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추수제를 일주일 앞둔 메르디에스는 활기가 넘쳤다. 평소에도 온갖 물건들이 들고 나는 메르디에스였지만 추수제가 되면 각지에서 몰려든 물건들로 산을 이루었다.
좌판에서 파는 이국적인 물건들에서부터 귀족들을 상대로 하는 외국의 진귀한 보석들까지. 메르디에스 거리는 추수제를 통해 한몫 잡으려는 상인들과 구경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메르디에스 성에서 일하는 수잔은 추수제를 앞두고 받은 공로금으로 작은 사치를 부려 볼 생각이었다. 평소라면 구경만 했을 비싼 옷가게에서 외출복도 하나 맞추고, 가족들에게 줄 선물도 하나씩 골랐다.
그리고 겨울을 나기 위한 땔감도 넉넉하게 구매한 다음 무려 배달료를 지급했다. 땔감을 직접 옮기지 않고 사람을 쓰는 것은 지금처럼 넉넉할 때가 아니면 결코 하지 못할 일이었다.
“이젠 얼추 할 일도 끝났고…….”
수잔은 상쾌한 기분으로 손을 탁탁 털며 주위를 힐끔 둘러보았다. 보는 시선이 없는 것을 아는데도 어쩐지 조심하게 되었다.
―셀레나라는 여자를 찾아가 봐. 진짜 잘 맞춘다니까. 너도 케인이랑 어떻게 될지 궁금하잖아.
메르디에스 성에서 같이 일하는 베티가 어찌나 열변을 토하던지. 수잔이 메르디에스 성의 경비대 소속인 케인과 만난 지도 벌써 햇수로 3년째였다.
경비대는 전도유망한 젊은 남자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경비대 소속으로 남지만 매우 드물게 기사로 승급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냥 시간도 남고 하니까.”
수잔은 괜히 혼잣말을 하며 베티가 말해 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베티가 말해 준 상점은 상업 지구에서 한 블록 벗어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추수제 전후로 우후죽순 생겨나는 간이 상점 중 하나였다.
보랏빛 조명이 감도는 신비로운 가게는 마치 설탕을 졸인 듯한 달콤한 향기가 났다. 이국적인 문양과 물건들이 가게 입구에서부터 줄지어 놓여 있었다. 작게 난 문을 밀자 짤랑하는 종소리가 났다.
“무엇이 필요하세요?”
이국적인 복장을 한 여자가 수잔을 보며 눈웃음을 쳤다. 윗입술 위에 작게 찍힌 붉은 점이 인상적인 여자였다.
“이곳에 오면 셀레나를 만날 수 있다고 해서요.”
수잔이 가게 안쪽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잘 찾아왔어요. 내가 바로 셀레나예요.”
여자가 수잔을 보며 싱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곳에는 아가씨의 아름다움을 더 돋보이게 해 줄 것들도 있고, 잠이 잘 오는 향초도 있어요. 하지만 아가씨에게 필요한 건 이런 게 아닌 것 같네요.”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노래처럼 이어졌다. 낯선 공간에 발을 들이며 긴장했던 마음이 저절로 풀어졌다.
셀레나는 수잔에게 따뜻한 차를 건네주었다. 수잔은 차를 한 모금 꿀떡 삼키고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아, 친구가 이곳에서 점술을 봤다고 해서요.”
“아가씨에게 필요한 건 별이 속삭이는 이야기였군요.”
셀레나가 별 모양의 추가 달린 줄을 수잔의 눈앞에 늘어뜨렸다. 별 모양의 추가 좌우로 흔들렸다. 수잔은 제 의식이 점점 가라앉으며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엇을 묻고 싶어서 왔나요?”
“만나는 남자가 있어요. 케인이라고. 성의 경비로 일하는 사람인데…….”
“경비대 소속의 케인, 이란 말이죠?”
셀레나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입술의 붉은 점이 유난히도 선명했다.
‘왜, 이렇게 잠이…….’
수잔은 자꾸만 눈이 감겼다. 정신을 차리려 눈을 부릅떠 봐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다시 꾸벅꾸벅 졸았다.
쨍그랑!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미지근한 물이 무릎 위로 쏟아졌다. 깜짝 놀라 졸음이 달아난 수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느라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떨어트려 가게가 엉망이 되었다.
“어머! 정말 죄송해요.”
당황한 수잔이 제 치맛자락으로 찻물을 닦으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냥 두어요. 그보다 이것 가져가세요.”
셀레나가 예쁜 무늬가 새겨진 동전만 한 자줏빛 통을 하나 내밀었다. 입술에 색을 입히는 연지였다.
“아, 네. 살게요. 얼마면―”
이만한 폐를 끼쳤으니 연지 한 통 정도야 얼마든지 살 수 있었다. 셀레나가 싱긋 웃으며 수잔을 향해 연지를 밀었다.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면서요. 이 연지가 아가씨의 사랑을 이루게 해 줄 거예요. 케인, 이라고 했죠?”
셀레나의 말에 수잔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 아니, 그래도 돈은 드려야 할 텐데…….”
셀레나는 돈을 내겠다는 수잔을 말리며 고개를 저었다.
“값은 오늘 아가씨를 만난 것으로 충분하답니다. 부디 어여쁜 아가씨의 사랑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네요.”
짤랑― 종소리와 함께 가게의 문이 닫혔다. 수잔의 손에는 공짜로 얻은 연지가 쥐여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수잔은 통을 열어 연지를 제 입술에 톡톡 발라 보았다.
‘예쁘다.’
한층 생기 있어진 입술이 마음에 들었다. 수잔은 연지를 품에 꼭 안고 걸음을 옮겼다. 이젠 메르디에스 성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 * *
메르디에스 성 안팎으로 바쁜 나날들이 이어졌다.
가장 골치 아픈 일은 역시 반 호수의 물을 빼는 일이었다. 사유지에 있는 자그마한 호수라지만 그래도 호수였다. 물길을 내어 수위를 낮추고 있지만 호수 바닥은 쉬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얼마쯤 더 걸릴 것 같아?”
캐롤린이 보고를 위해 자신을 찾은 경비 대장에게 반 호수의 진행 상황을 물었다.
추수제를 앞두고 한참 경비를 보강해야 하는 시기였다. 그런데 반 호수의 물을 빼는 데 인력이 모조리 투입되고 나니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다.
반 호수의 사정을 모르는 경비 대장으로선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임무였다. 경비 대장이 앓는 듯한 소리를 내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차라리 호수를 메우라 하셨으면 몰라도 호수의 물을 빼라니,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
캐롤린은 경비 대장의 불평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답답한 그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반 호수라는 변수를 그대로 둘 순 없었다. 캐롤린의 침묵을 압박으로 느낀 경비 대장이 괴로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닷새는 더 걸립니다. 이것보다 더 빨리는 정말 무리입니다.”
닷새라는 말미도 손이 비는 영지민들까지 모조리 동원했을 때나 가능한 일정이었다. 경비 대장은 더는 양보할 수 없다는 듯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닷새가 지나면 각자 자리로 복귀해.”
캐롤린은 경비 대장에게 보고서를 돌려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닷새라면 추수제가 시작하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끝낼 수 있었다. 앓는 소리를 종류별로 준비했던 경비 대장은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보고서를 받아 들었다.
“더 할 이야기가 남았어? 생각해 보니 닷새보다 더 빨리 끝날 것 같아?”
캐롤린이 멍하니 자리에 서 있는 경비 대장을 보며 물었다.
“아, 아닙니다.”
화들짝 놀란 경비 대장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에서 나갔다. 방에 혼자 남은 캐롤린은 창가에 서서 문을 활짝 열었다. 기분 좋은 가을바람이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내내 서류만 보느라 답답했던 속이 좀 뚫리는 것 같았다.
아래쪽에서는 성의 고용인들이 추수제를 앞두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품에 꽃이며, 그릇이며, 장식들을 한 아름 안은 하녀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추수제의 풍요로움은 이 땅의 모두를 흡족하게 했다.
캐롤린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하녀들의 일상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너도 베티가 말한 데 다녀왔어?”
“……응. 어제.”
“어땠어? 진짜 잘 맞춰?”
“그냥……. 다 잘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삼삼오오 모인 하녀들은 저들끼리 얼굴을 붉히며 까르르 웃었다. 재잘대는 입술에는 붉은 물이 곱게 들어 있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캐롤린은 창문을 닫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었다. 캐롤린이 막 서류를 집어 든 순간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들어온 시녀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성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성주님께서?”
레너드라면 조금 전에도 만나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것이 불과 서너 시간 전의 일이었다.
‘급한 용무가 있으신가?’
캐롤린은 의아해하면서도 서둘러 레너드의 집무실로 향했다.
“왔구나. 자리에 앉으렴.”
그곳에는 레너드와 커티스, 그리고 총관 폴이 자리하고 있었다. 캐롤린은 불안한 예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으음, 그게 말이다.”
레너드가 곤란한 얼굴로 미간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리카서스 쪽 꼬리를 잡았다. 예상대로 보우 강 상류에 여러 개의 수문을 설치했더구나.”
고개 숙인 캐롤린은 두 주먹을 꼭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여러모로 다행인 일이었다. 그런데 다행이라고, 잘되었다고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레너드의 두꺼운 손이 캐롤린의 여린 손등을 위로하듯 툭툭 두드렸다.
“위치까지 확인했는데 가만히 있을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니.”
캐롤린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는 시선들을 마주했다. 따스한 눈빛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레너드, 복잡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커티스, 결연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각오한 듯한 총관 폴까지.
그들을 확인한 캐롤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캐롤린, 네게 무거운 짐을 얹어 주는 것 같아 미안하구나.”
레너드가 안쓰러운 눈으로 다시금 캐롤린을 바라보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리스벨은 언제고 메르디에스의 첫 번째 손이었다. 부재한 메르디에스의 자리를 채우는 것은 응당 리스벨의 역할이었다. 그것은 짐이 아니라 영광된 책무였다.
“언제 떠나세요?”
“지금.”
말을 마친 레너드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며 덧붙였다.
“지금 가야 추수제 전에 돌아올 수 있겠더구나. 금방 돌아오마.”
마치 산책이라도 나가는 듯한 가벼운 어조였다. 캐롤린은 레너드의 배려에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대외적으로는 이곳에 계신 거지요?”
레너드가 자리를 비우는 것이 기밀이 아니라면 이토록 조용히 떠날 리가 없었다. 레너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리카서스에서 눈치를 채면 곤란하니까.”
수문의 위치를 파악했다는 것도, 레너드가 직접 그것을 해결하려 한다는 것도 모두 비밀이어야 했다.
“올해는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추수제가 될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캐롤린의 목소리는 물기가 어려 가늘게 떨렸지만, 그 어조만은 담담했다.
“그러니까 올해 추수제는 다 같이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성주님도, 아버지도, 리아도.”
“그럴 게다. 내가 오는 길에 아리아드네도 잡아 오마. 넌 아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렴.”
레너드는 친딸이나 다름없는 캐롤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덧붙였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총관이 도와줄 게다.”
총관 폴이 옆에서 고개를 짧게 숙였다.
“너만 믿으마.”
레너드가 힐끗 눈짓하자 폴이 벽에 걸린 액자의 위치를 바꾸었다. 그러자 집무실의 벽이 열리고 외부로 통하는 통로가 드러났다.
이젠 정말 떠날 시간이었다. 캐롤린은 어쩐지 어리광이 부리고 싶어졌다.
“배웅이라도 하게 해 주세요.”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고작해야 그런 것이었다. 레너드는 귀 끝이 붉어진 캐롤린을 내려다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나야 영광이지.”
캐롤린은 레너드와 커티스를 따라 집무실 벽과 연결된 좁다란 통로로 들어섰다. 집무실에 남은 채로 주인을 배웅한 폴이 다시금 액자를 움직였는지 등 뒤의 벽이 소리도 없이 닫혔다.
떠나는 사람에게도, 그것을 지켜봐야 하는 사람에게도 마지막 길은 짧게만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곧 성의 외부로 빠져나왔다.
그곳에는 변장한 기사 몇몇이 레너드와 커티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좀 더 먼 곳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내내 아무런 말이 없던 커티스가 제 딸을 돌아보며 짧은 말을 건넸다.
“이젠 그만 들어가거라.”
무뚝뚝한 표정 뒤에 있는 커티스의 진짜 얼굴을 알았다. 캐롤린은 떠나는 아버지의 모습에 울컥해서 내내 가슴에 얹혀 있던 말을 토해 내고야 말았다.
“아버지, 죄송해요. 실망하시게 해서…….”
제 사랑이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커티스를 슬프게 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캐롤린은 자신 때문에 슬퍼하는 아버지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딸은 되지 못했다.
“캐리…….”
커티스는 복잡한 표정으로 제 딸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무엇이라 말할 듯이 입술을 달싹였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 이야기는 돌아와서 하자꾸나.”
이리 서서 간단히 할 이야기가 아니었다. 캐롤린은 그새 멀어진 커티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너드와 커티스는 곧 점처럼 멀어졌다. 떠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캐롤린에게 매우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어쩐지 그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사라진 다음에도 한참이나 그곳을 서성이던 캐롤린은 주위에 땅거미가 내려앉을 즈음에야 몸을 돌렸다.
이렇듯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레너드도, 커티스도, 아리아드네마저 부재한 상황에서 자신마저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모두가 돌아올 곳을 지키는 것이 제 역할이었다.
캐롤린이 바삐 성으로 돌아가려던 그때였다.
“리스벨 영애.”
믿을 수 없는 목소리가 캐롤린을 불러 세웠다.
‘이젠 모두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캐롤린은 천천히 몸을 돌려 제 이름을 부른 이와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