대리자로 취급받는 유진이 포함된 일행이었다. 신전은 이들의 보호를 결코 거절할 수 없었다.

달미에르를 뿌리치는 데 성공한 달로아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경은 빠져요. 페렌트 일에 성 상티모니아가 끼어들어서 무슨 꼴을 보려고.”

하지만 달로아의 말대로 그것이 문제였다. 성 상티모니아가 끼어들게 되면 일이 훨씬 복잡해진다.

“아리아드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드문 남자였다. 낮은 목소리로 아리아드네를 부른 유진이 그녀의 얼굴을 제 손으로 감쌌다.

눈동자에 서로의 모습이 비칠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붙인 유진이 아리아드네와 눈을 마주한 채로 천천히 말했다.

“복잡한 생각은 나중에 해도 돼. 어디를 가든 상관없어. 내가 있는 한 아무도 당신에게 손 못 대.”

굳건한 그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그의 말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네 장난 따위에 다시는 날 끼워 넣지 마.

반 호수에 나타난 메로우에게서.

―위험한 일에는 몸을 좀 사리라고 하고 싶은데, 이 중에 그나마 상황이 돌아가는 걸 파악하고 있는 건 당신뿐이라 이거지.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민 시몬에게서.

―당신이, 당신이 있었어.

리뮈르에서 마주친 타우루스에게서, 유진은 몇 번이고 자신을 지켜 주었으니까. 아리아드네는 그와 함께 있는 동안 한 번도 제 안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도 그에게 언제나 믿을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아리아드네는 천천히 눈을 감고 어지러운 생각들을 정리했다. 달로아의 걱정처럼 아예 정신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확신할 수 없어 결정하는 것이 늦어졌을 뿐이었다. 고민을 끝낸 아리아드네가 눈을 떴다. 지금은 무엇보다 안심할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여기서 동쪽으로 이틀 거리에 있는 시에테에 가명으로 사 둔 저택이 있어. 아버지와 나밖에 모르는 곳이니까 안전할 거야. 우선은 그곳으로 가서―”

“꺄아악! 아리아드네 님, 나 좀 살려 주라.”

아리아드네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새된 비명과 함께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흙먼지의 선두에는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가 말에 어정쩡하게 얹힌 채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꺄악― 꺅! 꺅!”

여자의 방정맞은 비명이 고막을 따갑게 때렸다. 용병 차림을 한 남자들이 그런 여자의 뒤를 쫓고 있었다. 온몸을 꽁꽁 싸매고 눈만 빼꼼 열어 둔 여자가 자신을 뒤쫓는 남자들을 향해 쏘아붙였다.

“너희 미쳤어? 나 소르체 혈족이야!”

여자는 말 위에 납작 엎드린 상태에서도 다다다 말을 쏟아 냈다. 그런데 여자가 하는 말이라는 것이 좀 이상했다.

“너희 중에 안 다치는 사람 있니? 평생 병 안 걸릴 자신 있어? 유병장수가 어떤 고통인지 경험시켜 줘?”

협박 같긴 한데……. 여자를 지켜보는 일행의 표정이 일그러져 갔다.

점점 거리가 좁혀지자 다급해진 여자가 무언가를 꺼내 뒤쪽으로 던졌다. 쫓아오던 용병들이 여자가 던진 물건을 쳐 냈다. 파팟, 동그란 물체에서 터져 나온 가루들이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악! 미친, 이게 왜 이쪽으로 와!”

그때, 때마침 뒤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여자와 일행 쪽으로 가루를 날려 보냈다.

“이거 마비산이야. 코랑 입 막아!”

여자의 경고에 아리아드네 일행은 서둘러 코와 입을 막았다. 다행히도 가루의 양이 많지 않았는지 일행에게 닿기도 전에 마비산은 공중으로 흩어졌다. 이곳에서 마비산을 흡입한 건 저것을 뿌린 여자뿐이었다.

마비산이라는 것은 정말이었는지 부산하던 여자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졌다. 여자의 해괴한 모습을 지켜보던 달로아가 불길한 생각에 퍼뜩 아리아드네를 돌아보았다.

메르디에스 성에서 튀어나온 소르체의 혈족.

‘저 여자가 설마, 설마…….’

“……혹시 저 또라이가, 아니지?”

아리아드네가 난감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반응에 제 짐작이 맞았음을 확신한 달로아가 다시금 자신이 뿌린 마비산에 중독된 여자를 쳐다보았다.

‘저런 사람에게 미에르의 눈을 보일 생각이었단 말이야?’

경악한 달로아가 달미에르를 감싸며 외쳤다.

“우리 미에르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야!”

“아니, 난 괜찮…….”

달미에르도 차마 자신의 안전을 확신하지 못하겠는지 말끝을 흐렸다.

“저 여자 당신에게 필요한 사람이야?”

유진이 말 위에 축 늘어진 여자를 향해 눈짓하며 물었다.

“부탁해도 될까?”

아리아드네가 겸연쩍은 얼굴로 말하자 유진은 그녀의 이마에 제 입술을 찍듯이 눌렀다. 그의 입술이 떨어짐과 동시에.

“얼마든지.”

짧은 대답을 남긴 유진이 사라졌다. 아리아드네는 유진의 뒷모습을 보며 그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 자리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평소 그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런 접촉 또한 그의 방식은 아니었다. 그가 평소와는 달리 행동한 이유를 알았다. 유진은 자신을 위로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리아드네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구멍이 뚫린 것 같았던 가슴에 작은 창이 달린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조금 견딜 만했다. 그의 친절함에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잠기고 싶었다. 그곳에서라면 언제까지나 떠오르지 않아도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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