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148)
  • * * *

    페렌트의 왕궁에는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왕궁의 성벽에는 모든 기가 내려가고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검은 기가 일제히 올라왔다. 국상(國喪)을 알리는 기였다.

    죽음은 언제나 무거운 것이지만, 예기치 못한 죽음은 충격을 동반했다. 더구나 이번 죽음은 하나가 아니었다.

    2왕자 루안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에게 살해당한 이때, 페렌트의 49대 국왕 다그마르마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것도 모자라 1왕자 카이엔 역시 습격을 당해 거동조차 어려운 지경이었다. 직계 왕족 모두가 죽거나 다친 참변에 왕궁은 깊은 비탄에 잠겼다.

    그중에서도 케이루스의 재건을 준비하던 세력들은 별안간 닥친 재앙 앞에 몹시 절망하고 분노했다. 이번 참변이 메르디에스와 결탁한 이계의 방문자 유진의 짓이라는 소문은 그들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카이엔이 무사히 회복하여, 페렌트의 왕위를 잇는 것만이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들의 절망만큼이나 깊은 어둠이 왕궁을 감쌌다.

    어두컴컴한 실내를 밝히는 것은 일렁이는 작은 촛불이 전부였다. 국상 중에는 기름을 태워 불을 밝히는 것도, 불에 구운 음식도 전부 금지였다.

    몸을 편하고 즐겁게 하는 모든 것이 금지되었다.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은 물론, 향신료가 가미된 음식을 먹거나 예술품을 감상하는 등의 모든 일이 애도에 어긋나는 것이라 여겼다.

    국상 중에는 읽을 수 있는 책마저 성서나 역사서로 제한했다. 한낮에도 커튼을 다 열지 않고 지냈으며, 음식은 말린 곡물과 과일을 조리하지 않고 먹었다.

    장식이 없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마치 유령처럼 발걸음 소리조차 내지 않고 걸었다. 그 사이로 소리 없이 걸음을 옮긴 시종이 주각궁의 주인이 거처하는 방에 다다랐다.

    시종은 문 앞에 서서 숨을 고른 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카이엔의 방은 그나마 밝은 편이었다. 침대 앞에 무릎 꿇은 그는 능숙한 손길로 카이엔의 몸을 젖은 수건으로 닦았다.

    방 안에 놓인 촛불이 일렁일 때마다 높다란 침대 기둥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1왕자 카이엔은 고통스러운 신음으로 제 존재를 알렸다.

    카이엔을 호위하듯 지키고 선 것은 카이엔의 수족 제프리였고, 그 앞에 자리한 것은 레비에 후작이었다. 고통스러운 신음이 카이엔의 입에서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시종이 땀에 젖은 얼굴을 닦아 주려 손을 들자 카이엔이 그 손을 거칠게 쳐 냈다.

    카이엔에게서 거친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는 가슴을 지그시 누른 채로 가쁜 숨을 내쉬었다.

    “왕후, 는……. 왕후는 돌아왔나.”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기였다. 왕은 자살하고, 왕위 계승권자인 왕자 하나는 죽고, 하나는 크게 다친 상황이었다. 페렌트의 왕위와 케이루스의 제주 자리가 빈 상태였다.

    이 모든 상황은 카이엔이 제 손으로 직접 쌓아 올린 것이었다. 페렌트의 왕위와 케이루스의 제주 자리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무릇 마지막 한 걸음이 가장 신중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이 중요한 시기에 침상이나 지키고 있어야 한다니. 속에서 화가 치솟을 때마다 욕지기가 치밀었다.

    “욱, 우욱.”

    그는 구역질과 함께 피 섞인 토사물을 뱉어 냈다. 카이엔의 상태를 본 시종이 곁방에 든 의원을 다급히 불렀다. 카이엔의 상태를 살핀 의원이 입을 열었다.

    “전하, 지금은 전하의 회복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부디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카이엔이 고개를 들어 의원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언제쯤이면 일상생활이 가능하겠나?”

    “족히 반년은 더 요양하셔야 할 듯합니다.”

    “반년이라…….”

    말끝을 늘인 카이엔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의원이라는 자가 하는 말이라곤 안정하라, 마음을 편히 가지라, 그런 말이 전부였다.

    “쓸모없는 자는 목을 베어 성밖에 버려라. 그리고 새 의원을 찾아.”

    그런 자를 살려 둬야 할 이유가 없었다.

    “국상 중에 피를 보는 일은…….”

    레비에 후작이 카이엔을 만류하듯 입을 열었다. 레비에 후작은 카이엔과 아리아드네의 파혼 때, 케이루스 측의 대리인을 맡은 자였다. 스물일곱의 나이로 후작 위에 오른 그는 카이엔이 가장 가까이 두는 측근이었다.

    “두 번 말해야 하나?”

    카이엔은 만류하는 레비에 후작은 쳐다도 보지 않은 채 제프리에게 말했다. 카이엔 옆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제프리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의원이 하얗게 질린 얼굴을 바닥에 처박았다.

    “저, 전하……. 석 달― 아니, 한 달, 한 달만 주시면…….”

    의원은 때늦은 애원을 하며 매달렸지만 이곳에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프리가 의원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다음에 데려오는 의원도 저따위면 그때 잘리는 건 네 목이다.”

    카이엔은 의원을 끌고 나가는 제프리에게 협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나같이…….”

    엉망진창이었다.

    다그마르가 죽은 것도, 루안을 해치운 것도, 그 범인이 유진인 것처럼 말을 퍼트린 것도, 모두 카이엔의 계획대로였다.

    하지만 그 계획에 자신이 다치는 것은 없었다. 제 몸을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 하나만으로 모든 게 어그러진 기분이었다.

    카이엔은 습관처럼 품속을 더듬었다. 별의 그릇이 손에 잡히자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무렉스의 호른이 제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으려 했던 순간을 도무지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압도적인 죽음의 공포. 오래도록 카이엔을 짓눌러 온 죽음의 공포가 실체를 가지고 그를 위협했을 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음에도 별의 그릇이 카이엔을 구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정말 별의 그릇이 그를 구한 것인지 그것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확실히 그를 지켜 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소르체.”

    그래, 오직 소르체만이 카이엔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줄 수 있었다.

    “소르체를 가져야 해.”

    카이엔은 으득 입술을 짓씹으며 뇌까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레비에 후작이 입을 열었다.

    “전하께선 페렌트의 왕위와 케이루스 제주 위의 유일한 후계이십니다. 이 땅의 무엇이 전하를 거스르겠습니까.”

    페렌트에서 다섯 가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레비에 후작가 같은 전통 있는 명문가도 다섯 가문 앞에선 그저 그런 작위 귀족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넘볼 수 없는 권력을 차지한 것이 다섯인 것보다야 하나인 것이 낫다. 그리고 그것은 레비에가 선택한 케이루스여야 했다.

    레비에 후작의 다디단 아첨에 카이엔의 분노가 한결 누그러졌다.

    “후계일 뿐이잖나. 둘 중 무엇도 아직은 내 것이 아니지.”

    곧 내 것이 될 테지만. 그렇게 덧붙인 카이엔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케이루스야 그렇다 쳐도 페렌트의 왕위는 다른 네 가문의 동의가 필요해.”

    케이루스야 아무 문제 될 게 없었다. 루안이 죽은 마당에 카이엔 외에는 마땅한 후계도, 반대할 사람도 없으니까.

    문제는 페렌트의 왕위였다. 페렌트의 왕위는 다섯 가문의 합의와 추대로 이루어진다. 비록 지금에 와서는 형식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했지만 그 형식마저 무시할 순 없었다.

    “최소 과반이라도 얻으려면 둘이 더 필요한 셈이군요.”

    “메르디에스야 날 끌어내리지 못해 안달일 테니…….”

    “리카서스, 소르체, 리뮈르. 이 셋 중 무엇을 먼저 취할 생각이십니까?”

    레비에 후작은 셋 다 가지는 것은 당연하고, 순서만이 문제라는 듯 물었다. 역시 레비에는 달랐다.

    카이엔은 배부른 얼굴로 뿌듯하게 웃었다.

    “리뮈르야 곧 내 손에 떨어질 테니 리카서스를 먼저 포섭해야지.”

    포르타만 건너면 리뮈르에 도착한다지. 카이엔은 아리아드네의 행적을 떠올리곤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리뮈르가 제 손에 떨어질 날이 머지않았다.

    “리카서스도 내가 필요할 테니까.”

    리카서스의 예주는 왕후인 칼이 아니라 그 동생이었지만 리카서스 내에서의 영향력은 칼이 압도적이었다.

    칼을 옥죄던 리카서스의 성물마저 루안과 함께 사라졌으니 칼의 영향력은 더 커질 터.

    “왕후가 부디 전하의 손을 잡아야 할 텐데요.”

    “그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럴 테지.”

    부인과 아들, 칼이 휘둘러 온 권력의 큰 축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 공백을 어떻게든 채우려 들 것이 틀림없었다.

    “모두가 전하의 뜻대로 될―”

    그때, 어떤 전조도 없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거칠게 문이 열렸다.

    “아마도 그럴 것 같군.”

    카이엔이 저를 향해 다가오는 새까만 사내를 보며 말했다. 그토록 기다리던 왕후의 귀환이었다.

    * * *

    마치 빈 술통 안에 들어온 것처럼 쿰쿰한 냄새가 났다. 테이블 열 개가 전부인 공간에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중에서도 중앙 테이블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이 모여 시끄럽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거 좀 잘 해 봐.”

    “콩만 한 놈한테 벌써 얼마나 털린 거야?”

    “아, 진짜 이 새끼 또 죽겠네.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 차례라고 했잖아.”

    테이블을 빙 둘러싼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보탰다.

    “로열 스트레이트.”

    테이블에 앉은 더벅머리 소년이 마지막 카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맞은편에 앉은 사내가 부들부들 떨며 제 카드를 테이블 위로 내던지다시피 내려놓았다.

    9-6 투 페어였다.

    와하하,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새끼, 져도 그게 뭐냐? 쪽팔리게.”

    “와, 저 새끼한테는 종자(種子) 맡기지 마라. 그해 농사 말아먹는다.”

    포커판에서는 투 페어를 들고 풀 하우스가 뜨기를 기다리는 자에겐 절대로 종자를 맡기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투 페어를 가진 플레이어가 마지막 카드에서 풀 하우스를 만들 확률은 100번 게임을 한다 치면 겨우 8번에 불과하다.

    하지만 제 일이 되면 그 낮은 확률이 마치 눈덩이처럼 불어나 보이기 마련이었다.

    “잘했어. 난 저 꼬맹이한테 걸었거든.”

    털이 북실북실한 두꺼운 손이 패배한 사내의 어깨를 거칠게 두드렸다.

    “네놈이 하면 뭐 얼마나 다를 거 같으냐?”

    그렇지 않아도 여름내 모은 쌈짓돈이 탈탈 털려 머리끝까지 열이 오른 사내가 거칠게 일어났다. 그는 제 어깨를 두드렸던 손목을 틀어쥐며 빽, 고함을 질렀다.

    “콩만 한 놈 다시는 기웃거릴 엄두도 내지 못하게 밟아 주겠다고 한 사람은 그쪽이었잖아.”

    더벅머리 소년의 말에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요란스럽게 발을 굴러댔다.

    쿵쿵 바닥을 찧는 발소리, 재질이 다른 잔들끼리 부딪히는 소리, 나무 의자가 끌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떨어지고 부서지는 소리들. 한 덩어리로 뭉친 것처럼 구분도 되지 않는 온갖 괴성들이 뒤섞여 사방으로 떨어져 내렸다.

    리뮈르 사람들이 기나긴 겨울밤을 보내는 방법은 세 가지였다.

    술, 사랑, 그리고 도박.

    속이 홧홧한 독한 독주를 물처럼 들이켜고, 서로의 체온으로 한기를 녹이고, 어둠이 가실 때까지 도박을 즐겼다.

    겨울이 되면 번듯한 레스토랑에서, 길거리의 간이식당에서, 뒷골목의 펍이나 심지어는 가정집에서도,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도박판이 벌어졌다.

    하룻밤 잃는 돈이 사흘 치 급료를 넘기지만 않는다면, 도박으로 붙은 시비가 치안대에 신고될 정도가 아니라면, 리뮈르에서 가벼운 도박은 범죄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정해진 기준을 넘기지만 않는다면 말이지만.

    “로이, 돈 들고 가기 무겁지 않냐? 좀 들어 주랴?”

    묵직한 주머니를 들고 일어선 더벅머리 소년, 로이를 향해 주위 사람들이 개떼처럼 몰려들었다.

    한 명에게서 딸 수 있는 돈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로이를 상대로 이겨 보겠노라 나선 건 스무 명도 넘었다. 그들에게서 딴 돈이 착실히 모인 주머니는 제법 묵직했다.

    “꺼져, 우리 동생 약값이야.”

    승냥이 떼처럼 군침을 흘리고 모여든 사내들이 로이의 말에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멀어졌다.

    “동생이 많이 아픈가 봐?”

    내내 구석에서 말없이 술을 마시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힐끗 여자를 바라본 로이가 말없이 도박장을 빠져나가려던 순간이었다.

    “나랑 한 판 해.”

    여자가 로이를 붙들었다. 크지도 않은 목소리가 유난히도 선명했다.

    로이가 지겹다는 얼굴로 돌아봤다. 그가 이곳에 나타난 2년 전부터 숱하게 겪은 일이었다. 한 판만, 한 번만, 조금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먹던 술이나 곱게 먹다 가지 그래.”

    구레나룻 양쪽을 잡아당긴 로이가 쯧, 혀를 차며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로브를 깊게 뒤집어쓴 여자가 싱긋 웃음을 지었다. 로브 아래 보이는 하관만으로도 대단한 미인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내 사흘 치 급료면 아픈 동생 약값으로는 충분할 것 같은데…….”

    ‘웬 돈 자랑?’

    로이가 심드렁한 얼굴로 좀처럼 흥미를 보이지 않자, 자리에서 일어난 여자가 로브를 벗어 내렸다.

    그 속에 숨겨진 색이 밝은 금발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도박장에 모인 사내들이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눈처럼 하얀 피부, 장밋빛 볼, 그리고 얼음 호수처럼 새파랗고 시린 눈동자. 미인일 줄은 알았지만 짐작했던 것보다도 훨씬 대단한 미인이었다. 이런 척박한 땅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우아하고 섬세한 얼굴이었다.

    “왜 쫄려? 동생 약값 털릴까 봐.”

    새파란 눈동자가 로이를 보며 비웃듯이 가늘어졌다. 마주 본 로이가 기가 차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뭐래, 입은 옷 하나는 남겨 주지.”

    미에르가 알면 가만있지 않을 텐데. 로이는 어쩐지 귀가 따가운 것 같아서 성의 없이 귀를 후비적거리며 자리를 잡았다.

    나중이 이 일을 알게 된 미에르가 뭐라고 하든 걸어오는 시비를 피하는 건 도무지 제 성미에 맞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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