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만월의 달빛이 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리아드네는 자리에 누운 채로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아 렉사가 주었던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이 밤,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리뮈르 공작저는 고요한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방마다 작은 불빛이 새어 나왔다.
자는 것을 포기한 아리아드네가 침대에서 일어나 무릎을 모으고 그 위에 머리를 기대었다.
[부정한 왕은 리뮈르의 심판을 받으라.]
과거의 달로아는 ‘심연의 눈’을 가지고도 카이엔을 심판하는 데 실패했다.
‘이걸로 큰 고비는 넘긴 건가.’
아리아드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제 무릎에 얼굴을 더 깊게 묻었다.
콰앙! 쾅쾅쾅쾅!
그때,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리아드네가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선 자를 확인한 아리아드네는 불길한 예감에 머리끝이 쭈뼛 섰다.
“무슨 일이야? 조셉.”
이 새벽에 아리아드네를 찾은 이는 메르디에스 상단원인 조셉이었다. 하얗게 질린 조셉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쏟아 냈다.
“아리아드네 님, 큰일 났습니다. 포르타 너머로 보낸 사람이 막 도착했는데……”
조셉의 손에는 아직 뜯지 않은 서신들과 이미 확인한 듯한 서신들이 뒤섞여 있었다.
“제 선에서 확인 가능한 서신을 검토하던 중에 이것을 보고는 도무지 아침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조셉이 그중 가장 위에 있는 편지를 아리아드네에게 건네주었다. 편지를 받은 아리아드네가 말없이 내용을 확인했다. 내용을 확인한 아리아드네가 그 자리에서 나머지 편지들을 모조리 뜯어 확인을 마쳤다.
“달리오스 측 인사들이 리뮈르 내로 진입하는 틸레를 모조리 죽였던 모양입니다.”
조셉의 말대로 편지의 내용들은 모두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국왕 다그마르 자살, 두 왕자 피습, 2왕자 루안 사망, 1왕자 카이엔 중상, 케이루스 측은 피습의 유력한 용의자로 이계의 방문자 유진을 지목함, 1왕자 측에서 아리아드네의 메르디에스 부재를 확인함, 긴급 회신 및 귀환 바람.」
아리아드네가 손에 쥐고 있던 렉사의 구슬을 떨어트렸다.
‘렉사…….’
목에서 쓴 것이 울컥 올라왔다. 루안이 죽었다면 렉사 또한 소멸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 당장 메르디에스로 귀환한다.”
“날이 밝는 대로 떠나시는 편이…….”
“대주님께는 내가 말씀드리지. 조셉, 넌 지금 당장 유진에게 말을 전해.”
아리아드네는 줄을 당겨 하녀를 불렀다. 하녀에게 짐을 꾸려 줄 것을 부탁한 아리아드네가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떠나기 전에 대주님께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은데.”
아리아드네의 말에 하녀가 시녀장을 불러왔다.
“대주님께선 집무실에 계십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달헤임 또한 잠이 들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아리아드네는 시녀장의 안내를 따라 불빛이 어른거리는 복도를 걸었다. 시녀장은 짙은 나무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대주님, 메르디에스 공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하십니다.”
시녀장의 알림에 벌컥 소리를 내며 집무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집무실 밖으로 고개를 내민 것은 리뮈르 대주가 아닌 달로아였다.
“이렇게 급하게?”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얼굴을 작게 찌푸린 달로아가 아리아드네를 잡아끌었다. 등 뒤의 문이 조용히 닫혔다.
“공녀가 조금 더 머무를 줄 알았는데……. 해야 할 이야기도 남았고.”
깊게 한숨을 내쉰 달헤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다그마르 폐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 사인은 자살이라고 합니다.”
아리아드네의 말에 놀란 두 사람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런 연락은 받지 못했네.”
“달리오스 짓이겠죠.”
달로아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제가 받은 서신을 달헤임에게 보여 주었다.
“달리오스가 손을 써서 제게 오는 연락 또한 닿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조금 전에야 포르타 너머로 보낸 사람이 도착했습니다.”
내용을 확인한 달헤임의 낯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말씀드린 대로 마물의 발생은 성물과 관련이 있습니다. 리뮈르에 유독 강한 마물이 자주 나타나는 것은 디움이나 그 너머에 존재하는 어떤 성물 탓일 확률이 높습니다.”
아리아드네는 달리오스가 말하려고 했던 마물의 발생과 관련된 정보들을 달헤임과 공유했다. 달리오스가 디움 경계소의 기사들을 제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것 때문이었다.
달리오스는 그들이 죽여 온 마물이 한때는 인간이었던 존재고, 리뮈르 일가가 이것을 알면서도 기사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며 그들을 부추겼다. 극한의 환경에서 교묘하게 왜곡된 정보를 주입 당한 이들은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달리오스에게 이용당했다.
“공녀에겐 정말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졌네.”
가까이 다가온 달헤임이 고개를 숙였다. 아리아드네가 그런 달헤임을 만류하며 말했다.
“아닙니다. 리뮈르엔 아직도 갚아야 할 빚이 더 많습니다.”
“공녀가 날 여러모로 부끄럽게 만드는군그래. 호위가 필요하진 않겠나?”
아리아드네가 그럴 필요 없다고 거절하려던 순간이었다.
“호위보다 내 쪽이 더 쓸모 있을걸?”
달로아가 빙긋 웃으며 끼어들었다.
“로아.”
“아버지, 저 무작정 떼쓰는 거 아니에요. 아버지도 그러셨잖아요. 어떤 거대한 힘이 우리를 이끄는 것 같다고.”
달로아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저를 보는 달헤임을 향해 웃으며 덧붙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유가 있겠죠.”
달로아의 손이 제 눈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딸을 보는 달헤임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아버지, 로아 걱정은 마세요.”
그렇게 말하며 집무실에 들어선 이는 달미에르였다. 그는 떠날 준비를 모두 마친 차림새였다.
달미에르가 달로아 옆에 나란히 자리했다. 달헤임은 그런 리뮈르 남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로아 말대로 다 이유가 있겠지.”
달헤임이 제 자식들을 힘차게 끌어안았다가 놓아주며 말했다.
“누가 뭐라 해도 우리는 이 땅의 파수꾼이다.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행동해라.”
달헤임의 묵직한 음성 위로 가늘고 높은 소리가 얹어졌다.
“당신은 애들이 떠나는데 할 말이 고작 그런 것뿐이에요?”
문가에 기대어 서 있던 달리케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무런 감흥 없는 얼굴로 멀뚱멀뚱 서 있는 남매를 바라보는 달리케의 미간이 조금 구겨졌다.
‘제 아버지는 벌써 눈가가 촉촉한데 하여간 자식새끼 키워 봤자지, 쯧.’
가볍게 혀를 찬 그녀가 쌍둥이 남매의 어깨에 양손을 올리며 당부했다.
“명예와 목숨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대답을 기다리는 듯 달리케의 말끝이 늘어졌다.
“당연히 목숨이죠.”
“명예를 선택할 겁니다.”
동시에 나온 달로아와 달미에르의 대답은 정반대였다. 달리케와 달로아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명예를 선택한’ 달미에르를 바라보았다.
“네 책임이 무겁겠구나.”
달리케가 달로아의 어깨를 두드려 주자 달미에르의 얼굴이 팍 찌그러졌다. 그리고 그때, 달리케가 들어오며 활짝 열어 둔 집무실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준비를 마친 유진이 어서 떠나자는 듯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그의 뒤에는 조셉과 넋이 반쯤 빠진 리카르도가 휘청대며 서 있었다.
유진에게 다가간 아리아드네가 그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당신, 몸은 괜찮아? 이곳에서 며칠 쉬다가 천천히 와도 돼.”
유진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이럴 시간 없는 걸로 아는데, 어서 가지.”
그가 아리아드네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공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저의 앞마당에는 짐을 실은 말과 리뮈르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포르타를 가로지르는 군도(軍道)가 있어요. 리뮈르 기사들이 그 길을 안내해 줄 거예요.”
따라 나온 달리케가 기사들을 향해 눈짓하며 말했다. 아리아드네가 리뮈르를 떠나려 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서야 준비했을 텐데, 대단한 기동력이었다.
“그럼 연락드리겠습니다.”
아리아드네가 말에 오르려던 순간이었다. 내내 넋이 빠진 얼굴이던 리카르도가 어딘가 망설이는 목소리로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 저―”
“리카르도 경, 할 말이 있나요?”
아리아드네가 묻자 입을 꾹 다문 리카르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리카르도가 미련이 뚝뚝 남은 몸짓으로 느릿하게 등자에 발을 걸던 그때였다.
“리카르도 경!”
“경! 리카르도 경! 이렇게 가시면 어떡해요.”
아이들이 갑자기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너희들!”
말 위에서 훌쩍 뛰어내린 리카르도가 아이들을 꼭 안아 주었다. 그중에서도 리카르도의 왼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남자아이가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경, 이렇게 갑자기…….”
“톰, 다친 덴 괜찮고?”
리카르도가 톰의 몸 구석구석을 살피며 물었다. 그가 끝까지 머뭇거린 이유는 바로 이 소년 때문이었다.
―리, 리카르도 경,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까 리뮈르를 지켜 주…….
달리오스가 아이를 거칠게 다루며 묶었던 흔적이 아직 손목에 남아 있었다. 리카르도는 그 상처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이깟 상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훌쩍거리던 톰이 눈물이 퐁퐁 솟아나는 눈을 마구잡이로 비비며 말했다.
“저, 가르쳐 주신 것 게으름 안 부리고 날마다 열심히 할게요. 횡 베기 날마다 천 번씩 할 거예요. 그러니까 다시, 다시, 히끅―”
의젓한 모습으로 스승을 보내 주려 했던 소년의 각오는 터져 나오는 울음과 함께 무너졌다.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리카르도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에 만날 땐 더 많은 걸 가르쳐 주마.”
“빨리, 오셔야 해요.”
톰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인 리카르도가 자신을 둘러싼 아이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나누었다.
푸르스름하게 물든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온몸에 달라붙었다. 이별의 순간은 아무리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리카르도는 훌쩍 말 위에 올라 뒤를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히이이잉― 말이 울부짖는 소리가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덮었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고요한 새벽 공기 사이로 퍼져 나갔다.
메르디에스를 떠나온 지 석 달 만의 귀환이었다.
* * *
메르디에스에 붉은 반점이 찍힌 비둘기가 날아들었다. 메르디에스의 주인 레너드는 비둘기의 발목에 달린 대롱에서 둘둘 말린 종이를 꺼냈다.
맞은편에 앉은 캐롤린이 긴장한 얼굴로 레너드를 바라보았다. 다 읽은 종이를 물에 휘적휘적 적신 레너드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안심하렴. 아리아드네는 아무 일도 없다는구나.”
리뮈르로 간 아리아드네에게서는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끊겼다. 기다리다 못한 레너드가 일부 병력을 파견하려던 찰나, 아리아드네가 보낸 틸레가 도착했다.
“리뮈르가 1왕자가 보낸 마물로 인해 큰 해를 입을 뻔했다는구나. 그동안 연락이 원활하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라 하고. 다행히도 잘 수습했고, 지금은 귀환하는 중이라는구나.”
캐롤린은 그제야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 다행이에요.”
한숨 돌린 건 레너드도 마찬가지였다. 며칠 내내 긴장했더니 온몸이 뻐근했다. 레너드가 어깨를 휘휘 돌리며 물었다.
“릭센의 사자는 어쩌고 있어?”
마침내 왕도 릭센에서 국왕의 붕어를 알리는 사자가 도착했다. 사자는 메르디에스 공작 레너드에게 선왕의 장례식과 새로운 왕의 즉위식에 참석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그들의 요구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사자는 왕자들을 피습한 인물이 아직 잡히지 않았으니 왕궁에 머무르는 병력에 제한을 두겠다고 했다.
“변함없이 같은 말만 하고 있어요.”
캐롤린이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사자는 왕궁 내에서 각 공가가 대동할 수 있는 병력이 고작 서른이라는 헛소리를 길게도 늘여 놓았다.
“미친놈들, 곱게 죽으러 오라는 소리를 대놓고 하네.”
레너드가 코웃음을 치며 빈정거렸다. 손가락을 빙빙 돌리던 레너드가 제 목을 가로로 그으며 씨익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모가지를 따서 추수제 식탁에 올릴까 보다.”
캐롤린은 레너드 익살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메르디에스 추수제가 불과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
프레모 대륙 최대 곡창 지대인 메르디에스에서 추수제는 일 년 행사 중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매년 아리아드네가 도맡아 했던 일이었지만 올해는 캐롤린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추수제 준비로 네가 고생이구나.”
국왕이 승하한 시기라면 추수제를 생략하거나 줄이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레너드는 조금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레너드는 오히려 이번 추수제에 두 배 이상의 예산을 집행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리아가 추수제가 끝나기 전에 돌아오면 좋을 텐데…….”
추수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추수가 끝난 들판에 불을 놓는 일이었다. 캐롤린은 그 일만큼은 아리아드네가 하기를 바랐다.
레너드는 추수제 생각에 빠진 캐롤린을 유심히 살폈다. 캐롤린의 어린 시절을 전부 아는 레너드 눈에는 아직도 덜 자란 아이 같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는 시간만큼 빠른 건 없었다. 눈앞의 캐롤린은 완연한 성인이었다.
“커티스는 다른 말 없고?”
레너드의 뜬금없는 질문에 캐롤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외부인이 영내에 있을 때면 늘 예민하시잖아요. 그럴 땐 더 말씀이 없으시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알, 알버…….”
“……알버트 말씀이세요?”
“그래, 알버트! 소르체로 떠난 네 애인 말이다.”
“…….”
애인이라는 노골적인 단어에 순간 대꾸할 말을 잃은 캐롤린이 제 손끝만 만지작거리다 작게 고개를 숙였다.
“이 모두가 성주님의 은혜입니다.”
“내 은혜랄 게 있나. 나야 자리만 만든 게 전부인데……. 코라가 네 애인을 좋게 본 거지.”
오른팔을 다친 알버트는 케이루스의 상업 도시 일레체에서 메르디에스로 귀환했다.
메르디에스로 돌아온 알버트는 레너드의 도움으로 소르체의 혈족인 코라와 만날 수 있었다. 콧대 높은 코라에게 알버트가 잘 보였는지 그녀는 흔쾌히 소르체의 영지에 있는 다른 의원을 소개해 주었다.
캐롤린이 릭센에서 메르디에스로 돌아왔을 때, 알버트는 치료를 위해 소르체로 떠난 다음이었다.
“아버지께선 아무 말씀 없으세요. 차라리 화라도 내셨으면 좋겠는데…….”
커티스는 캐롤린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어떻게 된 거냐고 묻지도 않았다. 캐롤린과 마주하는 것조차 싫은지 새벽같이 나가 밤이 깊어야 돌아오곤 했다. 얼마 전부터는 아예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커티스는 대체로 엄격한 사람이었지만 캐롤린에게만은 너그러운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의 낯선 모습에 캐롤린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커티스야 나처럼 가벼운 사람이 아니잖느냐. 같이 기다려 보자꾸나.”
캐롤린은 입술을 꾹 깨물고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아버지 생각만으로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캐롤린, 혹 네 애인을 정부(情夫)로 두고 다른 이와 결혼할 마음은―”
울음을 참아 붉어진 눈이 레너드를 원망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아니, 내가 그러라는 게 아니라 나도 네 뜻을 정확히 알아야 네 아버지한테 뭐라 말을 해도 할 거 아니니!”
레너드가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혼전부터 따로 정부를 두는 것은 귀족 사회에선 드문 일도 아니었다. 흔한 사례이긴 하나 레너드는 그런 행태를 질색하는 쪽이었다.
캐롤린의 처지가 하도 궁지에 몰려 있으니 그 내심을 떠본 것일 뿐, 그러라고 떠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네 마음이 그토록 확고하다면 나도 방법을 찾아보마.”
‘소르체에서 치료받다 죽은 것으로 처리하고, 신분을 바꿔치기해 버릴까? 그냥 닮은 사람이라고 박박 우기면 남들이 어쩔 거야. 내가 그렇다는데.’
레너드는 자신이 떠올린 방법에 내심 만족했다. 물론 캐롤린이 들었다면 조금도 동의하지 않았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레너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캐롤린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사실,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는 마음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에게 들키고 나서야 알았다. 누군가 알아주기를 내내 바라고 있었다는 걸.
“너야 내 딸이나 마찬가진 걸. 자식이 불행하기를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겠니? 커티스가 쉽사리 말을 하지 못하는 것도 널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그런 게지.”
커티스의 외면이 아프긴 해도 혼자일 때보다는 덜 외로웠다. 캐롤린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고 있어요.”
무거워진 분위기에 레너드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엄살을 부렸다.
“아리아드네 그것도 하루에도 수십 번 내 심장을 조였다 풀었다 한다니까. 자식 걱정에 내 머리 세는 걸 못 본다더니.”
“무사히 돌아올 거예요. 아리아드네라면.”
캐롤린은 물에 젖어 흩어진 종이를 보며 말했다. 끊겼던 연락이 이어졌으니 메르디에스로 돌아온 틸레처럼 아리아드네도 곧 도착할 터였다.
“그래야지. 얘는 어떻게 된 게 어디를 갈 때마다 사람이 늘어. 엘바에서 성기사단 부단장을 주운 거로도 모자라 리뮈르에서는 리뮈르 공녀와 공자를 꾄 모양이야. 함께 온다는구나. 이번 추수제는 아주 북적북적하겠어.”
조용히 고개를 주억이던 캐롤린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리뮈르 공녀와 공자라고요?”
아리아드네와 릭센에서 헤어질 때, 리뮈르의 마음을 얻겠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것이 이렇게 빨리 이루어지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더구나 중앙 정계에서 쫓겨나듯 떠난 이후로 리뮈르 일족이 그들 영지 밖으로 나온 건 수십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다.
그런데 다른 이도 아닌 리뮈르 대주의 직계 혈족이 아리아드네와 동행한다니. 이는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
담담한 레너드의 태도에서 캐롤린은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정국이 이토록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메르디에스 후계인 아리아드네가 리뮈르 직계와 동행한다는 것은 두 가문이 손을 잡았노라고 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저토록 태연한 반응이라니. 레너드는 지금 이 상황을 짐작했거나 바라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것이 국왕의 붕어라는 국가적인 흉사(凶事)에서 메르디에스 추수제를 예년보다 더 크게 여는 것과 관련이 있을까?
이상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1왕자를 차기 왕으로 옹립하지 않을 거라면 지금쯤은 다른 계승자를 밀어야 할 시점이었다. 하지만 레너드는 케이루스의 피를 이은 계승자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레너드가, 메르디에스가 내세울 다음 왕은 누구인가. 캐롤린은 어떤 예감에 두 주먹을 꼭 쥐었다.
‘리아, 너야?’
그런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