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148)
  • * * *

    젖은 옷을 갈아입은 아리아드네는 따뜻한 차를 마시며 언 몸을 녹였다. 큰 잔에 가득 채운 차를 절반쯤 비우고 나서야 돌아온 유진이 털썩, 자리에 앉았다.

    “괜찮아?”

    아리아드네가 유진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괜찮아.”

    그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유진의 대답은 예상한 대로였다. 그도 약한 소리를 하는 순간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한 순간, 조금 전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시는, 그런 위험한 짓 하지 마.

    ―지키는 건 내 몫이야. 나를 제발 비참하게 만들지 마.

    ―왜 당신이 나 때문에…….

    떨리는 손, 억눌린 목소리, 젖어 든 눈동자. 하늘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은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그토록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그것도 자신 때문에. 아리아드네의 심장이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뛰었다.

    “그런데…….”

    “응?”

    유진의 목소리에 작게 심호흡을 한 아리아드네가 태연을 가장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달리오스 그자 말이야. 1왕자와 내통한 것치곤 당신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던데…….”

    아아, 아리아드네가 유진이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알 만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리뮈르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달리오스가 그렇게 물었을 때.

    ―리뮈르의 겨울이 그림처럼 아름답다고 해서요. 제가 예쁜 걸 좀 좋아하거든요.

    아리아드네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대답으로 달리오스를 떠보았지만, 그는 철없는 그녀의 대답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유진은 그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달리오스가 1왕자와 정보를 공유하는 사이라면 이제껏 아리아드네가 어떤 일을 해 왔는지도 들었을 터. 비단 엘바의 활약이 아니더라도, 카이엔은 아리아드네의 역량과 성품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데…….

    “1왕자에게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이라도 전해 들었다면 그런 뻔한 연기에 속지 않았을 텐데, 그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되어서.”

    유진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아리아드네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는 걸까.

    “당신 눈에 비친 나는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야? 내 연기에 속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무뚝뚝한 그의 물음이 어떤 찬사보다도 더 감미롭게 들렸다. 그가 마음에 없는 말은 하지 못하는 성품이라는 걸 알아서 더 그랬다.

    “아, 내 말은 그러니까…….”

    그가 당황한 얼굴로 얼버무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리아드네는 달리오스를 떠보기 전에도 반쯤은 그가 아는 것이 별로 없으리란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카이엔이 자신의 주위 사람들에게 그녀를 인정하는 발언 따위 했을 리가 없으니까.

    아리아드네의 짐작대로 달리오스가 아는 것이라곤 자신이 리뮈르에 체류 중이라는 사실 정도였다.

    “아니면, 내 연기가 그렇게 별로였다는 뜻이야?”

    아리아드네가 유진의 목에 팔을 건 채로 달콤한 웃음을 지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방문자님?”

    그녀의 웃는 얼굴이 유진과 점점 가까워졌다. 아리아드네의 얼굴이 다가올수록 만개한 꽃 한가운데 파묻힌 듯한 착각이 들었다.

    코끝이 닿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거리에 멈춰 선 아리아드네가 속삭이듯 말했다.

    “어때? 아직도 내 연기가 별로야?”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늘 담담하던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얼핏 보면 화가 난 것처럼 보였지만.

    ‘당황했나 봐.’

    그것이 아니라는 정도는 이젠 알았다. 자신에게만 보여 주는 그의 특별한 얼굴이 좋았다. 슬쩍 고개를 물린 아리아드네가 소리 내어 웃자 그제야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까지 외부 활동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첫 만남에서 행동하는 대로 편견을 가지더라고.”

    카이엔과 약혼하기 전까지 메르디에스 영지를 벗어난 적이 없었던 아리아드네는 그것을 적절하게 이용했다.

    세계 제일의 거부 메르디에스의 유일한 후계. 그 이름이 가진 편견은 헤아릴 수 없이 다양했다. 그중에 아리아드네가 가장 즐겨 사용한 것은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였다.

    “그동안 제법 유용하게 썼는데 이제는 좀 어렵겠지?”

    엘바에 이어 리뮈르에서까지 이렇게 요란하게 굴었으니. 아리아드네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진은 사람들이 그녀를 몰라서가 아니라 저 얼굴과 마주한 순간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어서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는 아직 물기가 남은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말려 주며 말했다.

    “오늘은 고생 많이 했으니까 그만 쉬어.”

    달래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던 아리아드네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끝까지 봐야지.”

    그의 목소리에 홀려 하마터면 그러겠다고 할 뻔했다.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닐 텐데.”

    유진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달리오스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 리뮈르에서 그에게 할 처분이란 하나뿐이었다.

    “내 앞에서 목이 잘리고 피가 튄 마물의 수가 얼만지 벌써 잊었어?”

    아리아드네가 부러 가벼운 말투로 말했지만 그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어쨌든 그는 사람이잖아. 그리고 전투랑 처형은 또 다르니까.”

    자신을 걱정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진짜 끔찍한 것이 어떤 것인지 신물이 날 만큼 겪어 봤으니까.”

    하지만 아리아드네에게 정말 무서운 것은 피가 튀고 살점이 잘리는 끔찍한 광경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죽고, 사촌 오빠의 목이 교수대에 걸리고, 아는 사람들이 매일 같이 죽어 나가는 그 순간을 혼자 견뎌 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 것에 비하면 달리오스의 처형 장면을 지켜보는 것 정도는 참을 만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는 이 일의 결과를 확인할 의무가 있었다. 그것이 과거 리뮈르 일가의 비극에 일조했던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말없이 아리아드네를 바라보던 유진이 제 손을 들었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새파란 눈동자가 자리한 눈가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가끔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아리아드네가 언제고 유진이 사라져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처럼 그도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눈앞에 있는 그녀가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

    “말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그것을 캐내어 묻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말하지 못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그럼 갈까?”

    유진은 무언가를 묻는 대신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 위로 아리아드네가 제 손을 얹으며 물었다.

    “리뮈르의 성물은 어땠어? 그건 당신에게 좀 도움이 될 것 같아?”

    그 물음에 유진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달의 마법사가 남긴 흰 저택에 남아 있던 심연의 눈. 거울이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리뮈르의 성물은 그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 저택의 중앙홀에 남아 있던 것은 엘바의 신전에서 본 모라의 석상이 분명했다.

    ‘내 선택은 또 다른 파멸을 불러왔으니, 나는 남은 생을 속죄하며 살겠다.’

    달의 마법사라고 불렸던 그자 또한 카푸트와 마찬가지로 모라의 힘을 빌린 어떤 존재였다. 달그림자로 다른 공간을 만들어 내는 그 능력은 분명 시간과 공간을 다스리는 모라의 힘이었다.

    그리고 모라의 석상과 마주한 순간 깨어난, 제 것이 아닌 카푸트의 기억들.

    ‘본디 내 것이었던 물건을 되찾으러 왔다.’

    ‘그것의 주인은 너희 같은 강탈자가 아니다.’

    카푸트의 기억과 마주한 순간 느꼈던 강렬한 열망과 그리움, 고통과 비감(悲感)이 아직도 생생했다. 제 속의 카푸트가 여전히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었어.”

    유진은 그 모든 것을 끊어 내려는 듯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아리아드네가 고민스럽다는 듯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그럼 어때!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성물 다 매입하지, 뭐. 조금만 더 기다려.”

    이내 그녀가 활짝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유진은 그녀의 손에 이끌려 멈추었던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전부 다 포기할 수 있었다. 아니, 이제야 그를 얽매고 있었던 제 것이 아닌 것들을 버릴 수 있었다.

    제 것이 아닌 기억에 얽매여 카푸트의 뜻대로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뿌리가, 기억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좋았다.

    “어, 눈이 그쳤어.”

    건물 밖으로 나온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를 돌아보는 얼굴이 더없이 아름다웠다.

    “……이미 찾았을지도.”

    어쩌면 자신이 찾았던 건 제 존재를 증명해 줄 무엇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포기해도 좋을 어떤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응? 뭐라고 했어?”

    다가온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그렇다면 자신은 가장 원하던 것을 이미 손에 넣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진은 자신을 붙든 여리고 부드러운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를 얽매고 있던 카푸트의 기억과 감정에서 벗어났지만, 그는 여전히 제가 어딘가에 단단히 매인 기분이었다. 하지만 새로 얻은 목줄은 안락하고 보드라워 도무지 벗고 싶지가 않았다.

    * * *

    “마물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알게 되면 너도―”

    달리오스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킬킬대며 말을 이어 가던 순간이었다.

    쐐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날아온 검이 달리오스의 손목에 박혔다. 달리오스가 비명을 지르며 눈밭을 데굴데굴 굴렀다.

    “저에게도 기회를 주시면 안 됩니까?”

    그렇게 물으며 눈밭 위를 가로지른 남자는 달리오스의 손목을 짓밟은 채로 자신이 던진 단검을 뽑아냈다.

    “리카르도 경.”

    달로아가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달리오스에게 단검을 던진 남자는 성 상티모니아의 성기사단 부단장 리카르도였다. 리카르도는 무표정한 얼굴로 단검에 묻은 달리오스의 피를 털어 냈다. 하얀 눈 위로 붉은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재미있는 이야기 중이었나 봐.”

    어느새 달로아 곁으로 다가온 여자가 말했다. 새 옷으로 갈아입은 아리아드네가 손목을 쥐고 눈밭을 구르는 달리오스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물었다.

    “말 같지도 않은 말만 하는 입을 그대로 둬야 해?”

    달로아는 달리오스가 하려던 말이 이대로 퍼져서는 안 될 이야기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것은 달로아만이 아니었다.

    “죄인의 입을 막고 사지를 묶어라.”

    달헤임의 단호한 명령이 내려지자 사방에서 달려든 기사들이 순식간에 달리오스를 결박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달리오스가 끅끅 소리를 내며 온몸을 뒤틀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리카르도가 눈을 한 움큼 들어 제 얼굴에 마구잡이로 비볐다. 조금 전 달리오스가 마물에 관한 이야기를 지껄이려 할 때, 저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목숨을 바쳐 마물을 막아 온 리뮈르의 긍지가 산산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알게 되더라도 이런 식은 아니었다. 성 상티모니아의 치부가 드러날지 모른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다.

    언제나 성기사 리카르도를 움직이는 가장 앞선 이유는 성 상티모니아의 수호자인 교황 아그네스의 의지였다. 그런데 조금 전 그는 스스로의 판단과 의지로 움직였다.

    “대주님, 이 자는 제 제자들을 인질로 삼아 저를 제압했습니다. 제가 이 자의 목숨을 거둘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우리가 이곳을 지키지 않으면 모두가 위험해지니까 우리가 해야 한댔어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목검을 휘두르며 눈을 빛내던 아이들. 그 아이들이 자라서 리뮈르를 지키고, 리뮈르를 지키려던 아이 중 누군가는 마물이 된다.

    자신이 해 온 일은 대체 뭐였을까.

    언제나 리카르도가 생각하는 최악의 괴물은 그가 자란 수도원의 원장이었다. 사제들을 겁탈하여 숱한 사생아를 만들어 낸 괴물.

    ‘내가 원장과 무엇이 다른가.’

    리카르도가 성 상티모니아가 행하는 일들에서 눈을 돌리고 귀를 막는 동안, 이 땅의 아이들은 마물에 의해 부모를 잃었다. 아이들의 부모를 죽인 마물도 한때는 리뮈르를 지키는 기사들이었을 텐데…….

    ‘나는 수많은 나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닌가.’

    그의 외면이 그와 같은 처지의 고아들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외면했던 현실은 너무도 아프게 다가왔다.

    ―리, 리카르도 경,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까 리뮈르를 지켜 주…….

    그를 협박할 목적으로 달리오스에게 사로잡힌 소년은 두려움에 질려 울먹이면서도 끝끝내 도망가지 않고 맞서 싸웠다. 그 소년의 얼굴이 리카르도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부디 제가 어린 제자의 복수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리카르도가 달헤임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그것은 안 될 말이네. 이 땅에서 죄인을 벌하는 것은 내 몫이야.”

    달헤임은 눈밭에 무릎을 꿇은 리카르도를 일으켜 주었으나, 그의 청은 들어주지 않았다.

    “사사로운 정에 눈이 어두워 너를 제대로 보지 못한 내 잘못이 크다.”

    달헤임의 낮은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단호한 어조였다.

    “너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네 영혼은 영원토록 이곳에 갇혀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네게는 죽음의 안식조차 찾아오지 않을 것이니.”

    달헤임의 판결에 달리오스의 몸부림이 심해졌다. 입에는 재갈이 물리고 두 손과 두 발이 묶인 달리오스가 온몸을 들썩이며 도망을 가려 했다.

    “죄인을 물에 넣어라.”

    불멸의 영혼을 지닌 인간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벌은 그 영혼을 가두는 것이었다. 프레모 대륙 사람들은 영혼이 묶인 인간은 다시 태어날 수 없다고 믿었다.

    영혼을 가두는 방법은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는데, 리뮈르에서는 그것이 수장(水葬)인 모양이었다. 달리오스의 눈동자가 두려움에 질려 크게 흔들렸다. 온몸이 묶인 그가 막힌 재갈 사이로 괴성을 질렀다.

    하지만 리뮈르의 기사들은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달리오스를 들어 달그림자가 비친 연못으로 밀어 넣었다. 결코 얼거나 마르는 법이 없는 달의 연못은 리뮈르에서 가장 지독한 감옥이었다.

    “으으읍, 으읍, 으으으읍―”

    달리오스가 끝까지 몸부림을 치며 벗어나려 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연못 속으로 밀어 넣어진 달리오스가 점점 수면에서 멀어졌다.

    모두가 참담한 심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달로아는 함께 자란 사촌의 마지막 모습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눈이 보이지 않는 달미에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지 못한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까.

    달로아가 달미에르의 손을 꽉 붙들었다. 달미에르 또한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나란히 선 남매는 물에 잠겨 점점 멀어지는 죄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른거리는 수면은 마치 거울처럼 그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도 함께 비추었다. 달로아의 눈이 연못에 비친 달미에르의 희뿌연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 순간, 달로아는 누군가 날카로운 거울 조각으로 자신의 눈을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달로아의 머릿속으로 이상한 광경들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달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긴 밤, 마물이 리뮈르를 덮칠 겁니다. 불행한 사고가 될 테지만 그대에게는 그만한 행운도 없을 겁니다. 리뮈르의 성을 단 사람 중에 달리오스, 그대만이 살아남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이는 붉은 기가 도는 금발에 갈색 눈동자를 가진 오만한 인상의 사내였다. 리뮈르를 벗어난 적 없는 달로아로선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달로아는 그가 누구인지 직감적으로 알았다. 달리오스와 함께 리뮈르에 마물을 끌어들인 페렌트의 1왕자 카이엔이 분명했다.

    ‘개자식 카이엔 케이루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이 얼굴을 알지?’

    속이 울렁거렸다. 달로아의 머릿속으로 마구잡이로 뒤섞인 기억들이 밀려들었다. 이 기억들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달리오스. 연못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달리오스의 기억들이었다. 달로아는 달리오스가 말하려 했던 ‘마물이 생기는 과정’에 대해서도 어렵지 않게 읽어 냈다.

    울컥,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달로아의 두 손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렸다.

    ‘왜 이런 일이…….’

    달로아의 이상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달미에르였다. 달미에르가 달로아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로아, 힘들면 보지 마.”

    달미에르의 눈동자가 달로아를 향하는 순간, 머릿속으로 밀려들던 기억들이 뚝 끊겼다. 달로아는 달미에르의 불투명한 눈동자를 보며 불현듯 깨달았다.

    둘로 나뉜 하나의 영혼. 이란성 쌍둥이인 그들이 나눠 가진 건 영혼만이 아니었다.

    “미에르, 나 보지 말고 앞을 봐.”

    달미에르는 그것이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누이의 바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누이가 원하는 대로 선선히 고개를 돌렸다.

    다시금 달미에르의 불투명한 눈동자가 수면에 비치자 달로아의 머릿속으로 달리오스의 기억들이 밀려들었다.

    달미에르의 눈동자는 마치 거울처럼 마주한 상대의 기억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달로아의 눈동자는 달미에르의 눈에 비친 기억을 읽어 냈다.

    ‘이게 대체―’

    달로아가 구역질을 하며 쓰러졌다. 아리아드네가 제 쪽으로 쓰러지는 달로아를 서둘러 붙잡았다.

    “괜찮아?”

    아리아드네가 달로아를 부축하며 물었다. 달로아가 떨리는 손으로 아리아드네를 밀어냈다.

    ‘망할 거울 같으니…….’

    이란성 쌍둥이인 달로아와 달미에르는 하나였어야 할 심연의 눈을 나누어 가졌던 모양이다. 성물인 거울이 사라진 건 오래전 일이었는데, 왜 지금에서야 그 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인지는 달로아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심연의 눈 같은 거.’

    달로아는 한 번도 그 능력을 바라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그것은 리뮈르를 이 땅에 가둬 둔 능력이었다. 모두가 꺼리는 불길한 능력이었다. 그 불길한 능력은 기어코 달미에르의 눈까지 잡아먹었다. 달로아에게 심연의 눈은 저주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제발 이따위 능력은 도로 가져가.’

    그 생각을 끝으로 달로아는 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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