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148)
  • * * *

    “커티스, 자네 독거노인으로 생을 마감하고픈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겐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황금색 들판을 따라 말을 몰던 레너드가 커티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난데없는 악담 비슷한 질문에 커티스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이런 일이 제법 익숙한 듯 커티스는 이내 평온함을 되찾고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커티스의 말에 레너드가 쯧쯧, 혀 차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캐롤린 말이야. 그렇게 끙끙 앓는 게 눈에 보이는데 아비가 되어서 어찌 그리 냉담해.”

    “…….”

    다시금 커티스의 눈썹이 꿈틀, 불쾌감을 드러냈다. 레너드는 커티스가 그러거나 말거나 조금도 개의치 않고 제 할 말만 쏟아 냈다.

    “언제까지 품 안의 자식일 줄 아는가. 자네 품 떠나고 나면 늦는단 말일세. 있을 때 잘해야지. 저 꼿꼿한 성미하고는.”

    “제 집안일입니다.”

    “내가 자네 집안을 흙발로 쳐들어가기라도 했나? 뭘 어쨌다고. 자네와 나 사이에 이 정도 말도 못 하나?”

    커티스는 레너드와 제 사이가 대체 무엇인가 잠시 고민했다. 레너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제 목숨도 아깝지 않았지만, 지금처럼 얄밉게 조잘거릴 때면 신분이나 지위를 다 버리고 한번 붙어 보고 싶기도 했다.

    그런 커티스의 마음을 조금도 모르는 레너드는 잠시도 입을 쉬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보게. 그, 알, 알…….”

    언제나 같은 구간에서 막히는 레너드가 인상을 한껏 찡그리며 제 기억을 헤집었다.

    “알버트입니다.”

    커티스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그 이름을 알려 주었다.

    “그래, 알버트! 자네가 심란해하는 게 캐롤린 애인이라는 그놈 신분 때문만은 아니지?”

    개운하다는 얼굴로 알버트의 이름을 외친 레너드가 커티스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물었다. 애인이라는 단어를 들은 커티스의 안면 근육이 불쾌한 듯 일그러졌다.

    레너드가 좋은 건수를 잡았다는 듯이 의기양양한 얼굴을 했다.

    “캐롤린이 자네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그런 거지?”

    “제가 성주님입니까?”

    커티스는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덧붙였다.

    “저는 딸아이의 애정이나 질투하는 미성숙한 사람이 아닙니다.”

    레너드는 아리아드네가 남자를 만날 때마다 커티스를 붙잡고 온갖 험담을 쏟아 내곤 했다. 순식간에 딸아이의 애정이나 질투하는 미성숙한 사람이 되어 버린 레너드였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았다.

    “자넨 성숙해서 집에도 안 들어가고 나 붙잡고 술 퍼마셨나?”

    “…….”

    커티스의 미간에 세로 주름이 깊게 생겨났다. 그는 결단코 레너드를 붙잡은 적이 없었다.

    캐롤린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어 메르디에스 성의 기사단장 집무실에서 지내는 자신을 찾아온 건 레너드였다. 혼자 술을 마시는 제 옆에서 지금처럼 계속 신경을 긁어 대는 통에 귀찮기만 했다.

    이를 악문 커티스가 화를 참자 레너드가 장난스러운 기색을 지우고 한결 진지해진 어조로 말했다.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닐세. 그거야말로 자네 집안일이니. 피하지 말고 캐롤린과 이야기를 해 보라는 거지.”

    레너드는 커티스가 캐롤린을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는지 잘 알았다. 그래서 더욱더 이러는 커티스를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해야 무슨 결론이라도 날 게 아닌가.”

    레너드의 채근에 깊게 한숨을 내쉰 커티스가 제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왜…….”

    하나뿐인 가문의 후계자가 평민 기사에게 마음을 준 것이 골치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커티스를 더 힘들게 한 것은…….

    “왜 제게 말을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캐롤린이 혼자 모든 것을 감내해 왔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세심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딸에게만큼은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어서 부단히 노력했는데, 그 모든 시간이 허망하게 느껴졌다.

    캐롤린에게 필요했던 것은 늘 밖으로 돌아다니는 바쁜 아버지가 아니라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동성의 부모가 아니었을까.

    ‘나는 그 아이에게서 어미를 빼앗은 몹쓸 아비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차마 캐롤린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정말 끔찍해. 당신은 평생 아무도 사랑하지 못할 거야. 아니, 내가 느끼는 이 절망도 이해하지 못하겠지. 당신에게는 마음이라는 게 없으니까.

    그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여자마저 병들게 했던 제 무정함이 딸아이를 상처 입힌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이럴 때면 자신이 꼭 검밖에 휘두를 줄 모르는 고장 난 인간처럼 느껴졌다.

    “뭐야, 캐롤린이 비밀을 만든 게 서운한 거였어?”

    “…….”

    레너드는 한순간에 그를 딸아이의 비밀에 삐친 유치한 인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커티스는 한숨이 나오는 동시에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졌다.

    “뭐든지 의지해 주기를 바라는 건 부모 욕심이 아닌가. 우리가 자식 걱정하듯이 자식들도 부모 걱정을 하는 거지.”

    “제가 벌써 그렇게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검을 잡겠다며 고집을 부리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커티스의 혼잣말에 레너드가 뾰족하게 대꾸했다.

    “검만 해도 그렇지. 재능 있는 아이를 기어이 그렇게 꺾어 놓더니.”

    “아무리 제 딸이라지만 캐롤린의 검술은 뛰어난 편이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축이라면 모를까.”

    커티스의 무뚝뚝한 대꾸에 속이 답답해진 레너드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거야 괴물 같은 네놈 기준이지! 1년 안에 견습 기사 수준에 도달하는 천재가 얼마나 있어서! 그럼 세상천지에 기사 못 될 사람 하나도 없겠다.”

    저 말도 안 되는 기준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캐롤린을 닦달한 걸 생각하면 레너드는 답답해서 자다가도 목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 진짜 내 자네 때문에 아까운 인재를 잃은 걸 생각하면 억울해서…….”

    제대로 된 수련을 시작하기도 전에 검을 놓은 캐롤린은 가끔 취미로 검이나 활을 손에 잡곤 했다. 성취가 제법 남다르기에 제대로 익혀 보는 것이 어떠냐 물었더니.

    ―어렸을 때, 뭣도 모르고 덤벼들었다가 포기했어요. 저는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지 못했나 봐요.

    캐롤린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커티스의 기준이 지나치게 높은 것이었다고 아무리 일러 줘도 캐롤린의 고집 또한 만만치 않았다.

    ―제가 본격적으로 검을 든다면, 리스벨의 명성에 걸맞은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아버지 말씀은 틀린 게 없으니까요.

    “어휴, 진짜 부녀가 하나같이 고집만 쇠심줄처럼 질겨서는…….”

    레너드의 투덜거림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커티스가 길가에 핀 이름 모를 보라색 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딸아이의 눈동자처럼 아름다운 색이었다. 그 꽃을 보고 있노라니 그렇게 떠나온 것이 후회스러웠다.

    “오기 전에 캐리의 말이나 제대로 들어 볼 걸 그랬나 봅니다.”

    레너드가 커티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돌아가서 하면 될 일 아닌가.”

    그래, 그러면 될 일이었다. 커티스의 눈에 닿은 보랏빛 꽃이 바람에 흩날려 멀리 사라졌다. 커티스는 꽃이 사라진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다 말을 재촉했다. 돌아가 딸을 보려면 이 일을 어서 끝내야 했다.

    * * *

    “이게 다 뭐야?”

    레너드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입을 떡 벌렸다. 깎아지른 듯한 협곡 사이를 세차게 흘러야 할 물들이 막아 둔 수문으로 인해 고여 있었다. 규모로 보아 한두 해 준비한 것이 아닌 듯했다.

    “성주님.”

    보우 강 상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메르디에스 기사 하나가 다가와 보고를 시작했다.

    “수문의 위치는 모두 네 곳이고, 각 수문을 지키는 병사의 수는 서른, 교대는 정오에 이루어집니다.”

    네 곳의 수문에 배치된 병력은 모두 백이십, 한 번 교대한 병사는 만 하루 동안 이곳에서 경계를 선다는 말이었다.

    “현재 우리 쪽 병력은?”

    이번 물음에 답한 것은 커티스였다.

    “기존 잠입 인원과 지금 도착한 인원을 합치면 이백입니다. 오늘 자정까지 백이 더 합류할 예정입니다.”

    “합이 삼백이란 말이지. 두 배면 해볼 만한가?”

    “어차피 길이 좁고 가팔라 인원으로 밀어붙이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보다는 야습이 효율적일 듯합니다.”

    커티스가 주위를 둘러보며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병력을 움직이고 전술을 지휘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몫이었다.

    “그렇게 하게.”

    레너드의 역할은 커티스를 믿고 지지하는 것이었다.

    “자정이 되면 상대를 빠르게 제압하고 수문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순차적으로 개방한다.”

    커티스의 명령을 받은 기사들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자정까지는 불과 여섯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레너드는 수문에서 좀 떨어진 협곡 위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메르디에스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빠르게 상대를 제압한다 해도 저들 중 몇몇은 다칠 테고, 또 몇몇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전력에 아무 도움 안 되는 자신 같은 우두머리는 얌전히 틀어박혀 있는 쪽이 더 현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레너드는 숫자로 사람의 머리를 헤아리는 윗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다.

    직접 칼을 맞대고 싸우진 못하더라도 가까운 곳에서 그들의 치열함을 지켜봐 주는 정도는 해야 할 것 아닌가. 레너드는 그것이 제 역할이라고 믿고 있었다.

    주위가 어둑해지고, 추가로 도착한 인원이 합류하고, 자정이 되어 메르디에스 병사들이 은밀히 움직이기 시작할 때도 그는 그곳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캄캄한 어둠 사이로 빛나는 가루들이 바람을 타고 나르는 것이 신호였다.

    ‘단조분’이라고 불리는 저 가루는 스스로 빛을 내는 단조라는 곤충에게서 채집한 것이었다.

    “으, 으억! 이게 뭐야?”

    수문을 지키던 리카서스의 병사들이 난데없이 날아든 단조분에 혼비백산이 되어 날뛰었다.

    “지금이다.”

    커티스의 나지막한 명령과 함께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메르디에스 병사들이 일방적으로 상대를 몰아붙였다. 수적으로도, 병력의 질로도 리카서스의 병사들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그들은 단조분 가루로 인해 빛나는 표적이 되어 버린 다음이었다. 네 곳의 수문을 지키는 백이십 명의 리카서스 병사들을 제압하는 데 걸린 시간은 한 시간에 불과했다.

    “이제 모두 끝난 듯합니다.”

    어둠에 몸을 숨길 필요가 없자 협곡 곳곳에는 횃불이 걸렸다. 주위가 한결 밝아졌다. 레너드는 협곡 위에서 수문이 위치한 곳으로 훌쩍 내려왔다.

    “아래쪽 수문부터 차례로 개방하라.”

    커티스가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갑작스러운 방류로 하류에서 범람하지 않도록 수문은 일부만 열었다.

    쏴아아아아아― 갇혀 있던 물이 흐르는 소리가 고요한 협곡에 울려 퍼졌다.

    “물의 수위가 예상만큼 높지 않은데?”

    레너드가 고개를 갸웃하며 수위를 확인했다. 가뭄이 든 것도 아닌데 하류 제방의 수위가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들었다. 상류에서 어지간히 틀어막았다는 말이었다.

    “물이 어디서 샜나?”

    가슴이 근질근질해서 레너드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벅벅 긁어 댔다. 불안한 레너드의 귓가에 미세한 진동과 함께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쿠르르, 쿠르르르르― 마치 물이 어딘가에 거세게 부딪히며 흐르는 것 같은 소리가.

    “어디서 물소리가 나지 않아?”

    “물소리라면 수문을 열었으니 당연히…….”

    레너드의 질문에 옆에 있던 기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그게 아니야. 저기가 아니라―”

    레너드의 발이 물소리가 나는 방향을 가리키려던 그때였다.

    콰앙! 쾅쾅쾅! 콰앙! 쾅! 쾅!

    협곡 양쪽에서 집채만 한 바위들이 굴러떨어졌다. 크고 무거운 바위들이 떨어지며 협곡 바닥을 세차게 때렸다.

    “이 망할 물미역 같은 새끼가!”

    빠드득 이를 갈며 레너드가 뇌까렸다.

    “함정이다. 다들 피해!”

    커티스가 몸을 날려 레너드를 보호하며 소리쳤다.

    ‘여기서 어디로 피해? 땅으로 꺼지냐!’

    도무지 빠져나갈 구멍이라곤 없었다. 레너드가 절망이 섞인 탄식을 내뱉으며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쿠르, 쿠르르르르르― 수문을 통해 협곡을 흐르는 것과는 명백히 다른 물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레너드의 시선이 제 발아래로 향했다. 이 기괴한 물소리가 들려오는 것은 바로 발아래, 그러니까 땅속이었다. 예상보다 낮았던 수위, 바닥을 때려 부술 듯이 굴려 보낸 집채만 한 바위들.

    레너드는 그제야 칼의 의중을 짐작했다. 이 협곡은 메르디에스 서남 평원을 쓸어 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 협곡은 그 자체로 무덤이었다.

    “……커티스, 땅속이었어.”

    “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쿠르르르르르!

    그때, 협곡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땅속을 흐르던 물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협곡 바닥을 뚫고 터져 나왔다.

    “미친놈.”

    칼, 그 미친놈은 협곡 바닥에 물이 흐르는 길을 뚫었다. 인위적으로 뚫은 길 사이로 물이 흐르며 지반은 계속해서 약해졌을 터.

    수문을 열며 갑자기 유입되는 물이 많아지자, 압력을 이기지 못한 지반이 터지며 그 속에 갇혀 있던 물이 솟구친 것이었다.

    투웅! 퉁퉁퉁! 여전히 협곡 위에서 굴러떨어지는 바위들은 약해진 지반을 끊임없이 때렸다.

    땅속을 흐르던 물이 솟구치고, 약해진 바닥이 푹푹 꺼지자 아군 적군 가릴 것 없이 협곡에 갇힌 병사들이 속절없이 죽어 나갔다. 마치 지옥 같은 풍경이었다.

    ‘아주 죽고 싶어서 기도를 하는구나. 그 망할 놈이.’

    레너드는 복수심에 까드득 이를 갈다 무언가를 발견하고 놀라 소리쳤다.

    “커티스, 뒤에!”

    그 소리에 커티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집채만 한 바위가 그들을 향해 맹렬히 굴러오고 있었다. 커티스가 제 죽음을 각오하며 레너드를 껴안은 그때, 투욱 그들이 딛고 있던 바닥이 그대로 꺼졌다.

    아아, 커티스는 무저갱 같은 바닥으로 꺼지며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보랏빛 꽃 한 송이가 바로 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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