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148)
  • * * *

    또다시 이 꿈이다.

    새파란 하늘, 끝없이 펼쳐진 초원. 하늘까지 닿을 정도로 우뚝 솟은 디움 산맥으로 가로막힌 지상 낙원 아르체.

    리뮈르에 도착한 날부터 보이는 이 풍경이 유진을 서서히 갉아먹었다.

    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기 중에 가득한 황금빛이 바람을 따라 흩어지면, 그 끝에 그리운 형상이 나타났다.

    ‘나 ……의 신부가 되었어. 괜찮아.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배경 속에서 그와 하나의 영혼을 반으로 나누어 태어난 존재가 웃고 있었다.

    ‘왜 하필이면 너야? 이건 아니야. 떠나자. 이건, 이건…….’

    그의 절규 같은 애원에도 그의 누이는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니, 난 안 떠나. 내게 이곳은 고향이고 살아갈 터전이야. 내 희생으로 이곳을 지킬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그렇게 말하는 누이에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새하얀 미사보로 얼굴을 가린 누이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그 손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신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듯이.

    길이 끝나는 곳에는 금으로 장식한 흰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미사보 너머의 입이 달싹였다.

    ‘나, 잘 살게. 그러니까 너도 행복해야 해.’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닫힌 마차가 점점 멀어졌다. 그는 제 영혼을 반으로 가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러니까 넌 여기서 죽어 줘.’

    갑자기 나타난 단발머리의 여자가 그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유진이 주위를 둘러보자 어느새 그는 방주의 광장에서 안나와 대치하고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총을 겨눠 안나를 향해 쐈다.

    타앙― 폭발음과 함께 온몸에 구멍이 뚫린 안나가 피를 흘리며 그를 향해 다가왔다.

    ‘제발 나를 죽여 줘, 그것이 오기 전에.’

    안나는 어느새 모습을 바꿔 누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이의 뒤로 새빨간 덩어리가 점점 다가왔다. 그는 그것이 두려워 질끈 눈을 감았다. 으드득, 하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제 위로 무언가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감은 눈을 뜨자 누이를 먹어 치운 새빨간 덩어리가 피를 뚝뚝 흘리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압도적인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 그리고 그는 동시에 안도를 느꼈다. 이것은 그에게는 몹시도 익숙한 악몽이었으니까. 저것에게 먹히기만 하면 제 악몽도 끝이었다.

    여느 때처럼 붉은 덩어리가 그를 덮치고, 그는 어둠 속에 갇혔다.

    그를 감싼 어둠은 검푸른 빛이었다. 저 멀리 빛이 보였다. 그가 빛을 향해 발버둥 쳤지만 그의 몸은 빛에서 점점 멀어져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는 이 감각을 알고 있었다. 이곳은 바로 방주의 분수였다. 그리고 그를 향해 다가오는 성화(聖畫) 속의 여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여자를 향해 한껏 손을 뻗다 보면 그는 어느새 란데르의 호숫가에 서 있었다.

    흰 손수건을 쥐고 울부짖던 아리아드네가 나무 뒤에 숨어 있던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푸른 눈은 마치 얼음으로 만든 불처럼 맹렬하게 타올랐다.

    ‘내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해 줄 건가?’

    아리아드네의 눈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이 마치 제 영혼까지 불사를 것만 같았다. 그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면 어디선가 살랑이는 바람이 불어왔다.

    아리아드네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마치 금실을 녹인 것처럼 밤하늘에 흔들렸다. 천천히 뒤돌아보는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빛을 받은 호수처럼 찬란하게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가 그를 직시하면 몸이 굳어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갇힌 제 영혼이 처음 생명을 얻은 것처럼 날뛰었다.

    제 손을 붙든 그녀가 네 번째 손가락에 낙인을 찍었다.

    ‘나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것 같은데.’

    그녀의 곧은 시선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그녀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그것이 그녀의 손을 감싸기 위함이었는지, 아니면 그녀의 손을 떼어 내기 위함이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하기도 전에 아리아드네의 손이 공기 중에 녹아드는 것처럼 서서히 흩어졌다.

    환하게 웃던 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곳에 남은 것은 자신을 원망하는 아리아드네의 푸른 눈동자.

    ‘전부 너 때문이야. 너만, 너만 없었어도!’

    그의 발밑이 무너져 내렸다. 주위를 둘러싼 붉은 덩어리들이 점점 그를 향해 다가왔다.

    ‘그러니까 넌 여기서 죽어 줘.’

    첫 번째 덩어리가 입을 열면,

    ‘아니, 나를 어서 죽여 줘.’

    두 번째 덩어리가 그를 재촉했다.

    ‘너도 행복해야 해.’

    세 번째 덩어리가 그를 감싸면,

    ‘나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것 같은데.’

    네 번째 덩어리가 그에게 안겼다.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자 붉은 덩어리들이 천천히 녹아내렸다.

    ‘전부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난 다 잃었어.’

    ‘괴물! 다들 널 두려워했어.’

    ‘왜 나만 죽어야 해?’

    녹아 가는 붉은 덩어리들이 그를 향해 원망과 증오를 쏟아 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잿빛 눈이 내리는 외곽의 사막이기도 했고, 황금빛이 바람에 흔들리는 아르체의 초원이었으며, 사방이 황금으로 가득한 성 상티모니아 황금의 방이자, 금실 같은 아리아드네의 머리카락이 하늘거리는 릭센의 밤하늘이었다.

    그는 그 모든 곳에 있었으나 동시에 그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당신도 날 좋아하잖아.’

    그가 눈앞의 그녀에게 손을 뻗으면 붉은 덩어리가 그녀마저 집어삼켰다. 그녀가 입 맞추었던 그의 약지가 뚝 잘려 나갔다.

    놀라 고개를 들면, 어두운 탑 두꺼운 철문 안에 갇힌 아리아드네가 돌바닥에 쓰러진 채 그를 향해 원망을 쏟아 냈다.

    ‘후회해. 당신 때문에 어그러진 모든 시간을 후회해. 내 삶을 돌려줘. 내 시간을 돌려줘. 나를, 나를 돌려줘.’

    그녀의 푸른 눈 속에서 타오르는 원망과 후회가 그를 꽁꽁 묶었다. 아리아드네의 푸른 눈마저 붉은 덩어리에 먹혀 사라질 때까지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또다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 * *

    “흐음, 리뮈르 공비를 어떻게 만나지?”

    여느 때처럼 곧고 반짝이는 아리아드네의 눈동자가 그를 보며 말했다. 증오와 원망을 쏟아 내던 어젯밤 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왜 그렇게 봐? 내가 그렇게 좋아?”

    아리아드네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유진을 향해 새초롬한 미소를 지으며 곱게 눈을 흘겼다.

    “그렇게 좋으면 그만 애태우고 넘어오지?”

    눈앞의 여자가 자신을 쉽게 원망하거나 버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하지만 두려움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었다.

    ‘후회해. 당신 때문에 어그러진 모든 시간을 후회해. 내 삶을 돌려줘. 내 시간을 돌려줘. 나를, 나를 돌려줘.’

    아리아드네의 눈에서 타오르던 섬뜩한 분노와 증오, 그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되면 어떤 기분일까.

    지나치게 생생한 꿈은 마치 현실 같아서 그의 상상이 아니라 언젠가 정말 일어났던 일처럼 느껴졌다.

    그의 악몽에서 아리아드네는 물거품처럼 흩어지기도 했고, 때로는 모든 것을 잃고 절망한 채 높은 탑에 갇혀 죽음을 바라기도 했다.

    그래, 그 모든 것은 그의 불안이 만들어 낸 망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망상이라 할지라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있었다.

    그의 불행.

    꿈은 그의 불행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보여 주었다. 그와 조금이라도 인연이 닿았던 사람들은 전부 좋지 못한 끝을 맞이했다.

    그는 아리아드네마저 제 진창에 끌어들이게 될까 봐 겁이 났다.

    “뭐가 그렇게 복잡해?”

    싱긋 웃은 여자가 그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이렇게 간단한걸.”

    정말 이 손을 잡아도 되는 걸까. 그의 꿈처럼 전부 사라지는 건 아닐까. 힘없이 늘어진 그의 손가락이 아리아드네에게 닿으려던 찰나였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때맞춰 들린 소리는 마치 누군가의 경고 같았다. 괜한 욕심을 부려 모든 걸 망가뜨릴 셈이냐는.

    ‘대체 무슨 생각을…….’

    유진은 쓰게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 자신을 보는 아리아드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는 끝내 외면했다.

    “……들어와.”

    유진에게서 시선을 돌린 아리아드네는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그녀의 허락에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더니 조셉이 들어왔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조셉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아리아드네가 작은 한숨을 흘리며 손가락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아직도야?”

    그들이 릭센을 떠난 지도 벌써 보름이 지났다. 그런데 메르디에스에서는 아직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릭센에 있던 신시아와 연락을 주고받은 것도 리뮈르의 관문인 포르타를 오르기 전, 산의 초입에 위치한 마을에서가 마지막이었다.

    “네.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다.”

    “조금 이상한데…….”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저었다. 연락이 끊겼다는 건 좋지 못한 징조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리뮈르에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발이 빠른 사람을 수배하여 포르타 너머 마을로 보내 두었으니 늦어도 보름달이 뜨기 전에는 돌아올 겁니다.”

    “그 전에 연락이 온다면 더 좋겠지만…….”

    아리아드네는 알겠다며 조셉을 내보냈다. 메르디에스 측 정보원을 사용할 수 없으니 리뮈르 공비에 대한 것도 제 기억만으로 해결해야 했다.

    달리케 리뮈르, 리뮈르 공비에 대한 정보라곤 그 이름이 전부였다. 리뮈르가 워낙 폐쇄적인 데다가 공식적인 혼인 사실도 달로아와 달미에르를 출산한 뒤에야 알렸을 정도로 꽁꽁 숨긴 탓이었다.

    아리아드네가 추측하는 것이라곤 공비가 붉은 계열의 머리카락을 지녔을 것이란 정도였다. 리뮈르 지방의 사람들은 대체로 색소가 옅은 편이었다. 그것은 리뮈르 일가도 마찬가지.

    달로아와 달미에르의 붉은 머리카락이 모계로부터 받은 것이라면…….

    ‘공비는 어쩌면 외부인일지도.’

    하지만 이렇게 폐쇄적인 리뮈르에서 외부인이 공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 그것을 생각하면 결국 제자리였다.

    “모르겠어, 정말.”

    아리아드네는 의자에 늘어진 채로 투덜거렸다.

    “외부와 단절되니까 더 갑갑해.”

    그녀의 투덜거림에도 눈앞의 남자는 좀처럼 반응이 없었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그렇지 않아도 흰 피부는 더 창백해 보였고 날카로운 얼굴 윤곽은 더욱 도드라졌다.

    잠이라도 설쳤나, 그렇게 생각하며 눈가를 덮은 머리카락이라도 넘겨주려던 아리아드네는 조금 전 제가 잡은 손을 빼내던 유진이 떠올랐다. 조금 가까워졌나 싶으면 이렇게 성큼 멀어진다.

    “당신에겐 미안해.”

    그제야 창밖만 보고 있던 유진이 고개를 돌렸다.

    “뭐가?”

    뜬금없는 아리아드네의 사과에 그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심연의 눈을 봐야 할 시기가 곧인데, 나 때문에 막힌 것 같아서.”

    아리아드네의 대답에 유진은 갑갑한 듯 아무것도 없는 목 언저리를 문질렀다. 리뮈르의 성물 심연의 눈. 그것을 보면 이 지긋지긋한 갑갑함이 조금 사라질까.

    “시기라……. 그러고 보면 당신은 릭센에서도 비슷한 말을 했지.”

    ―곧 리뮈르의 성물이 떠오를 거거든.

    비슷한 말을 한 사람은 또 있었다.

    ―심연의 눈은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리뮈르의 대주 달헤임도 그런 말을 했다. 그의 말에 아리아드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언젠가 렉사가 준 투명한 구슬을 꺼내 들었다.

    아리아드네가 마치 달처럼 은은한 흰 빛을 내뿜는 구슬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심연의 눈을 볼 수 있는 시기는 달과 관련이 있어.”

    아리아드네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은 과거, 카이엔과의 대화 도중이었다.

    흐드러지게 핀 작약 향기가 가득한 봄날이었다. 잔뜩 술에 취한 카이엔은 그날따라 유난히도 기분이 좋았다.

    [이계의 방문자가 곧 리뮈르의 성물을 보러 떠난다고 합니다.]

    아리아드네와 카이엔의 국혼이 무사히 이루어지고 홀연히 릭센을 떠난 유진이 향한 곳은 소르체였다. 그다음 그의 목적지가 리뮈르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가요? 리뮈르가 응할지 모르겠네요.]

    폐쇄적인 리뮈르가 유진에게 가문의 성물을 쉽사리 내놓을 것 같진 않았다. 어려운 일이 되겠구나, 아리아드네는 그런 생각을 했다.

    [리뮈르가 그의 요청에 응하더라도 헛걸음이 될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리뮈르의 성물, 심연의 눈은 달이 행성의 그림자에 온전히 잡아먹힌 밤이 되어야 눈을 뜨니까요.]

    [개기월식 말인가요?]

    [오늘 새벽, 달이 모습을 감출 겁니다. 오늘이 지나면 리뮈르의 땅에서 개기월식을 볼 수 있는 건 최소한 3년 뒤의 일. 그전에는 아무리 그라도 리뮈르의 성물을 볼 수 없을 겁니다.]

    케이루스의 성물이 가진 권능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역시 천체의 움직임을 예지하는 것이었다. 다음 개기월식이 언제 일어날지 카이엔이 아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리뮈르의 성물에 그런 제약이 있다는 것은 제법 내밀한 정보가 아닌가요?]

    하지만 그가 어떻게 리뮈르의 성물과 개기월식 사이의 상관관계를 아는 걸까?

    [개기월식이 언제 일어날지 미리 아는 것은 리뮈르로서도 대단히 중요한 일이니까요. 리뮈르에서는 이미 오래전, 케이루스에 이것을 알려 왔습니다. 케이루스는 그 보답으로 개기월식이 일어날 날을 알려 주곤 했죠.]

    그것이 카이엔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작약이 흐드러지게 핀 그날이 바로, 리뮈르의 비극이 일어났던 개기월식의 밤이었다.

    “리뮈르의 성물인 심연의 눈은 개기월식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만 볼 수 있다고 해.”

    아리아드네가 경험한 개기월식은 두 번 남았다. 892년 10월의 개기월식은 바로 닷새 뒤였고, 893년 5월의 개기월식이 있은 날은 리뮈르 일가의 비극이 발생한 날이었다.

    카이엔이 말한 3년 뒤의 개기월식은 896년의 일이었으니, 895년에 죽은 아리아드네로서는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다.

    “개기월식이라면…….”

    “그래, 닷새 뒤야.”

    닷새 뒤, 월식의 전 과정을 볼 수 있는 큰 규모의 개기월식이 있을 거란 케이루스의 예지가 있었다.

    진귀한 천문 현상을 앞두고 사람들은 몹시 고무되어 있었다. 그것은 리뮈르도 마찬가지라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리뮈르에서는 닷새 뒤의 개기월식을 앞둔 지금까지도 유진에게 아무런 언질이 없었다. 그것은 그에게 리뮈르의 성물을 보여 줄 마음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답답한 듯 목을 문지르던 그가 낮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기다려.”

    “응?”

    되묻는 말에 유진이 아리아드네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이 아리아드네 머리에 닿을 듯이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졌다. 유진이 제 왼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말했다.

    “외부와 단절되어 있으면 내부를 살펴보면 될 일이지. 여기서 기다려.”

    ‘왜 자꾸 여기서 기다리래,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닿을 듯이 가까워졌다가 끝내 멀어진 손에 아리아드네가 속으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여지없이 그 순간이 찾아왔다. 깜빡, 잠시 눈을 감았다 뜨는 짧은 순간조차 기이하게 느껴지는 익숙하고도 낯선 순간이.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들어 보면 유진은 조금 전과 다름없이 제 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선 리뮈르의 차가운 공기가 묻어났다. 마치 밖에 다녀온 사람처럼.

    “……잡아.”

    그가 느릿한 한숨과 함께 손을 내밀었다.

    “리뮈르 공비 앞에 데려다줄 테니까. 당신 일이 잘 풀려야 나도 리뮈르의 성물을 볼 수 있겠지.”

    유진은 변명처럼 이유를 덧붙였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듯이.

    아리아드네는 홀린 듯이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러면 주위의 공기마저 눈에 보일 듯이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였다.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 속에 움직이는 것은 오직 그와 자신뿐. 몇 번을 겪어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기이한 감각이었다.

    “여기야.”

    이윽고 그의 손이 닿은 적도 없다는 것처럼 제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마치 제게 닿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유진의 태도는 늘 담백한 편이었으나 그래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리아드네가 무언가를 물으려 하자 그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풀숲 너머에 몇몇 여자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유진이 자신을 내려놓은 곳은 아무래도 리뮈르 공저의 내정(內廷) 깊숙한 곳인 듯했다. 모여 있는 여자들 사이로 우뚝 솟은 붉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리뮈르 공비께선 키가 큰 편이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리아드네는 그제야 공비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공비의 얼굴을 확인한 아리아드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불타는 것처럼 붉은 머리카락, 짙은 남색의 날카로운 눈매, 피로하고 지친 안색까지.

    “어머…… 니?”

    아리아드네의 손에서 떨어진 렉사의 구슬이 데구르르 굴러 공비의 발치에서야 멈추었다. 천천히 몸을 굽힌 공비가 제 발치에 떨어진 구슬을 주워 들었다.

    리뮈르 공비 달리케가 신기하다는 듯 구슬을 유심히 살폈다. 투명한 구슬은 소용돌이치는 물살이 그대로 굳은 듯한 모양이었다.

    “영애 물건입니까?”

    달리케가 아리아드네가 몸을 숨긴 풀숲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영애 물건이 아닙니까?”

    여자치고 낮은 목소리, 단호하고 딱딱한 말투. 공비는 마치 자로 잰 듯한 사람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메르디에스의 아리아드네입니다.”

    풀숲에서 나온 아리아드네가 리뮈르 공비에게 인사했다. 내정 깊숙한 곳에 자리한 공비의 거처는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인지 공비 뒤에 서 있던 시녀들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시녀들의 반응에 유진이 저도 모르게 아리아드네를 제 뒤로 끌어당기려던 순간이었다.

    “메르디에스?”

    아리아드네의 이름을 말하는 공비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메르디에스라면 네가 파시파에의…….”

    공비의 목소리에는 아련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

    예상치 못한 이름에 놀란 것은 아리아드네 또한 마찬가지였다.

    메르디에스에서 ‘파시파에’의 이야기는 일종의 금기였다. 행여나 파시파에의 이야기를 꺼내 아리아드네가 상처받진 않을까 다들 쉬쉬하며 조심했다.

    파시파에가 살아 있을 때조차 그녀의 이야기가 공비의 처소 밖에서 오가는 일은 없다시피 했다. 파시파에가 죽은 뒤에는 더욱 그랬다.

    파시파에와 사촌지간인 글레나조차도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작은 금기처럼 여겨졌던 그 이름을 이곳에서 들을 줄이야. 더구나 저 얼굴로.

    제 어머니와 닮은 모습을 한 달리케가 그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그 이름을 말하는 것이 불편했다.

    “공비께선 제 어머니를 아십니까?”

    하지만 그것이 지금 이 자리를 망칠 정도는 아니었다.

    “피오나 라이덴.”

    달리케가 빙긋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것이 혼인 전 내 이름이었습니다. 답이 되었을까요?”

    라이덴이라면 파시파에의 친정, 디아즈 후작가에서 갈라져 나온 가문 중 하나였다. 라이덴이 독립한 것은 7대도 전의 일이니 혈연관계로 보기는 어려웠지만.

    “내 살아생전 파시파에의 딸을 보게 될 줄은 몰랐군요.”

    디아즈와 라이덴은 여전히 끈끈한 관계였다. 친밀한 가문에서 자란 또래끼리의 친분이야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내가 라이덴인 것을 알고 온 것 같진 않고…….”

    달리케의 눈길이 아리아드네를 느긋이 훑었다. 짙은 남색의 눈동자가 휘어졌다.

    “왜 날 찾았나요?”

    공비의 호의적인 태도는 파시파에로부터 비롯된 것이 분명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맞닥뜨린 어머니의 그림자라니. 무엇이든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리아드네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달로아의 조언이 있었습니다. 제 고민을 공비께 의논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요.”

    리뮈르 공녀가 아니라 ‘달로아’라고 칭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로아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죠.”

    공비의 눈에 깃든 것은 딸을 향한 무한한 애정과 신뢰. 아리아드네는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들어 보죠. 공녀의 고민이 무엇인지.”

    가까이 다가온 달리케가 아리아드네의 손에 렉사의 구슬을 쥐여 주며 처소 안쪽으로 잡아끌었다.

    “저분은?”

    그대로 자리를 떠나려던 달리케가 아리아드네 뒤쪽을 보며 물었다.

    “이계의 방문자님이십니다.”

    “반갑습니다. 함께하시겠어요?”

    당연히 그러겠다고 할 줄 알았던 유진이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놀란 아리아드네가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재촉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럼 다음에 뵙죠.”

    달리케가 짧게 인사하며 아리아드네와 함께 사라졌다. 유진은 시녀들마저 모두 떠난 내정에 혼자 남았다.

    그는 조금 전 시녀들의 사나운 눈초리에 저도 모르게 아리아드네를 끌어당기려 했던 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칼날 같은 리뮈르의 바람이 그의 손을 스쳐 지나갔다. 손을 움켜쥐었지만 그의 손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부 너 때문이야. 너만, 너만 없었어도!’

    아무리 애를 써도 그에게 남는 것은 언제나 원망뿐이었다. 원망은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후회해. 당신 때문에 어그러진 모든 시간을 후회해. 내 삶을 돌려줘. 내 시간을 돌려줘. 나를, 나를 돌려줘.’

    언제나 빛나던 그녀가 제 꿈에서처럼 무너져 슬퍼하는 것만큼은 차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유진마저 사라진 정원에 남은 것은 나무를 흔드는 리뮈르의 겨울바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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