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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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 눈이 펄펄 내리는 리뮈르에는 온갖 불청객들로 가득했다.

    흐억, 흐어어, 끼야야야악, 끼에에엑, 날개 달린 뱀이 입에서 불을 뿜어내며 다채로운 괴성을 질렀다. 마물이 내지르는 괴성은 얼핏 들으면 인간의 비명 소리처럼 들렸다.

    뱀의 형상을 한 채 인간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마물 자크루스의 출현이었다.

    “제시, 날개!”

    자크루스가 뿜어낸 불을 피한 달리케가 마물의 정면으로 달려들며 소리쳤다.

    달리케와 마찬가지로 붉은 갑옷을 뒤집어쓴 공비의 시녀가 쓰러진 마물의 시체를 밟고 하늘 높이 도약했다. 으아아아악, 마물의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자크루스의 몸통에서 왼 날개가 떨어져 나왔다.

    제시라 불린 공비의 시녀가 단숨에 마물의 뒤쪽에서 왼 날개를 잘라 내자, 균형을 잃은 마물이 온몸을 뒤틀며 지상으로 낙하했다.

    흐어, 흐어억, 흐으흐으―

    자크루스가 마지막 발악을 하며 입에서 불을 뿜어 댔다. 뿜어 대던 불이 잠시 멈춘 순간이었다.

    “그만 뒈지세요.”

    달리케가 불이 사그라진 틈을 타 자크루스의 아가리에 검을 박아 넣었다.

    으아아아악― 자크루스가 마지막 사력을 다해 거대한 불꽃을 뿜어냈지만 달리케는 이미 마물의 아가리에 박힌 검을 버리고 멀찍이 떨어진 다음이었다.

    “뱀이면 뱀답게 겨울에는 잠이나 처잘 것이지. 왜 기어 나와서.”

    달리케가 자크루스의 아가리에 박힌 검을 뽑아내며 비아냥거렸다. 그녀는 페렌트 최강의 전력이라 불리는 리뮈르 기사들 가운데서도 단연 발군이었다.

    폐쇄적인 리뮈르에서 외부인인 달리케가 공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가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달리케의 움직임은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유려하고 부드러웠다. 가볍고 날렵한 몸놀림, 빠르고 날카로운 검술.

    하지만 무엇보다도 놀라운 건 넓은 시야와 정확한 판단력이었다.

    “제시, 뒤!”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마물을 상대하면서도 주위 기사들이 위험에 빠질 때마다 누구보다도 먼저 그것을 알아차렸다.

    “닐, 좌측!”

    어린 기사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마르티코라스의 꼬리를 미처 피하지 못한 그때였다. 쐐액, 달리케가 던진 칼이 마르티코라스의 꼬리를 관통하며 나무에 처박혔다.

    “괜찮니?”

    공비가 바닥에 주저앉은 어린 기사를 손수 일으켜 주었다.

    “네, 네!”

    “조심하렴.”

    달리케가 어린 기사의 어깨를 두드려 격려하고는 멀어졌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녀를 의지하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달리케의 모습을 제 눈에 담았다. 어떤 왕이 될 것인가. 그 고민을 해결해 줄 실마리가 눈앞에 있었다.

    서걱, 바로 옆에서 종이를 자르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달리케를 응시하는 아리아드네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공중에서 흩뿌려진 피가 흰 눈 위로 쏟아졌다.

    아리아드네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달미에르가 마물의 목을 자른 칼에 묻은 피를 가볍게 털어 내고 있었다.

    “놀라셨지요, 제가 좀 더 빨리 대응했어야 하는데…….”

    “검술에 조예가 있으실 줄은 몰랐어요.”

    단정하게 묶은 붉은 머리가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섬세하고 예민한 인상의 달미에르는 전형적인 학자의 풍모를 지닌 사내였다.

    “제 한 몸 간신히 지킬 정도라서요.”

    달미에르의 대답에 아리아드네는 조금 전 목과 몸이 깔끔하게 분리된 마물의 사체를 힐끗 쳐다보았다. 제 눈으로는 그 움직임을 쫓기 어려울 정도로 신속한 발검이었다.

    “기준이 지나치게 높으시군요.”

    “환경이 환경이다 보니까요.”

    달미에르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싸우는 리뮈르 기사들의 활약으로 새까맣게 몰려들던 마물도 그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절반쯤 왔나요?”

    달미에르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글쎄요.”

    아리아드네는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다만 얼마 남지 않은 마물을 베며 다가오는 무리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무리 가운데 우뚝 선 남자가 대검을 휘둘러 자크루스의 목을 베어 냈다. 그가 말에서 뛰어내리며 다급히 다가왔다.

    “공비 저하, 미에르! 다들 무사하십니까?”

    남자가 투구를 벗자 땀에 흠뻑 젖은 긴 은발이 드러났다.

    “달리오스.”

    달리케의 부름에 달리오스라 불린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제가 있던 동쪽에도 마물이 밀려들어 오는 것이 늦었습니다.”

    “네가 동쪽 경계가 심상치 않다며 공저 병력을 일부 데리고 수색을 나갔다지. 그 탓에 조금 더 어려운 싸움이 됐어.”

    달리오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지쳐 보였지만 심각한 부상자는 없었다. 하지만 공저에 남은 병력으로 이만한 마물을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달리오스는 자신을 탓하는 듯한 달리케의 말에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동쪽을 지키지 못해 그곳이 뚫렸다면 공저의 사람들은 양쪽에서 협공당하는 꼴이 되었을 겁니다.”

    눈꼬리가 처진 그의 얼굴은 몹시도 억울하고 또 선해 보였다. 길게 늘어트린 은발에 회색 눈이라. 리뮈르를 세운 시조가 저런 모습이었다지.

    아리아드네는 달리오스의 모습을 아래위로 훑어보다 부러 감격한 얼굴을 꾸며 냈다.

    “동쪽에도 마물이 나타났었다고요? 리뮈르에 이렇게 마물이 많을 줄은……. 달리오스 경 덕분에 살았어요.”

    철없는 말과 겁먹은 표정만으로도 그는 쉽게 방심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달리오스가 으스대는 표정으로 번지르르한 대답을 늘어놓았다.

    “동쪽에도 저런 날개 달린 징그러운 마물들이 나타났나요?”

    아리아드네가 거대 잠자리 네우라를 가리키며 몸서리를 쳤다.

    “아, 물론입니다. 네우라만이 아니라―”

    “그런데 경을 따르는 기사들 중엔 네우라의 가루를 맞은 자가 아무도 없군요. 활을 가진 자도요.”

    네우라의 날개에서 떨어지는 가루는 일시적으로 시력을 마비시킨다. 심하면 영영 시력을 잃기도 했다.

    네우라와 같은 마물은 멀리서 활을 쏘는 것이 일반적인 대응책이었다. 근접전으로 상대하다 보면 네우라 가루가 눈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여기저기 묻기 마련이었다.

    “네우라 가루가 떨어지면 저렇게 빛나던데요.”

    아리아드네의 손가락이 이곳에서 네우라를 상대한 리뮈르 기사들은 가리켰다. 리뮈르 기사들의 망토와 갑옷에 묻은 네우라 가루는 마치 보석을 갈아서 뿌린 것처럼 반짝 빛이 났다.

    “애초에 마물 같은 건 상대한 적도 없으면서.”

    아리아드네의 붉은 입술이 마치 비웃는 것처럼 말려 올라갔다. 선해 보이던 달리오스의 얼굴이 악귀처럼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검과 망토에 묻은 피가 너무 깨끗하잖아요. 닭 피라도 뿌린 것처럼.”

    연극을 할 거면 좀 더 성의 있게 할 것이지. 아리아드네의 조롱이 짙어졌다.

    마물의 체액을 뒤집어쓴 이곳의 기사들과 달리 달리오스를 따르는 기사들은 지나치게 멀끔했다. 마치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 나타난 것처럼.

    “적당히 하시죠, 메르디에스 공녀님.”

    “그럴까? 리뮈르 영식.”

    아리아드네는 대번에 하대하며 호칭을 달리했다. 현 공작의 직계인 아리아드네나 달미에르는 공녀 혹은 공자의 칭호를 받지만 달리오스는 달랐다.

    ‘리뮈르 영식’이란 부름은 달리오스가 얻은 기사 작위까지 깡그리 무시한 호칭이었다.

    “……하, 살려 두란 부탁이 있었지만 그러진 못하겠군.”

    역시나. 달리오스는 리뮈르 일가가 죽고 운 좋게 차지한 자리를 지키려다 미친 게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미친놈이었다.

    공작 위가 탐나 카이엔과 내통하고 리뮈르에 마물을 끌어들인 인간 말종. 카이엔이 리뮈르 성물과 월식의 상관관계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도 모두 달리오스의 짓이 분명했다.

    “1왕자가 나를 살리라고 했으면 살려야지.”

    얼음처럼 차가운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아리아드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넌 1왕자 개잖아.”

    아니, 개만도 못했다. 아군이라고 믿었던 자가 마물을 상대하고 지친 사람들을 급습한다면 어떻게 될까. 과거의 모습이 보지 않아도 눈앞에 그려졌다. 그를 믿었다가 죽어 가는 리뮈르의 사람들이.

    달리오스의 입가가 푸들푸들 떨렸다.

    “……네가 질질 말을 끌며 시간을 버는 이유를 알지. 이놈도 네 짓이었나?”

    달리오스가 꽁꽁 묶인 남자를 집어던지며 물었다. 눈밭에 던져진 남자는 성 상티모니아의 부단장 리카르도였다.

    “이놈이 동쪽 경계에서 신호탄을 날리는 걸 잡아 왔지. 그게 성공했으면 몹시 골치 아팠겠지만.”

    리카르도는 정신이 반쯤 나간 얼굴이었다. 달리오스가 분풀이하듯 포박당한 리카르도를 걷어찼다.

    “그만해. 달리오스.”

    이제껏 지켜보기만 하던 달미에르가 나섰다.

    “정말 1왕자와 내통하여 리뮈르에 마물을 불러들였나?”

    달미에르의 질문에 달리오스가 눈을 치뜨며 입가를 씰룩였다.

    “그건 전부 네 탓이잖아. 네 눈깔이 제대로 보이기만 했어도 오늘 같은 일은 없었어. 네 눈에 박힌 심연의 눈이 발현되기만 했어도 다음 대주는 너였겠지. 그런데 아니었잖아. 하늘이 나를 선택한 거야. 나를, 이 나를!”

    악에 받친 목소리가 주절주절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너도 알잖아. 리뮈르 최강의 기사는 내 아버지인 달모리스였어. 그런데 왜, 왜! 이 땅의 주인이어야 마땅한 내 아버지가 쫓겨나야 했을까? 그건 전부 네 아버지가 위대한 기사 달모리스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야.”

    정말로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달리오스의 기나긴 헛소리는 열등감을 재료로 제 편할 대로 짜깁기된 망상에 불과했다.

    “그만해라, 달리오스.”

    낮고 진중한 목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한 무리의 기사들이 나타났다.

    “이, 이익.”

    리뮈르 기사단의 주인, 디움으로부터 페렌트를 지키는 대주 달헤임의 등장에 달리오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소, 메르디에스 공녀.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네.”

    달헤임의 시선이 아리아드네에게 닿았다.

    “그런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오. 리뮈르는 페렌트 모두의 자랑이고 긍지입니다.”

    아리아드네가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달헤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이건 전부 혈육과 온정에 끌려 봐야 할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한 내 실책이네.”

    달헤임은 참담한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단단하고 우직한 사람이 숨김없이 드러내는 아픔은 지켜보는 사람을 숙연하게 했다. 그가 죽은 동생의 아들에게 말했다.

    “달리오스, 나는 널 내 후계로 생각했다.”

    그 말을 들은 달리오스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거, 거짓말. 전부 다 거짓말이야.”

    달리오스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다.

    “달미에르는 불편한 눈을 이유로, 달로아는 달미에르를 이유로 리뮈르의 후계라면 마땅히 져야 할 의무를 포기했으니까. 내 자식들이 방기한 의무를 스스로 짊어진 네게 마땅한 자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달헤임의 말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아버지처럼 이용하다 버리려던 거, 그런 거, 누가 모를 줄…….”

    비척비척 뒤로 물러나던 달리오스의 눈이 누군가에게로 향했다.

    “디움의 경계소는 대대로 리뮈르 후계의 몫이었다. 네게 그 임무를 준 이유를 몰랐더냐.”

    그 순간, 달리오스가 무방비하게 서 있던 달리케를 확 잡아당기며 그 목에 칼을 겨눴다.

    “나, 나는 이대로 죽을 수 없어.”

    외면하고 싶은 진실을 맞닥뜨린 달리오스가 선택한 것은 공비를 인질 삼아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달리케는 무표정한 얼굴로 달리오스에게 끌려갔다. 그것을 지켜보는 달헤임의 눈동자가 이루 말할 수 없이 가라앉았다.

    “정말 그게 네 선택이냐?”

    달헤임이 낮은 한숨을 흘렸다. 달리오스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달리케의 목에 댄 칼을 더 바싹 들이밀었다.

    “다들 물러서.”

    리뮈르의 기사들 가운데 유독 나이 든 기사들의 얼굴이 못 볼 꼴을 봤다는 듯이 일그러졌다. 달리오스는 달리케를 인질로 삼은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누가 그래?”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달리오스가 눈을 껌벅였다.

    “누가 그래? 달모리스, 그 새끼가 리뮈르 최강의 기사라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달리케였다.

    “리뮈르 최강의 기사는―”

    달리오스가 그녀의 목에 겨눈 칼날을 세우려다 그대로 몸이 뒤집혀 바닥에 처박혔다. 달리케의 목을 겨누고 있던 칼은 깡!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가 눈밭에 파묻혔다.

    “나야. 내가 죽기 전까진.”

    달리케는 제 소매에 숨겨 둔 단검의 끝으로 달리오스의 목을 꾹 눌렀다. 달리오스의 목에서는 핏방울이 방울방울 새어 나왔다.

    “달모리스의 검술이 나보다 나았던 것은 사실이다. 부족한 내가 대주가 된 것은 니케가 나를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달헤임은 달리오스의 마지막 선택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달리케가 병이 들어 일선에서 물러난 지 오래되긴 했으나 그 위명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리뮈르에서 달리케는 그 자체로 승리의 다른 이름이었으니까.

    공비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한 아부라고 생각한 모양이지. 때론 아무리 큰 명성도 부족한 사람이 있는 법인데.

    “네 아버지의 인격이 좀 많이 부족하기도 했고.”

    달리케가 달리오스의 무릎을 걷어차 눈밭에 굴리며 덧붙였다.

    전대 대주였던 달비크는 인망이 두터운 첫째 아들과 무력이 뛰어난 둘째 아들 중 누구를 후계로 삼아야 할지 고민했다.

    그때, 달비크 앞에 구세주처럼 등장한 것이 니케였다. 그녀는 리뮈르 기사단에 입단한 지 불과 5년 만에 부대장 자리를 꿰찼다.

    실전에서 구를 만큼 구른 노련한 기사들도 니케를 당해 내지 못했다. 천재라 불렸던 달모리스조차 그녀의 검을 버텨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니케의 명성은 달헤임의 부족한 면을 채우고도 남았다. 후에 달헤임이 특유의 우직함으로 검술에서도 놀라운 성취를 이루긴 했지만.

    ―이 리뮈르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바로 어머니이거든.

    아리아드네는 달로아의 그 말이 ‘무력’을 뜻하는 것일 줄은 몰랐다.

    달리케가 눈밭을 기는 달리오스의 목을 꾹 밟았다. 달리오스의 긴 은발을 틀어쥔 달리케가 단검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서걱서걱 잘라 내기 시작했다.

    “당신은 마음이 약하니까. 배신자 목은 내가 칠까?”

    달리케 밑에서 꿈틀거리던 달리오스가 축 늘어졌다. 아무래도 기절한 모양이었다. 아리아드네는 달로아의 성격이 누구를 닮았는지 모르겠다던 제 생각을 조금 수정했다.

    한결 약해진 눈발 사이로 달빛이 비쳤다. 어느새 다시 차오르기 시작한 달은 만월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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