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148)

* * *

“안녕?”

사뿐사뿐 걸어 들어온 아리아드네가 방긋 웃으며 먼저 자리한 달로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걸친 채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달로아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너, 지금 안녕이라 그랬어?”

“응, 왜?”

아리아드네는 산뜻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렇게 말하는 아리아드네의 눈은 별이라도 박은 것처럼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입꼬리는 저절로 말려 올라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세상이 아주 꽃밭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비뚜름한 미소를 건 달로아가 제 손끝을 비비적거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어제 여우 한 마리한테 홀린 것 같아서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제 나들이에 아리아드네를 끌어들인 게 아니라, 아리아드네의 연애에 제가 이용당한 기분이었다.

“그래? 시가지에서 여우를 만났어?”

아리아드네가 눈을 반짝이며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아무래도 어디서 흘러 들어왔나 봐.”

“나도 같이 봤으면 좋았을걸.”

그렇게 말하는 새파란 눈동자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태연하게 웃는 얼굴을 보면 도리어 달로아 쪽에서 할 말이 막혔다.

“…….”

“왜?”

“모르는 척하는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달로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면 아리아드네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찜찜한 기분에 아리아드네를 이리저리 뜯어보던 달로아는 리뮈르 공작 부부의 등장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뮈르 공작 달헤임이 딱딱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자리에 앉지.”

달헤임의 에스코트를 받아 자리에 앉은 달리케가 온화한 얼굴로 물었다.

“메르디에스 공녀, 어제 외출은 즐거웠나요?”

“달로아가 좋은 곳을 안내해 주어 리뮈르의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전부 공비께서 권해 주신 덕입니다.”

“즐거웠다니 다행이군요.”

“좋은 아침입니다, 메르디에스 공녀.”

달리케의 응대에 이어 해사한 미소를 지은 달미에르가 아리아드네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네, 좋은 아침이네요.”

아리아드네와 달미에르의 대화에 그것을 지켜보던 달로아의 표정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달로아가 소름이 돋은 제 팔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늘 뚱하고 싸늘한 내 쌍둥이 동생이 왜 저런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어제 뭘 잘못 먹고 회까닥 미친 걸까.’

“어제는 그렇게 가 버리셔서 서운했습니다.”

달미에르가 눈가를 가늘게 접으며 눈웃음을 쳤다.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야.’

달로아는 제 눈을 의심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죠.”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그 대답에 달미에르가 고개를 주억이며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때, 탁 소리와 함께 손에 든 부채를 접어 주의를 환기한 달리케가 입을 열었다.

“그럼 자리해야 할 사람들이 모두 모인 것 같으니 이야기를 시작할까요?”

커튼이 날리는 창가에는 어느새 유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바람에 날려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창가에 선 그의 뒤로 햇살이 비쳐 들었다.

예전에는 그의 저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가 금방이라도 빛 사이로 흩어질 것만 같았다. 그럴 때면 내가 저 사람을 끝까지 잡아 둘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을 하기도 했다.

뚜벅, 그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아리아드네 뒤에서 멈추었다. 그가 제 위를 드리웠다.

아리아드네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제 시선에 닿은 그의 그림자가 제 것과 겹쳐 있었다. 그것만으로 가슴이 벅차 모든 것을 잊었다.

‘당신은 지금 내 앞에 있으니까.’

마법 같은 주문을 속으로 되뇌자 더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달헤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자 또다시 먼저 말을 꺼낸 건 리뮈르 공비 달리케였다.

그녀의 부름에도 달헤임의 입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눈과 얼음의 기사단 리뮈르를 통솔하는 대주 달헤임은 여전히 무언가를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달헤임, 이미 결정이 끝난 건 더 망설이지 말아요.”

달리케가 제 곁에 앉은 달헤임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가 낮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공녀의 말대로 오래된 신전 두어 군데에서 최근 마물의 비정상적 출현이 있었음을 확인했네.”

달헤임의 회색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의 눈에는 그것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책과 분노가 뒤섞여 일렁이고 있었다.

이윽고 고개를 든 달헤임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페렌트의 국경을 지키는 리뮈르의 대주로서 나는 이 위기가 페렌트 전체를 위협할 만한 것이라는 공녀의 판단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이를 알리기 위해 리뮈르를 찾은 공녀의 행동에 감사하는 바이네.”

혼란을 갈무리한 달헤임의 눈빛은 마치 태산처럼 단단하고 굳건했다. 페렌트의 북쪽 경계를 책임지는 리뮈르 대주의 눈이었다.

오랜 세월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혹한의 땅에서 외로운 싸움을 이어 온 그의 눈동자는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굳건하고, 투명한 얼음처럼 진실했다.

“제 말씀을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난관을 헤쳐 나가는 데 제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겠습니다.”

“아닐세. 내 아집으로 자네에게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네.”

이 정도로 리뮈르의 대주인 달헤임에게서 감사와 사과의 말을 듣기에는 도무지 염치가 없었다.

“대주께서 아무리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셨다 한들, 리뮈르의 고난을 외면한 제 부끄러움만 하겠습니까. 그런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오.”

아리아드네의 말에 달헤임이 크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처음에 박대했던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이 화제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은 듯, 달헤임은 유진에게 성물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

“방문자님께서 보기를 원하신 리뮈르의 성물 또한 내일이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달로아와의 거래가 있었던 터라 달헤임의 수락은 예상했던 일이었다. 이로써 유진은 다섯 가문의 성물 중 네 가문의 성물을 보게 된 셈이었다.

“성물을 보는 데는 그 대가가 필요하다고 들었다. 나는 뭘 해 주면 되지?”

성채로 무엇을 원하느냐는 유진의 물음이 이어졌다.

“대가는 필요치 않습니다.”

달헤임은 정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아니, 정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으로 하지. 그것이 서로에게 부담이 없을 테니.”

그것이 리뮈르답긴 했으나 유진은 빚을 지는 것이 내키지 않는 듯 그렇게 말했다.

“겨울 늑대의 눈을 한 방문자가 나를 찾으면 그에게 길을 열어 주어라.”

그 말을 하는 달헤임의 시선은 유진의 회색 눈동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겨울 늑대의 것과 같은 회색 눈동자. 그것은 주인에게 버림받고 쫓겨난 리뮈르 시조의 것이었으며, 쫓겨난 기사와 함께 리뮈르를 세운 달의 마법사가 그들에게 남긴 당부이기도 했다.

“이는 리뮈르에 성물을 남기신 달의 마법사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입니다. 겨울 늑대의 눈을 한 방문자께서 오셨으니, 이를 보여 드리는 것은 후손의 마땅한 임무일 뿐. 그것에 어떤 대가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달헤임은 이것이 제 임무라는 양 담담한 태도였다. 그러고 보니…….

―심연의 눈은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리뮈르의 성물을 보시려거든 때를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그때도 아무나 볼 수 없다고 했지, 유진에게 보여 줄 수 없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럼 처음부터 때만 맞으면 볼 수 있었다는 거야?’

아리아드네가 황당하다는 듯 달로아를 쳐다보았지만.

“방문자님께서는 참 운도 좋아. 개기월식이 얼마 남지 않은 이때 리뮈르에 도착하다니.”

달로아는 그딴 소리를 하며 딴청을 부렸다.

‘어차피 보게 될 거 그걸 빌미로 얻을 것 좀 얻은 게 뭐가 어때서. 결국에 너도 좋았잖아.’

입 모양으로 방긋거리는 달로아의 대꾸는 끝까지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달로아의 말대로 뭐, 그 외출이 좋았던 것도 사실이니까.

아리아드네와 유진은 기가 차다는 듯 웃는 것으로 달로아가 벌인 작은 사고를 넘겼다.

“모르셨겠지만 리뮈르의 성물인 심연의 눈이 보관된 장소는 달이 하늘에서 모습을 감추어야만 그 길이 열립니다. 내일 보실 수 있을 거라는 아버지의 말은 그 때문입니다.”

달미에르가 달로아의 말에 설명을 더하듯 말했다.

“리뮈르 혈족이 아닌 사람이 그 길을 걷는 건 처음이야. 아, 물론 이 비밀을 알게 되는 것도 처음이지만.”

달로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 말에 유진은 제 앞에 앉은 아리아드네를 내려다보았다. 제 시선을 느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했다.

―개기월식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만 심연의 눈을 볼 수 있다고 해.

심연의 눈과 월식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아리아드네에게 이미 들은 후였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리카서스의 성물이 유진을 보고 싶어 하리란 것도, 리뮈르의 성물은 개기월식 중에만 볼 수 있다는 것도.

유진은 그것이 아리아드네가 페렌트를 지배하는 다섯 가문 중 하나인 메르디에스의 후계라서 그런 줄로 알았다.

하지만 달로아는 지금 ‘리뮈르 혈족’ 외의 사람이 이를 알게 된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아리아드네의 새파란 눈동자는 말하지 못할 비밀을 품고 있는 걸까. 그녀가 제게 말하지 못하는 비밀은 무엇일까.

그 또한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한 비밀이 있었다. 그런 주제에 비밀이 무엇이냐 채근하여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안심하라는 듯, 아리아드네의 밝은 금발을 쓸어내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한 얼굴로 그를 보던 아리아드네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응접실에 자리한 리뮈르 일가들을 슬쩍 둘러본 아리아드네가 놀랐다는 듯 말했다.

“놀랍네요. 달이 사라져야만 볼 수 있는 성물이라니. 천체의 움직임을 예지하는 케이루스와는 공유할 법한 비밀인데……. 제가 제일 먼저 알게 되었다니 영광이에요.”

의도적으로 케이루스를 언급한 아리아드네의 감탄에 달미에르가 평온한 목소리로 반응했다.

“리뮈르의 성물은 우리에겐 영광인 동시에 상처이니까요. 우리가 릭센에서 물러난 이후로 부러 그것을 욕심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남들보다 미리 달의 움직임을 알아야 할 필요 또한 없지요.”

달미에르의 설명을 들은 아리아드네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리뮈르에서는 케이루스와 비밀을 공유한 적이 없다고 하고.

[개기월식이 언제 일어날지 미리 아는 것은 리뮈르로서도 대단히 중요한 일이니까요. 리뮈르에서는 이미 오래전, 케이루스에 이것을 알려 왔습니다. 케이루스는 그 보답으로 개기월식이 일어날 날을 알려 주곤 했죠.]

카이엔은 리뮈르에서 알려 온 것이라 했다. 둘 중 누구를 믿어야 할까. 대답은 너무 뻔했다.

그렇다면 카이엔은 어떻게 개기월식과 리뮈르 성물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 알았을까.

아리아드네는 눈을 내리깐 채로 제 앞에 앉은 리뮈르 일가를 하나씩 떠올렸다.

우직하고 대쪽 같은 리뮈르의 버팀목 달헤임, 그 출신을 감쪽같이 숨긴 라이덴 출신의 공비 달리케, 과거 카이엔을 죽이려 했던 달로아, 그리고 어쩌면 심연의 눈을 소유했을지도 모를 달미에르.

그들 중 누군가가 카이엔이나 혹은 그와 관련된 누구에게 이 정보를 넘긴 걸까. 아니면 의도치 않게 새어 나간 걸까.

“우리 자리를 옮겨서 다 같이 차라도 마실까요?”

달리케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며 차를 권한 그때였다. 뿌우우― 하는 뿔피리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이런, 어렵겠네요. 디움으로 정찰을 나갔던 기사들이 돌아온 모양이군요.”

디움, 정찰, 귀환. 아리아드네는 익숙한 단어에 심장에 쿵 내려앉았다.

[리뮈르 공작 위는 디움으로 정찰을 나가느라 살아남은 대주의 조카가 승계한다고 합니다.]

리뮈르 일가의 비극 이후, 리뮈르 공작 위를 이어받은 달헤임의 조카는…….

“리오스도 오겠네.”

“고생하고 돌아온 녀석에게 박하게 굴지 마라.”

달로아가 불만스럽게 입을 내밀자 달헤임이 이를 저지했다. 달로아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아리아드네 기억에 있는 이름이기도 했다.

달리오스 리뮈르. 달미에르의 시신을 미끼 삼아 달로아를 끌어내려 했던 바로 그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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