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148)
  • * * *

    ―진실을 알게 된 남자는 먼 길을 떠나지. 자신을 찾아 땅끝까지 헤맸던 호수의 정령처럼.

    아리아드네가 남긴 말은 족쇄가 되어 그를 칭칭 휘감았다. 그가 눈을 뗀 그 잠깐 사이에 그녀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누군가 제 목을 틀어쥔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뭐 해, 같이 춤이라도 추고 와.

    그렇게 말하며 유진을 군중 속으로 떠밀었던 달로아와 그녀의 남동생 역시 어디에도 없었다. 유진은 사람들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바쁘게 몸을 움직이던 사람들이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가 기억하는 순간부터 시간은 언제나 그의 편이었다. 유진은 한 번도 어떤 순간이 절실했던 적이 없었다. 찰나의 순간을 멈추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도무지 안심할 수가 없었다. 잠깐 눈앞에서 사라진 것뿐인데, 곧 찾을 수 있을 텐데, 그런데, 그런데도…….

    유진은 초조한 속을 다스리지 못해 제 머리를 감싼 채로 숨을 헐떡였다. 눈앞이 새까맣게 변하더니 그의 악몽 중 일부가 마치 생생한 현실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아, 그들이라면 이미 죽었지. 그녀가 사랑하던 것, 그녀를 사랑하던 것, 이 세상에 이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붉은 기가 도는 금발을 한 남자는 교활한 뱀의 얼굴을 한 채 흡족한 듯 웃으며 말했다.

    ‘이계의 방문자여, 지난 선택을 후회하나? 아리아드네를 구하고 싶나? 그대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그녀가 잃은 것들을 되찾아 줄 순 없을 텐데.’

    그 말을 하는 남자는 그녀의 행복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페렌트의 새로운 왕 카이엔 케이루스.

    유진은 제 꿈을 그저 악몽으로만 치부할 수가 없었다. 지나치게 정교한 꿈은 현실의 그조차도 알지 못했던 이곳의 이면을 알려 주고는 했다. 예를 들자면, 현실의 그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축제가 열린 리뮈르의 거리 같은.

    이 광경을 보는 것이 처음이어야 하는데, 그는 축제가 열린 리뮈르 거리의 모습을 이미 알고 있었다. 꿈속의 그가 경험한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더욱 불안했다. 이 모든 것이 제 몸에 기생한 카푸트가 보여 주는 미래일까 봐. 아니, 이 모든 것은 제 불안이 만들어 낸 망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제 망상이라고 해도, 한번 흐른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아무리 시간이 그의 편이라고는 하나, 그라고 세계의 시간까지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고 나면 늦는다. 그런 후회는 한 번으로 족했다.

    ‘제발, 제발…….’

    그는 노란 등이 빼곡히 걸린 거리 곳곳을 헤매고 다녔다. 축제 중인 리뮈르 영지는 온통 사람들로 가득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가게 안을 가득 메운 사람들 사이로 그가 지나가자 사람들은 마치 태엽이 고장 난 인형처럼 그대로 행동을 멈췄다.

    자신이 시간을 멈출 수 있는 범위가 얼마만큼인지, 얼마 동안 시간을 멈출 수 있는지 그조차 제 한계를 몰랐다.

    이곳의 시간이 멈춘 지금도, 아리아드네가 있는 그곳의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생각하면 조금도 지체할 수 없었다.

    째깍, 멈추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몇 번의 시간이 멈추고,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흘렀던가. 멈췄던 바람이 불고,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술과 음식을 먹었다.

    목에서 피가 넘어오는 것처럼 숨이 들끓고 땀이 비 오듯 흘렀다. 힘을 지나치게 사용한 탓인지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하늘의 달도 서쪽으로 성큼 가까워져 있었다. 아리아드네가 사라진 지도 서너 시간은 족히 지났다는 뜻이었다.

    그가 스물다섯 번째로 들어선 골목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가게의 문을 열었다. 유진이 문을 열자 시끄럽던 소음이 단번에 멎었다.

    어둑한 조명 사이로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두 손을 치켜든 채 움직임을 멈춘 사람들 사이로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이봐.”

    유진이 그녀의 어깨를 흔들자 마치 잠에서 깨어난 것 같은 멍한 얼굴이 눈을 깜박였다.

    “어, 어?”

    달로아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얼빠진 감탄사만 뱉어 냈다.

    “다른 사람은 어디 있어?”

    유진의 물음에 그제야 정신이 든 달로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게 대체 뭐야…….”

    그녀는 죄다 움직임을 멈춘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떡 벌렸다가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함을 질렀다.

    “그때도! 이렇게 했던 거였어.”

    달로아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혼잣말을 쏟아 냈지만.

    “와, 이게 대체 무슨 능력이야. 이런 사람을 어떻게 이겨.”

    그에겐 그것을 들어 줄 여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디 있어! 빨리 말해.”

    무심을 가장하고 있던 회색 눈동자가 깨진 유리 조각처럼 날카롭고, 벼랑 끝에 몰린 사람처럼 초조한 빛을 띠었다.

    그의 간절함에 떠밀린 달로아가 삐걱삐걱 걸음을 움직였다. 달로아가 뒤쪽으로 난 작은 쪽문을 열자 왁자지껄한 소음과 함께 뜨거운 훈기가 훅 밀려들었다.

    유진이 달로아를 찾아낸 이 도박장은 큰 대로에 있는 술집과 연결된 곳이었다. 보통은 술집을 통해서 도박장에 들어오는데 비범한 사람은 도박장을 먼저 찾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아, 저기 있네.”

    달로아가 구석에 앉은 아리아드네를 발견하고 다가가려던 찰나, 옅은 금발이 테이블 위로 풀썩 떨어졌다.

    “아리아드네!”

    유진의 다급한 부름과 함께 다시금 술집 안에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달로아는 이 모든 것을 제 눈으로 보고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일을 벌인 당사자는 쓰러진 아리아드네에게로 성큼 다가갔다. 달로아도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아갔다. 그가 쓰러진 아리아드네를 제 품에 안으며 맞은편에 앉은 달미에르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말해.”

    조금 전까지 술집 안을 가득 채웠던 소리들이 일순간에 멎었는데도 달미에르는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글쎄요.”

    엷은 웃음을 지은 달미에르가 제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잔에 담긴 술을 단번에 비워 냈다. 달미에르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 술을 마시며 대화한 것밖에는……. 공녀께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저는 눈이 보이질 않아서.”

    한쪽 입술을 끌어 올린 동생의 얼굴이 마치 모르는 사람의 것처럼 낯설어, 달로아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이곳에 둘만 남겨 두고 몰래 도박장으로 빠져나갈 때까지만 해도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까칠한 좀생이였는데…….

    “부디 그녀에게 아무 일이 없기를 바라야 할 거야. 비켜.”

    유진이 아리아드네를 품에 안은 채로 술집을 빠져나갔다. 쓰러지면서 술을 엎지르기라도 했는지 아리아드네의 옷과 머리가 조금 젖어 있었다.

    그들이 사라지자 술집 안은 다시 시끌벅적한 소음으로 가득 찼다. 달로아는 아무 말 없이 제 잔에 술을 채우는 달미에르에게서 술병을 빼앗았다.

    “뭐야? 너 술도 안 좋아하면서.”

    그가 잔에 남긴 술을 가볍게 털어 넣으며 말했다.

    “안 좋아한다고 못하는 건 아니니까.”

    “메르디에스 공녀는 왜 갑자기 쓰러진 거래? 술을 얼마나 마셨길래.”

    달로아의 물음에 달미에르의 웃음이 짙어졌다.

    “너 그거 좀 하지 마. 기분 나빠. 소름 돋아.”

    평생을 한 몸처럼 보아 온 얼굴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어색했다. 달로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제 팔뚝을 쓸어내렸다.

    “로아, 네가 늘 버릇처럼 말했지. 리뮈르에 변화의 바람이 필요하다면 그걸 결정하는 건 우리의 의지여야 한다고.”

    “갑자기 그건 왜?”

    뚱딴지같은 소리에 달로아의 미간이 구겨졌다.

    “아니, 이번엔 네가 틀렸어. 바람은 밖에서 불어오는 거야. 바람이 불어오면 거기에 휘말리는 사람은 도리가 없는 거지. 그 사람이 바람이었던 거야. 리뮈르를 뒤흔들.”

    자리에서 일어난 달미에르가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달로아는 순순히 일어나 달미에르의 팔을 잡고 술집을 나섰다.

    세찬 겨울바람에 거리 곳곳에 걸린 노란 등이 흔들리고 있었다. 월식을 이틀 앞둔 밤이었다.

    * * *

    만월에 가까운 둥근 달이 새까만 밤하늘에 떠 있었다.

    저벅저벅, 새까만 하늘처럼 어두운 머리카락을 지닌 사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옅은 금발이 그의 품 안에서 하늘하늘 흔들렸다. 여자의 머리카락은 그를 비추는 밤하늘의 달빛처럼 황홀한 색이었다.

    ‘대체 얼마나 마신 건지…….’

    리뮈르 사람들이 주로 마시는 술은 몇 번이나 증류를 거친 독한 종류였다. 그의 품에 안긴 아리아드네에게서도 마치 쏟아붓기라도 한 것처럼 알코올의 알싸한 냄새가 났다.

    “으음.”

    무엇이 불편한지 품 안의 여자가 뒤척이며 몸을 움직였다. 발갛게 익은 볼이 그의 가슴팍을 찾아 파고들었다.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그의 발걸음이 뚝 멈추었다.

    술을 마신 건 그녀가 아니라 저인 것만 같았다. 서로의 몸이 닿은 곳마다 열이 올랐다. 아니, 이걸 두고 몸이 닿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두꺼운 천이 몇 겹이나 서로를 가로막고 있는데도 왜 이토록 마음이 시끄러운 걸까.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슬쩍 치워 볼까, 생각했다가도 이내 욕심을 버리고 그녀를 추슬러 안았다.

    하지만 술에 취한 그녀의 체온은 평소보다도 훨씬 뜨거워서 그는 좀처럼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리뮈르의 매서운 겨울바람조차도 그의 몸을 조금도 달래 주지 못했다.

    차라리 이대로 공기 속으로 녹아들었으면……. 그러면 그를 괴롭히는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텐데. 그 스스로 벗어나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는지도 몰랐다.

    프레모 대륙에서 가장 강한 기사들이 지키는 리뮈르 공작저의 담을 가뿐히 넘은 유진은 그대로 아리아드네가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

    주인이 없는 방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어두운 방 안을 가로질렀다.

    방 한가운데 놓인 침대가 그의 목표였다. 그는 아리아드네를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오늘 외출을 위해 그녀가 차려입은 옷은 감이 좀 좋을 뿐, 평민들이 입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몸을 조이는 것도,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것도 아니니 이대로 입고 자도 크게 불편할 것 같진 않았다. 다만 목 끝까지 단단히 채운 단추가 눈에 걸렸다.

    그는 아리아드네의 옷깃에 달린 단추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손가락 끝에 손톱만 한 단추가 닿았다. 단추의 실이 몇 가닥인지 셀 수 있을 정도로 온 신경이 손끝에 실렸다.

    그는 단추 푸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그저 그것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시작은 분명 이게 아니었는데……. 정신을 잃은 사람을 상대로 이런 마음이 드는 게 상종 못 할 파렴치한이 된 것만 같았다.

    유진은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덮었다. 새까만 어둠이 그를 덮치면 익숙한 광경들이 펼쳐졌다.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지옥 같은 외곽의 광경들, 새빨간 덩어리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불타는 남쪽의 성과 높은 탑에 갇혀 자신을 원망하는 여자, 오로지 분노만으로 겨우 생을 붙잡고 있는 그녀…….

    제 불행이야 익숙하니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꿈처럼 제 불행이 그녀마저 삼켜 버리면 어쩌나. 그런 것들을 떠올리면 그는 제 속의 욕심을 조금 더 눌러 담을 수 있었다.

    ―말했지? 이곳에서 약지는 영혼과 사랑을 품고 있다고.

    하지만 언젠가 여자의 입술이 닿았던 손가락이 간질거릴 때마다…….

    ―당신 살던 데는 미의식이 달라?

    방 안을 비추는 달빛처럼 빛나는 머리카락이, 영혼을 불사르는 불처럼 푸른 눈동자가, 조금도 흔들림 없는 곧은 시선이.

    ―그럼 당신 취향이 아니야? 나 안 예뻐?

    제 마음을 고백할 때조차 자신만만한 당당함이.

    ―혹시라도 당신이 나 거절하면, 나 차이는 것도 처음이야.

    언제든 눈이 멀 것처럼 환하게 웃던 그 미소가.

    ―당신도 날 좋아하잖아.

    그 모든 것들이 제 속에서 끝없이 되풀이되었다.

    그래도 이만하면 충분했다. 그 모든 것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 해도, 제 불행에 여자를 끌어들이는 것보다는 나았다.

    유진이 손바닥을 펼쳐 아리아드네의 눈을 덮었다. 그녀가 부디 평온한 밤을 보냈으면 했다. 이런 순간조차 긴 속눈썹이 살랑대며 닿아 오는 감촉이 그의 마음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제 손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그대로 그곳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가지 마.”

    잠꼬대일 것이 분명한 목소리가 저를 붙들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제 약지를 옥죄기 전까지만 해도.

    “더 자.”

    차마 그 손을 뿌리칠 수 없어 고작 한다는 것이 그런 말이었다.

    깜박, 눈꺼풀 아래 숨겨졌던 푸른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선연히 드러났다. 언제나 선명했던 눈동자는 잠에 취한 듯 풀어진 채로 느리게 깜박였다.

    “유진? 잘 찾아왔네.”

    평소보다 느릿한 어조, 불분명한 발음, 그리고 취기가 돌아 기분이 좋은지 넘쳐흐르는 웃음. 곱게 휘어진 눈가가, 슬쩍 벌어진 입술이 그의 머릿속에서 어서 도망치라며 경보(警報)를 울렸다.

    “잠들 때까지 내 옆에 있어.”

    하지만 아리아드네가 웃으며 그의 손을 끌어당기자 그는 그대로 침대 맡에 떨어졌다.

    “꿈인가?”

    아리아드네가 그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혼몽한 듯 느리게 움직이는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 같았다.

    “꿈이야.”

    그가 담담히 대꾸했다. 이것이 꿈이어야만 잠시라도 곁에 있을 수 있었다.

    “왜 날 피해?”

    그녀는 꿈에서조차 둘러 가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직시하는 눈동자가 숨김없이 제 마음을 말해 온다.

    그는 한숨 같은 웃음을 흘리며 리볼버를 꺼내 들었다.

    리볼버 가운데 달린 실린더를 옆으로 젖히자 탄환을 재는 여섯 개의 구멍이 드러났다. 언젠가 그가 보여 주었던 것처럼 여섯 개의 약실 가운데 탄환이 들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유진은 하나의 탄환이 든 실린더를 뱅그르르 돌린 뒤 제 관자놀이에 겨누었다.

    “왜 그래? 꿈에서라도 이런 건 싫어.”

    잠에 취해 흐트러져 있던 아리아드네가 몸을 일으켰다.

    “이 약실에 탄환이 있을 확률은 1/6이야.”

    그가 천천히 해머를 당기자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실린더가 돌아갔다.

    “내가 당신을 욕심내도 괜찮을까? 당신이 결정해. 당신이 그러라면 나도 도박을 해 볼까 하고.”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긴 아리아드네가 눈가를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 목숨을 가지고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내가 부담돼?”

    “그래서 당신 선택은?”

    “누가―”

    잔뜩 화난 얼굴로 다가온 아리아드네가 그의 손에서 리볼버를 낚아챘다.

    “내 앞에서 그따위 짓 하도록 내버려 둘 것 같아?”

    “그러니까 나도―”

    유진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아리아드네의 머리카락 끝을 잠시 쥐었다가 그대로 풀어 주었다.

    “당신을 두고 그런 도박을 할 순 없어.”

    언제부터였을까. 제 약지에 입 맞추며 사랑을 고백한 순간이었을까? 제게 성물을 보여 주겠다며 거래를 제안했을 때부터였을까? 아니면, 무지개가 걸린 란데르의 호수에서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였을까.

    모든 순간이 그를 황홀하게 했으나, 그 순간들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는 언제고 그녀에게 묶였을 것만 같았다. 저 푸른 불꽃을 본 순간부터 제 영혼은 제 것이 아니었다.

    “당신이 나를 욕심내는 게 날 위험하게 해?”

    영리한 여자는 제가 하려는 말을 모두 알아듣고는 제게 확인을 요구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제 관자놀이에 리볼버를 겨눴을 때, 그는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했다.

    여자가 그에게 자신을 욕심내라고 한다면, 그래서 제 관자놀이에 쏜 리볼버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괜찮다는 신호가 아닐까 하고.

    차라리 그렇게라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마음에 둔 그녀는 그렇게 숨기고 감추는 것 따위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다.

    새파란 눈으로 그런 짓을 두고 볼 거 같으냐며 화를 냈다. 마치 그의 비겁함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 그렇단 말이지.”

    하, 어이가 없다는 듯 조소를 머금은 아리아드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매에 서렸던 웃음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다음이었다.

    “당신이 결정해.”

    그녀가 손에 든 리볼버를 그대로 제 관자놀이에 겨누었다. 유진이 아리아드네를 말리려 발을 뻗었지만.

    “오지 마. 당신 그 잘난 능력도 쓰지 마.”

    서릿발 같은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는 마치 주박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당신이 결정해. 지금의 날 구할 건지, 당신 때문에 위험해질지도 모를 미래의 나를 구할 건지.”

    “아리아드네, 그거 놓고 이야기해.”

    제 이름을 들은 아리아드네는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거 알아? 당신은 내가 위험할 때만 내 이름을 부른다는 거.”

    달빛에 비친 아리아드네의 얼굴이 요요히 빛났다. 그녀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짙어진다고 느낀 순간, 가느다란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다.

    핏, 리볼버에서 새어 나온 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작게 흩날렸다.

    “이젠 1/5인가? 아직 나쁘지 않은 확률이네.”

    아리아드네는 눈조차 깜박이지 않았다. 주먹을 쥔 남자의 손이 잘게 떨렸다.

    “오지 마!”

    유진이 발을 떼려고만 해도 송곳같이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를 막았다. 그런 그를 보던 아리아드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꿈을 꿔도 뭐 이딴 걸.”

    “꿈이 아니야. 그러니까―”

    그의 말에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꿈이 아니야?”

    “아니야.”

    “그럼 뭐가 달라져?”

    환하게 웃는 얼굴은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언젠가 유진은 그녀에게 풀멘의 조작법을 알려 준 일이 있었다. 영리한 그녀는 한 번 배운 것은 잊는 법이 없었다. 아리아드네가 천천히 풀멘의 뒤쪽에 달린 쇠고리를 젖혔다.

    “……내가.”

    그는 저 짧은 말을 뱉는 것이 제 심장을 토해 내는 것만 같았다.

    “말해.”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고서야 그는 마침내.

    “내가 졌어.”

    제 패배를 선언할 수 있었다.

    툭, 두꺼운 카펫 위로 그녀의 손에 들린 리볼버가 마침내 떨어졌다.

    그것을 신호로 아리아드네에게 다가간 그가 그녀를 으스러지도록 껴안았다.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곧게 뻗은 콧대 아래에 자리한 것은 붉은 입술. 그는 아리아드네의 턱을 쥐고 그대로 입술을 붙였다.

    열린 입술 사이로 서로의 숨이 섞였다. 마치 상대의 숨을 모조리 앗아갈 것처럼 거칠고 사나운 입맞춤이었다.

    “내가 말했잖아. 호수의 정령이 떠난 건 남자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남자가 자신을 찾아올 것을 믿어서라고.”

    가느다란 아리아드네의 손가락이 광장에서 물어뜯은 그의 귓불을 꾹 누르며 달콤한 웃음을 흘렸다.

    ―호수의 정령이 떠난 건 남자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야. 그건 남자가 자신을 찾아올 것을 믿었기 때문이야.

    광장에서 아리아드네가 그의 귀를 물어뜯으며 남긴 말은…….

    ―그러니까 내가 사라지면 당신도 날 찾아와야 해.

    그 자체로 주박이 되어 그를 옭아맸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말대로 사라진 그녀를 찾아야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패배였다. 그는 종일 그녀가 그린 판 위에서 빙빙 맴돌다 그녀가 열어 준 출구로 간신히 탈출했다. 아니, 어쩌면 이 또한 그녀가 만든 함정일지도 몰랐다.

    그렇다 해도 이제는 더는 도망가고 싶지 않았다. 망상인지 예지일지 모를 그 지긋지긋한 악몽으로부터도, 그리고 자신의 심장을 이토록 거세게 뛰게 하는 그녀로부터도.

    그는 다시 고개를 기울여 아리아드네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서로의 혀가 섞이고, 호흡을 나누는 진득한 키스가 이어졌다.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감싸고, 아리아드네의 손이 유진의 머리카락을 파고들었다.

    그때, 그녀의 손에서 끝이 뾰족한 쇳덩이 하나가 굴러떨어졌다. 여섯 개의 약실 중 하나에 들어 있어야 할 탄환은 카펫 위를 굴러다녔다.

    “이것 봐. 당신도 날 좋아하잖아.”

    그녀의 웃음소리에 섞인 달콤한 말이 다시금 베어 문 그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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