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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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기월식이 일어났던 밤, 왕도 릭센의 하늘에도 공평하게 만월이 떠올랐다.

    “곧 개기월식이 시작됩니다.”

    카이엔의 심복 제프리가 개기월식을 알려 왔다.

    “그래, 가지.”

    카이엔은 불편한 몸을 일으켰다. 아직 채 낫지 않은 상처들이 그를 괴롭혔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숨을 쉴 때마다 폐부를 찌르는 고통을 느꼈던 처음에 비하면 매우 호전된 상태였다.

    처음 카이엔을 진료한 돌팔이는 족히 반년은 정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불과 한 달 만에 놀라울 정도로 회복했다. 어쩌면 이것도 죽음의 순간에서 그를 구해 주었던 케이루스의 성물이 행한 기적일지도 몰랐다.

    ‘하늘마저 나를 돕는군.’

    카이엔은 하늘의 달을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개기월식은 그가 가장 기다리던 것 중 하나였다. 저 달이 그에게 리뮈르를 가져다줄 터였다.

    제프리의 부축을 받아 은밀하게 이동한 카이엔은 케이루스의 성물을 보관한 홀에 올랐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신을 모시는 신전이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했다. 신을 모실 땅인 성지, 신의 힘을 믿는 성도, 그리고 모시는 신의 힘이 깃든 성물.

    신을 믿는 자가 신의 힘이 깃든 성물과 신을 모실 땅에 제 피를 흘리면 그곳은 신을 모시는 신전이 된다.

    케이루스의 성물을 보관한 별의 홀은 대대로 케이루스의 혈통들이 제 피를 먹여 온 일종의 신전이었다.

    먼 옛날, 신으로부터 직접 축복을 받은 신전은 아니라 행할 수 있는 권능에 조금 차이가 있긴 했다. 이곳을 통해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것은 끽해야 대여섯 명 정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는 제법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비릿한 웃음을 지은 카이엔이 품에서 케이루스의 성물을 꺼내 들었다. 하얗게 빛나는 뼈가 유난히도 성스럽게 보였다.

    그가 날카로운 날붙이로 제 팔을 그었다. 날붙이가 지나간 자리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그는 손가락에 제 피를 묻혀 흰 뼈 위에 이동할 신전의 위치를 나타내는 별자리를 그렸다.

    그러자 별의 그릇에서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파앗! 터져 나오는 강렬한 빛무리 너머로 울창한 숲의 모습이 드러났다.

    카이엔과 제프리는 빛무리 너머로 발을 디뎠다. 조금 전까지 릭센의 왕궁에 있었던 그들은 순식간에 왕궁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숲에 떨어졌다.

    구에에엑, 키키키키키킥, 스르르르르, 갖가지 마물들에게서 나는 기이한 소리들이 울창한 숲을 채우고 있었다.

    케이루스 영지의 북쪽 끝에 위치한 이곳은 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자리라 하여 ‘귀별 숲’이라 이름 붙은 곳이었다.

    귀별 숲은 엘바의 신전처럼 먼 옛날 모라로부터 위대한 축복을 받은 땅이었다. 이 숲은 모든 것을 잃고 낙원에서 쫓겨난 케이루스가 다시금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준 축복의 땅이기도 했다.

    하늘에 걸린 달이 천천히 어둠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개기월식의 시작이었다.

    카이엔은 다시금 제 몸에 피를 내어 흰 뼈 위에 어딘가의 위치를 나타내는 별자리를 그렸다. 빛무리 너머로 저 멀리 리뮈르에 위치한 신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귀별 숲에 우글거리던 마물들이 옆으로 한 발짝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그것들은 리뮈르의 신전에 뚝 떨어졌다.

    그리고 또다시 피로 별자리를 그리자 다른 공간이 연결되었다. 달리오스로부터 그 위치를 전해 들은 달의 마법사가 남긴 저택이었다. 평소라면 이 길은 카이엔의 힘만으로는 열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이 사라지는 월식의 밤. 리뮈르의 핏줄이 달의 길에 올라 그 길을 열어 준다면, 카이엔은 달의 길이 열린 틈을 타 그곳에 마물을 보낼 수 있었다.

    월식에 들뜬 리뮈르를 저 마물들이 송두리째 집어삼키리라. 카이엔은 가슴속 차오르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심판의 리뮈르라니. 멍청하고 우둔한 것들이 갖기에는 가당찮은 이름이었다. 감히 누가 누구를 심판한단 말인가.

    그들이 가진 무력도 귀찮았지만 리뮈르라는 이름이 지닌 상징성이 더 문제였다. 리뮈르가 지닌 권능을 두려워하여 모두가 합심하여 그들을 몰아냈다. 하지만 리뮈르는 자신들을 몰아낸 자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페렌트의 경계를 지켜 왔다.

    그들의 강직함이야말로 카이엔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리뮈르의 강직함은 카이엔이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쌓아 올릴수록 제 발목을 붙잡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순 없었다.

    더구나 아리아드네가 리뮈르로 향했다고 하지 않나. 그녀를 실망하게 할 수야 없지. 전 약혼녀를 위해서라도 마땅한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 제 도리였다.

    별의 홀로 돌아온 카이엔은 느긋하게 때를 기다렸다. 채 낫지 않은 몸을 혹사했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하늘의 달이 모두 사라지고, 사라졌던 달이 다시금 천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카이엔은 여유로운 태도로 월식을 감상했다.

    시간을 다스리는 모라의 권능. 별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시간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모라를 모시는 이들에게 달은 언제나 경외의 대상이었다. 케이루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가진 모든 것들은 모라로부터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사라졌던 달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나 싶은 그때, 강렬한 고통이 그를 덮쳤다.

    “허억― 헉헉…….”

    카이엔은 날카로운 무언가가 제 가슴을 쥐어뜯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겨우 나아 가던 몸이 급작스러운 격통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을 굴렀다. 마치 뾰족한 톱이나 날카로운 가시에 가슴이 뜯기는 것만 같았다.

    ‘왜, 대체 왜…….’

    카이엔은 그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리뮈르를 집어삼키려던 제 시도가 실패했음을 직감했다. 이 고통은 그 실패로 인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왜 실패했는가? 대체 무엇 때문에. 결코 실패할 리 없는 시도가 연이어 실패했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카이엔은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이를 갈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개기월식이 이틀 지난 밤, 카이엔은 그 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하, 리뮈르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은밀히 나타난 제프리가 밀봉된 서신을 받쳐 들었다. 초조하게 리뮈르의 소식을 기다리던 카이엔은 제프리의 손에서 낚아채다시피 서신을 가져갔다.

    잽싸게 일어난 제프리가 초에 불을 붙였다. 주위가 밝아지자 밀봉된 서신을 뜯던 카이엔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이것은 카이엔과 내통한 리뮈르 대주의 조카 달리오스가 보낸 서신이 아니었다. 불길한 예감은 확신이 되어 카이엔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관통했다. 서신을 확인한 그의 손이 마구잡이로 떨렸다. 분노가 그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저, 전하. 왜 그러시―”

    탁, 카이엔이 던진 서신이 제프리의 뺨을 스치고 바닥에 떨어졌다. 제프리가 바닥에 떨어진 서신을 확인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고통으로 핼쑥해진 카이엔의 낯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세 번, 아니, 아리아드네의 시녀까지 치면 이것으로 네 번이군.”

    아리아드네 곁에 심어 둔 위버 자작가의 차녀 줄리라는 계집이 들킨 것이 첫 번째였고, 엘바의 마물이 들킨 것이 두 번째였다.

    캐롤린 리스벨을 묶어 두려 했던 알버트를 빼앗긴 것이 세 번째였고, 마물을 이용하여 리뮈르를 집어삼키려던 것을 저지당한 것이 네 번째였다.

    “그러니까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카이엔의 눈이 위험할 정도로 사납게 빛났다. 제프리는 저도 모르게 움찔 뒤로 물러났다.

    “제, 제가 부족하여―”

    제프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간신히 제 잘못을 고했다. 그가 잘못한 것은 없지만 카이엔에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게 아니지.”

    가까이 다가온 카이엔이 제프리를 내려다보았다. 촛불에 일렁이는 그림자가 유난히도 크게 드리웠다.

    “아리아드네가 혹 앞날을 꿈에서 보았을까? 그래서 내가 어찌 나올 줄 알고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막아서는 걸까?”

    제프리는 그저 지금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제 잘못을 빌었다.

    “어찌 생각하느냐?”

    “제 아둔한 머리로는 도무지―”

    묵직한 무게감이 제프리의 한쪽 어깨를 짓눌렀다. 카이엔의 발에 한쪽 어깨를 짓밟힌 제프리는 눈을 질끈 감고 제 주인의 처분을 기다렸다. 카이엔의 분풀이가 언제 끝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누가 말해 주지 않고서야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럼 대체 누굴까?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이는 세상에 오직 너와 나, 둘뿐인데…….”

    깜짝 놀란 제프리가 고개를 쳐들었다. 이건, 이건 아니었다. 제프리의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카이엔은 경악하는 제프리의 얼굴에서 배신자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너였나? 네가 아리아드네에게 정보를 흘렸나?”

    그가 배신자가 아니라면 지금 이렇듯 두려워할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제프리, 그녀가 네게 뭘 약속했지?”

    카이엔은 더 대단한 것을 약속할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닙니다. 저는 배신하―”

    푸욱, 살을 가르는 소리에 제프리의 말이 멈추었다. 제프리는 더듬더듬 제 목을 감싸 쥐었다. 미끌미끌한 액체가 끝도 없이 쏟아졌다.

    제프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카이엔이 피 묻은 칼을 손에 든 채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배신한 것이 아니라면 내 완벽한 계획이 실패할 리 없잖느냐.”

    이것이 카이엔의 답이었다.

    “저는, 결코…….”

    제프리는 아직도 제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평소처럼 시킨 일을 했을 뿐이고, 리뮈르의 일이 틀어진 것은 저와는 조금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왜, 정……말, 저는…….”

    제프리는 제 앞의 카이엔이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팔을 뻗었다. 피범벅이 된 제프리의 손이 카이엔의 옷깃을 스치며 떨어졌다.

    카이엔은 제 얼굴에 튄 피를 닦으며 제프리의 피 묻은 손자국이 남은 침의를 벗어 던졌다. 이따위 불결한 옷은 한순간도 몸에 걸치고 싶지 않았다.

    * * *

    카이엔은 목깃까지 올라오는 검은 옷으로 몸을 감쌌다. 진통제를 쏟아부은 덕에 간신히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장식이 없는 검은 옷과 창백한 낯빛이 그를 더욱 시름에 잠긴 사람처럼 만들어 주었다.

    “전하, 간밤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으셨다고요.”

    마찬가지로 검은 옷을 차려입은 남자는 카이엔의 최측근인 레비에 후작이었다.

    “아아, 쥐새끼 한 마리를 처리했지.”

    카이엔은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로 다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국상 중에 제일 유력한 왕위 계승자인 1왕자의 궁에서 시체가 나오다니. 레비에 후작은 카이엔의 방만한 행실이 불만스러웠으나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카이엔은 잠시의 정적조차 불만스러운지 비뚜름한 웃음을 걸고는 빙글 몸을 돌렸다.

    “레비에.”

    “네, 전하.”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간 카이엔이 제 소매를 정리하며 말했다.

    “우리 쪽 정보가 새고 있어. 그만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지.”

    고개 숙인 카이엔의 입술이 레비에 후작의 귓가에서 달싹였다.

    “내가 제프리의 목을 자르지 않았다면 누구의 목이 잘렸을 것 같은가.”

    나지막한 경고의 말은 레비에 후작을 향하고 있었다. 느릿하게 몸을 세워 멀어진 카이엔이 레비에 후작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좀 더 기뻐하지 그래. 후작을 향한 내 신뢰가 이토록 두터우니.”

    고개를 숙인 터라 레비에 후작의 표정을 확인할 순 없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가 카이엔에게 원하는 것은 신뢰 따위가 아니니까.

    “곧 그대가 원하는 대로 될 거야. 그때가 되면 레비에는 다른 기둥을 섬기지 않아도 되겠지.”

    레비에가 원하는 것은 왕가 다음 자리를 차지하는 것. 그것을 이루어 줄 수 있는 것은 카이엔뿐이었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은 카이엔이 새로운 수족의 이름을 불렀다.

    “제롬.”

    제롬, 그것이 새로운 제프리의 이름이었다. 죽은 제프리를 대신해 카이엔의 새로운 수족이 된 제롬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왕후는?”

    “지하 안치소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왕후가 자신을 기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낮에도 어둑한 복도를 지나 지하 계단을 내려가자 서늘한 공간이 나타났다.

    대리석 석판 위에는 방부 처리를 한 다그마르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었다. 다그마르의 관 주위로는 횃불이 빙 둘러싸고 있었는데 이는 망자가 저승으로 가는 길을 잃지 말라는 뜻이었다.

    왕의 시신을 안치한 이곳에 카이엔보다 먼저 도착한 사람이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남자가 다그마르의 관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이엔이 남자를 부르려던 순간이었다. 푸른빛이 도는 검은 머리카락이 심해의 물결처럼 흔들리더니 이윽고 그의 얼굴이 다그마르의 관에 닿았다.

    ‘미쳤군.’

    카이엔은 비소를 머금으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왕후께서 먼저 오셨군요.”

    카이엔의 부름에 다그마르의 관에 얼굴을 기댄 남자가 제 몸을 바로 세웠다.

    “왕자.”

    칼의 서늘한 목소리가 석벽을 울렸다.

    “기도를 올리는 사제의 수를 늘리는 게 좋겠어. 폐하의 영혼이 어두운 곳으로 떨어지면 어떡하나.”

    자살한 영혼은 결코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알려져 있었다.

    자살한 영혼이 떨어지는 지옥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어둠이며, 어둠에 갇힌 영혼은 다시 태어날 수도, 그곳을 벗어날 수도 없다고 한다.

    칼은 자살한 다그마르의 영혼이 어둠 속에 갇힐 것을 걱정하여 날마다 수십의 사제가 망자를 위한 기도를 올리도록 했다.

    여기서 사제의 수를 더 늘린다고 자살한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을 리가. 하지만 카이엔은 굳이 그런 말로 칼의 심기를 거스를 이유가 없었다.

    “왕후의 말씀이 옳습니다.”

    지금 도움이 필요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얌전히 눈을 내려 깐 카이엔의 시선에 칼의 발끝이 걸렸다. 그에게 다가온 남자가 카이엔의 머리 위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왕자의 궁에서 피를 보았다지? 국상 중에 사람을 죽여야만 했던 이유가 그럴듯해야 할 텐데 말이야.”

    칼의 목소리에는 불쾌함이 묻어 있었다. 남자는 다그마르의 상중에 궁에서 피를 본 자신을 질책하고 있었다. 카이엔은 입 안을 짓씹으며 최대한 유순한 목소리를 꾸며 냈다.

    “그들이 메르디에스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흐음,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왕후가 조금 감탄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왕자는 소식이 참 빠르군. 나도 나름 여기저기 눈을 심어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칼의 물음이 이어졌다.

    “그래, 리뮈르에서 왕자가 원하던 것은 이루었고?”

    “……내부에 메르디에스의 세작이 있었습니다. 어제 처리했으니 앞으로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어째 내가 줄을 잘못 선 모양이야. 왕자가 이토록 무능한 줄 미처 몰랐군. 아니, 공녀가 지나치게 뛰어난 건가?”

    모든 게 제 뜻대로 굴러갈 줄 아는 애송이 같으니. 칼은 잠시의 화를 참지 못하고 가장 가까운 심복을 죽여 버린 어린 왕자를 즐거이 바라보았다.

    “왕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자네가 말한 것은 준비해 두었네. 곧 리카서스와 메르디에스 사이의 경계에서 자그마한 소요가 있을 걸세. 뭐, 운이 좋으면 그럴듯한 걸 잡을 수도 있을 것 같고.”

    리카서스의 동쪽 경계는 메르디에스의 서쪽과 맞닿아 있었다. 오래전, 그곳에 분란의 씨앗을 심어 두었으니 곧 수확할 때였다.

    카이엔이 요청한 것은 칼이 소요를 일으켜 시선을 돌려 주는 것이었다. 그가 메르디에스 내부에서 어떤 일을 벌일 수 있도록.

    “그래 내가 시간을 끄는 동안 무얼 할 텐가.”

    “메르디에스에 물건을 팔아 볼까 합니다.”

    “장사라……. 좋지. 장사는 메르디에스의 특기가 아닌가. 그치들은 도무지 손해 보는 법이 없지. 분명 앉은 자리에서는 이득인 거래 같았는데 돌아서면 내가 손해더란 말이야. 왕자는 이득을 남길 수 있으려나.”

    이번 일도 실패하면 저 왕자에게 더는 기대할 것이 없었다.

    “한 번 더 기대해 보지.”

    “감사합니다.”

    칼의 그 말이 마지막 기회임을 카이엔도 모르지 않았다.

    “내게 할 말이 끝났나? 그럼 나가 보게. 혼자 있고 싶으니.”

    그렇지 않아도 진통제의 효과가 떨어져 가던 참이었다. 카이엔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남자를 그곳에 두고 돌아 나왔다.

    왕의 시신을 안치한 그곳에는 왕의 두 번째 남편이었던 자만이 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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