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148)
  • * * *

    메르디에스의 남쪽 들판은 노랗게 익은 밀로 가득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황금빛 물결이 출렁였다. 바야흐로 추수의 계절이었다.

    이 시기 메르디에스는 어디를 가나 황금빛으로 넘실거렸다. 집마다 추수한 곡식으로 창고를 채우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푸근한 웃음이 가득했다.

    여문 곡식과 잘 익은 과실에서는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흘렀다. 이 땅을 지배하는 풍요의 냄새.

    사람들은 들뜬 기분으로 열흘 앞으로 다가온 추수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한 해의 수확을 감사하고 다음 해의 풍요를 기원하는 추수제는 메르디에스에서 가장 오래된 의식이었다. 예년보다도 훨씬 크게 치러지는 탓에 사람들의 설렘 또한 그만큼 크게 부풀어 올랐다.

    추수제 준비로 여념이 없긴 캐롤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평소라면 아리아드네를 돕는 정도였을 것이 이번엔 아예 제 차지가 되어 버렸다.

    캐롤린이 성 내 경비 조율을 막 끝냈을 때였다. 반대쪽에서는 내정을 담당하는 글레나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린즈 부인, 성 내 사용인들에게 지급될 공로금은 예년 수준으로 하되 수혜자를 늘리는 쪽으로 하면 어떨까요?”

    “추가 수혜자에 따른 예산안 작성해서 내일까지 보고해.”

    “연회장 장식물과 디너 메뉴는 어떻게 할까요? 요리장이 내일까지 결정해 주셔야 한다고…….”

    “요리장이 올렸던 메뉴는 뭐였지?”

    “여기 있습니다.”

    “린즈 부인, 화훼가 도착했습니다. 지금 확인해 주셔야…….”

    글레나야 늘 표정이 없는 편이었지만, 지금은 영혼이 모조리 빠져나간 것만 같았다. 막 할 일을 마친 캐롤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건 제가 확인할게요.”

    “아, 죄송해서 어쩌죠. 리스벨 영애께서도 바쁘실 텐데…….”

    글레나 성격에 웬만하면 사양할 텐데 많이 지친 모양이었다. 캐롤린은 괜찮다는 듯이 작게 웃었다.

    “잠시 쉬러 갈 참이었어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2층 회의실에서 나온 캐롤린은 후원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추수제 동안 쓸 꽃과 나무들이 도착해 있었다.

    “주문서는?”

    캐롤린의 물음에 따라온 하녀가 종이를 내밀었다.

    “그럼 확인하지.”

    싱싱하게 피어난 꽃과 나무를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것이 일이 되면 달랐다. 꼼꼼히 확인을 마친 캐롤린이 상인이 내민 영수증에 막 사인을 하려 할 때였다.

    “저건 뭐지? 저건 주문한 적이 없는데…….”

    캐롤린이 낯선 식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까이 다가간 캐롤린이 식물의 생김새를 확인했다. 납작한 선인장에는 막 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한 자주색 꽃이 피어 있었다.

    “그것은 피피라는 선인장입니다. 십 년에 한 번 꽃을 피울까 말까 하는 아주 귀한 녀석인데 때마침 꽃을 피웠길래 추수제에 써 주십사 선물로 들고 왔습니다.”

    메르디에스 추수제에 물건을 대는 이들은 이렇듯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귀한 것들을 알아서 바치곤 했다. 자신이 바친 물건이 메르디에스 추수제에 쓰인다면 어떤 행운이 따를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토록 귀한 물건을 그냥 받을 순 없지. 저것은 값을 치르지 않은 물건이니 도로 가져가도록.”

    캐롤린이 손짓하자 인부들이 꽃이 핀 선인장을 도로 짐마차에 실었다.

    “돈을 받으려거나 물건을 더 팔려고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받아만 주시면―”

    “돈이 부족해서 저 물건을 받지 않겠다는 말 같은가?”

    세상에서 가장 많은 황금을 가졌다는 메르디에스였다. 그깟 선인장의 값을 치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저 선인장이 사전에 약속한 물건인가?”

    “아닙니다.”

    “자네가 원하면 약속하지 않은 물건이라도 받아야 하나?”

    추수제에는 많은 물건이 들고 나는 만큼 그것들 중에 이상한 것이 섞여 있으면 곤란했다. 노련한 상인은 제 실수를 깨닫고는 사색이 되어 땅바닥에 엎드렸다.

    “죄, 죄송합니다.”

    흙바닥에 머리를 박은 상인의 모습에 캐롤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인이 한 실수에 비해 과한 사죄였다.

    하지만 그가 지레 겁먹은 것이라 보기도 애매한 것이 메르디에스 눈 밖에 난 상인에게는 아무도 물건을 주지 않는다. 이만한 실수를 트집 잡아 어찌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같은 실수는 한 번으로 끝냈으면 해.”

    캐롤린의 용서에 상인은 연거푸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 인사를 했다.

    ‘피곤해.’

    간단히 끝날 일이었는데 신경을 곤두세웠더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캐롤린은 바람을 쐴 겸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기분 좋은 가을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남쪽은 아직 가을이 한창이었다.

    ‘리아가 있는 곳은 춥겠지?’

    리뮈르는 한 해의 절반이 겨울이라고 했다. 캐롤린은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리뮈르의 풍경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하지만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곳의 풍경을 상상으로 떠올리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캐롤린은 자신의 기억 중에 가장 그럴듯한 것으로 상상을 대신하는 수밖에 없었다.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였던 언젠가의 메르디에스를.

    그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진짜, 그 물미역 같은 놈을 내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레너드가 씨근덕거리며 열을 내고 있었다. 옆 사람에게 마구 화를 쏟아 내던 레너드가 캐롤린을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어, 캐롤린 아니냐?”

    “오셨어요?”

    캐롤린은 레너드 뒤에 있는 커티스를 힐끗 보며 고개를 숙였다. 한 달 만에 마주하는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커티스는 한 달 만에 딸을 마주하고도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캐롤린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억지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망할 놈들 같으니라고!”

    캐롤린의 물음에 잠시 잊고 있었던 울분이 떠올랐는지 레너드가 다시금 불을 뿜어낼 듯이 펄펄 날뛰기 시작했다. 캐롤린이 영문을 몰라 눈만 깜박이자 옆에 있던 커티스가 입을 열었다.

    “리카서스와 맞닿은 서쪽 경계에서 몇 가지 문제가 생겼다. 리카서스 예주야 분란을 싫어하는 사람이니 아마도 왕후가 조종하는 걸 테지.”

    메르디에스의 서쪽 경계는 리카서스의 동쪽과 마주하고 있었다.

    캐롤린은 그제야 레너드가 말했던 물미역이니 망할 놈이니 하는 단어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현 예주의 이복형인 왕후 칼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모양이다.

    “보우 강 제방의 수위가 아주 바닥이야. 가뭄이 든 것도 아닌데!”

    레너드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보우 강은 리카서스 북동쪽에서 시작되어 메르디에스 서남 평원을 흐르는 강이었다. 그 물을 먹고 자란 서남 평원의 밀이 페렌트 전체 유통량에서 절반을 차지했다.

    “그놈들이 상류를 틀어막은 거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목깃을 잡아 뜯은 레너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캐롤린은 그제야 레너드가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이해했다. 지금은 알알이 여문 밀들이 수확을 기다리는 시기였다. 만약 상류에서 가둬 둔 물을 일시에 터트리기라도 한다면…….

    “추수를 서둘러야겠어요. 인력을 충원해―”

    물살에 밀이 모조리 쓸려 가기 전에 추수를 끝내야 했다. 다급하게 말을 쏟아 내던 캐롤린은 또 다른 것에 생각이 미쳤다.

    추수를 위해 사람들이 몰린 평원. 어쩌면 왕후가 노리는 것은 그것일지도 모른다.

    “아, 그것까지 계산한 걸까요?”

    “그 시커먼 속을 누가 알겠어. 비열한 자식 같으니.”

    레너드의 말대로였다. 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이쪽은 수확을 앞둔 밀이 인질인 셈이었다.

    “어쩌면 영지를 비워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커티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영내에도 골칫거리는 남아 있었다.

    “반 호수의 일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 괜찮을까요?”

    아리아드네가 짐작한 대로 리뮈르에서도 마물이 나타났다. 반 호수를 해결하지 않는 이상, 메르디에스도 안전하진 않았다.

    “아, 그것들 진짜! 늙은 놈이나 어린놈이나 하나같이 사람 목숨을 뭐로 아는 거야?”

    돈 좋지, 권력은 더 좋다. 그래도 사람이라면 최소한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있었다. 메르디에스 서남 평원을 물바다로 만들면 페렌트 전체에 기근이 온다. 수천, 수만 명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이었다.

    레너드는 머리끝까지 치솟는 화를 참지 못하고 고함을 버럭 질렀다.

    “반 호수의 물을 모조리 빼라고 해. 바닥이 드러나면 거기 뭐가 있는지 알게 되겠지. 망할 신전이 나타나면 불 질러 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이번 추수제에서 불타는 건 추수가 끝난 빈 들판이 아니라 오래전 주인을 잃은 신전이 될 것 같았다.

    * * *

    아리아드네는 투숙한 여관방에 딸린 테라스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 걸린 달의 한쪽 귀퉁이가 깎여 나간 채였다. 리뮈르 공작저에서 떠나온 지도 벌써 닷새째였다.

    그동안 아리아드네 일행은 쉼 없이 달린 덕에 리뮈르 동남부의 소도시 린달에 도착했다. 이대로라면 예정보다 이르게 메르디에스에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리뮈르 기사들이 요충지마다 설치된 군도를 이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 덕이었다.

    더불어 메르디에스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어느 길을 택하든 마을이 있는 곳이면 일행이 머물 숙소가 준비되어 있었고, 그곳에는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다.

    간단한 요기만 하며 종일 이동하다 기절한 채로 잠들고 일어나서 다시 이동하는 일의 반복이었다. 그러기를 닷새째, 결국 아리아드네와 조셉의 체력이 바닥났다.

    몸을 단련한 이들이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리아드네 일행은 린달에서 하루 쉬어 가기로 했다.

    몸이 편해진 탓일까. 묻어 두었던 불안함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아리아드네는 무릎을 모으고 그곳에 제 고개를 파묻었다.

    ‘자야 하는데…….’

    아무래도 오늘 밤은 다시 잠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에 걸린 달을 바라보았다.

    ‘메르디에스의 하늘에도 같은 달이 떴겠지.’

    아리아드네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고향에 있을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렸다.

    그때, 하늘의 달을 배경으로 검은 그림자가 날아들었다. 제 앞에 뚝 떨어진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한 아리아드네가 우울한 기색을 지우고는 싱긋 웃으며 팔을 벌렸다.

    “어떻게 알았지? 내가 당신 생각하고 있었던 거.”

    장난스러운 기색에도 유진의 굳은 표정은 풀릴 줄을 몰랐다. 다가온 그가 아리아드네의 머리에 조심스럽게 제 손을 얹었다.

    “왜 안 자고 나와 있어?”

    무심한 말투와는 반대로 아리아드네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손길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리아드네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숨을 들이쉬었다. 서늘한 공기가 뺨에 닿아 왔다.

    “자다 깼어.”

    꿈에 렉사가 나타났다. 렉사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다 그대로 물이 되어 녹아내렸다. 뒤이어 나타난 루안이 렉사를 찾으며 아리아드네를 원망했다. 왜 자신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느냐고.

    뒤돌아 도망치면 불타는 메르디에스 성이 보였다. 레너드가 아리아드네를 위해 그네를 묶어 주었던 나무에는 그네 대신 레이먼드의 목이 걸렸다.

    아리아드네가 나무에서 레이먼드를 끌어 내리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불타는 성에서 검게 그을린 글레나가 걸어 나왔다.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또 모두 죽어 버렸잖아요.’

    아리아드네는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채로 잠에서 깨어났다.

    ‘그것이 정말 꿈이었을까. 이토록 생생한데.’

    꿈에서 깨어나고도 거세게 날뛰는 심장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온갖 감정들이 가슴을 묵직하게 눌러 왔다.

    “아무도 죽지 않았으면 했어. 다시는 누구도 잃고 싶지 않았어. 그렇게 하려고 정말 노력했는데…….”

    그의 서늘한 손이 아리아드네의 얼굴을 감쌌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유진을 바라보았다. 유진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의 회색 눈동자가 그녀를 위로하듯 천천히 깜박였다.

    “당신 탓이 아니야.”

    유진의 위로에 아리아드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지킬 상대를 잃고 나서 누구의 책임이니 하는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어.”

    탑에 갇힌 그때, 지겹도록 생각했다. 죽은 이들 앞에서 그들을 지키지 못한 것에 어떤 변명도 하지 않겠다고.

    아리아드네가 유진의 옷을 꽉 틀어쥐었다. 잇새로 억눌린 감정들이 터져 나왔다.

    “나는 또 지키지 못했어.”

    탑에 갇힌 그때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또다시 무력하게 제 사람들을 잃었다. 지켜 주겠다고 했으면서.

    고개 숙인 아리아드네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의 눈물이 유진의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를 봐.”

    천천히 무릎 꿇은 그가 아리아드네의 얼굴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마주한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그의 입술이 눈물 자국으로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고 지나갔다.

    “나는 당신 덕에 지금 살아 있는 거야.”

    유진이 아리아드네의 아랫입술을 베어 물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의 혀가 밀려들었다. 밀려든 혀가 아리아드네 입 안 곳곳을 탐색하듯 훑고 지나갔다.

    그의 혀가 지나간 곳마다 불길이 일었다. 맞닿은 혀에서 시작된 불길이 온몸에 고였다.

    모자란 공기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젖혀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입술이 조금의 틈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그녀가 내뱉은 숨조차 모두 제 것이라는 양 탐욕스러운 키스였다.

    “당신이 날 살렸잖아.”

    리뮈르의 연못에서, 방주의 분수에서 가라앉는 그를 향해 다가온 것은 그녀였다. 모든 것을 놓고 사라지고 싶었던 순간마다 그녀가 자신을 끌어 올렸다.

    “당신이 그랬지. 당신이 사라지면 찾아오라고.”

    쇠를 긁는 듯한 낮고 거친 음성이 아리아드네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그러니까 내가 사라지면 당신도 날 찾아와야 해.

    리뮈르 거리에서 춤을 추며 속삭인 그녀의 말은 그를 묶어 두는 족쇄가 되었다.

    그러니.

    “아니, 다신 당신 찾으러 다니는 일 없을 거야. 애초에 내 앞에서 사라지게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그녀도 언제까지고 이 족쇄를 쥐고 있어야 했다.

    제 기억도, 의지도, 심장도 모두 필요 없었다. 그녀의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다시금 그가 가까워졌다. 다물린 아리아드네의 입술 사이로 내려앉듯 스쳐 지나간 그의 입술이 이번에는 귓가에 닿았다. 그의 입술 아래에서 여린 혈관이 팔딱팔딱 날뛰었다.

    귓가에서 미끄러진 그의 입술이 가느다란 목을 지나 둥근 어깨에 닿았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어깨 위에서 흩어졌다. 살아 있는 사람의 온기였다.

    아리아드네는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댄 그의 머리카락을 슬며시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천천히 고개를 든 그가 자신과 눈을 마주했다. 깊게 가라앉은 회색 눈동자는 채 식지 않은 열기에 잠겨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낮게 잠긴 그의 눈동자를 보며 속삭였다.

    “나를 살린 건 당신이야.”

    이렇게 어둠 속에 잠긴 그를 볼 때면 탑에 갇힌 자신을 찾아왔던 과거의 유진이 떠오르곤 했다.

    ‘당신은 대체 무엇을 바라고 나를 살렸던 걸까. 당신에게 나는 무엇이었기에.’

    아리아드네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마치 새 부리로 쪼는 듯한 가볍고 달콤한 입맞춤이었다.

    “왜 좀 더 일찍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아리아드네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그의 순간들이 아쉬웠다.

    유진이 알지 못하는 시간의 그까지 모두 갖고 싶었다.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제 것으로 하고 싶었다.

    “…….”

    그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생겼다. 아리아드네는 구겨진 그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물었다.

    “왜?”

    “좀 더 일찍?”

    그들은 올여름 란데르의 여름 별장에서 처음 서로를 마주했다. 그 이후로는 쭉 함께였다. 그런데 그녀는 마치 ‘그를 알고도 알아보지 못했던 순간’이 존재했던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유진의 의구심은 아리아드네가 제 시선을 슬쩍 피하자 더욱 짙어졌다.

    “혹시 당신―”

    그가 아리아드네에게 무엇이라 물으려던 찰나였다. 와당탕, 무언가 떨어지며 적막하던 주위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로아, 이 밤에 너 또 어딜 가는 거야?”

    적막을 깨트린 것은 달미에르의 목소리였다. 아리아드네는 소리가 들려오는 아래쪽을 살폈다.

    몰래 여관을 빠져나가려던 달로아가 문 앞에서 딱 걸린 모양이었다. 달로아의 발치에 문 옆에 쌓아 둔 물건들이 쓰러져 나뒹굴고 있었다.

    “미에르, 너 자는 거 아니었어?”

    “잠들 뻔했지.”

    “아, 진짜 저 애늙은이……. 하여간 예민해서.”

    달로아가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리뮈르 남매의 소동 덕택에 어둠에 잠긴 여관에 하나둘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여관 주위를 둘러보던 리뮈르 기사 하나가 서둘러 다가왔다.

    “아니, 잠깐 주위 좀 둘러볼까 하고…….”

    달로아가 어정쩡한 미소를 지으며 말끝을 늘어뜨렸다. 리뮈르 기사는 이런 일이 몹시 익숙하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리뮈르 기사의 대답에 달로아의 미간이 구겨졌다.

    “잘됐네, 로아.”

    “미에르, 너 진짜 그러기야?”

    달로아가 답답함에 발을 구르며 제 동생을 노려봤다.

    “아무래도 밤나들이는 실패한 것 같은데 그만 포기해.”

    아리아드네가 2층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곧이어 쿵쿵,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2층으로 올라온 달로아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불평을 내뱉었다.

    “아, 진짜……. 내 깊은 속을 누가 알겠어?”

    “아무도 모르지. 없는 걸 무슨 재주로 알겠어.”

    달미에르가 냉큼 대꾸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쌍둥이 동생의 빠른 동의에 불쾌해진 달로아가 이를 악물고는 뇌까렸다.

    “네가 모르는 거거든.”

    남매의 설전을 지켜보던 아리아드네가 가벼운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어딜 나가려던 거야?”

    “아, 아아, 아아아…….”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 위에 엎어졌던 달로아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한쪽 검지를 세워 빙빙 돌리며 말했다.

    “위쪽에서 도는 고급 정보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달로아는 제가 보는 세상이 반쪽짜리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모인 데는 이야기가 돌기 마련이야. 때론 거리의 소문이 가장 빠른 정보이기도 해.”

    살고자 하는 욕망은 귀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평민들 또한 이득을 위해서, 생존을 위해서 저마다 가진 정보들을 주고받았다.

    달로아가 개기월식을 앞두고 무리해서 리뮈르 거리로 나갔던 것도 거리에서 떠도는 릭센의 소식을 듣기 위해서였다.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단 말이야.”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달로아는 거리의 정제되지 않은 정보가 알고 싶었다. 그녀가 본 달리오스의 기억 중에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뭐, 메르디에스도 곧 끝날 거라지? 안에서 새기 시작하면 끝이지. 리뮈르나 메르디에스나.

    달리오스의 기억은 그것으로 끝이라 더 자세한 건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안에서 새기 시작하면’이라니 메르디에스 내부에 1왕자가 심은 세작이라도 있는 걸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역시 심판의 권능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둘로 나눠진 권능은 제약이 너무 많았다. 메르디에스 사람들을 일일이 붙잡고 기억을 살피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고.

    그렇다고 이를 아리아드네에게 터놓고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누가 좋아하겠어. 나라도 싫겠다.’

    상대가 제 머릿속을 낱낱이 들여다본다면 누구라도 끔찍해하는 것이 당연했다.

    아리아드네가 구하려 했던 것은 심판의 권능 때문에 밀려난 리뮈르 일족이지, 심판의 권능을 가진 리뮈르 일족이 아니니까.

    ‘아리아드네가 우리를 받아들인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알 수 없어. 지금 이 능력을 드러내는 건 위험 부담이 너무 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뭐라도 해 보려고 했던 건데.

    “진짜, 잠깐만 둘러보고 오려고 했는데!”

    저 예민하기만 하고 하등 쓸모없는 혈연 같으니라고. 달로아가 이를 득득 갈며 달미에르를 노려보았다. 달미에르는 달로아가 그러거나 말거나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선별되지 않은 거리의 정보가 필요한 거야?”

    이야기를 모두 들은 아리아드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뭐, 그렇지? 같이 가 주기라도 하게?”

    달로아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아리아드네가 움직이는 대로 고개를 쭉 내밀었다.

    곧 아리아드네가 제 방에서 붉은 반점이 찍힌 흰 비둘기 한 마리를 들고 나왔다. 메르디에스에서 사용하는 전서구였다. 아리아드네가 새까만 밤하늘에 비둘기를 날려 보내며 말했다.

    “이틀 뒤면 받아볼 수 있을 거야.”

    마치 길바닥에 널린 돌멩이를 건네는 것 같은 가벼운 태도였다. 달로아는 어쩐지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 같은 감격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왜?”

    “아무래도 내가 줄을 잘 잡은 것 같아서…….”

    달로아는 아리아드네 손을 덥석 쥐었다. 싸울 때는 역시 이기는 쪽에 붙어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이기느냐? 더 센 놈이 이기기 마련이다.

    “미에르, 역시 돈이 전부야.”

    더 센 놈을 끌어들이는 건 역시 돈이었다.

    “헛소리 그만하고 자.”

    달미에르가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다.

    “까탈스럽기는.”

    불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달로아가 테라스 아래에서 서성이던 사람을 발견하고는 양손을 흔들었다.

    “어? 리카르도 경이다! 경, 여기로 올라와요!”

    달로아의 권유에 어쩔 줄 모르고 머뭇대던 리카르도가 붉어진 얼굴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여관 안으로 사라졌다.

    “그 사람은 왜 불러?”

    달미에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불만을 토해 냈다.

    “왜? 사람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잖아.”

    쌍둥이 동생의 불평에 달로아는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젠 그만 다들―”

    마찬가지로 불쾌한 낯을 한 유진이 일어나며 자리를 정리하려던 찰나였다. 끼이익, 신경질적인 마찰음과 함께 리카르도가 테라스에 들어섰다. 그는 한밤중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선 다들 왜…….”

    모인 사람들을 훑던 리카르도의 시선이 어느 지점에서 멈추었다. 그의 시선을 느낀 아리아드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리아드네의 새파란 눈동자가 그를 직시하자 리카르도는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리카르도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며칠 전부터 아리아드네만 보면 자꾸만 기분이 이상해졌다.

    “…….”

    아리아드네는 우물쭈물하는 리카르도를 의아하게 바라보다 밤하늘의 달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냥 달 구경하던 중이었어요.”

    밤하늘에 걸린 것은 하현, 점점 줄어드는 달이었다.

    “저 달이 모두 줄어들면 메르디에스 추수제가 열리는데…….”

    더 이상 줄어들 것은 없고 차오르는 것만 남은 그믐달이 뜨는 밤. 메르디에스에서는 추수제가 시작된다.

    아리아드네가 밤하늘의 달을 보며 잠시 상념에 빠졌다. 과거에는 올해 추수제를 치르지 못했다. 추수제 전야에 열린 사냥 대회에서 커티스가 사망한 탓이었다.

    [리아, 아버지가,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알버트는 죽지 않았고, 사냥 대회는 열리지 않는다.

    ―캐롤린, 모두를 부탁해. 아버지도, 백작님도.

    ―응, 잘 지키고 있을게. 걱정 안 해도 돼. 나는 언제나 네 대신인걸.

    아무도 죽지 않는 풍요로운 추수제가 아리아드네를 기다리고 있었다.

    “메르디에스 추수제라고? 나 보고 싶었는데!”

    그 말에 달로아가 반색했다. 메르디에스 추수제라면 건국제에 버금갈 정도로 규모가 큰 행사였다. 아리아드네가 빙긋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대로만 가면 이번 추수제는 메르디에스에서 보낼 수 있겠지?”

    그러리란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밤하늘의 달을 향해 흰 비둘기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