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하얀 꽃이 피어난 것처럼 나뭇가지마다 모두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새어 나온 입김이 하얗게 부서졌다.
“곧 포르타로 진입합니다.”
길을 안내하는 리뮈르의 기사가 알려 왔다. 포르타만 넘으면 그 뒤로는 쭉 평지였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후두둑 떨어지더니 그중 일부가 아리아드네의 머리 위로도 떨어졌다. 아리아드네는 손을 들어 머리카락에 붙은 눈 뭉치를 털어 냈다. 눈이 닿은 손바닥에 물기가 흥건했다.
―이 몸은 바다를 다스리는 위대한 신 테티스의 마지막 권속 무렉스이니라.
―다른 욕심은 다 버렸는데, 렉사만은 제가 없어도 계속 웃었으면 좋겠습니다.
―저, 감사합니다, 공녀. 제게 포기하지 말라고 해 주셔서. 꼭 살아남겠습니다.
―잠깐. 네게 선물 하나를 주마. 그게 있으면 물에 빠져도 한 번은 살 수 있겠지.
아리아드네는 목에 걸린 렉사의 구슬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토해 냈다. 그렇지 않으면 메르디에스가 아니라 당장 릭센으로 달려갈 것만 같았다.
“당신 탓이 아니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유진은 제 속을 모두 들여다 본 것처럼 위로했다. 그가 제 얼굴에 남은 물기를 훔쳐 냈다.
“……응.”
“하지 못한 일을 후회할 때가 아니야. 해야 할 일이 남았잖아.”
그는 자신을 일으키는 법을 잘 알았다. 렉사와 루안을 다시 살릴 수 없다면 그들의 죽음이라도 밝혀야 했다.
“그래. 해야 할 일이 남았지.”
다시 낮은 한숨을 토해 낸 아리아드네가 말을 재촉하며 멀어졌다. 유진은 제 손에 남은 물기를 바라보다 날카로운 것에 찔린 듯한 상흔에 시선이 닿았다.
―당신이 찾는 물건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까요. 이래도 거절하시겠습니까?
1왕자가 케이루스의 성물을 들이민 그날의 상처가 아직도 그의 몸에 남아 있었다. 평소라면 반나절도 되지 않아 사라졌을 상처였다. 제 몸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유진은 채 낫지 않은 가슴의 상처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죽지 않는 괴물 같은 이 몸이 그토록 끔찍했던 순간도 있었는데, 이제는 이 몸이 죽을까 봐 겁이 났다.
유진은 고개를 들어 멀어지는 리뮈르를 눈에 담았다. 하늘까지 맞닿은 땅, 디움에 둘러싸인 리뮈르가 점점 멀어졌다.
그는 카푸트의 기억이 묻혀 있을 디움 너머를 뒤로하고 아리아드네를 향해 말을 몰았다. 부서지는 햇빛처럼 찬란한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에 닿을 듯이 나부꼈다. 그녀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면 그는 언제까지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 * *
타닥타닥, 불티가 튀어 올랐다. 불빛에 비친 얼굴들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군도(軍道)는 군대의 수송과 이동을 위한 길이었다. 이곳 포르타 군도는 산을 횡으로 가로지르는 길이라 빨리 갈 수 있는 대신 쉴 곳이 마땅치 않았다. 오늘 밤은 꼼짝없이 노숙이었다.
조그마한 모닥불을 둘러싸고 옹기종기 사람들이 모여 앉았다. 초라한 장소와는 달리, 그들의 면면만큼은 왕궁에서 열리는 무도회가 부럽지 않았다.
페렌트를 다스리는 다섯 가문 중 ‘심판의 리뮈르’의 장녀인 달로아가 나뭇가지로 바닥을 직직 그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버지, 저 ‘심연의 눈’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미에르가 아니라 로아, 네가?
리뮈르의 성물이 보관된 곳에서 성물이 사라지고 달미에르는 시력을 잃었다. 언젠가 달미에르가 심판의 권능을 발휘하게 될지도 모른다. 다들 그런 각오를 하며 지내 왔다.
달헤임은 각오했던 아들이 아니라 딸이 권능을 가졌다는 것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정확히 말하면 미에르와 제가요. 미에르는 비추는 눈을, 저는 읽어 내는 눈을 나눠 가진 것 같아요.
―어떻게 이런 일이…….
달헤임은 침음을 삼키며 제 머리를 짚었다.
―그러니까 알려 주세요. 역대 ‘심연의 눈’의 소유자들에 대해서.
달헤임은 심란한 얼굴로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역대 리뮈르의 대주 가운데 심연의 눈을 다룰 수 있었던 이는 불과 여덟 명에 불과했다.
그들은 항상 눈을 가리는 얇은 천을 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눈이 어떠한 생김새였는지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얇은 천 아래 가려진 눈은 한쪽은 미에르처럼 혼탁한 눈이고, 한쪽은 본디 지닌 눈이라 했다. 미에르는 눈이 변하고도 권능이 발현되지 않았지. 나는 그것이 우리 일족에게 더는 권능이 나타나지 않을 징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니…….
미간을 문지르며 낮은 한숨을 내쉰 달헤임이 달로아에게 물었다.
―그런데 심연의 눈을 나눠 가졌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저도 정확한 건 잘 모르겠어요. 연못에 비친 미에르의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달리오스의 기억이 제 머릿속으로 들어왔다는 것밖엔…….
달로아가 아직도 혼란스럽다는 듯 뒷말을 흐렸다.
―네가 달리오스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을 땐 아무 일도 없었고?
―네. 달리오스의 기억을 비춘 건 제가 아니라 미에르의 눈이었어요. 저는 미에르의 눈에 비친 기억을 읽은 거고요.
달로아가 자신의 한쪽 눈을 덮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 거울이 사라진 건 10년도 전의 일인데, 왜 오늘에서야 그 능력을 발휘하게 된 걸까요?
그런 달로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달헤임이 무언가를 짐작한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로아, 아무래도 오늘에서야 그 능력이 발휘된 게 아니라, 오늘에서야 그 능력이 발휘될 상황이 만들어졌다는 게 맞을 것 같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달헤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달로아가 되물었다.
―심연의 눈은 상대와 눈을 마주한 순간, 상대가 떠올린 기억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란다.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비추는 눈과 읽어 내는 눈을 한 사람이 가진 경우라면 별다른 제약이 없었겠지. 하지만 하나였어야 할 심연의 눈이 둘로 갈라지는 바람에 능력에 어떤 제약이 생긴 것 같구나.
―제약이라면…….
그 순간, 달로아는 달헤임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너는 미에르가 상대와 눈을 마주하고 기억을 비추는 동안에만 그 기억을 읽을 수 있지.
달헤임은 최대한 담담한 어투로 설명을 이어 갔다.
―여기에서 ‘미에르가 상대와 눈을 마주하고 기억을 비추는 동안’이라는 시간적 제약이 발생하게 되지.
첫 번째 제약은 또 다른 제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 네가 미에르의 눈에 비친 기억을 읽어 내기 위해서는 ‘상대의 기억을 비추고 있는’ 미에르의 눈동자와 마주해야겠지. 그때, 미에르의 눈이 상대가 아닌 로아 너를 향하고 있다면…….
달헤임이 말없이 달로아를 바라보자 그녀가 허탈한 듯 낮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겠죠. 미에르의 눈에 비친 것은 내 기억일 테니. 어쩌면 내가 떠올린 기억과 내가 읽어 낸 기억이 같은 것일 테니 구분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고요.
달로아는 맥이 풀린 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가 미에르의 눈에 비친 기억을 읽기 위해서는 다른 매개체가 있어야 했던 거군요.
달로아가 달리오스의 기억을 읽을 수 있었던 건 겹겹이 쌓인 제약을 우연히 피한 결과였다.
달로아가 달리오스의 기억을 읽었던 그때, 달미에르는 연못에 잠겨 가는 달리오스와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달로아는 연못의 수면에 비친 달미에르의 눈동자를 아무런 방해 없이 마주할 수 있었다. ‘달리오스의 기억을 읽고 있는’ 달미에르의 눈동자와 말이다.
이렇듯 달로아가 ‘심연의 눈’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기억을 비추는 순간의 달미에르의 눈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매개체가 반드시 필요했다.
겹겹이 쌓인 제약이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상대의 기억을 읽어 내는 능력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날, 거울은 만진 건 저였어요. 미에르가 권능을 나눠 짊어지게 된 건 우리가 쌍둥이이기 때문일까요?
―로아, 그것은 네 탓이 아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아버진 그때도 그러셨어요. 미에르의 눈이 그렇게 된 건 내 탓이 아니라고.
모두가 달로아의 탓이 아니라고 했지만, 달로아만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자신 때문에 시력을 잃은 동생을 두고 뻔뻔하게 가문을 이을 자신이 없어서 일부러 더 밖으로 나돌았다.
가문의 일에 관심을 두거나, 몸을 단련하고, 영지를 경영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내내 도망쳤다. 결국, 그중 무엇도 완전히 포기하지 못한 주제에.
―그러면 미에르의 눈이 그렇게 된 건 누구 탓인가요?
고개를 숙인 달로아를 내려다보던 달헤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이건 널 위로하려는 말이 아니야. 객관적인 사실이지. 심판의 권능을 이었던 선조들 중 거울을 만지지 않고도 권능을 이어받은 자 역시 존재한다. 그러니 그날, 네가 거울을 만지지 않았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다.
달헤임의 목소리는 그저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담담했다. 고개를 든 달로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럴까요?
―그래. 오늘 일까지 겪고 나니 더 그런 생각이 드는구나. 어떤 거대한 힘이 우리를 이끄는 것 같지 않니?
달헤임의 깊고 평온한 눈동자를 보며 달로아는 어떤 예감에 휩싸였다.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열었다.
―아버지도 짐작하고 계시는 거죠? 제가 리뮈르를 떠날 거란 걸.
거센 바람이 리뮈르에 불어 닥쳤다. 달로아는 지금이야말로 이 바람에 몸을 맡길 때라고 직감했다.
“하아…….”
나뭇가지로 바닥에 직직 그림을 그리던 달로아가 한숨을 내쉬며 성의 없이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바닥에는 눈썹이 위로 뻗은 왕방울만 한 눈이 한 쌍 그려져 있었다. 기괴한 모양새가 얼핏 봐도 범상치 않았다.
“마물이 나타날까 봐 걱정돼서 그래?”
아리아드네가 달로아가 그린 그림을 보며 물었다.
“예술을 보는 심미안 좀 키워야겠네. 이게 어디를 봐서 마물이야?”
달로아가 황당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으음……. 그럼?”
아리아드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달로아는 가슴이 답답해서 소리를 빽 질렀다.
“그냥 사람 눈이잖아! 어딘가 성스러운! 어?”
자신이 갖게 된 ‘심연의 눈’을 그린 달로아가 주위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하듯 바라보았지만 다들 시선을 피했다.
“와, 지금 이거 뭐야?”
달로아는 조금 전까지 흠뻑 빠져 있었던 제 섬세한 감성이 단박에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달로아가 구시렁대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날 달로아가 달리오스의 기억에서 읽은 것 중에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달로아는 그것이 못내 찝찝했다.
‘그렇다고 내 권능으로 알아내기엔 이 능력이 너무 제한적이야.’
달로아가 권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기억을 읽고 있는 달미에르의 눈을 비출 어떤 매개체가 필요했다.
‘거울?’
달로아는 고개를 저었다. 거울을 보는 달미에르의 눈동자를 보아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다. 거울에 비친 것은 ‘거울을 보는 달미에르의 눈동자’일 테니까.
답답해진 달로아가 혼탁한 달미에르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것처럼 달미에르가 눈을 곱게 접으며 생긋 웃음을 지었다. 달로아는 동생의 달콤한 웃음에 생리적인 불쾌감을 느끼고는 얼굴을 구겼다.
그것도 모르고 달미에르는 더 짙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원래 제 누이가 예술적 소양이 뛰어난 편은 아니죠.”
느슨하게 묶은 달미에르의 붉은 머리가 달로아를 놀리듯 흔들렸다.
“넌 또 무슨 헛소리야.”
달로아가 제 동생을 향해 힘차게 발을 뻗자 달미에르는 가볍게 움직여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발을 피했다. 리뮈르 남매는 볼 때마다 참 사이가 좋으면서도 나빴다.
아리아드네는 그사이에 달로아가 그린 그림을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봐도 마물의 형상이 분명했다.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오늘은 이만 쉬시지요.”
그때, 리뮈르 기사가 다가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바람과 밤이슬을 막아 줄 간이 막사가 완성되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경.”
“아닙니다. 이 정도로…….”
기사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멀어졌다. 아리아드네가 그간 리뮈르에서 한 일들을 알게 되자, 리뮈르 기사들의 태도가 우호적으로 변했다.
“내일 봐.”
자리에서 일어난 아리아드네가 중앙에 위치한 막사로 발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저, 저…….”
망설이는 남자의 목소리에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돌렸다.
“제게 할 말이 있나요, 리카르도 경?”
아이들과 헤어진 뒤로 리카르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그것이…….”
무엇이라 말할 것처럼 달싹이던 입은 다시 굳게 닫혀 버렸다.
“믿었던 진실과 목격한 현실 사이에서 혼란스러우신가요?”
정곡을 찔린 리카르도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그네스가 시킨 일을 할 때면 머릿속이 늘 깨끗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시키는 일만 하면 됐으니까.
같은 일을 하는 성기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똑같은 틀에서 찍어 낸 것처럼 같은 말과 행동을 반복했다. 성기사단의 부단장으로 있을 때는 고민할 것이 없었다.
“공녀는 사람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하지만 눈앞의 아리아드네는 달랐다.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제가 진리처럼 믿어 왔던 신념과 믿음들이 흔들렸다.
성 상티모니아는 정말 이 사태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가. 예전에는 주저 없이 그렇다고 답할 수 있었던 질문에 지금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경, 우리 아버지 천국에 가셨겠죠? 사람들을 위해서 마물을 해치우다가 돌아가셨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억지로 웃던 톰의 얼굴이 어른거려 리카르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체 제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필이면 왜 저를 요구했습니까? 저보다 가치 있는 것들이 훨씬 많았을 텐데!”
그러면 눈앞의 여자가 미워졌다. 아리아드네가 아그네스에게 리카르도를 요구한 탓에 그의 인생은 산산이 무너져 내렸다.
“왜 내가 경의 혼란을 잠재워 주기를 바라나요? 그건 경의 몫이 아닙니까? 제자에게 부끄러운 스승이 되기 싫은 건 경이지 제가 아닌걸요.”
아리아드네는 그대로 돌아서 막사 안으로 사라졌다. 하, 한숨이 섞인 허탈한 웃음이 리카르도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아리아드네는 그를 번민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모든 번민을 사라지게 했던 아그네스와는 정반대였다.
아리아드네와 함께 있을 때면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머저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살아남으려 꿈틀대는 애벌레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이렇듯 치열했던 순간이 대체 언제였던가. 리카르도는 뜨거운 숨을 꿀꺽 삼켰다. 온몸이 참을 수 없이 뜨거웠다. 리카르도는 붉어진 얼굴을 차마 보일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
말없이 이를 듣고 있던 달미에르의 한쪽 눈썹이 살짝 들렸다. 눈이 보이지 않는 만큼 다른 감각이 예민한 그였다. 그는 술렁이는 리카르도의 마음을 장본인보다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경, 오늘은 이만 들어가시죠.”
달미에르가 멍하니 서 있는 리카르도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몽롱한 여운에서 강제로 벗어난 리카르도가 허둥지둥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채 가시지 못한 붉은 기가 남아 있었다.
“왜…….”
고개를 든 리카르도는 예상치 못한 시선과 부딪혔다.
“…….”
유진의 회색 눈동자가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서늘한 시선에 뜨겁게 달아올랐던 몸이 빠르게 식었다.
‘왜, 왜 그러지?’
리카르도는 좀처럼 제게서 눈을 떼지 않는 유진의 눈치를 보며 뒷걸음질로 슬그머니 사라졌다.
“넌 왜 갑자기 죽상이야?”
달로아가 인상을 잔뜩 구긴 달미에르에게 다가가 팔꿈치를 툭 치며 눈치 없이 물었다.
“신경 꺼.”
달미에르가 한숨을 내쉬며 자신에게 들러붙는 달로아의 얼굴을 밀어냈다.
그렇게 저마다의 밤이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