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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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뮈르 거리는 온통 눈과 얼음으로 가득했다.

    눈으로 만든 성을 배경으로 얼음으로 만든 말에 탄 얼음 기사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듯이 앞발을 치켜든 말의 모습은 꼭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귀까지 덮는 털모자를 쓴 아이들이 얼음으로 만든 말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거리에 나온 아이들은 하나같이 손목에 작은 장식물을 걸고 있었다. 노란 빛깔의 둥그스름한 얼음 장식은 어디를 보나 달의 형상을 본뜬 것이었다.

    “잠시만.”

    뒷짐을 진 채로 느릿느릿하게 걷던 달로아가 먹거리를 파는 행상 앞에서 멈춰 섰다.

    “여기 귀티아 하나.”

    그새 값을 치르고 벌써 크게 한 입 베어 문 달로아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먹을 사람?”

    귀티아는 돼지고기에서 비계가 많은 부위를 염장한 뒤 훈제한 것으로, 얇게 저며 빵 사이에 끼워 먹거나 향신료를 뿌려 술안주로 먹는 리뮈르의 전통 음식이었다.

    “싫음 말고.”

    눅진한 버터와 비슷한 풍미였으나 와인과 함께 먹는 것이 아니라면 별로 내키지 않았다. 아리아드네가 조그맣게 고개를 젓자 달로아도 더는 권하지 않았다.

    “미에르 넌?”

    “난 느끼한 거 싫어하잖아.”

    “그래서 안 먹는다고?”

    달미에르가 작게 인상을 찌푸리자 달로아가 되물었다.

    “프리고, 사워크림 얹어서.”

    그러자 달미에르가 냉큼 주문을 마쳤다. 태연한 얼굴로 음식을 기다리는 모습이 의외였다. 저 새침하고 깐깐한 인상의 도련님이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을 아무렇지 않게 먹을 줄이야.

    달로아는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프리고 하나를 주문했다.

    곧 상인이 밀가루에 신선한 달걀과 치즈를 넣은 반죽을 납작한 모양으로 솜씨 좋게 구워 냈다. 바싹 구워 낸 프리고에 사워크림이 듬뿍 올라갔다.

    달로아가 뜨끈한 프리고를 달미에르 손에 쥐여 주었다. 그것을 받아 든 달미에르가 프리고를 작게 베어 물었다.

    막 구워 낸 프리고에서는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뜨거운 열기가 리뮈르의 겨울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입맛이 돌았다. 아리아드네의 시선을 느꼈는지 프리고를 먹던 달미에르가 고개를 들었다.

    “공녀께서도 드시겠습니까?”

    “야, 메르디에스 딸이 이런 거 먹겠냐?”

    달미에르의 권유에 달로아가 면박을 주었다.

    “그럴까요?”

    아리아드네가 냉큼 수락하자 남매는 조금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리아드네는 막 구워 낸 프리고를 호호 불어 가며 먹었다.

    처음 먹어 보는 프리고는 치즈 케이크를 구운 것 같은 맛이었다. 무엇보다 손바닥 반만 한 크기라 부담이 없어 좋았다.

    “왜 그러세요?”

    먹는 것도 멈추고 자신을 살피는 듯한 달미에르의 태도에 아리아드네가 물었다.

    “이런 음식은 불쾌해하실 줄 알았습니다.”

    “어떤 음식이요?”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달미에르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러니까…… 이런 소박한?”

    “메르디에스의 딸이니까?”

    “…….”

    “메르디에스의 딸이니까요. 생각하신 대로 산해진미라 불리는 그런 것들이야 언제든 먹을 수 있는데 굳이 그리워할 필요가 없죠. 드레스를 입고 잠을 잘 순 없잖아요? 저라고 매끼 정찬을 먹는 건 아니에요.”

    아리아드네는 제 손에 붙은 부스러기를 털어 내고 남은 기름기는 치마에 슥슥 닦았다. 어차피 두 번 입지 않을 옷이었다.

    “맛있네요. 제가 본 리뮈르처럼 담백하고 솔직한 맛이었어요.”

    “……이 땅의 음식을 즐겨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좋은 음식을 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끈한 음식을 먹자 속이 한결 든든해졌다.

    아리아드네는 달로아를 따라 리뮈르 시내를 종횡무진 돌아다녔다. 눈 뭉치로 과녁을 맞히는 게임도 했고, 유명한 전투를 재현한 눈싸움도 구경했다.

    축제의 클라이맥스를 앞두고 거리극이 시작되었다. 거리극은 거리 곳곳에서 열렸는데,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다른 내용의 극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리뮈르 시조의 이야기를 구경하는 달로아와는 달리, 조금 옆에서 다른 내용의 극을 구경했다.

    아리아드네가 보는 거리극은 어려서 헤어진 프레이야와 프레이르라는 이란성 쌍둥이가 서로를 찾아 헤맨 끝에 마침내 조우하게 된다는 내용으로, 리뮈르 지방의 전통 설화 중 하나였다.

    “프레이야, 내 영혼의 반쪽.”

    “마침내 우리는 온전한 영혼으로 남을 수 있게 되었어. 프레이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연인이나 할 법한 대사였지만 둘이 저런 말을 주고받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정말 영혼을 공유한 것 같으신가요?”

    “어떨 것 같습니까?”

    아리아드네가 제 곁에서 함께 거리극을 구경하는 달미에르에게 물었지만, 되돌아온 것은 또 다른 물음이었다.

    “글쎄요. 저는 친동기조차 없는지라 어떤 느낌일지 잘 모르겠네요.”

    프레모 대륙 사람들은 ‘쌍둥이’ 사이에는 특별한 어떤 유대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일란성 쌍둥이는 하나의 육체를 나눠 가진 각기 다른 영혼이고, 이란성 쌍둥이는 하나의 영혼이 둘로 갈라져 각기 다른 육체를 타고난 것이라 믿기 때문이었다.

    “정말 달로아와 나는 본디 하나의 영혼이었을까요?”

    달미에르는 마치 혼잣말처럼 잔잔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대답을 바라는 것이 아니기에 아리아드네는 침묵을 지키며 그의 말을 들었다.

    “정말 우리가 하나라면 달로아는 내게 그토록 미안해할 필요가 없는데……. 내가 무엇을 잃었다 해도 달로아에게 그것이 남았다면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는 희뿌연 막으로 덮인 제 눈동자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달로아는 달미에르가 죽고 나서야 심연의 권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대체 심연의 권능과 앞을 보지 못하는 달미에르의 눈 사이에는 어떤 관련이 있기에.

    “이 눈 때문에 달로아의 발목을 잡고 싶지는 않습니다. 소르체 혈족에게 써 주신 소개장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혹여 그것으로 제 누이와 어떤 거래를 하실 생각이라면…….”

    그의 불투명한 눈동자가 아리아드네 쪽을 향했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아도 그 감정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부탁드립니다. 만약 그것 때문에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그것은 제 몫입니다.”

    그의 눈동자에는 제 누이에 대한 걱정과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가 달로아를 이토록 걱정하는 것은 달미에르의 눈을 위해서라면 그녀가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로를 이토록이나 아끼는 것은 그들이 본디 하나의 영혼이기 때문일까.

    “한날한시에 태어난 반쪽이라……. 가지지 못할 것이 없다는 메르디에스의 딸인 내게는 없는 것이네요. 하지만 내게도 가족은 있습니다.”

    아니, 세상에 당연한 애정은 없다. 그들의 유대와 애정은 그들이 시간을 들여 쌓아 올린 것이다.

    “나는 그 소개장을 빌미로 리뮈르의 누구에게든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인질로 삼아 무엇을 얻으려는 것만큼 무용한 것이 있을까. 그렇게 얻은 것이 단단할 리 없다.

    “왜요? 당신이 그것을 빌미로 무엇을 요구하든 꽤나 유용한 카드일 텐데요.”

    아리아드네의 단호한 대답에 달미에르는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당신 말대로 당신이 리뮈르에 온 것이 마물의 습격을 막기 위해서라면 앞뒤 가릴 처지가 아닐 텐데요. 왜 어려운 길을 택하는 겁니까?”

    “……더는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요.”

    더구나 그것이 제 잘못을 고해해야 할 대상이라면 더더욱이나. 그런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리뮈르의 지난 세월은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고 이미 지난 일이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발뺌하는 것 또한 도리가 아니겠지요.”

    달미에르의 희뿌연 눈동자가 아리아드네를 탐색하듯 바쁘게 움직였다.

    “그것은 공녀께서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 아닙니까?”

    “메르디에스의 부와 권력 또한 제 손으로 이룬 것이 아니니까요. 메르디에스가 이룩한 부와 권력을 이어받았으니 그 뒤에 있는 그림자 또한 마땅히 제 몫입니다.”

    “천을 짜기 위해 꼬인 실타래부터 풀겠다는 말씀입니까?”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번거롭고 귀찮은 과정이 있다 해도 리뮈르의 마음을 얻는 것이 먼저였다. 과거를 매듭짓지 않은 채 말하는 미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리뮈르의 사람들이 겪은 상실이 카이엔을 향한 제 복수보다 얕은 것이라 누가 단정할 수 있나.

    “그러니 그 일로 더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소개장을 써 드린 것은 제 작은 호의일 뿐 그것으로 무언가를 요구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달미에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와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저 여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공녀께서는…….”

    혼란스러워진 그가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던 그때, 어느새 어두워진 거리를 밝히는 노란 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노란빛을 내는 둥그스름한 등은 아이들이 저마다 하나씩 손목에 걸고 다니던 것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태양이 사라진 밤하늘을 비추는 달이 지상에 내려와 거리 곳곳에 걸렸다.

    달미에르의 하얀 얼굴에도 달 등의 노란빛이 비쳐 선명한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뭐 해? 이제부터가 이 축제의 클라이맥슨데!”

    들뜬 얼굴을 한 달로아가 아리아드네의 손목을 쥐고는 군중 속으로 끼어들었다.

    둥글게 원을 만든 사람들이 쿵쿵 크게 발을 구르더니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돌바닥을 두드리는 발소리가 어둠을 쫓아낼 듯이 거세게 쿵쿵 울려 퍼졌다. 황량한 바람과 거센 추위를 모조리 잊을 만큼 격정적인 움직임이 이어졌다.

    아리아드네는 저를 붙드는 손길에 이끌려 빙글빙글 돌다가 풀려났다. 그렇게 풀려나고 나면 제 손을 붙든 이가 바뀌어 있었다.

    동작을 틀리거나 박자를 놓쳐도 누구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이 하는 단순한 동작을 뒤늦게 따라 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마치 뜀박질을 한 것처럼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어느새 멀어진 달로아가 멀찍이 떨어진 달미에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군중에서 이탈했다.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돌렸다.

    빙글빙글 한 바퀴 돌고 나면 리뮈르의 겨울바람을 닮은 서늘한 손이 자신을 붙들었다.

    새하얀 눈처럼 창백한 피부, 그리고 밤하늘보다도 더 어두운 검은 머리카락과 겨울 늑대를 닮은 서늘한 회색 눈동자. 눈을 감고도 그려 낼 수 있는 얼굴이 아리아드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엇갈리게 마주 잡은 손이 마치 저를 그에게 매어 두기라도 할 듯 단단했다.

    “이 춤이 무슨 춤인지 알아?”

    엇갈려 잡은 손을 풀어내 옆으로 뻗으면 그의 어깨가 제 어깨와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제 머리카락이 그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아니.”

    뒤로 발을 뻗으며 그에게서 멀어지면 여느 때처럼 짧은 대답만이 툭 떨어졌다.

    “얼음 호수를 지키는 호수의 정령이 어느 날 호수에 빠진 남자에게 반한 거야. 남자를 사랑한 정령은 금기를 어기고 사람을 살려 줬대.”

    엇갈린 손이 다시 풀리고 이번에는 반대쪽 어깨가 닿았다.

    “살아난 남자는 그대로 호수를 떠났고, 금기를 범한 정령은 호수에서 쫓겨나 남자를 찾아 헤맸지. 호수의 정령은 땅끝에서 마침내 남자를 찾아냈고, 그들은 사랑에 빠졌어.”

    유진의 낮은 숨소리가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눈꽃의 마법사가 호수의 정령을 찾아온 거야. 눈꽃의 마법사는 정령이 다시 호수로 돌아갈 방법을 찾았다고 했어. 정령은 고민 끝에 남자 곁에 남기로 결심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왼발을 뒤로 뻗으면 멀어지는 대신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노란빛으로 물든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포기한 정령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에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남자를 본 거야. 정령은 그대로 남자를 떠났고 남자는 홀로 남겨졌지.”

    딱딱, 바닥을 차며 발을 구르는 소리에 그녀의 목소리가 묻혔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남자는 정령이 자신을 떠난 이유를 몰랐어. 그날 밤, 그의 곁에 있었던 여자는 눈꽃의 마법사가 만들어 낸 환상이었으니까.”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생각했다. 얼음 호수의 정령은 눈꽃의 마법사가 만들어 낸 환상을 정말 몰라봤던 걸까.

    “진실을 알게 된 남자는 먼 길을 떠나지. 자신을 찾아 땅끝까지 헤맸던 호수의 정령처럼.”

    아리아드네가 유진의 손을 잡은 채로 빙글빙글 돌았다. 그녀는 그 손을 놓고 멀어지기 전에 그의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아니, 호수의 정령이 떠난 건 남자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야. 그건…….”

    낮은 속삭임과 함께 따끔 하는 작은 통증이 느껴졌다. 유진은 어느새 멀어져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아리아드네를 망연히 쳐다보았다.

    그는 제 앞에 새로이 자리한 여자와 마주할 수 없어 그곳에서 벗어났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몇 번이나 반복되고 새로이 음악이 시작될 때마다 사람들은 바뀐 파트너와 함께 발을 구르며 웃음을 터트렸다. 쿵쿵, 지축을 흔드는 발 구름 소리에 그의 심장이 같이 뛰었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뜨거웠다. 그는 붉어진 얼굴을 숙인 채로 손을 들어 제 귀를 감쌌다. 조금 전 제 귀에 닿은 숨결과, 그리고 이어서 귓불에 닿아 온 감촉.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이 귓불에 닿는가 싶더니 벌이라도 주는 것처럼 귓불을 세게 깨물었다. 하지만 그는 그 감각이 고통이라는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호수의 정령이 떠난 건 남자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야. 그건…….

    그의 머릿속은 온통 아리아드네가 남긴 마지막 말로 가득 찼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그를 감쌌다. 천천히 고개를 든 유진의 인상이 파삭 찌그러졌다. 춤을 추는 사람들 가운데 아리아드네는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남자를 떠나간 호수의 정령처럼, 그녀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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