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148)

* * *

희미한 의식 사이로 달콤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 냄새가 점점 멀어지자 참을 수 없는 갈증을 느꼈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수잔은 더듬더듬 냄새를 찾아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단단히 묶인 몸으로는 몸부림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아가씨.”

어딘가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사근사근한 어조와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은 이국적인 억양.

“다, 당신이 여긴 어떻게…….”

정신을 차린 수잔이 마주한 것은 베티의 소개로 갔던 가게의 주인이었다.

“셀레나…….”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수잔을 내려다본 셀레나가 짙은 미소를 지었다. 셀레나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자 입가에 찍힌 점이 덩달아 올라갔다.

“아가씨도 짐작하고 있잖아요.”

셀레나가 수잔의 귓가에 속삭였다. 수잔의 가슴이 불안으로 거세게 요동쳤다.

“우린 공범이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셀레나가 벽에 걸린 등잔을 내렸다. 탁, 심지에 불을 붙인 셀레나가 등잔을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다.

테이블에는 납작한 선인장 몇 개가 놓여 있었는데, 선인장 끝에는 봉오리가 맺힌 자주색 꽃이 달려 있었다.

“피피라고 해요. 나는 이걸 ‘달콤한 잠’이라고 부르죠.”

셀레나의 손끝이 선인장을 가리켰다. 등잔의 열기를 받은 자주색 꽃이 점점 벌어지더니 이윽고 활짝 만개했다.

수잔은 만개한 자주색 꽃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저것은 분명 추수제 연회장을 장식했던 그 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연회장에 들인 것은 바로 수잔 자신이었다. 그런데 그 꽃을 누구에게서 받았는지, 왜 그 꽃을 연회장에 놓았는지 아무래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아름답지요?”

만개한 꽃에서는 설탕을 졸인 듯한 달콤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달콤한 냄새가 방 안을 채우자 머리가 빙빙 돌고 목이 바짝 말랐다.

수잔은 자신이 이미 저것에 중독되었음을 알았다. 왜 진작 눈치채지 못했을까. 연회장을 가득 채운 그 냄새는 자신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는데.

“이 꽃으로 연지를 만들면 어떤 색이 날까요?”

셀레나가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수잔은 제 주머니 속에 있는 연지통을 생각하며 으스러질 듯이 주먹을 쥐었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셀레나를 만난 뒤로 드문드문 기억이 끊겼던 그때, 자신은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수잔은 자신이 연회장을 벗어날 때 목격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디엔가 중독된 것처럼 느리고 둔하게 움직이던 사람들.

그곳에 모인 이들은 페렌트 남부를 이끄는 귀족들이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었다. 아니, 자신의 목숨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다.

‘메르디에스가, 우리의 성이…….’

으득, 수잔은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 제 혀를 깨물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왜 이렇게 유난들인지…….”

셀레나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케인은 어디 있어요?”

뚝뚝, 수잔의 입술 사이로 흐른 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케인을 떠올리면 제 몸의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내 말 명심해. 연회가 시작되자마자 거기서 빠져나와야 해.

케인은 분명 셀레나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는 말은…….

“살았지. 그는 제 역할을 훌륭히 해냈으니까.”

수잔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싸늘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수잔의 몸이 마구잡이로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피피라는 저 꽃에 중독되어 셀레나의 뜻대로 움직였음을 깨달았을 때도, 케인이 셀레나와 내통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했을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저이가 저러는 것은 중독 증상인가?”

서늘한 목소리가 수잔을 가리키며 물었다.

“피피의 달콤함에 저런 고통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셀레나의 대답을 들은 이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그 사람’은 수잔처럼 몸이 묶여 있지도 않았고, 성을 침범한 셀레나를 막아서지도 않았다.

수잔은 도무지 제가 본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물 밖으로 꺼내진 물고기처럼 입을 빠끔거릴 뿐, 무엇을 물을 수조차 없었다.

“아, 아아…….”

수잔은 피를 뚝뚝 흘리며 바닥을 기었다.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메르디에스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 * *

덜커덕, 마차가 크게 위아래로 요동치더니 이윽고 멈추었다. 달로아가 손에 쥐고 훑어보던 종이들이 흩날리며 마차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또 무슨 일이야?”

마차 천장에 머리를 부딪친 달로아가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짜증을 냈다.

“글쎄…….”

아리아드네는 침착한 얼굴로 마차에 딸린 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마차를 몰던 조셉이 다급한 목소리로 고했다.

“아리아드네 님, 마차 바퀴가 빠졌습니다. 제가 얼른 가까운 마을에 가서 마차든, 말이든 빌려 오겠습니다.”

“그래, 고생이 많아.”

“아닙니다.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연신 고개를 조아리던 조셉이 마차에 매인 말 한 마리를 끌러 마을로 향했다. 아리아드네는 낮은 한숨과 함께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초조함에 신경이 갉아 먹히는 기분이었다.

얼마 전부터 메르디에스의 지원에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다. 리뮈르를 벗어나면서부터는 점점 심해지더니 린트에서 수급한 말이 얼마 가지도 못하고 쓰러지는 일까지 있었다.

메르디에스 성에서 엿새 거리인 비스테에서 겨우 마차를 구한 것이 바로 어제였다. 그리고 추수제는 불과 이틀 뒤였다. 지금 이대로라면 추수제에 맞춰 메르디에스에 도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추수제에 맞춰서 도착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제 몸이 조금 불편한 것도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메르디에스의 지원에 문제가 생긴 것이 다른 이유 때문이라면?

아리아드네는 머릿속을 점령한 불안한 생각들을 도무지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터질 때마다 소리라도 내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변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천천히 주우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때? 원하던 건 찾았어?”

아리아드네가 달로아에게 종이를 건네며 물었다. 마차 안을 잠식하듯 채운 종이는 달로아가 요청한 거리의 정보들이었다. 선별되지 않은 거리의 소문들은 달로아가 질려 할 정도로 쉴 새 없이 날아들었다.

“아무래도 난 현장형 인간인가 봐. 사람들 사이에서 들으면 어, 이거다! 하는 감이 오는데…….”

종이를 받아든 달로아가 양손으로 그것을 붙든 채 고개를 처박더니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종이를 내던졌다.

“글자는 한 번 걸러진 거라서 그런가.”

흐트러진 종이 더미 위로 쓰러지듯 몸을 누인 달로아가 유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확실한 건 아래쪽 여론은 저쪽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거?”

반쯤 눈을 감고 있던 유진이 천천히 눈을 떴다. 어깨와 목을 가볍게 움직인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외부인이 왕위 계승자를 해쳤다는데 좋아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지.”

유진의 말대로였다. 더군다나 페렌트 국민들은 천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프레모 대륙의 패자(霸者)로 군림해 온 페렌트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다.

성 상티모니아와 페렌트가 직접 부딪친다면 성 상티모니아의 손을 들어 줄 페렌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긴 한데 또 마냥 부정적인 건 아냐. 메르디에스에서 케이루스와 대립각을 세우는 것을 보고 관망세로 돌아선 사람들이 적지 않아.”

하지만 페렌트 내의 싸움이라면 달라진다. 케이루스에 맞선 것은 성 상티모니아가 아닌 메르디에스였다.

“국상 중에 보란 듯이 추수제를 연 게 유효했다고 봐야지.”

공가의 누군가가 죽었다고 해서 왕가의 행사를 취소하지는 않는다. 이는 왕가의 일상이 공가의 의례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가의 의례는 그렇지 않았다. 왕가의 의례는 곧 국가적 의례였다. 국상 중에는 입을 즐겁게 하는 음식조차도 가려야 했다.

그런데 메르디에스는 왕이 승하한 이 시점에 보란 듯이 추수제를 열었다. 그것도 예년보다 훨씬 성대하게.

이는 지켜보는 이들에게 케이루스가 명백한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는 방증처럼 여겨졌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자연히 둘의 세력을 견주어 보았다.

케이루스는 유일한 왕가의 자리에서 끌려 내려와 메르디에스와 비교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예년보다 추수제를 좀 크게 연 정도로는 여러모로 남는 장사였다.

달로아가 몽롱한 눈으로 종이 위에 써진 숫자들을 더듬으며 말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숫자들이었다.

“메르디에스 공작께서는 참으로 비범하신 분 같아. 직접 뵙고 고견을 여쭙고 싶어.”

사기도박에서나 가능한 배율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사람이 있다니! 달로아의 머릿속에서 레너드는 이미 반신반인(半神半人)이었다.

들뜬 달로아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초조함이 좀 가시는 것 같았다. 아리아드네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널 만나면 좋아하실 거야. 아버지한테도 리뮈르는 이상향이어서.”

아리아드네의 대답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달로아가 이내 으스대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뭐, 우리가 좀 인기가 많긴 하지.”

내내 아무 말 없던 달미에르도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뮈르 남매가 페렌트 북쪽 경계를 묵묵히 지켜 온 리뮈르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러다가 추수제는 정말 못 보겠다.”

달로아가 달미에르의 어깨에 턱을 괴고는 멈춰선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추수제 연회가 보고 싶은 거라면 네 환영 연회를 그만한 규모로 열면 되지.”

누구, 뭐를 뭐? 떡 벌어진 달로아의 턱이 달미에르의 어깨를 꾹 눌렀다. 달미에르는 말없이 누이의 벌어진 입을 다물어 주었다.

“어차피 추수제 전후로는 성내에 머무르는 사람이 많아서 소규모 연회가 한 달가량 이어지거든. 그중 사나흘 정도 연회 규모를 좀 키우면 될 거야.”

아리아드네는 제 설명이 부족했나 싶어 조금 더 덧붙였지만 달로아는 여전히 빳빳하게 굳은 채였다.

“왜?”

아리아드네가 설명이 더 필요하냐는 듯 물었다.

“아니,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 싶어서.”

“음, 연회는 참석할 사람만 있으면 여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참석할 사람만 있다면 나머지는 모두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리아드네는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어렵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참 넉넉한 땅이야.”

달로아의 반응에 아리아드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응, 빨리 보여 주고 싶어. 아름다운 곳이야. 너도 분명 좋아할 거야.”

황금으로 물든 메르디에스의 들판이 눈에 선했다. 풍요롭고 넉넉한 땅,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그곳. 아리아드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리아드네 님, 많이 기다리셨지요? 마차는 구하기가 어려워서 우선 말을 샀습니다.”

어찌나 서둘렀는지 서늘한 날씨에도 땀에 흠뻑 젖은 조셉이 말을 파는 상인들과 함께 나타났다.

“고생 많았어, 조셉.”

“아닙니다. 어서 말에 오르시지요.”

조셉은 말을 끌고 온 상인들에게 셈을 치르고는 그들에게 마차의 뒤처리를 부탁했다. 일행은 말로 갈아타기 위해서 마차에서 나왔다.

“찌뿌둥했는데 잘됐다.”

달로아가 몸을 크게 젖히며 숨을 들이쉬었다.

“네 수다에서도 벗어날 수 있고.”

따라 나온 달미에르가 덤덤하게 덧붙이자 달로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저것도 핏줄이라고.”

아리아드네는 이제는 일상이 된 남매의 다툼을 구경하며 말을 타기 위해 등자에 발을 디뎠다. 그런데 등자에 미끄러운 것이 묻어 있었는지 발이 삐끗했다. 질끈 눈을 감은 순간, 단단한 팔이 아리아드네의 몸을 감쌌다.

“괜찮아?”

눈을 뜨자 유진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작게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진 않았고?”

유진은 아리아드네의 몸을 들어 그대로 말 위에 앉혀 주었다.

“응, 괜찮아.”

“그렇다면 다행이고.”

유진은 땅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말의 등자를 살펴보았다. 등자 안쪽을 헝겊으로 닦아 내자 기름이 묻어났다. 등자에 기름칠을 하고 닦아 내는 것을 깜빡 잊은 모양이었다.

고의는 아니라도 명백한 실책이었다. 조금 전 말을 판 이들을 쫓아가 책임을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메르디에스에 도착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한숨을 내쉰 유진이 몸을 일으키려던 그때, 반짝이는 무언가가 그의 눈에 띄었다. 유진이 천천히 손을 뻗어 그 물건을 주웠다.

“왜? 뭔데 그래?”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을 확인한 아리아드네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유진은 아리아드네의 눈가를 엄지로 쓸었다. 겉으로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고 그 속까지 괜찮을 리가.

“괜찮아.”

아리아드네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렉사의 구슬을 받아들었다.

“깨졌어.”

조금 전 말을 올라타다 삐끗하는 바람에 품에 있던 구슬이 바닥으로 떨어진 탓이었다. 소멸한 렉사의 유일한 흔적인 이 구슬조차도 온전치 못한 모습으로 남았다.

“당신이 원한다면―”

그 구슬의 시간을 되돌려주겠노라는 제안을 하려 했지만, 아리아드네는 그 말을 끝까지 듣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신의 권속이 남긴 물건이니까 이것도 성물이잖아. 성물의 시간을 되돌리는 게 쉽진 않겠지. 당신이 무리하는 건 싫어.”

아리아드네는 짐에서 장신구를 담아 두었던 벨벳 주머니를 비우고 렉사의 구슬을 담았다. 깨어진 구슬 조각들이 부딪히며 절그럭 소리를 냈다. 절그럭 소리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연이어 닥친 사고들이 무언가의 전조처럼 느껴져서 더욱 불안했다.

‘다 괜찮은 거지?’

아리아드네는 렉사의 구슬이 담긴 주머니를 꽉 쥐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고통에도 차마 놓을 수가 없었다. 비릿한 바람이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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