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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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아드네가 제 어머니를 떠올릴 때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잎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처럼 마르고 앙상한 손가락이었다.

    생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고목(枯木)의 죽은 나뭇가지 같던 손가락. 그 손은 언제나 그림 같은 자태로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제게 내어 줄 것은 조금도 없다는 듯이.

    어머니는 한 달에 한 번 고작 두어 시간을 함께하는 것조차 마땅치 않아 내내 창밖만 보곤 했다.

    가끔 대화를 나누는 일도 있었지만 정치, 사회, 시사, 예술, 어떤 대화도 열 살도 채 되지 못한 어린아이가 이해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요즘은 무얼 배우느냐.

    ―이달에는 역사와 상업을 시작했어요.

    ―역사란 그 자체로 거대한 유기체와 같지. 한 인간의 삶을 이해하면 도시의 흥망성쇠를 짐작할 수 있게 되고, 도시의 흥망성쇠를 이해하면 나라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알게 된다. 지도자의 가장 큰 덕목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선한 마음과 의지로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닐까요?

    ―선한 마음과 의지라……. 결정을 따르는 자라면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하지만 결정을 내리는 자는 선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옳은 판단을 해야 한다.

    ―옳은 판단이 무엇인지 어떻게 아나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지. 그러니 네 눈이 보는 것은 지금이 아니라 미래여야 한다. 하지만 미래를 다녀올 수 없으니 역사라도 잘 배워 두려무나.

    열 살의 자신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대화가 요즘 들어 불쑥 떠오르곤 했다.

    제 결정이 옳은 것일까, 제 판단이 틀리면 어쩌나 흔들릴 때마다 그 말이 생각났다. 지금이 아니라 미래를 봐야 한다는 그 말이.

    ‘나는 3년 뒤 미래를 경험했어. 그러니까 내 판단을 믿어야 해.’

    그리고 그 말에 의지하는 자신을 깨닫는 순간 어쩐지 심란해졌다.

    사랑받은 기억은 없다. 사랑한 기억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듯 선명한 흔적을 남기고 떠나다니. 어머니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던 걸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아리아드네는 어머니가 아닌 ‘파시파에’로서의 그녀 삶이 종종 궁금해지곤 했다.

    “어머니 뵈었다면서? 어머니 시녀들이 도끼눈을 하고 이르던데. 내 손님이 약속도, 양해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 곤란했다고.”

    제 상념을 깨뜨린 목소리의 주인공은 달로아였다. 모처럼 포근한 날씨에 볕을 쬐고 있었는데…….

    “유난스럽다고 생각해?”

    해를 가린 채 아리아드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달로아가 그렇게 물었다.

    “아니, 이해해.”

    낯선 이를 유난스럽게 경계하는 것은 리뮈르 공비의 처소가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내 어머니도 그러셨으니까.”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작은 변수에도 크게 위험해지곤 한다.

    “…….”

    작게 인상을 찡그린 달로아가 잠시 숨을 참았다가 내쉬며 물었다.

    “그 짧은 시간에 어머니 건강 상태까지 눈치챘을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알았어?”

    “낙엽 타는 냄새.”

    “낙엽?”

    “어머니에게선 늘 낙엽을 태운 것 같은 냄새가 났어. 그게 약초를 말린 냄새라는 건 나중에야 알았는데……. 응접실에 그 냄새가 옅게 배어 있어서.”

    고통을 줄여 주는 마약성 독초 헤르바. 아리아드네는 헤르바를 말린 냄새가 마른 낙엽이 타는 냄새 같다고 생각했다.

    “아아, 다행이네.”

    그렇게 말하며 옆에 털썩 주저앉은 달로아의 얼굴은 생각 외로 담담했다.

    “아파 보이는 거 싫어하시거든.”

    바람에 달로아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해지는 저녁놀처럼 선명한 주황색이었다.

    한낮의 태양이 그녀의 얼굴 위로 강렬한 빛을 내리쬐었다. 눈이 부신 듯 찡그리는 달로아의 얼굴에 깃든 것은 체념과 슬픔이 아닌 깊은 애정이었다.

    무엇이 달랐던 걸까. 죽어 가는 가족을 둔 것은 같은데 무엇이 달라 달로아는 자신의 어머니를 저토록 사랑하는 걸까.

    아리아드네는 지금 이 순간 조금 외롭기도 하고, 누군가 그립기도 했다.

    그것은 메르디에스에 있을 레너드였으며, 글레나이고, 줄리와 이블린이자, 살리바에 남은 레이먼드였다.

    리뮈르의 차가운 겨울바람이 제 심장을 지나 몸속을 내달리는 것만 같았다. 마치 저 혼자만 겨울에 뚝 떨어진 기분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먼 곳에 있고, 함께 있는 사람은 닿을 듯이 닿지 않는.

    “영지 내 오래된 신전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과 조사가 시작됐어. 수상해 보이는 곳은 경계를 늘릴 예정이고.”

    달로아의 설명에 아리아드네의 눈이 빠르게 깜박였다.

    “이렇게 빨리?”

    수색을 할 예정이라는 것도 아니고 벌써 수색이 시작되었다니. 리뮈르 공비를 만난 것이 고작 이틀 전이었다. 공비의 결단과 추진력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호하고 신속했다.

    “내가 어머니를 만나라고 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어? 이 리뮈르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바로 어머니이거든.”

    달로아가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조사 결과에 따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되겠지. 아, 그리고 네가 좋아할 만한 소식이 하나 더 있어.”

    그녀가 노을 같은 제 머리카락을 빙빙 돌리며 은근히 몸을 붙여 왔다. 아무래도 진짜 용건은 이쪽이었던 모양이다. 반짝 빛을 내는 얼굴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음흉했다.

    “네 방문자님의 성물 접견 요청에 대해서 가족회의를 했는데…….”

    달로아의 말에 아리아드네의 얼굴이 파삭 구겨졌다.

    “……내 방문자님 같은 소리 하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아리아드네가 몸을 뒤로 빼 달로아로부터 멀어지며 물었다.

    “그게 왜 내가 좋을 소식이야?”

    유진을 떠올리는 순간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마치 바람처럼 내내 주위만 맴돌면서 잡힐 듯 잡히지 않아 애태우더니 리뮈르에 도착한 뒤로는 정말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다가오는가 싶으면 저만큼 도망가고, 그러다 그가 필요한 순간에는 귀신같이 나타났다 바람같이 사라지곤 했다.

    그런데 그것도 이틀 전까지였다. 요 며칠은 그의 그림자조차도 보기 어려웠다. 유진이 작정하고 자신을 피하기 시작하니 도무지 그를 잡아 둘 방도가 없었다.

    지금 제 마음이 끝을 모르고 추락하는 것에는 그의 공이 적지 않았다.

    ‘제 마음도 모르는 겁쟁이. 피하기만 하고 비겁해.’

    하지만 아무리 투덜거려도 그 끝은 늘 하나였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무리 자신을 괴롭혀도…….

    “흐음, 그래서 관심 없다고?”

    달로아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비음이 잔뜩 섞인 콧소리를 냈다. 그럴 리 없다는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그래, 애정만큼 그 무게가 정확한 건 없다. 조금이라도 더 사랑하는 사람이 절대적 약자가 되는, 결과가 정해진 싸움.

    ‘당신을 보고 싶어. 만지고 싶어.’

    아무리 유진에게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제 마음은 늘 같은 자리에서 맴돌았다.

    ‘당신 자리는 내 옆이야. 당신도 날 좋아하니까.’

    계산을 끝낸 아리아드네가 달로아의 손목을 덥석 잡으며 싱긋 웃음을 지었다.

    “나한테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와는 전략적 제휴 관계를 맺었으니 도울 수 있다면 응당 도와야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방긋 웃은 달로아가 엄지와 검지로 자그마한 틈을 만들며 한쪽 눈가를 찡긋거렸다.

    “거의 성사 직전인데, 조금 모자란 그런 상태거든. 내가 조금만 더 강하게 밀어붙이면 될 것 같은데 말이야. 어떻게 내가 힘 좀 써 봐?”

    “뭘 원하는데?”

    “내가 원하는 게 뭐겠어? 뻔하잖아.”

    페렌트의 방벽을 지키는 수호자, 심판의 리뮈르, 그 리뮈르의 하나뿐인 공녀 달로아가 몹시 우아하게 뻗은 엄지와 검지를 비비적거리며 덧붙였다.

    ‘대주 달헤임이나 공비 달리케 모두 저런 성격은 아닌 것 같던데……. 대체 누구를 닮은 건지.’

    아리아드네가 눈썹을 들썩이는 달로아를 보며 말해 보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한 게임 땡길 때가 한참 지났단 말이지.”

    하지만 그 제안만큼은 몹시 흡족했다. 달로아의 제안에 아리아드네의 웃음이 깊어졌다. 좋은 거래가 될 것 같았다.

    * * *

    햇빛을 받은 하얀 눈들이 질 좋은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유진과 마주한 것이 사흘 만이라 더 기분이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리아드네는 목줄에 매여 끌려온 것 같은 유진을 보며 생긋 웃었다. 유진은 잠시 움찔하는 것 같더니 그대로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리뮈르 공녀, 제 청을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구경을 할 수 있을 듯합니다. 리뮈르의 아름다운 모습을 꼭, 제 눈으로 보고 싶었거든요.”

    아리아드네가 먼저 달로아에게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러운 인사를 건넸다. 그 매끄러운 인사의 어딘가가 튀어나온 못처럼 느껴지는 건…….

    ‘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달로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그림 같은 미소로 화답했다.

    “메르디에스와는 다른 풍경일 거라 자신합니다. 오늘의 외출이 메르디에스 공녀께 즐거운 기억으로 남기를 바랄 뿐이죠.”

    호호호, 무척이나 작위적인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하지만 연극을 하는 달로아의 마음만큼은 어느 때보다도 흡족했다.

    ―한 게임 땡길 때가 한참 지났단 말이지.

    밤 외출이 발각당한 뒤로 달로아는 리뮈르 공저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좀이 쑤셔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공비께서 리뮈르 영지를 둘러보고 싶으면 너와 함께하면 좋을 거라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어머니께서?

    ―어때?

    아리아드네의 의도를 눈치챈 달로아가 샐쭉 가늘게 눈을 떴다.

    ―어머니께서 내게 네 안내를 맡겼다는데 그것을 번복하다니, 안 될 일이지. 내가 대접할게.

    일이 이렇게 진행되면 아리아드네는 공비의 권유에 따른 것뿐이고, 달로아는 어머니의 명에 따른 것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달헤임이 달로아가 아닌 다른 사람을 데려가라 말하는 것은 공비를 무시하는 행위였다.

    ‘아버지께서 그럴 리가 없지.’

    ―그래, 그런데 말이야. 우리가 나간다면 호위가 붙겠지?

    ―일당백인 네 방문자님이 계시는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

    달로아가 아리아드네를 끌고 나가려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유진이 함께 가야 호위들의 감시망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아리아드네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피어났다.

    ―내 생각도 그래. 너라면 그를 데려가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가족회의 결과가 네 손에 달려 있으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나보고 그 남자를 데려오란 말이구나.

    달로아가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괜찮은 거래였다.

    그리고 그 거래의 결과가 바로 오늘이었다. 흡족한 것은 달로아만이 아니었다. 아리아드네 또한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월식을 앞두고 리뮈르가 온통 축제 분위기라고 들었어요. 무척이나 기대되네요.”

    “리뮈르 사람들은 달에 남다른 애착이 있으니까요.”

    리뮈르의 시조는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은 기사였다고 한다. 대륙 북쪽 끝까지 쫓겨난 기사가 이 땅에서 만난 것은 그와 마찬가지로 버림받은 달의 마법사. 기사는 마법사를 지켜 주고, 마법사는 그에게 달의 길을 열어 주었다. 그것이 리뮈르의 시작이었다.

    “……언제 출발할 거야?”

    울림이 풍부한 서늘하고 낮은 목소리, 사흘 만에 듣는 유진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딘가 초조한 기색에 거칠한 안색. 평소보다 날 선 분위기까지. 그런 얼굴이라도 반갑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걸 보면 제정신이 아니었다.

    “왜? 당신도 기대 돼?”

    가벼운 태도로 다가간 아리아드네가 싱긋 웃으며 말을 걸었다.

    “볼만할 거야. 리뮈르 축제는 재미있기로 정평이 난 편이라.”

    “……별로.”

    분위기를 환기해 볼까 싶어 그런 소리를 슬쩍 얹어 보았지만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외면하고 있는 그에게서는 짧은 대답만이 떨어졌다.

    꽉 막힌 벽을 마주한 기분에 아리아드네는 제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혀끝에 쓴 약이 발린 것만 같았다. 불편한 침묵이 둘 사이를 흘렀다.

    아리아드네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알아. 당신이 요즘 날 내켜 하지 않는 거.”

    굳이 화를 내거나 서운함을 드러내진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사실을 말할 뿐이었다. 그의 어깨가 작게 움찔거렸다.

    “오늘은 달로아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어. 불편하지 않게 할게.”

    “아니, 나는…….”

    답답한 듯 낮은 한숨을 내쉰 그가 마침내 고개를 돌려 아리아드네와 마주했다.

    “달로아가 약속했어. 오늘 외출에 동행하면 당신에게 리뮈르의 성물을 보여 주겠다고.”

    느릿하게 감았다 뜬 아리아드네의 푸른 눈동자는 시릴 정도로 잔잔했다.

    “…….”

    말문이 막힌 유진이 무엇이라 입을 열기도 전에 아리아드네의 얼굴에 그림 같은 미소가 걸렸다.

    “그러니까 오늘 하루만 참아.”

    옅은 금발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가슴이 선득해지는 미소에 저도 모르게 뻗어 나간 손이 아리아드네를 잡으려던 찰나.

    “리뮈르 공자께서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리아드네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녀의 걸음이 멈춘 곳에는 예민한 학자 같은 인상의 남자가 서 있었다.

    “미에르? 나 배웅 나왔어?”

    달미에르를 발견한 달로아가 싱긋 웃으며 다가섰다. 외출로 들뜬 달로아가 제 동생을 향해 수선스럽게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대화를 시작한 남매를 바라보는 아리아드네의 얼굴에서 그린 듯한 인위적인 미소가 차츰 사라졌다. 꾸며 낸 표정이 사라진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유진은 허공을 움켜쥔 제 손을 천천히 내리고는 뒤로 물러섰다. 아리아드네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는 벌써 멀어진 다음이었다.

    “로아, 너 무슨 일을 벌이는 거야? 얼마 전에 집을 그렇게 뒤집어 놓고 설마 또 위험한 곳에 가려는 건 아니지?”

    달미에르가 한숨을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달로아는 오늘도 뒷골목 도박장에 행차하실 예정이었다. 리뮈르 공자님의 눈치가 제법이었다.

    “내가? 미에르, 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오늘 외출은 내가 원한 게 아닌걸. 오늘 난 메르디에스 공녀의 안내역이라고.”

    달미에르의 어깨에 양손을 올린 달로아가 의기양양한 말투로 대꾸했다. 눈치가 빠른 게 아니라 그저 제 누이를 지나치게 잘 아는 걸지도.

    아리아드네가 한숨을 삼키며 신경전을 벌이는 남매를 바라보았다.

    “손님들까지 모시고 나가는데 무슨 일이야 있으려고. 걱정 마.”

    달로아가 제 동생의 어깨를 두드리며 방긋방긋 웃었다.

    “저 손님들과 함께 간다는 게 더 문제 같은데…….”

    제 어깨를 두드리는 달로아의 손을 쳐 낸 달미에르가 인상을 잔뜩 구겼다.

    “진짜……. 너, 이쯤에서 적당히 해.”

    달미에르의 간섭에 짜증이 난 달로아가 어금니를 악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로아, 너야말로 적당히 해. 뿔난 망아지처럼 여기저기 들이받고 다닐 나이는 지났잖아?”

    “뭐? 뿔난 망아지?”

    헛웃음을 흘린 달로아가 노을빛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달미에르의 귓가에 속삭였다.

    “동생아, 좀 더 솔직해지지 그래? 내가 너 때문에 메르디에스 공녀에게 끌려다닐까 봐 걱정하는 거잖아.”

    “그럴 리가요, 누님. 누님이 사고 치고 다녀서 그 뒷감당을 제가 하게 될까 봐 걱정인 거지요.”

    하지만 달미에르는 조금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미에르, 너 정말―”

    “그렇게 걱정되시면 공자께서도 함께 가시죠.”

    달로아가 폭발하려던 순간, 가만히 지켜보던 아리아드네가 끼어들었다. 지금 여기서 시간을 더 허비하고 싶진 않았다.

    “동행인이 걱정되신다면서요.”

    달로아가 눈을 부라리며 온몸으로 ‘절대 안 된다는’ 의사 표현을 했다. 그 부산스러운 몸짓에 달미에르의 미간에 생긴 주름이 더 깊어졌다.

    “로아, 지금 너 대단히 시끄러워.”

    “나 아무 말도 안 했거든.”

    “…….”

    달로아가 즉각 항변했지만 달미에르는 조금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리뮈르 공자께서 동행하셔도 괜찮을까?”

    아리아드네가 유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유진 입에서 괜찮다는 대답만 나오면 이대로 달미에르를 둘러업고서라도 리뮈르 공저를 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

    이 싸움에서 비켜 있던 유진은 달미에르를 유심히 바라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곤란하면―”

    유진이 어렵다고 하면 리뮈르 기사단의 기사라도 당장 불러올 참이었지만.

    “……당신이 그러고 싶다면.”

    멀어졌나 싶었던 그는 또다시 그런 말로 제 마음을 흔들었다. 아리아드네는 옅은 미소마저 사라진 얼굴로 유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럼 가실까요?”

    대외용 미소를 띤 아리아드네가 달미에르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인상을 잔뜩 찡그린 달로아가 투덜거리며 따라오는 건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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