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148)

* * *

“무슨 헛소리야? 죽지도 않은 날 왜 살려?”

달로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픽 웃으며 아리아드네의 멱살을 놓고는 한발 물러섰다. 그러곤 마치 사기꾼을 보듯 아리아드네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리아드네는 그런 달로아로부터 빙글 몸을 돌려 유진과 나란히 섰다.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온통 하얀 눈으로 물든 높은 산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리아드네가 삐죽 솟은 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유진, 저기 저 산맥이 디움이야. 하늘과 가장 가까운 땅.”

달로아가 나타나기 전에 나눴던 이야기의 반복이었다.

“아하?”

유진은 영문 모를 이야기에 의아해하면서도 애매한 맞장구로 호응을 해 줬다. 미리 말을 맞춘 것도 아닌데 호흡이 곧잘 맞았다.

‘아, 이 남자 진짜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없네.’

아리아드네가 유진을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디움은 저 너머 죽음의 땅 아르체에서 쫓겨난 마물들로 가득한 곳이기도 하지.”

“대체 무슨 헛소리를―”

아리아드네는 달로아의 황당함을 가뿐히 무시한 채로 말을 이었다.

“1왕자가 왕이 되는 데 가장 걸림돌인 건 역시 메르디에스겠지. 하지만 왕이 된 다음을 생각하면 가장 위협적인 건 리뮈르야. 난 그가 리뮈르의 무력을 경계한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리뮈르가 가진 명성. 카이엔은 그게 두려웠던 거야.”

다시 빙글 돌아 달로아와 마주한 아리아드네가 투명한 회색 눈을 응시했다.

“심판의 리뮈르, 그 리뮈르가 제 추악한 면을 낱낱이 밝혀낼까 봐.”

저열한 방법으로 페렌트를 집어삼키려는 그에게 가장 위협적인 건 바로 리뮈르의 명성 그 자체였다.

“지금 그게―”

“1왕자가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리뮈르를 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달로아와 마주 보고도 아리아드네가 대화하는 상대는 여전히 유진이었다. 그리고 그는 몹시 훌륭한 아군이었다.

“기습?”

“그렇지.”

그의 대답에 아리아드네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만한 인력을 여기까지 이동시키는 건 보통 일이 아닐 텐데?”

“칼을 든 것이 반드시 사람일 필요는 없잖아?”

아리아드네의 말에 달로아의 미간이 구겨지더니 이내 한숨 같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마물…….”

리뮈르는 마물로부터 페렌트를 지키는 최전선이었다. 그런 리뮈르 일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갑자기 영지 내에 집단으로 나타난 마물.

카이엔의 능력을 알기 전에는 불행한 사고쯤으로 여겼던 일이었다.

“메르디에스 영지에 있는 반 호수에서는 얼마 전 바다 마물인 메로우가 뛰쳐나왔지. 랭스턴의 엘바에서는 수십 종의 마물이 사육되고 있었어.”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모두 카이엔의 음모였음을 안다.

“우리가 알던 상식으로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 어떤 마물들이 언제 어떻게 튀어나올지 아무도 몰라.”

아리아드네의 옅은 금발이 겨울바람에 흩날렸다. 그 뒤로 하늘을 찌를 듯한 디움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달로아는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이 뒤섞인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 숨처럼 익숙한 리뮈르의 겨울바람에도 저 여자의 낯선 기운이 실려 있는 것만 같았다.

“외부에서 침입하는 적이라면 리뮈르가 능히 막아 낼 수 있겠지. 하지만 내부에서 불시에 솟아나는 마물이라면 리뮈르라도 안심할 수 없어.”

그녀의 새파란 눈동자는 달빛에 비친 눈처럼 깨끗했다.

“마물이 나타난 후에는 늦어.”

차갑다고 생각한 푸른 눈에서는 파란 불꽃이 튀었다.

“별의 그릇이 가진 권능은 하늘을 읽는 것만이 아니야. 공간이 존재하는 곳에는 시간이 흐르고, 시간이 흐르는 장소는 공간이 되지. 시간과 공간은 둘이 아닌 하나야. 1왕자는 공간을 뛰어넘어 이곳에 마물을 보낼 거야.”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믿지 않으면? 그럼 내가 왜 이곳에 왔다고 생각해?”

성큼 다가온 아리아드네가 오만한 얼굴로 달로아를 바라보았다. 마주한 시선인데도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1왕자를 끌어내리려고? 천덕꾸러기 왕자를 지금 그 자리에 올린 건 나야.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만이라면 다른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아.”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 당당함. 그것이 허세가 아님을 달로아도 익히 알았다.

“아직도 내가 여기까지 와야 했던 이유를 모르겠어? 1왕자에게 숨겨진 힘이 있기 때문이지. 우리 모두를 위협할 만한.”

“이게, 다 무슨…….”

달로아가 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왜 아버지가 아니라 나야?”

“대주님께서 날 만나 주시긴 하고?”

그날 조찬 이후로 달헤임은 털끝 하나 볼 수 없었다. 괜히 아리아드네가 리카르도 근처에서 얼쩡거린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달로아가 물은 것은 조금 더 예전의 일이었다.

“처음부터 왜 나였어?”

잭의 도박장에서부터 아리아드네의 목표는 달로아였다. 리뮈르 공저에 발을 들이기도 전부터 아리아드네는 대주인 달헤임이 아니라 한낱 공녀일 뿐인 자신을 목표로 삼았다.

‘대체 왜…….’

아리아드네는 어딘가 울컥한 표정으로 달로아의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슬쩍 손에 쥐었다.

“우리가 서로를 알게 되면 우리는 분명 같은 생각을 할 테니까.”

달로아가 죽어 가며 내밀었던 손을 이제는 자신이 내밀 차례였다.

[좀 더 일찍, 우리, 가 서로를…… 알았더라면……. 우리는…… 분명 같, 은 생각을 했을 텐데…….]

이 머리카락처럼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 가던 달로아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진 과거라고 해도 내 안에 남았으니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나만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아리아드네는 그녀 외에 다른 사람은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메르디에스를, 리뮈르를, 페렌트를, 이 땅의 모두를 지킬 거야. 다시는 나를, 너를, 우리를 잃지 않아.”

이번에야말로 달로아의 손을 잡을 차례였다.

“…….”

하지만 꽁꽁 얼어붙은 달로아의 마음을 녹이기엔 역부족이었던 걸까. 아무 말 없이 아리아드네를 보던 달로아가 눈가를 찌푸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마치 품평을 하듯 삐딱한 태도로 아리아드네를 훑어봤다. 달로아가 마침내 비틀린 입술을 열었다.

“대체 그런 쓰레기는 왜 만난 거야? 멀쩡하게 생겨서는.”

“…….”

너무도 합당한 말이라 대꾸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네 약혼자는 무슨 쥐약이라도 주워 먹었대? 왜 약 처먹은 쥐처럼 미쳐서 날뛰는 거야? 다 같이 죽자는 거야, 뭐야.”

다행히도 이번에는 대꾸할 만한 것이 있었다.

“약혼자 아니야. 내가 그 인간이랑 파혼한 지가 언젠데.”

“언젠데?”

“……한 달쯤 전에.”

어째 이번에도 밀린 기분이었다.

“어지간히도 오래됐다.”

역시나 달로아가 픽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이번에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무언가를 가늠하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달로아가 마침내 생각을 정리한 듯 입을 열었다.

“너, 우리 가족 중에 못 본 사람 있지 않아?”

리뮈르 공자인 달미에르까지 봤으니 리뮈르 일가 중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것은 한 사람뿐이다.

“무슨 말이야?”

“어머니를 만나 봐.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야.”

리뮈르 공비 달리케. 그녀를 만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아직은 알 수 없으나 달로아의 이 말은 분명 중요한 단서일 터.

“내 말을 믿어?”

아리아드네는 눈앞의 달로아에게 물었다.

“아니.”

그리고 돌아온 것은 칼로 자른 듯한 부정.

“믿어서 볼 손해보다 믿지 않아서 볼 손해가 지나치게 크잖아. 리스크는 적은 쪽을 선택하는 게 게임의 기본이야.”

달로아는 뭐 그런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투로 답했다. 그녀는 마치 악동 같은 얼굴로 씨익 웃으며 아리아드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많이 따는 걸 목표로 하면 안 돼. 적게 잃는 게 목표여야지. 그래야 후회가 적거든.”

복잡한 문제를 경쾌하게 정리한 달로아가 하얀 배경 속으로 사라졌다.

* * *

“경! 저 횡 베기 백 번 다 했어요!”

땀을 흠뻑 흘린 사내아이가 달려와 리카르도의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리카르도는 다른 아이의 자세를 잡아 주던 손으로 사내아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벌써? 힘들었을 텐데 끈기가 대단하구나.”

리카르도의 칭찬에 사내아이의 얼굴이 헤벌쭉 벌어졌다. 그때, 사내아이의 뒤로 몸을 내민 여자아이가 칭찬을 바라는 얼굴로 말했다.

“리카르도 경! 저는 이백 번 했는데요!”

“뭐? 거짓말하지 마!”

먼저 매달렸던 사내아이가 붉어진 얼굴로 빽 고함을 질렀다.

“내가 언제?”

여자아이가 놀리는 듯한 어조로 사내아이 주위를 빙빙 돌았다. 또래의 놀림에 주먹 쥔 손을 부들부들 떠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아 리카르도는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흐음,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해 줄까?”

그의 말에 당장이라도 싸울 것처럼 두 손을 치켜들었던 아이들이 얌전히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마치 속삭이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처음으로 마물 토벌을 나갔을 때가 열다섯 살이었는데…….”

한껏 집중한 아이들이 마치 별을 박은 것처럼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그를 주시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말이라도 놓칠세라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그가 열다섯에 참전한 마물 토벌전의 이야기가 끝나자 사내아이가 온몸을 꾸물대며 물었다.

“정말? 히드라는 머리가 잘리고도 막 이렇게 움직여요?”

리카르도는 사내아이와 눈을 마주한 채로 천천히 말을 잇다가…….

“응. 잘린 머리가 이렇게 입을 쩍 벌리고는―”

이야기처럼 입을 쩍 벌리며 두 팔로 사내아이를 제 품에 가둬 버렸다.

“으아악!”

깜짝 놀란 사내아이가 괴성을 지르며 그의 품에서 버둥거렸다. 리카르도가 사내아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제 품에서 놓아주었다.

“으아악, 으애액, 으앵!”

아까부터 사내아이를 놀리던 여자아이가 조금 전 사내아이가 놀라 한 행동을 과장되게 따라 하기 시작했다.

“겁쟁이 톰, 그런 네가 마물을 향해 칼을 뽑을 수 있을까?”

“야! 캐시 너!”

톰이 자신을 놀려 대는 캐시를 향해 팔다리를 휘둘렀지만 얄미운 캐시는 혀를 쭉 내밀고는 달아나 버렸다.

“흑, 흐윽…….”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눈물을 뚝뚝 흘리던 톰이 리카르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경, 저 진짜 마물 하나도 안 무서운데…….”

“알아, 톰. 톰이 얼마나 용감한데.”

울음 섞인 항변에 리카르도는 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톰이 리카르도의 품을 파고들며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한참 후에야 겨우 울음을 그친 톰이 훌쩍이며 웅얼거렸다.

“나는 아버지 아들인데……. 우리 아버지는 리뮈르 기사단의 정식 기사였단 말이에요.”

“……그랬구나.”

페렌트 최강의 기사단 리뮈르에 입단하기 위해서는 신분도, 돈도, 심지어 빼어난 실력조차 필요 없었다.

리뮈르 기사단에는 인력이 늘 부족해 지원하는 자들은 웬만하면 뽑았다. 험지에서 숱한 실전을 경험하다 보면 실력은 저절로 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입단한 사람 중 정식 기사가 되는 것은 십분의 일도 되지 못했다. 대부분 정식 기사가 되기도 전에 죽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리뮈르 기사단의 인력이 그토록 부족한 이유였다. 그런 리뮈르 기사단의 정식 기사였다면 톰의 아버지는 꽤나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음이 분명했다.

“아버지가 자랑스럽겠구나.”

“네!”

마물의 침략이 잦은 리뮈르에는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유난히도 많았다. 리카르도는 그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제가 자란 고아원이 생각나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톰은 그렇게 부모를 잃은 고아 중 한 명이었다.

“디움에는 최초의 권속으로부터 쫓겨난 마물들이 모여 산대요. 그래서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강한 마물들로 가득한 거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곳을 지켜야 한다고 했어요.”

이곳의 아이들은 장난감보다 검을 먼저 들었다. 뿌듯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웠다.

“우리가 이곳을 지키지 않으면 모두가 위험해지니까 우리가 해야 한댔어요.”

“아버지가 그러셨어?”

“네!”

“아버지는…….”

“3년 전, 마물 토벌을 나갔다가…….”

리카르도가 정말 묻고 싶었던 것은 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셨냐는 것이 아니라 시신을 찾았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리카르도의 의중을 모르는 톰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헤실헤실 웃는 얼굴로 말했다.

“경, 우리 아버지 천국에 가셨겠죠? 사람들을 위해서 마물을 해치우다가 돌아가셨으니까.”

시신으로라도 돌아오는 자는 그나마 다행이다. 마물 토벌을 나갔다가 사라진 자 중 일부는 마물이 된다.

마물을 받아 주는 천국은 어디에도 없으리라. 톰의 말간 눈빛이 리카르도의 가슴을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그럼. 천국에서 톰을 내려다보고 계실 거야.”

그는 물기에 젖은 톰의 눈가를 닦아 주며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진실은 왜 이렇게나 아픈 것인지. 마치 제가 디디고 선 땅이 모조리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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