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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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비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응접실은 유달리 포근하고 따뜻한 분위기였다. 파스텔 톤의 편안한 색감과 햇빛이 잔뜩 쏟아지는 채광 좋은 창이 조화로웠다.

    창 너머로는 오밀조밀하게 꾸민 후원이 겨울에도 푸릇푸릇한 나무로 가득했다. 마치 공비의 처소에만 미리 봄이 온 것 같았다.

    달리케가 뜨거운 물이 담긴 찻잔에 말린 꽃을 툭툭 떨어뜨리며 물었다.

    “로아를 구해 주셨다죠?”

    달로아의 손님으로 리뮈르 공저에 발을 들일 때 그렇게 서로 입을 맞추어 두었다.

    “아닙니다. 도움을 받은 건 오히려 저인걸요.”

    아리아드네는 겸양처럼 말을 돌렸다.

    “리뮈르 영지는 좀 둘러보았나요?”

    “아직 기회가 없어서 보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되면 로아와 함께 둘러보면 좋을 거예요. 로아만큼 이 리뮈르 구석구석을 잘 아는 사람도 없는지라.”

    달리케의 손에서 떨어진 말린 꽃이 눈처럼 흰 도기 잔에서 다시 피어났다.

    말린 꽃의 정체는 붉은 동백이었다. 흰 도기 잔에서 만개하듯 피어난 붉은 동백은 하얗게 쌓인 눈 위로 송이째 후두둑 떨어져 버린 모습 같기도 했다.

    “이전에 본 적도 없으면서 잘 자랐다고 말하는 건 실례겠죠?”

    흰 도기 잔을 아리아드네 앞으로 밀어 준 달리케가 느긋한 태도로 소파에 몸을 묻었다. 느슨하게 풀어진 몸짓에 붉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언제나 꼿꼿하던 파시파에와는 달랐다. 자세히 뜯어보니 닮은 것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 정도. 이목구비는 닮은 데가 없었다.

    그렇지만 첫인상이 그래서일까. 달리케가 자신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볼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마치 죽은 파시파에와 마주하는 것만 같아서.

    “좋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리아드네가 술렁이는 속을 가라앉히며 붉게 피어난 동백차를 들이켰다.

    “리뮈르 공비께서 라이덴 분이실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라이덴이라면 세력도, 명예도 나쁘지 않은 가문이었다. 라이덴의 딸인 그녀가 리뮈르 공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왜 아무도 몰랐던 걸까.

    “성년이 되기도 전에 그 집에서 뛰쳐나와 이름을 바꾸고 살았으니 당연한 일이죠. 그 집에선 내 장례까지 치렀으니. 뭐, 집 나간 자식보다야 죽은 자식이 낫단 거겠죠.”

    붉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긴 달리케는 마치 다른 사람 이야기처럼 말했다.

    “남부는 풍요로운 땅이죠. 하지만 그 풍요가 내 것이 아니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달리케의 얼굴에서는 조금의 미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라이덴에서 내 가치는 오로지 정략결혼을 위한 상품이었죠. 라이덴이 가진 것 중 그 무엇도 내 것이 아니었어요.”

    남부 중에서도 디아즈와 라이덴의 영지가 위치한 서남부는 리카서스와 맞닿아 있었다. 리카서스의 영향을 받은 가문 중엔 오직 남성만을 후계로 여기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부당한 취급에 눈물짓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린 여자애에 불과했죠. 그런 내게 꿈을 꾸게 해 준 사람이 있었어요.”

    달리케는 아리아드네의 담담한 눈동자를 보며 어린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언제나 꼿꼿하게 세운 등, 제 것과 같은 색인데도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눈, 도저히 같은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대범함,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진득한 열망.

    파시파에는 어린 날의 제 우상이었다.

    ―왜 처음부터 가문이 네 것이 될 수 없다 단정 짓지? 너 또한 라이덴의 피를 이었는데.

    ―파시파에, 그게 무슨 말이야? 라이덴의 후계는 다니엘인걸.

    ―네가 그리 생각한다면 그리되겠지. 네 미래가 네 희망보다 나을 리 없으니.

    서늘한 얼굴을 한 파시파에는 곧 사라졌지만 그녀가 남긴 말은 오래도록 달리케 안에 남았다.

    성년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이었다.

    ―안녕, 파시파에.

    달리케는 파시파에를 찾아 디아즈 후작저의 담을 넘었다.

    ―그런 인사를 하기엔 지나치게 늦은 시각인데.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어. 내 미래는 이곳에 있지 않아.

    ―다신 돌아오지 않을 생각인가?

    ―아마도.

    ―이것을 가져가. 여비는 되겠지.

    ―디아즈의 미래 주인께선 마음도 넉넉하시지.

    ―경비가 오기 전에 어서 떠나, 피오나.

    ―난 이젠 라이덴이 아니야. 그러니 피오나도 아니지.

    ―그렇다면 새 이름이 필요하겠군.

    ―네가 지어 줘.

    ―……니케, 니케가 좋겠어.

    ―뭐야, 지나치게 거창한 이름이잖아.

    ―그래서 그 이름이 버거워?

    ―아니, 마음에 들어.

    ―잘 가, 니케.

    파시파에의 목소리가 밤공기 사이로 녹아들었다.

    꿈꾸는 미래는 거창할수록 좋다. 꿈을 꾼다고 그것이 정말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꿈조차 꾸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달리케에게 그것을 알려 준 것은 바로 또래의 소녀였다.

    “내게 다른 삶과 새 이름을 준 것이 바로 그대 어머니였죠.”

    아리아드네는 아무 말 없이 옅은 웃음을 지었다.

    누군가에게 새로운 삶을 주었던 파시파에는 정작 제가 낳은 딸의 존재는 못 견뎌 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애정을 주지 못한 어머니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파시파에와 마주할 때마다 느껴야 했던 절망이 떠오르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로아든, 공녀든 나와 파시파에의 관계를 알았을 리는 없고……. 공녀는 대단히 운이 좋은 사람이군요. 그럼 들어 볼까요? 운 좋은 공녀의 고민이 무엇인지.”

    ‘운이 좋다라…….’

    아리아드네는 오늘따라 그 말이 유난히도 쓰게 느껴졌으나 이내 털어 버렸다. 어차피 다 지난 일이었다. 그런 것보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훨씬 중요했다.

    “그러니 리뮈르에 1왕자가 마물을 풀 거고 공녀는 그것을 막으려 한다, 그 말인가요?”

    아리아드네의 설명을 들은 달리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네. 1왕자는 이미 여러 번 마물로 사람들을 교란했어요. 케이루스에게 권능을 건넨 ‘모라’의 신전이 공간을 잇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고요.”

    리뮈르에도 마물들의 통로가 될 ‘모라’의 신전이 있을 터 그것을 찾아야 했다. 아리아드네의 설명에 생각에 잠긴 달리케가 눈가를 찡그리며 말했다.

    “오래된 신전이라……. 공녀 말대로 신전에서 마물들이 솟아난다면 위협적이긴 하겠군요. 리뮈르의 땅에는 오래된 신전이 적지 않으니.”

    달리케는 찡그린 얼굴과는 달리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신전 주위에서 마물이 발견되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니 시험 삼아 몇 번 보낸다 해도 눈치채기도 어렵죠.”

    탁탁, 발로 바닥을 차는 소리가 일정하게 이어졌다. 생각을 정리하는 달리케의 습관인 듯했다.

    “엘바에서 마물을 사육했다는 말도 쉬이 넘기긴 어렵네요. 사육한 자가 있다면 필시 그것을 사용한 자가 있을 테니.”

    탁! 바닥을 차는 소리가 멈추었다. 그녀 안에서 결론이 난 걸까. 달리케의 남색 눈동자가 아리아드네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1왕자와 랭스턴 공작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는 것도, 1왕자가 마물을 이용해 음모를 꾸미려 한다는 것도, 모두 공녀의 추측에 불과하다는 것 알고 있나요?”

    지금은 추측이라 해도 반드시 일어날 미래였다.

    “아니면 날 설득할 만한 증거가 더 있나요?”

    아리아드네는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미래를 경험한 자신의 기억이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그 기억을 토대로 끼워 맞춰서야 겨우 도달한 결론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달리케로선 제 말을 쉽사리 믿기 어렵겠지. 제 이야기를 비약과 추측으로 가득한 망상으로 치부해 버린다면…….

    [미에르는 이미 죽었으니까. 내가 광장으로 달려간다고 그 애가 살아 돌아올 것도 아니잖아.]

    [좀 더 일찍, 우리, 가 서로를…… 알았더라면……. 우리는…… 분명 같, 은 생각을 했을 텐데…….]

    그 끔찍한 미래가 다시 반복될지도 모른다.

    ‘다시는 누구도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아.’

    굳게 다짐한 아리아드네가 밤하늘 같은 달리케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제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

    달리케 또한 마찬가지였다. 남색 눈동자가 아리아드네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대주를 움직이는 것이라면 내가 맡지요.”

    아무 말 없이 아리아드네를 마주 보던 달리케가 시원스레 대답했다.

    “…….”

    이렇게 쉽게 끝날 줄이야. 몇 가지 말을 더 준비했던 아리아드네는 어쩐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고민이 더 남았나요? 기뻐할 줄 알았는데.”

    달리케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제 청을 선뜻 들어주신 건 제 어머니와의 인연 때문입니까?”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눈을 동그랗게 뜬 달리케가 무슨 말이냐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전 공녀 스스로 말하지 않았나요? 이곳에 공녀가 직접 온 것이 그 증거라고.”

    그녀는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를 설득할 만한 객관적인 증거가 있다면 이 긴박한 상황에 공녀가 직접 오지 않았겠죠. 우리를 속이려는 것이라면 보다 그럴듯한 증거를 꾸몄겠고. 이만한 이야기를 하면서 어떤 증거도 내놓지 못하는데, 그 이야기를 전하는 상대가 메르디에스의 유일한 후계라…….”

    아리아드네를 보는 달리케의 남색 눈동자는 여전히 포근했다.

    “이 이야기를 꾸며 공녀나 메르디에스가 얻을 실익이 뭔가요? 그것은 공녀가 리뮈르에 묶일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나요? 그러니 믿을 수밖에요.”

    아무런 증거 없이 위험한 땅에 발을 들인 제 존재가 증거라는 그 말은 아리아드네가 준비한 말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한 것은 달리케였다.

    “리뮈르 사람들은 대부분 이곳을 벗어난 적이 없어요. 그들은 매우 용맹하고 정직하지만 동시에 폐쇄적이고 아집에 사로잡혀 있죠. 사고가 매우 경직되어 있단 말이에요. 다른 곳에서 온 사람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죠.”

    마치 개구쟁이 동생이 골치라는 말투였다. 하지만 그 짧은 말에도 리뮈르를 향한 애정이 느껴졌다.

    “로아가 공녀를 내게 보낸 이유는 내가 외지인이기 때문이에요. 그나마 남의 말을 듣는 사람이라는 거죠.”

    달리케가 폐쇄적인 리뮈르의 공비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를 둘러싼 공기는 리뮈르의 추운 겨울을 녹일 만큼 따뜻하고 포근했다. 여전히 따스한 봄처럼 아리아드네를 바라보던 달리케가 덧붙였다.

    “지금 내가 시시콜콜 이런 말을 하는 건 그대가 파시파에의 딸이라서가 맞아요. 하지만 달헤임을 움직이겠단 결정은 파시파에와는 무관해요. 나는 리뮈르의 공비인걸요. 판단을 할 때는 가슴이 아닌 머리로 한답니다.”

    아리아드네는 제 어머니의 얼굴을 한 달리케가 자신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몹시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녀의 불편함을 눈치챘는지 달리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리아드네, 널 두고 일찍 떠난 파시파에를 원망하니?”

    그 물음은 메르디에스 공녀가 아닌 친우 파시파에의 딸에게 묻는 것이었다.

    “아니요. 일찍 떠난 것을 원망하기엔 어머니와 저는…….”

    일찍 떠난 것을 원망한다는 말은 그리워한다는 말이다.

    “어머닌 절 달가워하지 않으셨어요.”

    아리아드네에게는 그리워할 만한 기억이 남아 있지 않았다. 자신이 지켜본 파시파에의 삶은 오로지 고통뿐이었다.

    “그게 무슨…….”

    달리케는 혼란이 가득한 얼굴로 무엇이라 묻지도 못하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절 낳고는 원하던 미래를 송두리째 잃으셨으니까요.”

    아, 깊이 탄식한 달리케가 눈을 가렸다.

    “미안해요. 그런 사정이 있을 줄은…….”

    곧 손을 내린 달리케가 사과를 건네 왔다. 아리아드네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모르시는 것이 당연하니 제게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달리케를 곤란하게 하려고 꺼낸 말이 아니었다. 거짓을 말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 상대였을 뿐이다.

    “오늘 무리한 제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메르디에스 공녀, 이 인사를 잊을 뻔했군요.”

    아리아드네를 따라 일어난 달리케가 갑자기 몸을 숙였다. 당황한 아리아드네가 그녀의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미에르의 눈을 위해 애써 주었다고 들었습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치마를 잡은 달리케의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자식을 향한 그녀의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공비께 이런 인사를 받을 만한 일이 아닙니다. 소르체의 치료가 성사된 것도 아니니 이러시면 제가 부끄럽습니다.”

    아리아드네가 달리케의 손끝을 잡아끌며 말했다.

    “내 마음을 표현하려면 이것도 부족하지요. 언제고 내가 공녀를 도울 수 있다면 좋겠네요.”

    그렇게 잡은 손은 그녀 주위를 둘러싼 공기처럼 매우 포근했다. 하지만 그녀에게선 매우 익숙한 냄새가 났다. 마치 마른 낙엽을 태운 듯한 씁쓸한 냄새가.

    그것은 아리아드네에게 얼마 남지 않은 파시파에의 기억 중 하나였다. 달리케의 손끝에도, 봄이 온 것 같은 응접실에도 약초를 태운 냄새가 옅게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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