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148)
  • * * *

    “트리플.”

    “아…….”

    이번 판도 로이의 승리였다. 페어조차 완성하지 못한 여자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카드를 내려놓았다.

    로이는 눈을 반쯤 가리는 더벅머리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더 늦으면 미에르에게 들킬 텐데…….’

    로이의 동생인 미에르는 눈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눈치가 귀신같았다.

    “아, 아깝다.”

    “절호의 찬스였는데!”

    구경꾼들이 저마다 말을 보탰다. 아쉬울 것도, 절호의 찬스였던 적도 없지만 여자의 미모에 홀린 사람들이 아무 소리나 지껄여 댔다.

    돈 많은 집 아가씨가 밤나들이라도 나온 건가. 어느 집 아가씨인지는 모르겠지만 리뮈르의 사람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한 번이라도 봤다면 저만한 미인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로이는 카드를 확인하는 여자의 표정을 살폈다. 긴장한 것처럼 잔뜩 굳은 표정이 카드를 확인하는 순간 슬쩍 풀어졌다. 고개를 든 여자가 의기양양하게 베팅을 걸었다.

    호기롭게 붙잡기에 기본은 할 줄 알았더니, 도박장에 출입할 실력은커녕 게임으로 즐기는 수준도 못 되었다. 여자의 실력은 간신히 룰만 익힌 정도였다.

    오픈한 카드만 봐도 엎은 카드가 무엇일지 빤하게 읽혔다. 전략이라고는 전무했고, 걸어야 할 때와 멈춰야 할 때도 구분하지 못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여자는 제 표정을 숨길 줄 몰랐다.

    좋은 카드가 들어오면 게임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들뜬 얼굴을 하고, 나쁜 카드를 쥐면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울상이었다. 아니, 저 정도 되면 숨길 의지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포커를 치기에 좋은 얼굴은 아닌데…….”

    슬쩍 말을 흘리자 여자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얼굴.”

    로이가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 알겠다고. 뭘 쥐고 있는지.”

    그제야 로이의 말을 이해했는지 여자가 생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이제껏 내가 가진 걸 숨길 필요가 없었거든.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도 아니라서.”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고난이나 좌절 같은 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게 분명했다.

    “편하게 살아서 좋겠네.”

    한껏 비아냥거린 로이가 카드를 뒤집은 채로 내려놓았다.

    “폴드.”

    로이가 포기를 선언하자 생글거리며 웃고 있던 여자 얼굴이 금방 울상으로 변했다.

    “아, 모처럼 좋은 카드였는데…….”

    로이는 예상외로 재미없게 전개되는 게임에 금세 흥미를 잃었다.

    “포커하기에 좋은 얼굴은 아니라고 했잖아.”

    심드렁한 로이의 말에 여자가 제 얼굴을 가리키더니 깔깔거리며 웃었다.

    “내 얼굴이 별로라는 말은 처음 들어.”

    됐다, 됐어. 아주 세상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로이가 여자에게서 딴 칩을 돈으로 환전했다. 주머니가 좀 더 묵직해졌다.

    “더 할 거야?”

    로이는 칩이 떨어진 여자의 테이블을 보며 물었다. 여자는 두 번 생각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리뮈르에선 하룻밤 잃는 돈이 사흘 치 급료를 넘겨선 안 돼. 어겼다간 바로 치안대로 끌려가거든.”

    로이의 설명에 여자는 별 우스운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피식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내 사흘 치 급료가 얼만 줄 알고?”

    ‘이래서 돈 많은 애들이랑 엮이면 피곤하다니까.’

    로이는 습관적으로 귀 옆 구레나룻을 양손으로 꾹꾹 잡아당겼다.

    “치안대는 걱정 마. 딱 한 판만 더 해.”

    여자가 생긋 웃으며 두 번째 손가락을 들었다.

    “누가 네 걱정한대? 난 이만 가 볼 시간이야.”

    로이가 한결 묵직해진 주머니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에르가 개구멍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 어쩐지 불안했다.

    로이의 예민한 감이 일어날 때를 지나쳤다고 거세게 주장했다. 이제껏 제 예감을 무시해서 좋았던 적이 없었다.

    “이거.”

    여자에게로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묘하게 시선을 끄는 여자였다.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선명한 존재감이 여자 외의 모든 것을 흐리게 만들었다.

    여자가 제 손가락에서 천천히 반지를 빼더니 점원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좀 바꿔 줘.”

    점원이 제 손에 떨어진 반지를 멍하게 쳐다보다가 뒤늦게 놀라 화들짝 튀어 올랐다.

    “저, 저희는 물건 안 받는데요.”

    “그래?”

    여자는 아쉬울 것 없다는 태도로 다시 반지를 가져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리뮈르에서 가벼운 도박을 허용하는 건 디움 산맥과 맞닿은 척박한 환경 때문이었다.

    긴긴 겨우내, 눈 쌓인 거친 산으로 둘러싸여 고립된 이곳에서 주민들이 즐길 만한 여가라고는 술과 도박이 전부였다.

    금지한다고 지켜질 리 없으니 가벼운 도박을 허용하는 대신 정도를 벗어나는 것은 더욱 엄격히 처벌했다.

    기준에서 벗어난 과한 판돈,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중독, 도박장에서 물건을 잡히는 것, 도박으로 인한 시비, 모두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로이는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로이는 여자가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반지로부터 도무지 눈을 뗄 수 없었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로이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왜? 가 봐야 한다면서?”

    로이를 마주 본 여자의 입술이 곱게 호선을 그렸다.

    “어쩌지? 난 돈이 떨어졌고, 여긴 물건은 안 받는다는데…….”

    여자가 곤란하다는 듯 입술을 검지로 툭툭 두드렸다. 그러다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반지를 로이 쪽으로 밀었다.

    “아, 이거 네가 받아 주면 안 돼?”

    로이는 여자가 내민 반지를 말없이 응시했다.

    ‘모조품인가? 저것이 흉내 낼 수 있는 물건이던가?’

    진짜이든 그럴듯하게 만든 가짜이든 눈앞에서 저것을 발견한 이상 모르는 척할 순 없었다.

    “돼.”

    “로이!”

    도박장 주인인 잭이 로이를 말리려는 듯 고함을 질렀다. 갑자기 나타난 더벅머리 소년에게 연거푸 깨지고도 이곳에서는 작은 시비조차 일지 않았다.

    이곳 주인인 잭의 보호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풋내도 채 가시지 않은 로이가 벌이는 화끈한 승부를 좋아했다.

    잭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것이 치안대에 끌려가기라도 할까 사납게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제 업장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도 사절이었다.

    로이가 테이블 위에 놓인 반지를 잭에게 던졌다. 놀란 잭이 반사적으로 반지를 받았다.

    “눈이 장식이 아니라면 제대로 살펴봐. 저건 그냥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라고.”

    잭은 까만 돌로 만든 반지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로이의 말대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돌멩이였다.

    “가끔 감자나 우유 같은 거 주고받기도 하잖아. 그냥 그런 거야. 우리 집 꼬맹이가 좋아할 것 같아서.”

    물론 로이의 집에 돌로 만든 반지를 가지고 놀 꼬맹이 따위는 없었지만.

    “그런가?”

    머쓱해진 잭이 반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여자가 테이블 위에 도로 올려진 반지를 등불에 비춰 보며 자랑하듯 말했다.

    “맞아. 우리 집엔 이런 거 막 굴러다녀.”

    로이의 시선은 더는 반지에 머무르지 않고 여자를 향했다. 마주친 새파란 눈동자가 로이를 보며 곱게 휘어졌다.

    “아, 근데 나 생각이 바뀌었어.”

    “…….”

    “난 돈은 필요 없거든. 칩을 걸 거라면 난 그만하고 싶은데…….”

    조금 전만 해도 이곳을 떠나려는 로이를 앉힌 건 여자였다.

    ‘대체 무슨 수작이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로이는 좀처럼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못했다.

    “보다시피 난 돈 말곤 걸 게 없는데?”

    로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내가 오늘 잘 곳이 마땅치 않거든. 내가 이기면 너희 집에서 하룻밤만 재워 줘.”

    여자의 바로 뒤에는 회색 로브를 뒤집어쓴 건장한 사내가 한 명, 여자가 술을 마시던 테이블에는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이 두 명 더 있었다.

    밤나들이에 사람 셋을 끌고 다니는 귀한 아가씨가 머무를 곳이 없다니.

    “우리 집은 너무 누추해서 아가씨같이 귀한 사람이 머무를 만한 곳이 못 돼.”

    로이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치안대에 신고하든가 해야지, 뭐. 증거품이 있으면 더 좋기야 하겠지만.’

    로이의 증언만 있다면 증거품이 없는 정도는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네가 이기면 네 동생, 소르체의 혈족에게 보여 줄게. 그래도 안 할 거야?”

    뒤돌아선 로이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의술로는 전 대륙에서 소르체를 따를 자가 없었다. 소르체라면 미에르의 눈을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200년 전, 자신들의 영지로 돌아가 그곳에 틀어박힌 소르체는 페렌트의 왕이 불러도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소르체의 땅을 아무나 밟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끔 소르체의 땅을 벗어난 소르체 혈족들이 병자를 봐주는 일도 있으나, 그들은 제가 치료할 환자를 스스로 선택했다.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회유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소르체의 혈족이었다.

    ‘저 여자가 정말 미에르를 소르체의 혈족에게 보여 줄 수 있을까?’

    허풍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에르의 눈을 두고 돌아서는 일 따위는 가능하지 않았다.

    “거짓말이면 가만 안 둬.”

    “물론.”

    여자는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싱긋 웃음을 지었다.

    착착착, 빳빳한 카드가 경쾌한 소리와 함께 로이 앞에 놓였다. 로이는 제 앞에 놓인 세 장의 카드를 확인했다.

    스페이드 7, 스페이드 9, 클로버 A. 로이는 스페이드 7과 스페이드 9를 숨기고, 클로버 A를 모두에게 보이도록 뒤집었다. 여자가 내려놓은 카드는 다이아몬드 A였다.

    다음으로 로이가 받은 카드는 스페이드 8이었다. 여자가 받은 카드는 하트 A. 여자는 네 번째 카드에서 A 원 페어를 완성했다.

    “앗, 원 페어네.”

    여자가 기쁨을 숨기지 못하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오픈된 네 장의 카드 중에 세 장이 A였다. 카드가 미쳤나. 로이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제 카드를 다시금 확인했다.

    스페이드 7, 8, 9가 나란히 들어왔다고 스트레이트 플러시 같은 패를 기다릴 바보는 아니다.

    무늬가 같으면서 숫자가 이어지는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완성될 확률은 100번에 3번이 채 되지 않는다. 이대로 숫자가 연결되는 스트레이트만 완성해도 나쁘지 않았다.

    로이의 다섯 번째 카드는 스페이드 10. 이것으로 스페이드 7, 8, 9, 10이 손에 들어왔다. 여자의 다섯 번째 카드는 클로버 6.

    로이가 스트레이트 플러시를 완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스페이드 6 혹은 스페이드 J, 두 카드 모두 아직 살았다.

    ‘미에르를 소르체에게 보이라는 하늘의 뜻인가.’

    로이는 여섯 번째 카드를 열었다. 하트 6이었다. 이로써 하트 6과 스페이드 7, 8, 9, 10. 다섯 개의 숫자가 연결된 스트레이트가 완성되었다.

    “뭐야…….”

    여자가 투덜거리며 다이아몬드 8을 내려놓았다. 이것으로 여자가 내려놓은 카드는 다이아몬드 A, 하트 A, 클로버 6, 다이아몬드 8.

    드디어 마지막 카드였다. 지금도 충분히 높은 카드지만 스페이드 6이나 스페이드 J가 뜬다면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완성된다.

    포커판에서는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뜨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는 속설이 있었다. 스트레이트 플러시는 그 정도로 만나기 어려운 카드였다.

    로이는 마지막 카드를 열었다.

    스페이드 Q. 로이가 받은 7장의 카드는 클로버 A, 하트 6, 스페이드 7, 8, 9, 10, Q. 이것으로 스페이드 무늬가 다섯 장 모인 플러시가 완성되었다. 숫자가 연결된 스트레이트보다도 높은 카드였다.

    플러시를 이길 수 있는 카드는 풀 하우스, 포 카드, 스트레이트 플러시. 하지만 여자가 오픈한 네 장의 카드는 다이아몬드 A, 하트 A, 클로버 6, 다이아몬드 8이었다.

    여자의 카드로는 포 카드도 스트레이트 플러시도 불가능했다. 설사 여자가 다이아몬드 플러시를 만든다 해도 스페이드 플러시가 이긴다.

    로이가 마지막 카드인 스페이드 Q를 오픈하자 여자는 안타깝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자는 제 카드를 열지도 않았다.

    “졌어.”

    그렇게 말한 여자는 열지 않은 일곱 번째 히든카드 뒷면에 슥슥 글자를 적어 내렸다.

    “이곳으로 찾아와. 그건 너 가지고.”

    카드와 반지를 테이블 위에 그대로 남겨 둔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도박장을 빠져나갔다.

    로이는 여자가 두고 간 카드와 반지를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의 마지막 카드는 로이의 마지막 카드와 무늬만 다른 다이아몬드 Q였다.

    다이아몬드 Q 카드 뒷면에는 여자가 자신을 찾아오라며 적어 내려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당연히 여자가 머무는 곳의 주소일 줄 알았는데, 카드 뒷면에는 변형된 카드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이게 대체!’

    그것을 확인한 로이의 인상이 팍 찌그러졌다. 로이는 서둘러 여자가 열지 않은 여자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카드를 확인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로이가 돈이 든 주머니도 내팽개친 채로 도박장을 박차고 나갔다.

    “로이, 너 이 돈―”

    놀란 잭이 로이를 불렀지만 뒤를 돌아볼 새도 없었다.

    “지금 돈이 문제야?”

    평소보다 한 톤 높아진 목소리가 로이의 다급함을 알렸다.

    그대로 도박장을 뛰쳐나온 로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거리 위로 선명한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로이는 눈에 난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선명하게 이어지던 발자국이 마치 공중으로 증발하기라도 한 것처럼 중간에 뚝 끊겼다.

    로이는 그 자리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까만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이 마치 눈송이처럼 콕콕 박혀 있었다.

    쌔액 얼어붙은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트럼프 카드 한 장이 날아와 눈 위로 꽂혔다. 로이는 손을 뻗어 카드를 주웠다.

    스페이드 Q. 조금 전 마지막 게임에서 로이가 일곱 번째로 받은 마지막 카드와 같은 것이었다.

    여자가 두고 간 ‘다이아몬드 Q’ 카드 뒷면에는 사선으로 잘린 스페이드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스페이드 무늬는 검으로부터 유래한 것이었다.

    부러진 검,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날 찾아?”

    여자의 목소리가 서늘한 밤공기를 갈랐다. 로이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리는 위에서부터 들려왔다.

    리뮈르의 가옥은 눈이 쌓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붕의 경사를 급하게 만든다. 뾰족한 지붕은 아무것도 없는 여름에도 발을 딛고 서기 어려울 정도였다. 지금처럼 눈이 쌓인 겨울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여자는 눈이 쌓인 지붕 위에 서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로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까 그놈인가?’

    자세히 보니 여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회색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가 여자를 제 발등 위에 올려놓은 채였다.

    “너 뭐야?”

    로이가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아직도 모른다면 좀 실망인데…….”

    그렇게 말한 여자는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사뿐히 길 위로 내려왔다. 이번에도 그 사내에게 반쯤 안긴 채였다.

    고급 금사 같은 옅은 금발이 밤하늘을 수놓는 것처럼 흐트러졌다.

    “가져가. 그 게임은 네가 이겼으니까.”

    로이가 여자를 향해 반지를 던졌다.

    여자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카드는 하트 Q와 클로버 Q. 여자가 완성한 패는 Q 트리플과 A 원 페어로 이루어진 풀 하우스였다.

    어두워 잘 보이지도 않는 새까만 반지가 사내의 손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사내에게서 반지를 건네받은 여자가 제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하얗게 뻗은 긴 손가락은 장식 없는 새까만 돌로 만든 반지를 끼고도 더없이 우아했다.

    “이게 다야?”

    요리조리 반지를 살피던 여자가 잊은 것이 있지 않느냐는 투로 물었다.

    “……너 뭐냐고 물었어.”

    “뭐긴 너희 집에 초대된 손님이지.”

    생긋 웃는 여자와 마주한 로이가 답답하다는 듯이 검은 더벅머리를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질문을 바꾸지.”

    머리를 마구잡이로 헤집던 로이가 제 머리에서 천천히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그 손에는 로이가 이제껏 쓰고 있던 더벅머리 가발이 들려 있었다.

    가발 속에 숨겨져 있던 로이의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로이의 머리카락은 마치 불타오르는 저녁놀처럼 선명한 주황색이었다.

    “메르디에스 공녀, 지금 뭐 하자는 수작이야?”

    로이는 가발을 쓰기 위해 틀어 올렸던 긴 머리카락을 풀어냈다. 부러 꾸민 낮은 목소리를 버리자 한 톤 높은 목소리가 드러났다.

    “말했잖아. 오늘 밤 너희 집에서 재워 달라고.”

    아무 말 없이 아리아드네를 바라보던 로이가 피식 웃으며 진짜 제 머리를 헤집었다.

    “손모가지 날아가고 싶어? 어디서 수작이야.”

    로이의 말에 아리아드네가 생긋 웃으며 대꾸했다.

    “리뮈르 공녀가 내 손모가지를 날리면 문제가 될 텐데?”

    아리아드네가 로이의 신분을 언급했지만 그녀는 예상했다는 듯 덤덤했다. 사선으로 잘린 스페이드 무늬를 보았을 때부터 짐작한 일이었다.

    심판의 리뮈르, 디움 산맥으로부터 페렌트를 지키는 리뮈르의 문장은 부러진 검이었다. 그리고 리뮈르 공작가의 혈족들은 대대로 리뮈르의 문장인 부러진 검을 뜻하는 달(Dal)을 제 이름의 첫 글자로 삼았다.

    로이의 진짜 이름은 달로아 리뮈르. 그녀는 리뮈르 공작가의 장녀였다.

    아리아드네가 달로아를 알아챈 것과 마찬가지로 달로아 역시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리아드네를 알아보았다. 이는 아리아드네가 내민 새까만 돌로 만든 반지 때문이었다.

    케이루스, 리카서스, 소르체, 리뮈르 네 가문에는 메르디에스에서 만들어 선물한 인장이 있었다. 누구도 그것을 쓰지는 않지만.

    가문의 보고(寶庫)에서 그 인장을 본 뒤 달로아는 한 번도 그것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그 인장을 만든 재질 때문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과 다를 것이 없었지만 인장을 만든 새까만 돌은 다이아몬드보다도 단단했다.

    ‘이것으로 무기를 만들 수 있다면…….’

    어린 달로아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대륙 어디에서도 그와 같은 돌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한 것을 보란 듯이 내밀었으니 당연히 그 정체를 눈치채야 했다.

    까만 돌로 만든 반지를 내민 여자. 밝은 금발에 푸른 눈. 처음부터 아리아드네 본인일 가능성을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메르디에스 후계가 리뮈르의 땅에 나타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달로아의 혼란은 아리아드네의 마지막 카드로 끝이 났다.

    다이아몬드 Q. 다이아몬드가 상징하는 것은 화폐. 아리아드네 스스로 제 이름을 밝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카드에는 대체 무슨 장난을 친 거야?”

    달로아가 마지막 게임에서 제일 찝찝했던 것을 물었다.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완성될 것처럼 줄줄이 이어지다 정작 완성된 건 스페이드 플러시.

    그런 달로아의 스페이드 플러시를 이긴 아리아드네의 패는 Q 트리플과 A 원 페어로 이루어진 풀 하우스.

    달로아와 아리아드네의 마지막 카드는 각각 스페이드 Q와 다이아몬드 Q.

    이 모든 걸 우연이라 믿을 정도로 순진하진 않았다. 달로아의 물음에 아리아드네가 슬쩍 뒤를 돌아보며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범인(凡人)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유능한 분이 계셔서.”

    아리아드네의 그 말이 소개라도 되는 양 남자가 깊게 눌러쓴 로브를 젖혔다.

    새까만 머리카락,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그리고 이 땅에 사는 겨울 늑대를 닮은 회색 눈동자. 온 대륙을 들썩이게 만든 ‘이계의 방문자’는 제법 반반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매끈하게 생긴 것이 꼭 사기꾼 같았다. 달로아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제 눈을 툭툭,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도 여기 사람인데 사기 치고 그런 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 달로아도 유진과 같은 회색 눈동자였다.

    리뮈르는 상대적으로 색소가 옅은 사람이 많았다. 남쪽에서는 희귀하다 못해 신기한 취급을 받는 회색 눈동자도 이곳에선 좀 드물긴 해도 아예 없진 않았다.

    리뮈르의 문을 연 시조는 겨울 늑대와 같은 회색 눈동자에 달빛 같은 은발을 지닌 검사였다고 한다. 달로아의 회색 눈동자 역시 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런 짓을 왜 해?”

    유진의 대꾸에도 달로아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이계의 방문자라며 추켜세우는 사람은 많았어도, 그게 사기가 아니냐고 물어 온 사람은 처음이었다.

    “원래 다 중독에서 시작하는 거거든. 사기꾼들은 사기를 못 끊어.”

    달로아가 제 손가락을 비비며 말을 이었다.

    “한두 번 한 솜씨가 아니니까 내 눈을 속였지.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야?”

    “…….”

    “여기서 다시 해 봐.”

    다시 보여 주기 전까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을 기세였다. 달로아의 집요한 추궁에 유진이 슬쩍 발을 뒤로 뺐다. 조금 이상한 여자 같았다.

    달로아의 기대대로 유진이 어떤 기술을 가진 건 아니었다. 시간을 이용해서 카드를 미리 준비한 것으로 슬쩍 바꿔치기했을 뿐.

    “안 돼. 나한테만 보여 주는 거라서.”

    아리아드네가 달로아의 시선에서 유진을 지키듯 가리고 섰다. 더 기가 찬 건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가 아리아드네 뒤로 냉큼 숨어 버리는 것이었다.

    “사기를 치고도 뭐 이렇게 뻔뻔―”

    그때였다. 달로아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떨어진 무언가가 눈밭을 굴렀다.

    체구가 작고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와 중년 남성이 사이좋게 낙하했다. 그중 예쁘장한 남자는 추위에 약한지 파랗게 질려 덜덜 떨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달로아가 한숨을 내쉬며 제 발밑을 구르는 리카르도를 내려다보았다.

    “추, 춥습……. 에, 에취!”

    덜덜 떨던 리카르도가 연거푸 재채기를 터트렸다. 아리아드네가 시키는 대로 조셉을 둘러업고 지붕 위에 올라간 것까진 좋았다.

    그런데 아무 언질도 없이 갑자기 둘만 휑하니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언제 내려와야 할지 도무지 타이밍을 잡을 수 없었다. 조셉을 둘러맨 채로 기다리다 힘이 빠져 결국에는 지붕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리뮈르의 추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당장 몸을 녹이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다. 리카르도는 달로아의 다리를 덥석 붙잡고는 매달렸다.

    “뭐 하자는 거야.”

    달로아가 이것 좀 어떻게 해 보라는 눈빛으로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갈 곳 없는 불쌍한 사람 좀 도와 달라는 거지.”

    “나도 몰래 들어가야 할 판인데 너희까지 데려가라고?”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달로아가 심드렁한 얼굴로 귀를 후비적거렸다.

    ‘미에르, 그 꼬장꼬장한 놈의 잔소리를 어떻게 감당하라고. 미에르한테만 들키면 그나마 낫지. 밤나들이 다닌 걸 아버지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상상만으로도 오싹했다.

    ‘남장까지 하면서 몰래 나온 이유가 뭔데!’

    달로아가 처음부터 남장을 하고 밤나들이를 다닌 것은 아니었다.

    시작은 작은 일탈이었다. 뻔히 아는 사람들끼리 하는 도박은 너무 재미가 없었다. 몇 번 해 보면 표정이나 패턴이 뻔했다.

    그게 지겨워서 여기저기 기웃대다 보니 어쩌다 뒷골목 도박장까지 흘러왔는데,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좀처럼 끊을 수가 없었다.

    귀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시끌벅적하고, 거칠고 무례한 언사가 일상처럼 오가지만, 공저에 틀어박혔을 때는 들을 수 없는 생생한 삶의 이야기들이 흘러넘쳤다.

    그곳에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에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연히 그런 곳을 몰래 들락거리는 달로아를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치안대에 발각당해 한창 게임 중에 끌려가기를 수차례, 그 뒤로는 남장을 한 채 밤나들이를 다니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아직은 무사했지만 또 들키면 밤 외출은 이젠 정말 끝이라고 봐야 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진 달로아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그때, 아리아드네의 입에서 난감하다는 듯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시종 거침없던 그녀가 좀처럼 뒷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달로아는 불길한 예감에 눈썹을 치켜들었다.

    “사실 아까 네가 집에서 나오는 거 기다려서 쫓아왔는데…….”

    “그런데?”

    “우리가 좀 부산스러웠나 봐. 경비한테 들켰어.”

    달로아가 눈을 질끈 감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국경을 수비하는 리뮈르에서, 그것도 가장 경계가 삼엄한 리뮈르 공저에 정체 모를 괴한이 기웃거렸다니.

    ‘저것들은 대체 왜 내 눈앞에 있는 거지? 안 잡혀가고.’

    그녀의 생각을 들여다본 것처럼 아리아드네가 말했다.

    “경비는 무사히 따돌렸는데, 아마 난리가 났겠지?”

    들킨 것도 모자라 따돌리기까지. 달로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양손으로 감쌌다.

    난리만 났을까. 도시 전체를 뒤집고 다녔다 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사라진 달로아가 정체 모를 괴한에게 납치당한 거라 오해하고 추격대를 꾸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문제의 화근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싱긋 웃음을 지었다.

    “나라도 데리고 가. 나만 한 손님이 있는데 설마 큰일이야 있겠어?”

    화근 주제에 제가 해결책인 것처럼 굴었다. 달로아는 지친 얼굴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같이 가.”

    냉큼 쫓아온 아리아드네가 달로아를 보며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달로아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져 눈썹을 찌푸렸다.

    “뭐야, 기분 나쁘게.”

    달로아의 타박에도 아리아드네는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만나서 반갑다고, 달로아 리뮈르.”

    언제 봤다고 친한 척이지? 달로아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터덜터덜 집으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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