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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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르디에스 성의 하녀 수잔은 요즘 들어 깜빡 정신을 놓는 일이 잦았다. 추수제를 앞두고 바쁘게 움직인 탓인 듯했다. 더구나 오늘은 사흘간의 추수제 연회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그래도 사흘 뒤면 바쁜 일도 끝이니까 한숨 돌릴 수 있겠지.’

    수잔은 연회장에 장식할 자주색 꽃을 한 아름 품에 안고는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부풀어 오른 꽃봉오리에서 흘러나온 달콤한 꽃냄새에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수잔은 정원에서 멍하니 앉아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며칠 전부터 계속 저러시네.’

    자수정 같은 보랏빛 눈동자는 평소의 총기를 잃고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수잔이 어찌할까 지켜보던 그때, 누군가 다가와 여자를 불렀다.

    “리스벨 영애, 린즈 부인께서 찾으세요.”

    아리아드네의 시녀, 이블린의 부름에 캐롤린은 정신을 차리려는 듯 얕게 고개를 흔들었다. 캐롤린은 이블린과 함께 돌아갈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이윽고 캐롤린은 복잡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 부인께는 조금 기다려 달라고 전해 줘요.”

    “네. 알겠습니다.”

    캐롤린은 이블린이 떠나는 것을 기다렸다가 곧 후원 너머로 사라졌다.

    ‘곧 연회가 시작될 텐데 어디 가시는 거지?’

    수잔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 자리를 떠났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해가 지면 추수제 연회의 시작이었다.

    바쁘게 걸음을 움직이던 수잔이 주방으로 연결되는 통로로 막 들어가려던 순간이었다. 누군가 그녀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케인.”

    자신의 팔을 붙든 남자를 확인한 수잔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꽃은…….”

    케인이 수잔의 품에 안긴 꽃을 보며 작게 인상을 찡그렸다. 마치 겁이라도 먹은 표정이었다. 훨씬 더 무서운 칼은 아무렇지도 않게 휘두르면서.

    수잔은 작게 웃으며 품 안에서 흘러내리는 꽃 무더기를 추켜올렸다.

    “연회에 장식할 거야. 그런데 오늘 바쁘지 않아? 경비대도 정신없을 텐데.”

    수잔은 눈을 깜박이다가 이내 케인의 용건을 깨달았다.

    “아, 음식과 술 받으러 온 거구나.”

    추수제인 만큼 성의 고용인들에게도 풍족한 음식이 내려지곤 했다. 그리고 이런 심부름은 본디 막내의 몫이었다.

    평소에는 막내에서 어서 탈출하고 싶다며 노래를 부르던 케인이 오늘따라 얌전했다. 어딘가 멍한 케인은 새끼 오리인 양 수잔의 뒤꽁무니를 따라 졸졸 쫓아왔다.

    수잔은 케인을 뒤에 매단 채로 주방으로 들어섰다. 그 꼴을 처음 목격한 건 같은 하녀인 베티였다. 베티가 둘을 아래위로 흘겨보며 핀잔을 주었다.

    “수잔, 너 오늘 같은 날 한가하게 데이트야?”

    “무슨 말이야. 난 장식할 꽃 가지러 다녀온 거고 케인은 경비대 음식 받으러 온 건데.”

    수잔은 품에 안은 꽃을 테이블 위에 놓으면서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진짜 꽃이 예뻐서 봐준다.”

    새침하게 대꾸한 베티가 봉오리 끝을 오므린 자주색 꽃 한 송이를 뽑아 들어 코끝에 갖다 대고는 깊게 향기를 맡았다. 자주색 꽃에서는 설탕 시럽처럼 달콤한 냄새가 났다.

    베티는 황홀한 표정으로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수잔은 못 말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주방장님, 경비대에 나갈 음식 어디 있어요?”

    수잔이 조리에 한창인 주방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크게 소리쳤다. 그녀의 부름에 안쪽에서 이것저것 지시하던 주방장이 걸어 나왔다.

    “오, 케인이구나. 혼자 왔니?”

    경비대의 막내 케인을 발견한 주방장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케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감한 얼굴로 케인을 바라보던 주방장이 어깨를 작게 으쓱했다.

    “으음, 그러면 짐수레가 필요하겠는걸.”

    도무지 한 사람이 가져갈 수 있는 양이 아닌 터라 짐수레를 꺼내 와 음식과 술 따위를 싣기 시작했다. 정신이 반쯤 빠진 것 같았던 케인도 분주하게 움직이며 음식 나르는 것을 도왔다.

    “그건 연회 음식이야.”

    주방장이 연회에 나갈 음식 근처에서 알짱거리는 케인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케인이 멋쩍은 듯 뒤로 물러나자 주방장은 케인을 주방에서 아예 내보내 버렸다.

    주방장은 얼이 빠진 경비대 막내가 어지간히 힘든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짐수레가 꽉 차도록 가득 싣고도 모자라 바구니 두 개를 더 채웠다.

    “이건―”

    “수, 수잔이 도와줄 거예요.”

    주방장이 누구를 보낼까 고민하는데 케인이 옆에 있던 수잔을 잡아끌었다. 어머, 깜짝 놀란 수잔이 입을 벌린 채 얼굴을 붉혔다.

    “그래?”

    주방장은 그제야 둘 사이에 감도는 묘한 기류를 눈치챘다.

    ‘요즘 수잔 저것이 묘하게 들뜬 것 같더라니.’

    주방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흘겨보자 얼굴을 붉히고 있던 수잔이 냉큼 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제가 얼른 다녀올게요.”

    수잔은 안절부절못하는 케인과 함께 주방을 나섰다. 짐수레를 끄는 케인 뒤에서 수잔이 바구니를 옆에 끼고는 따라 걸었다. 바구니에 든 따끈한 빵과 구운 베이컨에서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솔솔 올라왔다.

    케인은 마치 고행을 하는 사람처럼 아무 말 없이 짐수레만 끌었다.

    “케인, 너 오늘 이상하다.”

    “…….”

    “정말 이상하네.”

    탁, 끌던 짐수레를 거칠게 내려놓은 케인이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수잔의 어깨를 단단히 틀어쥔 케인이 낯선 얼굴로 뜻 모를 말을 내뱉었다.

    “오늘 연회가 시작되면 성에서 몰래 빠져나와.”

    “무슨 말이야? 연회 때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니까 몰래 빠지라는 거잖아. 한 번만 내 말 들어.”

    간절하기까지 한 케인의 애원에 수잔은 점점 혼란스러웠다.

    “나중에 다 설명할게.”

    “……알았어.”

    수잔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 명심해. 연회가 시작되자마자 거기서 빠져나와야 해.”

    “알았다니까.”

    “꼭, 꼭이야.”

    케인은 몇 번이나 다짐을 받은 다음에야 다시 짐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왜 저래?’

    묵묵히 짐수레를 끈 케인은 경비대 숙소 근처에 도착하자 수잔이 들고 있던 바구니를 뺏어서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케인!”

    경비대 숙소 입구에는 케인이 끌고 온 짐수레와 수잔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짐수레 옆에 선 수잔은 경비대 숙소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누군 한가한 줄 아나. 저 혼자 바쁜 척은.’

    씩씩거리며 주방으로 돌아온 수잔은 막바지 연회 준비로 정신없이 움직였다.

    새하얀 테이블보를 깔고 중앙에는 밀과 꽃, 계절 과일로 바구니를 만들어 얹었다. 화려하고 우아한 맛은 덜해도 추수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따끈한 음식들이 속속 올라오고 달콤한 디저트도 테이블 위를 빼곡하게 채웠다.

    준비가 끝난 연회장에 남부의 귀족들이 하나둘 자리하기 시작했다. 원래도 메르디에스 추수제는 남부 귀족들의 결속을 확인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하지만 이번 추수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메르디에스는 1왕자와 파혼한 것도 모자라 왕의 승하라는 국가 중대사를 보란 듯이 무시했다. 소식이 아무리 느린 자라도 이번 추수제가 정국의 중요한 분수령이라는 정도는 알았다.

    수잔은 평소보다 바짝 기합이 들어간 채로 음식을 나르고 연회장 곳곳을 정리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다른 고용인들 눈치를 보던 수잔이 앞치마에 손을 문질러 닦았다. 긴장한 탓인지 자꾸만 땀이 나 손바닥이 미끈거렸다.

    ―오늘 연회가 시작되면 성에서 몰래 빠져나와.

    그 말을 하는 케인의 얼굴이 너무도 절박해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수잔은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사람들 사이를 걸었다.

    “어디 가?”

    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물었다. 깜짝 놀란 수잔이 고개를 들었다.

    “베티?”

    “곧 연회 시작하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베티가 연회의 시작은 봐야 하지 않겠냐며 그녀를 잡아끌었다. 어어, 수잔은 베티의 손에 잡혀 연회장 구석으로 끌려갔다.

    곧 음악 소리와 함께 호스트가 입장했다. 오늘 호스트 역할을 맡은 것은 리스벨 영애인 캐롤린이었다.

    추수제 연회에 메르디에스 일가가 나타나지 않은 것을 두고 사람들 사이에 작은 소요가 일었다. 사람들을 죽 훑어본 캐롤린이 이런 반응을 짐작했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께서도 아시다시피 추수제 연회는 사흘입니다. 사흘 동안 어떤 호스트가 나타날지 기대되지 않으시나요?”

    그것은 마치 내일은 다른 호스트가 나타날 거라는 말처럼 들렸다. 그 말에 사람들의 술렁임이 가라앉았다.

    “성주님께서는 연회가 가장 즐거울 때 나타나겠다고 하시네요. 성주님을 끌어내려면 여러분이 이 연회를 좀 더 즐겨 주셔야 할 것 같아요.”

    그 말에 몇몇 귀족들은 시선을 교환했다. 어쩌면 메르디에스 일가는 일부러 나타나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자신들이 부재한 연회에서 다른 이들이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지 지켜보기 위해서.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의 계산으로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느긋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본 캐롤린이 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 땅의 풍요로움이 모두에게 영원하기를.”

    메르디에스 추수제의 시작이었다.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장엄한 곡이 선율을 타고 사람들 사이를 흘렀다.

    ‘케인이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결국 수잔은 연회가 시작되고도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초조해진 수잔은 연지가 번지는 것도 모르고 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겠지.’

    크리스털 샹들리에의 열기가 유난히도 뜨거웠다. 뜨거운 열기에 머리가 빙빙 돌았다. 바닥이 솟구치는 것 같은 어지럼증에 수잔은 이마를 짚었다. 연회장 가득한 디저트 때문인지 설탕을 졸인 듯한 달콤한 냄새가 코끝을 찔러 왔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바닥이 푹푹 꺼지는 것만 같았다. 점점 심해지는 현기증에 수잔은 혀를 짓씹었다. 아릿한 고통에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바로 눈앞의 풍경도 물에 젖은 그림처럼 흐릿해졌다. 흐릿한 풍경 속에서 만개한 자주색 꽃만이 선명했다.

    수잔은 급기야 테이블 위에 얌전히 꽂혀 있는 조막만 한 꽃이 바위처럼 크게 부풀어 오르는 환상을 보기에 이르렀다.

    ‘어서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해.’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얼굴을 손으로 덮었더니 좀 살 것 같았다. 수잔은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걸음을 옮겼다.

    단단한 대리석이 녹아내린 것처럼 출렁였다. 물속을 걷는 것 같기도 하고, 구름 위를 걷는 것 같기도 한 기이한 기분이었다.

    연회장을 채운 사람들의 움직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물에 잠긴 사람처럼 둔중하게 제 몸을 놀렸다.

    수잔은 비틀비틀 움직이면서도 기어코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케인을 찾아야 해.’

    그녀는 본능적으로 케인을 찾아 헤맸다.

    ‘오늘 케인은 서쪽 근무라 그랬지.’

    수잔은 제 꼴이 어떻게 보일지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케인이 근무를 서는 성의 서쪽으로 발을 옮겼다. 성의 서쪽 문에 다다른 수잔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연회를 위해 개방된 것은 성의 정문이었고, 메르디에스 성의 정문은 남쪽에 있었다. 성을 둘러싼 네 개의 문 중 개방된 것은 남문뿐이었다. 그런데 굳게 닫혀 있어야 할 서쪽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서쪽 문이 왜……. 병사들은 어디에 있지?’

    술에 취한 것처럼 몸과 머리가 무거웠다. 수잔은 팔다리를 흐느적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상했다. 성의 경비를 서야 할 병사들이 죄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때, 낯이 익은 경비 중 한 명이 바닥에서 일어나더니 수잔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수잔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하려 했는데 머리가 제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머리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다리를 움직여도 조금도 나아갈 수 없었다. 수잔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제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몸은 땅바닥에 붙은 채로 허우적대고 있었다. 수잔은 바닥에 붙은 채로 허우적대는 제 몸을 보고서야 자신이 땅바닥에 철퍼덕 널브러졌음을 알았다.

    ‘아아, 경비가 일어선 게 아니었구나. 내가, 쓰러진 거였어.’

    수잔은 그 생각을 끝으로 가물가물한 의식을 놓았다. 정신을 잃은 그녀의 얼굴은 마치 달콤한 꿈을 꾸는 사람처럼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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