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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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엔이 왕으로 즉위했던 건, 893년 봄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봄이 채 물러가기도 전에 리뮈르에서는 큰 변고가 일어났다.

    달이 행성의 그림자에 잡아먹힌 새벽. 그 밤에 마물이 집단으로 리뮈르를 습격하여 리뮈르 공작 일가가 모두 죽는 일이 있었다.

    리뮈르 공작 위는 디움 산맥으로 정찰을 나간 덕분에 살아남은 달헤임의 조카에게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리뮈르에 일어난 갑작스러운 비극에 작은 죄책감을 느꼈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권능을 가진 것이 죄는 아니었으니까.

    하물며 그들은 자신들을 쫓아낸 이들을 지키기 위해 외로운 싸움을 하다 끝내 죽고 말았으니 뒷맛이 좋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목숨을 잃은 달헤임과 그 일가를 영웅으로 추앙하는 것으로 불편한 마음을 달랬다.

    시인들은 앞다투어 그들을 추모하는 시를 지었고, 리뮈르 일가의 장렬했던 마지막 순간을 다룬 ‘눈의 전사들’이 상연되는 극장은 연일 만석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며 눈물 몇 방울 찍어 내는 것으로 제 속의 죄책감들을 조금씩 씻어 냈다.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차츰 잊혀 가던 리뮈르의 이름이 다시 언급되기 시작한 건 그해 가을, 세간에는 죽었다고 알려진 달헤임의 아들 달미에르가 살아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여름 내내 사람들을 울게 만들었던 연극 ‘눈의 전사들’에서 리뮈르 공자 달미에르는 어려서 앓은 열병으로 눈이 보이진 않지만, 다정한 성품을 지닌 인물로 등장했다. ‘눈의 전사들’에 흠뻑 빠졌던 사람들은 달미에르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몰살당한 일가의 마지막 생존자, 그가 가진 비밀이 무엇이기에 반년이나 제 생존 사실을 숨긴 것일까.

    사람들 사이에서는 온갖 소문이 나돌았다. 그중에는 리뮈르의 비극이 사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온갖 것들이 더해진 소문은 그 실체와는 무관하게 점점 몸뚱이를 키워 갔다. 그렇게 리뮈르와 관련된 온갖 소문이 나라를 뒤덮었다. 소문은 도무지 사그라질 줄을 몰랐다.

    [별 해괴한 말까지 다 돌아다니는가 봅니다.]

    카이엔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잔뜩 찌푸린 얼굴로 아리아드네에게 복잡한 심경을 토로했다.

    [달미에르가 정말 살아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잖아요. 시작부터가 허무맹랑한 상상에서 시작된 것이니 얼마 가지 못할 거예요.]

    [그러면 좋겠습니다.]

    카이엔의 기대처럼 소문은 점차 사그라질 듯이 보였다. 소문의 시작인 달미에르의 생존부터가 확인되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곧 사그라질 줄 알았던 소문은 꼬랑지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소문에 불을 붙인 건, 달미에르를 직접 봤다는 은밀한 목격담과 그가 남겼다는 짧은 말 때문이었다.

    ‘부정한 왕은 리뮈르의 심판을 받으라.’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오래도록 잊고 지냈던 단어를 떠올렸다.

    심판의 리뮈르.

    대대로 북방 경계선을 지켜 온 리뮈르였지만 그들의 진정한 역할은 따로 있었다. 상대의 죄를 낱낱이 드러내어 그 죄를 벌하는 심판자.

    그렇게 카이엔은 그가 왕으로 즉위한 해를 채 넘기기도 전에 그의 기반을 송두리째 흔드는 추문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쯤 되자 카이엔에게 달미에르의 생존은 골치 아픈 소문 정도로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리뮈르 공작 위를 이은 달리오스를 불러들여 그에게 리뮈르에서 일어났던 마물 습격 건을 상세히 조사할 것을 명했다.

    달리오스는 곧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그날의 참변이 있기 전부터 디움 산맥으로부터 넘어오는 마물이 급격히 증가했으며, 자신이 디움 산맥으로 정찰을 나갔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했다.

    방비에 더 신경 써야 한다는 기사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대주 달헤임은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고, 그날의 참변은 대주의 임무를 소홀히 한 달헤임의 실책이었다고 달리오스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숭고한 희생으로 제 몸을 바쳐 평화를 지켜 낸 영웅이 게으르고 무능한 지휘관으로 전락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죽은 리뮈르 일가는 더 이상 영웅이 아니었다.

    급격히 돌아서 리뮈르 일가를 비난하는 사람들과 아직 제 생각의 방향을 잡지 못한 몇몇 사람들, 여전히 죽은 리뮈르 일가를 추앙하는 사람들로 뒤섞여 여론은 혼란스러운 양상을 띠었다.

    여론이 팽팽하게 맞선 가운데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달미에르에 대한 의문은 점점 커져만 갔다. 달미에르가 직접 나타나 모든 의문을 해결하라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것은 그자가 죽은 달미에르를 사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미에르와 함께 자라 그 얼굴을 잘 아는 리뮈르 공작 달리오스는 그렇게 말했다.

    [달미에르를 사칭하는 자는 그믐달이 뜨는 밤, 자신이 사칭한 달미에르의 시신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달리오스는 리뮈르에 안치된 달미에르의 시신을 왕도까지 운반하고, 중앙 광장에 나뭇단을 산처럼 쌓았다. 그리고 산처럼 쌓인 나뭇단 가운데 기둥을 세우고, 그곳에 젊은 남자의 시신을 매달았다.

    상황이 극으로 치닫자 사람들은 리뮈르 일가를 둘러싼 진실보다도 과연 광장에 가짜 달미에르가 나타날 것인가에 더 열을 올렸다.

    [좀 이상하지 않아요?]

    상황을 들은 아리아드네가 카이엔에게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리뮈르 공작 말이에요. 달미에르를 사칭한 자가 누군지 알고 있는 거 아닐까요?]

    [왜 그런 생각을 했습니까?]

    아리아드네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달미에르 시신을 미끼 삼아 그자를 끌어내려 하고 있잖아요. 달미에르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라면 그런 함정에 걸려들 리가 없죠. 리뮈르 공작이 그런 수를 썼다는 건 달미에르를 사칭한 자가 달미에르를 결코 외면하지 못할 사람이라는 거죠. 대주는 그자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거고.]

    [예를 들자면…….]

    [충성스러운 가신, 사랑하는 연인 혹은 가족. 그 정도가 아닐까요?]

    [그렇군요. 알아보겠습니다.]

    아리아드네의 생각대로였다. 카이엔의 추궁에 달리오스는 사실을 고백했다. 리뮈르 일가가 마물에게 습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일가 모두가 몰살당한 것은 아니었다.

    그날 밤, 저택 밖에 있었던 리뮈르의 장녀 달로아가 홀로 살아남았다.

    달리오스는 사후 수습을 위해 달려왔다가 살아남은 달로아를 발견하고 따로 보호했으나, 며칠 뒤 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했다.

    달리오스는 사라진 달로아를 은밀히 찾았으나 끝내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자 그녀의 생존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그녀가 살아 있는 한 달리오스는 리뮈르 공작 위의 정당한 계승자가 될 수 없으니까.

    달미에르를 만났다는 몇몇 목격자들로부터 그의 인상착의를 전해 들은 달리오스는 확신하고 있었다. 달로아가 다시 나타났음을.

    [공녀는 왜 모습을 감췄던 걸까요? 리뮈르의 비극에 우리가 모르는 진실이 있는 건 아닐까요?]

    아리아드네는 달로아에게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비밀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렇다면 사람들 앞에 떳떳이 나와 그 억울함을 알릴 일이지, 나라를 이토록 혼란에 빠트리는 것이 옳은 일은 아니잖습니까.]

    그것이.

    [아리아드네, 나를 믿지 못해? 당신마저 내가 리뮈르의 심판을 받아야 할 부정한 왕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카이엔에 대한 믿음을 깨트릴 만큼은 아니었다.

    [그대가 선택한 내가.]

    떨리는 눈으로 제 대답만을 기다리는 남자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해서 그런 줄로 알았다. 아리아드네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믿어요. 당신을 못 믿는 게 아니라 리뮈르 공작의 행보가 좀 꺼림칙하다고 생각했어요.]

    달리오스가 벌이는 일은 하나같이 과했다.

    [아무리 공녀를 끌어내기 위한 것이라지만 죽은 자의 시신을 저토록 모욕할 필요가 있을까요? 어떤 진실이 밝혀질까 두려워하는 것은 공녀가 아니라 공작 같아요.]

    아리아드네의 지적에 카이엔은 한숨을 깊게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절반의 동의였다.

    [당신 말대로 리뮈르 공작 위의 계승에 우리가 모르는 어떤 사연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상, 정당하게 공작 위를 계승한 리뮈르 공작을 내 의심만으로 인정하지 않을 순 없습니다. 그것이 다섯 기둥의 수장인 내 역할이니까.]

    왕을 향한 비방만 제외하면 리뮈르 공작이 달미에르를 사칭한 자를 잡아들이는 것은 어찌 보면 가문 내의 일이기도 했다.

    공작이 제 가문의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지나친 감이 있다 해도 함부로 간섭하긴 힘들었다.

    카이엔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지친 얼굴을 한 카이엔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공녀는 왜 당신을…….]

    설사 리뮈르 공작 위의 계승에 석연치 않은 것이 있다 해도 그것은 달리오스와 해결 봐야 할 문제가 아닌가.

    달로아의 화살이 왜 카이엔을 겨누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이유를 짐작해 보려던 아리아드네는 문득 어떤 생각에 미쳤다.

    [카이엔, 나라면 그날 광장에 나타나지 않아요.]

    제 생각을 말로 꺼내 놓자 짐작은 더욱 굳어졌다.

    [달미에르와 달로아, 둘은 한날한시에 태어난 서로를 제 반쪽이라 여겼다고 했습니다. 둘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리뮈르 공작이 한 말이니 틀림없을 텐데.]

    때론 너무 가까워서 보지 못하는 것도 있는 법이다. 달리오스는 둘의 관계를 잘 알기 때문에 달로아가 달미에르를 포기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달리오스를 잘 아는 건 달로아도 마찬가지. 달로아가 그 확신을 이용하려 든다면?

    [나라면 사람들의 이목이 온통 한곳에 쏠린 그 순간이 내 염원을 이룰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할 거예요.]

    아리아드네는 달로아의 목표가 손에 잡힐 듯이 보였다.

    [나라면 그날 광장에 나타나는 게 아니라 당신을 노리겠어요.]

    아리아드네의 말에 카이엔은 허점을 찔린 사람처럼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내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페렌트의 왕궁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습니다. 설사 그녀가 리뮈르의 가전 검술을 익힌 빼어난 실력자라 하더라도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리뮈르 공작의 말을 들어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지만.]

    카이엔은 엄지로 아리아드네의 볼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하지만 성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과는 별개로 구석에 몰린 자는 뭐든 할 수 있는 법이니, 왕궁의 경계는 강화하는 게 좋겠습니다. 왕비께서 다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니까.]

    그렇게 덧붙인 그가 아리아드네 눈가에 입을 맞췄다. 하지만 아리아드네의 신경은 온통 다른 것에 쏠려 있었다.

    [성공…….]

    무언가가 잡힐 듯이 잡히지 않았다. 바로 눈앞에 있는데.

    [반년이나 감쪽같이 제 생존 사실을 숨겼는데 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걸까요?]

    그녀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나타나서? 아니, 달로아의 생존 사실을 알고 있었던 달리오스조차 그 행방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면 지금 모습을 드러낼 이유가 없지. 달로아는 성공의 가능성을 본 거야. 그런데 어떻게?’

    리뮈르 공녀라는 신분을 이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년 만에 대단한 세력을 이룬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대체 무슨 수로…….

    [카이엔, 어쩌면 공녀는…….]

    아리아드네가 건넨 말에 카이엔의 얼굴에서는 희미한 웃음마저 사라졌다.

    아무리 그믐이라지만 그날 밤은 유독 별빛조차 희미했다. 그래서 새빨간 화염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중앙 광장 한복판에서 피어오른 화염은 왕도 어디에서나 보일 정도로 거대했다. 새빨간 화염이 도시의 하늘을 뒤덮었다.

    초조해하는 아리아드네와 달리 카이엔은 느긋하기만 했다.

    [광장이든 왕궁이든 어디에서 나타나든 그자가 살아 나갈 곳은 없습니다. 모두 그대 덕분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카이엔이 아리아드네를 가볍게 이끌어 접견실 한쪽으로 걸어갔다. 접견실 한쪽 벽을 막아선 새까만 유리 앞에서 카이엔의 걸음이 멈추었다.

    끼이익, 카이엔이 반질반질한 검은 유리를 슬쩍 밀자 숨겨져 있던 비밀 공간이 드러났다. 카이엔이 검은 유리 너머에 아리아드네를 앉혔다.

    [왕비께선 여기 계십시오. 그자를 맞이하는 건 나 혼자로도 족하니까.]

    흡족한 얼굴로 웃으며 물러난 카이엔이 검은 유리 너머에서 손을 흔들었다. 페르메 유리로 분리한 비밀 공간 안쪽에 자리한 아리아드네는 어쩐지 불안하고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는데,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대체 왜…….’

    혼자서 초조해하는 아리아드네와는 달리 밝은 접견실에 자리한 카이엔은 시종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창밖에서 넘실대는 붉디붉은 저 불이 왕궁까지 모두 불사를 것만 같았다.

    타오르는 불에 온통 정신이 빼앗긴 그때.

    [동생이 불타는 순간에 날 보러 올 줄은 몰랐는데.]

    [미에르는 이미 죽었으니까. 내가 광장으로 달려간다고 그 애가 살아 돌아올 것도 아니잖아.]

    달로아가 나타났다. 넓은 왕궁에서 왕이 어디에 있는지 조금도 헤매지 않은 사람처럼.

    [진짜 미에르는 지금도 나와 함께 있으니까.]

    달로아는 뿌연 막으로 뒤덮인 왼쪽 눈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보란 듯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질 멍청이를 기대한 모양이지만, 보시다시피 지는 게임은 좋아하지 않아서.]

    [페렌트의 왕을 상대로 게임이라.]

    [네놈은 페렌트의 왕도, 케이루스의 제주도, 아무것도 아니야. 미친 살인마일 뿐이지.]

    달로아가 내뿜는 강렬한 적의는 검은 거울 너머에 있던 아리아드네에게 닿을 정도였다.

    [리뮈르의 성물을 이은 대주로서 말하지. 죽어.]

    리뮈르 공작 위를 이은 달리오스 따위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 투였다. 당연한 일이다.

    달로아가 정말 리뮈르의 성물인 ‘심연의 눈’을 가졌다면, 리뮈르의 진정한 주인은 달로아 그녀였으니까.

    달로아가 카이엔을 향해 달려드는 그 순간, 그가 빙글 몸을 돌렸다. 마침내 카이엔의 눈과 마주한 달로아가 멈칫 몸을 굳혔다.

    쐐액,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온 검이 그녀의 다리를 관통했다. 달로아는 제가 죽이려던 자를 눈앞에 두고 무릎 꿇었다.

    [거지새끼. 가진 거라곤 제 몸뿐인 비루한 새끼. 왕좌를 따낸 것도, 오늘 목숨을 건진 것도 전부 메르디에스에 빌붙어 이룬 거잖아.]

    카이엔과 눈을 마주한 것만으로 달로아는 모든 것을 알아챘다. 리뮈르의 성물 심연의 눈이 가진 힘이었다.

    [그게 뭐 어떻단 말이냐.]

    카이엔이 검은 거울 너머 아리아드네를 보며 웃었다. 아리아드네는 그 웃음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달로아가 모습을 드러낸 이유가 그녀가 어떤 힘을 얻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리뮈르의 딸인 그녀가 얻었을 힘이 무엇이겠는가. 모든 것을 꿰뚫어 본다는 심연의 눈. 그것을 가졌다면 왕을 죽이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카이엔은 대책을 세웠다. 카이엔이 있는 방까지 오면서 달로아가 마주했을 눈들이 그녀에게 알려 준 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왕궁을 지키는 병사들에게는 처음부터 거짓 정보를 주었으니까. 그리고 진짜 정보는 앞을 볼 수 없는 맹인들에게만 주어 카이엔을 지키게 했다.

    달로아의 몸을 꿰뚫는 검과 화살이 늘어날수록 그녀는 조금씩 죽어 갔다. 숨을 헐떡이던 달로아가 검은 거울 너머를 응시했다.

    [메르디에스?]

    페르메 유리 너머 자신이 보일 리 없는데, 새까만 어둠 속에서 아리아드네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뭐야, 눈앞의 주인이 무슨 마음인지도 모르는 멍청한 사냥개가 여기도 있었네.]

    의미 모를 그 말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리아드네가 그 말의 진의를 묻기도 전에 카이엔의 칼이 달로아의 가슴을 갈랐다.

    피로 젖은 달로아가 아리아드네를 향해 손을 뻗으며 힘겹게 말했다.

    [좀 더 일찍, 우리, 가 서로를…… 알았더라면……. 우리는…… 분명 같, 은 생각을 했을 텐데…….]

    그리고 곧 헐떡이던 소리마저 잦아들었다. 병사들이 들어와 그녀의 시신을 밖으로 끌어냈다. 죽은 그녀의 눈은 양쪽 모두 투명한 회색이었다.

    [……우리?]

    달로아에게 있어 자신은 그녀의 능력을 알아차리고 그녀를 죽게 한 원수일 뿐인데, 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그저 죽어 가는 자의 발악이라고 생각하고 넘겨도 될 걸 어쩐지 그럴 수가 없었다.

    마치 중요한 무언가를 제 손으로 끊어 버린 것만 같았다. 카이엔이 살았으니 더는 불안해할 이유가 없는데. 초조한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때 아리아드네에게 다가온 카이엔이 그녀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리아드네, 그대가 또 날 살렸습니다.]

    그날, 자신이 살려야 했던 건 카이엔이 아니었다. 죽어야 할 사람과 살아야 할 사람이 바뀌었음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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