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148)
  • * * *

    빛이 들지 않는 내부는 가느다란 촛불 몇 개가 전부였다. 소파에 깊게 몸을 묻은 남자가 손에 들린 잔을 흔들었다. 달그락, 유리잔에 담긴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러니까 이게 다 그놈 짓이다?”

    페렌트의 왕후, 칼은 잔에 담긴 호박색 액체를 천천히 들이켰다. 음주는 국상 중에 엄히 금하는 것 중 하나였으나 아무도 칼에게 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빈 술병이 그의 발아래 아무렇게나 굴러다녔다. 독한 술을 연거푸 들이켜고도 그의 눈빛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진땀을 흘리고 있는 건 칼의 맞은편에 자리한 카이엔이었다. 리카서스의 성물이 남겨 놓은 흔적은 아직도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카이엔은 고통으로 정신이 흐려졌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제 말을 믿지 못하시는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루안이 남긴 마지막 말마저 부정하실 생각입니까?”

    칼이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루안과 그 시종의 시신에 난 흔적을 확인해 보십시오.”

    그 상흔이 페렌트에는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마물의 흔적이라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그 상처를 보는 순간 누구나 떠올리기 쉬운 존재가 떡하니 있는데.

    “확인이야 이미 끝냈지. 다들 입을 모아 이계의 방문자가 사용하는 무기인 풀멘의 흔적이라고 하더군.”

    칼이 소파에 깊게 묻은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킨 그가 걸음을 옮겼다. 반듯한 걸음걸이가 도무지 독한 술을 몇 병이나 마신 사람 같지 않았다.

    “내 아들은 성물에 심장이 뚫리고, 내 부인은 독을 먹고 자살했다.”

    뚜벅뚜벅, 단단한 신발 밑창이 바닥을 두드렸다. 칼은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카이엔 주위를 맴돌았다.

    “내가 왕궁을 비운 보름 사이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어. 마치 그것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지.”

    카이엔의 등 뒤에서 멈춘 왕후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번 일로 왕자의 앞길을 막아선 것들이 깡그리 사라졌어.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하, 헛웃음을 흘린 칼이 마치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카이엔의 귓가에 속삭였다.

    “폐하께선 왜 죽었나?”

    카이엔의 어깨에 놓인 칼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카이엔은 제 어깨를 부서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잔뜩 힘이 들어간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머니께서 스스로의 목숨을 저버리신 이유를 정말 모르십니까?”

    천천히 고개를 든 카이엔이 칼과 시선을 마주치며 물었다.

    다그마르의 평온한 인생을 망친 작자가 누구이던가. 그녀를 자살로 몬 것이 비단 자신뿐이겠는가. 눈앞의 남자는 카이엔의 가장 큰 공모자였다.

    칼의 새까만 눈동자가 눌어붙은 기름 찌꺼기처럼 진득했다.

    “늘 생을 버거워하셨던 분이지 않습니까.”

    카이엔은 죽은 모친을 퍽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꾸며 내었다.

    “고통 속에서 너무 오래 사셨습니다.”

    왕후의 새까만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번들거렸다. 웃는 것처럼 가늘어진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래서 편해지라고 죽였나?”

    칼의 손가락 끝이 카이엔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겨우 나아가던 상처가 벌어지며 붕대 위로 피가 배어 나왔다. 의지와는 무관하게 억눌린 신음이 카이엔의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제가 그 일을 했다면 제 몸이 좀 더 멀쩡한 때를 골랐을 겁니다.”

    카이엔은 제가 다칠 생각 따윈 조금도 없었다. 제 몸을 일부러 망가뜨려 가며 일을 꾸미는 건 카이엔이 할 만한 짓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가 바로 눈앞의 남자였다. 가늘어진 눈동자가 카이엔을 살피듯이 훑고 지나갔다.

    “하긴, 왕자가 고작 내 의심을 피하자고 제 몸뚱이를 만신창이로 만들 리가 없지.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얼마나 끔찍한지 모를 리가 없는데.”

    카이엔은 자신을 낳아 준 부모보다도, 가장 가까이에서 제 수족처럼 움직이는 제프리보다도, 칼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그것은 칼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제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카이엔의 속내를 읽어 냈다. 둘은 마치 분신처럼 닮은 존재였다.

    “제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왕자야말로 내가 필요할 테지.”

    카이엔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제 어깨를 틀어쥔 계부(繼父)를 올려다보았다. 언제고 저 남자를 제 발밑에 무릎 꿇리고 싶었다.

    그날이 멀지 않다 여겼건만 남자와 제가 손잡는 날이 먼저 올 줄이야. 하기야 그 존재만 견딜 수 있다면 칼은 매우 훌륭한 우군이었다. 자신과 똑 닮은 한편이라니. 그것만큼 편리한 것이 어디 있을까.

    이 상황이 황당하기는 칼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는 낮은 웃음을 흘리며 카이엔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좋아. 감히 내 것을 건드린 자를 그냥 둘 순 없는 노릇이니.”

    칼은 격려하듯 카이엔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내 아들의 심장에 구멍을 낸 자를 잡아다 똑같이 갚아 줘야지. 그자의 심장을 산 채로 뜯어내 까마귀 밥으로 던져 줄 때까진 잘 지내보자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카이엔에게서 멀어진 칼은 탕! 하는 거친 소리를 내며 문을 닫고 나갔다. 겨우 혼자가 된 카이엔은 욱신거리는 어깨를 감싸 쥐었다.

    본디는 메르디에스와 손을 잡고 칼을 치려 했지만 이제는 칼과 손을 잡고 메르디에스를 쳐야 했다. 순서야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모두 사라질 것들인데.

    그래, 먼 길을 떠난 약혼녀에게 줄 선물도 남았지 않던가. 제가 보낸 선물이 그녀의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그 생각을 하니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은 이 고통도 좀 견딜 만했다.

    * * *

    휘이잉, 칼날 같은 바람이 아리아드네 곁을 스쳐 지나갔다. 눈만 겨우 내놓은 차림인데도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주위는 온통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세상의 색이란 색은 모두 지워지고 흰색만 남은 것 같았다.

    북쪽에 자리한 산은 위로는 하늘까지 닿을 것처럼 솟아 있었고, 옆으로는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어져 있었다. 하늘까지 맞닿은 땅이라 일컬어지는 디움 산맥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이곳이 페렌트 북방의 끝, 사람이 사는 가장 추운 도시, 얼음과 눈의 땅 리뮈르였다.

    허리에나 올까 싶은 어린아이들이 나무로 만든 목검을 들고는 저들끼리 장난을 치며 깔깔 웃어 댔다. 신나게 웃고 떠들던 아이들이 어느 한 곳을 가리키더니 와르르 몰려갔다.

    “경, 경! 오늘도 연습 봐 주세요.”

    “오늘은 제 차롄데! 어제 내일은 저 봐 주신다 그랬잖아요.”

    아이들이 리카르도의 팔과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연습을 봐 달라 졸라 댔다.

    리뮈르로 오는 내내 바짝 굳어 주위 눈치만 살피던 리카르도의 표정도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그는 입가에 웃음을 매단 채 제게 매달린 아이들을 쓰다듬었다.

    ‘아이를 좋아하는 모양이지?’

    아이들이 제 체중을 실은 채로 주렁주렁 매달리고, 귀가 아플 정도로 떠들어 대는데도 리카르도는 조금도 귀찮아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니야. 오늘은 내 차례야!”

    “넌 그제도 했잖아.”

    팔에 매달린 애들이 서로를 향해 발을 뻗으며 빽빽 소리를 질렀다. 리뮈르 대주께선 분명 기사들의 지도 대련을 부탁했던 것 같은데…….

    “모두 다 봐 줄 테니까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그가 능숙한 보모처럼 아이들을 달래자 아이들은 언제 다퉜냐는 듯이 방긋 웃으며 다 같이 “네!” 하고 대답했다.

    “착하다.”

    아이들을 쓰다듬어 준 리카르도가 팔과 다리에 주렁주렁 아이들을 매단 채로 사라졌다.

    ‘줄줄이 사탕 같다.’

    아리아드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차가운 바람 사이로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때 모르고 피어난 꽃처럼 겨울바람 사이에 섞인 온기가 그녀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것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얼어붙은 손끝이 간지러웠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두께의 외투에 푹 파묻혀 있는 아리아드네 위로 또 다른 외투가 떨어졌다.

    “안 추워?”

    고개를 들어 보니 유진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리아드네에게 외투를 벗어 준 그는 리뮈르의 겨울을 나기엔 지나치게 가벼운 차림이었다.

    “추워. 이것 봐, 손이 꽁꽁 얼었잖아.”

    아리아드네가 발갛게 변한 손을 내밀며 투정을 부리듯이 말했다. 유진은 아무 말 없이 아리아드네 손을 다시 외투로 덮어 주고는 그 위를 제 손으로 감쌌다.

    “그러니까 왜 고생을 사서 하고 그래?”

    ‘그냥 잡아 주지.’

    아리아드네는 그와 제 사이를 가로막은 외투가 성가시기만 했다. 괜스레 흘겨보는 제 시선을 알기는 아는지 슬그머니 눈을 피한 그가 말을 돌렸다.

    “저게 디움 산맥인가?”

    그래도 뭐, 아리아드네는 외투를 단단히 감싼 그의 손을 보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응, 나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야.”

    “가까이에서 보면 더 굉장하겠군.”

    그가 조금 감탄했다는 듯 말했다. 늘 무감하던 유진의 평소 태도를 생각하면 대단히 감탄한 거라 봐도 좋았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 하늘까지 치솟은 산, 깊이를 알 수 없는 협곡. 이런 거대한 자연 앞에 서면 어쩔 도리 없이 가슴이 술렁인다. 제힘으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대상 앞에서 두려운 마음이 드는 건 인간의 본능이었다.

    ‘세상에서 두려울 것 없는 그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아리아드네는 유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창백한 피부, 서늘한 눈매, 회색 눈동자, 바람에 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온통 눈뿐인 이곳과 그는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울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하늘까지 닿을 듯이 우뚝 솟은 하얀 산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제 눈으로 보는 산의 풍경보다 그의 눈에 비친 산의 모습이 더 볼만하다 생각했다.

    가만히 먼 산만 보고 있던 그가 물었다.

    “디움 산맥 너머에는 뭐가 있어?”

    “글쎄, 아무것도 없지 않을까?”

    인간이 살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디움 산맥 너머에는 생명을 가진 것은 아무것도 살지 못하는 죽음의 땅만이 존재했다.

    “저 너머는 죽음의 땅이야. 나무도, 풀도, 흙도, 생명을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죽음의 땅 아르체.”

    생명을 가진 것은 아무것도 살 수 없는, 오직 죽음만이 가득한 저주받은 땅 아르체.

    “……죽음의, 땅?”

    그 말을 듣는 순간, 유진의 머릿속이 시끄럽게 울렸다.

    ―나는 뭐지?

    ―그건 내가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어떤 생명도 살지 못하는 죽음의 땅, 그곳에 가면 알게 될지도.

    ―그곳에는 뭐가 있지?

    ―아무것도.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나?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땅이라고.

    무렉스와 나눴던 대화가 어떤 경고음처럼 그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아무것도,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죽음의 땅, 유진은 고장 난 오르골처럼 그 말만을 되풀이했다. 그때, 아리아드네가 외투에 폭 싸여 있던 손을 꺼내 유진의 손을 감쌌다.

    “이것 봐. 이렇게 차가우면서 내 손만 덮어 주면 어떡해.”

    핀잔 같은 투정을 부리던 아리아드네가 그를 올려다보며 작게 웃었다. 삐익, 삑삑, 그의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울려 퍼지던 경고음이 점차 멀어지고 그 자리를 아리아드네의 말소리가 채웠다.

    어차피 그곳에 가는 건 조금 더 뒤의 일이었다. 리뮈르의 성물이 떠오른 뒤에, 다섯 가문의 성물을 모두 본 다음에…….

    이마를 스치는 감각에 정신이 든 그가 아리아드네를 보며 물었다.

    “왜?”

    갑작스레 다가온 아리아드네의 손가락이 이마를 가린 그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냥.”

    아리아드네는 말없이 그의 어깨에 제 이마를 기댔다.

    순간, 그가 사라지는 줄 알았다. 때때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하얗게 뒤덮은 이 눈처럼, 어느 순간엔가 그가 존재했다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고.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었다. 정말 그렇게 되기라도 할까 봐.

    “그냥, 당신이 좋아서.”

    슬쩍 고개를 든 아리아드네는 평소처럼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했다. 툭, 아리아드네의 고개가 그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아무 말 없이 어깨를 내어 준 그가 아리아드네의 손가락 사이로 슬며시 제 손을 얽었다. 꽉 맞물린 손의 감촉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결국 잡을 거면서.’

    아리아드네는 그의 어깨에 기댄 채로 눈을 감았다. 온통 눈으로 가득한 사방은 마치 새벽처럼 고요했다. 세상에 오직 그와 자신, 둘뿐인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조금 전까지 끔찍하기만 했던 리뮈르의 추위가 제법 견딜 만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공간에 웬 불한당이 난입하기 전까지만 해도.

    “여기 있었네. 한참 찾았잖아.”

    눈을 뜨자 달로아가 붉은 머리를 산발한 채로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쫓아낼 땐 언제고 희생이니, 감사니 말로만 하고 입을 씻기엔 좀 염치없지 않아?

    이틀 전, 달로아가 그렇게 다이닝 홀을 박차고 나간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달헤임도, 달로아도 아무리 찾아가도 도무지 만날 수가 없더니.

    “그거 어떻게 한 거냐니까.”

    갑자기 나타난 달로아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질문을 해 댔다. 이틀 전 일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그거라니?”

    뜻 모를 질문에 아리아드네가 눈가를 찌푸리며 되물었다. 하지만 유진은 무언가 아는 모양이었다. 낮은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킨 그가 슬쩍 뒷걸음질 쳤다.

    도망갈세라 유진을 붙든 달로아가 물었다.

    “잭 도박장에서 말이야. 내가 깊이 생각을 해 봤는데, 카드 바꿔치기한 거 맞지?”

    ‘아, 이런. 그 이야기였구나.’

    달로아가 집요한 눈빛으로 유진의 대답을 촉구했다.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을 기세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 말곤 방법이 없어. 떠나기 전에 딱 한 번만 더 보여 줘. 나 이번에는 잡아낼 수 있어.”

    유진은 달로아가 종일 자신을 쫓아다니는 통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며칠째 꿈자리가 사나워서 잠을 자지 못한 터라 더 성가셨다. 차라리 싸우자고 쫓아다니는 거면 끝이라도 있지.

    이쯤 되니 어린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리카르도가 부러울 지경이었다.

    “보여 준다고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먼저 보여 줘 봐. 내가 못 한다고 누가 그래?”

    달로아는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 눈은 몹시 빠르고, 손은 그보다 더 빨랐으니까. 달로아가 바짝 얼굴을 들이밀자 유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만해.”

    유진이 닿기도 싫다는 듯 팔꿈치로 달로아의 얼굴을 꾹 밀어냈다. 달로아가 아랑곳하지 않고 유진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해 보자니까. 왜 자꾸 해 보기도 전에 안 된다고 그래?”

    턱, 그때 달로아의 손 위로 가느다랗고 하얀 손가락이 얹어졌다. 고생이라곤 조금도 모를 것이 분명한 아름답고 귀한 손.

    달로아가 고개를 들어 그 손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서늘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한 여자가 달로아의 손을 천천히 떼어 내며 말했다.

    “누구 마음대로 이 사람 손을 잡고 그래?”

    “뭐야, 겨우 손 좀 닿은 거로 웬 유난이야? 닳는 것도 아닌데.”

    “겨우 손 좀? 이 손이 그냥 손이야?”

    “그냥 손이 아니면 뭔…….”

    가만히 제 손을 내려다보던 달로아가 이윽고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우와, 성 상티모니아의 방문자님께선 손 닿는 정도로 따로 기부금을 받고 그래? 와, 진짜 돈 쉽게 번다. 큰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더니.”

    잘못짚어도 한참 잘못짚었지만 아리아드네는 굳이 정정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걸어 다니는 헌금 통이야, 뭐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달로아의 눈이 그새 유진의 손을 낚아챈 아리아드네에게 닿았다.

    “넌 왜 잡고 있어?”

    “난 그래도 돼.”

    “뭐야, 돈 많다고 자랑하는 거야?”

    어깨를 으쓱한 달로아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좋겠다. 돈 많아서.”

    “그날처럼만 벌면 금방 부자 되겠던데?”

    아리아드네의 대꾸에 달로아가 그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는 듯 얼굴을 와락 구겼다.

    “수십 년을 모아도 네 귀에 달린 귀걸이 한 짝도 못 살 텐데?”

    달로아가 아리아드네의 붉은 귀걸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같은 붉은색이라 착각하기 쉽지만 아리아드네의 귀걸이에 달린 보석은 루비가 아니라 레드 다이아몬드였다. 레드 다이아몬드는 유색 다이아몬드 중에서도 가장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보석이었다.

    하지만 레드 다이아몬드의 진정한 가치는 가격이 아니었다. 달로아가 한쪽 입꼬리를 슬쩍 잡아당겼다 놓으며 덧붙였다.

    “하기야 돈이 있다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이제까지 발견된 레드 다이아몬드는 삼백여 개에 불과했다. 그중 대다수는 메르디에스 소유였다. 대금을 치를 돈이 있다 하더라도 메르디에스가 팔지 않는다면 가질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레드 다이아몬드였다.

    귀한 것이니만큼 그 형태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레드 다이아몬드를 한눈에 알아본 달로아 역시 보통 눈썰미는 아니었다.

    “도박장에서 딴 돈은 어차피 다 돌려줘. 돈을 따는 게 목적인 것도 아니고. 정말 그 돈 먹었다가 아버지께 들키기라도…….”

    달로아는 생각만 해도 싫다는 듯 몸서리치며 말했다.

    ―꺼져, 우리 동생 약값이야.

    도박장에서 만난 달로아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약값이 아니라 동생을 치료할 수 있다는 희망이었을까.

    아리아드네는 제 용건을 잠시 뒤로 미루었다. 지금 달로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동생의 치료일 테니까.

    “우리 내기는 어떻게 할까?”

    ―네가 이기면 네 동생, 소르체의 혈족에게 보여 줄게.

    아리아드네는 달로아에게 분명 그렇게 말했다.

    “내가 졌잖아.”

    그 말을 하는 달로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은 고통을 참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했다.

    “네가 이겼지.”

    아리아드네가 달로아의 말을 정정했다. 그날 자신이 이긴 것은 달로아의 말대로 속임수에 불과했다.

    “정말 보여 줄 수 있어?”

    아리아드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으로 달로아를 압박할 생각 따윈 처음부터 없었다.

    “가문의 주치의가 소르체의 혈족이야. 코라에게 소개해 주는 것까진 할 수 있어. 네 동생을 치료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까진 간섭할 수 없지만.”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소르체의 혈족들이었다.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그들뿐이었다.

    “그것만 해 줘도 감지덕지야. 고마워.”

    달로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코라에게 소개장을 쓰려면 기본적인 병증은 확인해야 해. 리뮈르 공자를 볼 수 있을까?”

    “미에르? 아직 한 번도 못 봤나?”

    아, 하긴.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은 달로아가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하긴, 걔가 좀 인간 불신이야. 활자 중독이기도 하고.”

    ‘활자 중독?’

    아리아드네는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며 달로아 뒤를 따랐다.

    리뮈르 공저는 두꺼운 벽을 이중으로 세워 추위를 막았다. 걸을 때마다 울리는 소리가 벽에 부딪혀 떨어졌다.

    앞선 달로아를 따라 모퉁이를 돌자 아치형 문이 나타났다. 달로아가 문을 밀었다. 벽돌을 쌓아 만든 공간에는 온갖 책들로 가득했다.

    달로아는 책들로 복잡한 공간을 익숙한 듯 빠져나갔다. 높은 책장이 빽빽하게 들어차 갑갑하게만 느껴졌던 시야가 트였다.

    광활하다 싶을 정도로 넓은 공간에는 허리까지 오는 낮은 책장과 책을 읽을 수 있는 테이블이 드문드문 놓여 있었다. 이토록 넓은 공간에 사람이라곤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한 남자가 햇빛이 비쳐 드는 창가에 앉은 채로 책을 보고 있었다. 하나로 묶은 남자의 붉은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 더 붉게 보였다.

    “미에르.”

    달로아의 부름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달로아와 같은 붉은색 머리카락인데도 남자의 붉은색은 훨씬 차분한 느낌이 들었다.

    리뮈르 공자, 달미에르. 그를 직접 보는 건 과거의 기억까지 모두 합쳐도 처음이었다. 아리아드네는 마침내 달미에르의 얼굴과 마주할 수 있었다.

    전체적인 이목구비는 성(性)이 다른 남매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달로아와 닮은 얼굴이었지만, 외모에서 풍기는 느낌은 전혀 달랐다.

    붕 뜬 달로아의 붉은 머리와는 다르게 차분하게 가라앉은 머리는 느슨하게 묶은 채였고, 가지런한 눈썹과 그 아래 자리한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는 날렵하고 예민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달로아처럼 회색이지 않을까 짐작했던 눈은 그 색을 알 수 없었다. 동공과 홍채가 구분되지 않는 달미에르의 눈동자는 마치 어떤 막에 싸인 것처럼 혼탁한 빛이었다.

    그를 본 건 처음이었지만 저 눈을 본 건 처음이 아니었다. 그 눈을 보는 순간 아리아드네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아리아드네의 손이 예기치 못한 충격으로 싸늘하게 식어 갔다.

    “로아, 누구셔?”

    달미에르의 단정한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미성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아리아드네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처음 뵙네요, 리뮈르 공자님. 메르디에스의 아리아드네입니다.”

    아리아드네는 달미에르가 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가볍게 묵례하며 제 소개를 했다.

    “아.”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달미에르가 읽던 책을 손가락으로 더듬어 확인하고는 책을 덮었다. 그가 읽던 책은 글자가 크고 테두리가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달미에르가 활자 중독이라 해서 이상하다 여겼더니.’

    저 책이 그 해답인 모양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달미에르가 읽을 수 있도록 특별한 방식으로 만든 책. 책 자체도 사치품인데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특별 제작한 책이라니…….

    “방문하셨단 말은 들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몸이 불편한 터라 맞이하지 못한 무례를 범했군요.”

    책을 덮은 달미에르가 인사하며 자리를 권했다. 차분한 목소리와 흠잡을 데 없는 단정한 태도였다. 자유분방하고 솔직한 달로아와는 여러모로 달랐다.

    “한 분 더 계신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는 달미에르의 고개는 정확히 유진을 향해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예민한 감각이었다.

    “아, 그 옆에는 성 상티모니아에서 오신 이계의 방문자님.”

    냉큼 달미에르 곁으로 달려간 달로아가 그 ‘한 분’에 대해 조잘거렸다. 달로아의 소개에도 유진은 묵묵부답이었다.

    아리아드네가 옆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생각에 잠긴 듯 미간을 찡그린 유진이 리뮈르 남매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유진에게서 반응이 없자 달미에르 쪽에서 먼저 인사를 건넸다.

    “성 상티모니아의 축복 속에 평안하시길.”

    “…….”

    그 인사가 성 상티모니아 식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유진은 그때까지도 자신에게 인사하는 달미에르를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평소처럼 데면데면한 반응이라기보다는 좀 놀란 듯한 눈치였다.

    ‘달미에르의 눈 때문인가?’

    의아한 아리아드네가 유진의 표정을 살피는데.

    “필요한 책이 있으시면 찾아 드릴까요?”

    다소 쌀쌀맞은 물음이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달미에르가 그림 같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완곡하게 돌려 말하고 있었지만 달미에르의 저 말은 어서 이곳에서 사라지라는 뜻이 분명했다.

    “아뇨. 저는…….”

    뿌연 막으로 뒤덮인 불투명한 눈동자. 제 기억 속 달로아의 한쪽 눈, 그 눈의 생김새가 꼭 저러했었다. 그리고 그때의 달로아는 분명 심연의 눈을 다룰 줄 알았다.

    ‘그래서 그런 말을…….’

    [진짜 미에르는 지금도 나와 함께 있으니까.]

    달로아는 혼탁한 막으로 뒤덮인 한쪽 눈을 쓸어내리며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죽은 가족을 그리는 관용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달로아의 한쪽 눈, 그 눈의 원래 주인은 따로 있었던 거다.

    “책이 아니라 공자를 뵈러 왔어요.”

    달미에르 리뮈르. 그는 어쩌면 ‘심연의 눈’의 소유자일지도 모른다.

    “제게 용건이 있으신가요?”

    달미에르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다는 투로 물었다.

    “네, 아마도.”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달미에르에게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만큼 쌓여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을까. 그는 정말 심연의 눈을 다룰 수 있는 걸까.’

    ―하긴, 걔가 좀 인간 불신이야.

    달미에르가 정말 심연의 눈을 가졌다면 인간 불신인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그가 정말 심연의 눈을 다룰 수 있다면 제 용건을 알아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아니, 제 지난 기억까지도 모두 읽어 낼 수 있겠지.

    아리아드네는 제 기억 중에서 달미에르가 결코 평온을 가장할 수 없는 것들을 골라내었다.

    [리뮈르 일가가 모두 죽었다는군.]

    [리뮈르의 성물을 이은 대주로서 말하지. 죽어.]

    [좀 더 일찍, 우리, 가 서로를…… 알았더라면…….]

    리뮈르 일가에게 닥친 끔찍한 비극과 달로아가 죽어 가던 마지막 순간, 그러한 것들을.

    달미에르의 눈꺼풀이 천천히 닫혔다가 열렸다. 이윽고 드러난 혼탁한 눈동자가 아무 말 없이 저를 응시한다.

    ‘당신이 정말 심연의 눈을 가졌다면…….’

    초조한 침묵 끝에 굳게 닫힌 달미에르의 입술이 열렸다.

    “무슨 일이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심지어 단정한 얼굴에서는 미묘한 귀찮음이 묻어났다. 아리아드네는 입술을 짓씹었다.

    ‘내 짐작이 틀렸던 걸까. 아니면, 심연의 눈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걸까.’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정적을 깨트린 건 달로아였다. 달로아가 달미에르의 손목을 살짝 흔들며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미에르, 메르디에스 공녀가 소르체 혈족에게 소개장을 써 주신대. 소개장을 쓰기 전에 널 보고 싶다고 하셔서 내가 데려왔어.”

    그 말을 들은 달미에르의 입에서는 낮은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결 부드러운 표정을 지은 그가 고개를 숙이며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불필요한 걸음을 하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미에르!”

    세차게 발을 구른 달로아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그것이 눈에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달미에르가 달로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로아, 나는 이 눈이 불편하지 않아.”

    “알아. 아는데……. 그렇지만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최소한 시도는 해 봐도 되잖아.”

    “고치지 않아도 상관없다면 굳이 애쓸 필요도 없지.”

    조금의 여지도 남겨 두지 않는 단호한 대답이었다. 달로아는 초조한 얼굴로 달미에르를 덥석 붙들었다.

    “……우린 태어날 때부터 늘 함께였잖아. 내가 보는 것을 너에게도 보여 주고 싶어.”

    “보이지 않는다고 따로 떨어진 것도 아니지.”

    그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한 채로 손끝으로 달로아의 얼굴을 더듬었다. 조금 전 책의 글자를 짚던 그때처럼.

    “눈으로 보지 않는다고 보이지 않는 게 아니야.”

    달로아의 얼굴에서 손을 떼어 낸 그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간 달로아의 얼굴에서는 소리 없는 눈물이 떨어졌다.

    “울지 마. 못생겨져.”

    달미에르는 보지 않고도 본 사람처럼 달로아의 울음을 알아챘다.

    “너 진짜 짜증 나.”

    달로아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을 신호로 그녀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알아, 나도. 전부 내 이기심이라는 거. 그냥 내가, 내가 후회하기 싫어서 그래. 또 후회하기는 싫어서. 전부 내 탓인 것만 같아서.”

    달로아는 소매로 젖은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옷감에 쓸린 달로아의 눈가가 붉어졌다. 쓱쓱, 옷감이 살갗을 스치는 소리가 조용한 돌벽에 부딪혀 떨어졌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달미에르가 졌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하자.”

    조금 전 했던 말이 무색하게 달미에르는 제 결정을 순순히 뒤집었다.

    “너 나한테 빚진 거야.”

    그 말에 달로아가 활짝 웃으며 달미에르의 목을 껴안았다.

    “얼마든지, 오늘부터 네가 오빠 해.”

    “됐어. 너나 해.”

    달미에르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달로아와 달미에르의 웃는 모습은 놀랍도록 비슷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이 여전히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이란성 쌍둥이인가?”

    유진의 물음에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 리뮈르 남매는 이란성 쌍둥이야.”

    한날한시에 태어난 상대가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유난히도 닮은 얼굴이 더욱 애틋해 보였다. 달로아와 똑 닮은 웃음을 지운 달미에르가 아리아드네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정중한 태도로 몸을 숙였다.

    “메르디에스 공녀, 부탁드립니다.”

    “얼마든지요.”

    “번거로운 부탁드려 죄송합니다.”

    그는 재차 정중한 사과를 건네 왔다.

    “아니요. 어차피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제가 아는 소르체의 혈족에게 진료 소개장을 써 드리는 것이 전부라서요. 치료를 받으실 수 있을지는 저도 장담할 수 없어요.”

    “그 정도야 저도 알고 있습니다.”

    담담한 태도는 조금도 실망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리아드네는 소개장에 필요한 몇 가지 질문을 떠올렸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병증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편하신 대로.”

    아리아드네는 곧 몇 가지 질문을 통해 달미에르의 병증을 확인했다.

    그는 열 살이 되던 해, 원인을 알지 못하는 열병을 크게 앓은 뒤 시력을 잃었다고 했다. 밝고 어두운 정도만 간신히 구별할 수 있으며 다른 통증은 느끼지 못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제 병증을 설명하는 그의 태도는 마치 책을 읽는 것처럼 건조하고 담담했다.

    “제가 아는 소르체의 혈족에게 소개장을 보내겠습니다. 좋은 소식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네. 그랬으면 좋겠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 태도였다. 정말 겉과 속이 한결같은 사람들이었다. 포커하기에 좋은 얼굴이 아닌 게 누군데 진짜.

    “그럼 다음에 또 뵙지요.”

    아리아드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달미에르가 따라 일어났다.

    “오늘의 은혜는 반드시 잊지 않고 갚겠습니다.”

    “은혜라니요. 페렌트에 사는 이라면 리뮈르의 은혜를 입지 않은 자가 없는데요.”

    “…….”

    달미에르의 입이 딱 다물렸다.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는 못하는 것이 리뮈르다웠다.

    “오늘 도움을 받은 처지에 이런 말씀을 드리긴 송구하나 저는 아버지를 움직이지 못합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얼음 같은 남자였다. 아리아드네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공자님, 전 그런 것을 바라고 한 행동이 아닙니다.”

    꽁꽁 언 마음을 하루아침에 녹일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진 않았다. 이 정도는 충분히 각오했다.

    “제 짐작으로 무례한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

    그는 다시금 정중한 사과를 청해 왔다.

    “그럼 머무르는 동안 편히 지내시길 바랍니다. 귀하게 자란 공녀께서 험한 곳에서 지내시는 것이 편치는 않겠지만요.”

    달미에르의 걱정 아닌 걱정을 들은 아리아드네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우리 집은 너무 누추해서 아가씨같이 귀한 사람이 머무를 만한 곳이 못 돼.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봐. 달로아가 한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리뮈르는 외지인의 출입이 드문 땅이라 어디를 가든 크게 환영받진 못하실 겁니다. 공저 밖을 다니실 땐 되도록 호위와 동행하십시오.”

    무뚝뚝한 어조였지만 그의 걱정만은 진심 같았다.

    “충고도 감사히 받지요.”

    아리아드네의 대답에 까딱, 가볍게 묵례한 달미에르가 읽던 책을 도로 펼쳤다.

    “배웅 좀 하고 올게.”

    달미에르의 어깨를 두드린 달로아가 아까처럼 능숙하게 책장 사이를 빠져나갔다. 서재를 빠져나온 달로아가 탕! 소리를 내며 아치형 문을 경쾌하게 닫았다.

    “구체적으로 뭘 바라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쉽진 않을 거야.”

    마주한 달로아의 눈은 무언가를 바라는 것도, 그렇다고 미움이나 원망에 사로잡힌 것도 아니었다. 달로아의 회색 눈은 이곳을 뒤덮은 새하얀 눈처럼 놀라울 정도로 깨끗했다.

    ―아버지, 전 지금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그냥 할 말을 하는 것뿐인데요.

    그날 조찬에서 자신이 했던 말 그대로였다. 그저 사실을 말한 것뿐 화를 낸 게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리뮈르 ‘밖’의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대도 없었으니까.

    “달로아 리뮈르, 나는 정말 리뮈르를 싸움에 끌어들이려고 온 것이 아니야.”

    하지만 이곳 사람들 중에 자신의 말을 들어 주는 것도 그녀뿐이었다.

    “그럼?”

    “리뮈르는 이미 릭센의 싸움에 휘말렸어. 이대로라면 곧 이곳엔 상상도 하지 못할 거대한 바람이 불 거야.”

    “뭐?”

    달로아의 회색빛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벌어졌다 이내 분노를 품었다.

    “아, 진짜.”

    그녀가 제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휘저었다.

    “다들 대체 우리를 뭘로 생각하는 거야?”

    고개를 치켜든 달로아가 헛웃음을 흘리며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언제는 우리가 불길한 눈을 가져서 싫다며? 그래 놓고 자기들 필요할 때마다 이용하려 들지.”

    지긋지긋했다. 제 편할 대로 내쳤다가 필요할 때면 기웃대는 승냥이 떼 같은 작자들이.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서 싸우지 않아. 리뮈르가 지켜야 할 건 이 땅뿐이야.”

    얼굴이 찢어질 것 같은 차가운 바람도, 발이 푹푹 빠지는 눈더미도, 황량하고 메마른 이 땅도, 모두 그녀의 고향이었다. 지겹고 갑갑할지언정 미치도록 사랑스러운.

    “바보 같고 한심하겠지. 쥐고 있는 힘도 쓰지 못하는 반편이라고 여기겠지. 그런데 그런 우리니까 여기 이러고 있는 거야!”

    기나긴 겨울을 술로 버티는 사람들이 안쓰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어릴 때는 종일 생각했어. 저 산맥 너머에 뭐가 있을까 하고.”

    풍요로운 땅을 꿈꾸지 않는 영주는 없다.

    “리뮈르에 변화의 바람이 필요하다면, 우리가 이곳을 나간다면, 그걸 결정하는 건 우리여야지. 누구도 우리를 이 땅에서 끌어낼 순 없어.”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오직 이곳 사람들의 의지여야 했다. 이곳으로 쫓겨난 것이 우리의 의지가 아니었으니 이곳에서 나갈 때만큼은 스스로 결정하고 싶었다.

    “페렌트의 방벽이 리뮈르라면 이곳 사람들을 지키는 방벽은 나야. 말해. 네 진짜 목적이 뭐야?”

    분노한 달로아가 아리아드네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널 살리려고 왔다면 믿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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