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148)

* * *

투욱, 툭툭, 투두둑, 아리아드네는 쏟아지는 빗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비가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습니다. 잠시 몸을 피할 데라도 좀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조셉의 말대로였다. 하늘을 가득 메운 먹구름은 도무지 물러갈 기세가 아니었다.

겨울비는 마치 송곳처럼 내리꽂혔다. 그나마 잎이 넓은 나무 아래 몸을 숨겼다지만 겨울비를 온전히 막아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조금씩 몸이 젖어 들었다. 비는 빠르게 체온을 빼앗아갔다.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리아드네는 딱딱 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조셉이 손을 들어 비를 막으며 뛰쳐나가려던 순간이었다.

“내가 같이 가지.”

내내 아무 말 없이 앞만 보고 있던 유진이 입을 열었다. 그는 파랗게 질린 입술을 꽉 다물고 있는 아리아드네를 힐끗 내려다보더니 제 겉옷을 둘러 주었다.

묵직한 무게감이 아리아드네의 어깨를 눌렀다. 긴 로브의 끝이 젖은 흙바닥에 쓸려 더러워졌다. 아리아드네는 유진이 덮어 준 로브의 소매 끝을 만지작거렸다.

“괜히 움직이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 늦지 않게 올게.”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을 마친 유진은 겨울비가 내리는 산속으로 사라졌다. 유진과 조셉이 비 피할 곳을 찾아 떠나자 아리아드네는 리카르도와 단둘이 남았다.

평소 힘없이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리카르도를 아리아드네가 일방적으로 구박하는 구도였지만, 이런 극한 상황에서까지 그럴 생각은 없었다. 아리아드네가 몇 차례 이런저런 대화를 건넸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시원찮았다.

‘하긴, 제 의사와 무관하게 끌려다니는 게 좋을 리는 없겠지.’

아리아드네는 처음 리카르도를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내가 팔을 잡고 흔드는 것만으로 얼굴이 붉어지던 때도 있었는데…….’

엘바에서 마물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고, 성 상티모니아의 행태에 분노하고, 마물에 대한 비밀을 잠시 함구하는 대가로 리카르도를 요구했다.

자신과 있으면 지겹게 마물을 보게 될 테니까. 성 상티모니아가 숨겨 온 일들이 어떤 것인지 그 눈으로 확인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래, 그런 생각을 했었지.’

하지만 온몸이 꽝꽝 얼어 깨질 것 같은 추위 앞에서는 제 이상이고 복수고 다 던져 버리고 싶었다.

“아, 추워.”

아리아드네는 동동거리며 발을 구르다가 힐끔 옆을 쳐다보았다. 조금 창백해진 것만 제외하면 리카르도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혼자만 수선을 떠는 것 같아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경은 괜찮아요?”

“네, 추위는 익숙한 편입니다.”

딱 떨어지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래도 아리아드네와 오손도손 대화를 나눌 마음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도 다른 사람 형편을 봐줄 상황이 아니었다.

“하긴, 살리바도 좀 추운 편이었지.”

혼자서도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아무 말이나 되는대로 내뱉던 아리아드네가 추위에 꽁꽁 언 몸을 양손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 봐요. 정신이 나갈 것 같아.”

진짜 정신이라도 놓고 싶은데 그랬다간 정말 죽을 것 같아서 그럴 수도 없었다.

“무슨 말을…….”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뒷말을 어물어물 삼키는 리카르도를 보며 아리아드네가 재빨리 물었다.

“경은 어쩌다 성기사가 됐어요?”

리카르도의 대답이 궁금해서 물은 것은 아니었다. 무엇이라도 생각할 거리가 필요했다. 아리아드네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머리를 뒤적였다.

기사와 마찬가지로 성기사도 대부분 귀족 출신이었다. 평민은 드물었고, 어린 나이에 저렇게 높은 자리를 차지한 경우라면 더 그랬다.

성기사는 더 폐쇄적이라 들었으니 리카르도 집안이야 더 말할 것도 없겠지. 아리아드네는 성기사를 배출하는 것으로 유명한 몇몇 가문을 떠올렸다.

‘내가 떠올린 가문 중에 하나려나. 아, 진짜 춥다. 유진은 언제 오지.’

얼어붙은 발가락을 신발 안에서 꼼지락거릴 때였다.

“신전에서 자란 남자아이가 될 수 있는 것 중 가장 좋은 것이 그것이라서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신전에서 자란 아이? 성기사는 어릴 때 뽑아서 신전에서 키우는 건가? 아니, 선후 관계가 반대잖아. 방금 신전에서 자라서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고…….’

어, 이거. 추위에 둔하게 돌아가던 머리가 뒤늦게 위화감을 발견했다. 놀란 듯 커진 눈동자를 본 리카르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전 불을 꺼트린 바람입니다.”

불을 꺼트린 바람. 그건 성직자의 사생아를 일컫는 말이었다.

신에게 귀의하여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불. 그런 성직자를 타락시키는 것들은 무수히 많겠으나, 그중에서도 사람들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것은 단연 애욕(愛慾)이었다.

성직자의 사생아는 누구보다 고귀하고 고결해야 할 성직자가 성욕을 탐하여 신을 저버린 증거였다.

물론 교황이나 추기경쯤 되면 공공연한 사생아 한둘 없는 이가 오히려 드물었다. 하지만 어디든 죄를 재는 잣대는 공평하지 않다.

“무슨 말이든 해 보라지 않으셨습니까? 왜, 더러운 자가 하는 이야기는 싫으십니까?”

아리아드네는 예상치 못한 대화에 한숨을 삼켰다. 리카르도의 신분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추위를 잊을 만한 잡담이나 하려던 것이 이런 내밀한 이야기를 끌어낼 줄이야.

내밀한 이야기를 듣게 되면 필연적으로 관계에 변화가 생긴다. 아리아드네는 눈앞의 성기사와 어떤 관계를 맺을 생각 따윈 조금도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거라면 지금 여기서 끊어야 한다.

“누가 더럽대?”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눈앞의 성기사를 끝끝내 외면하지 못했다. 어째 과거로 돌아오고 더 물러진 것 같았다.

“신에 귀의한 것도, 다시 세속으로 돌아오는 것도 그냥 선택이잖아. 그게 깨끗하고 더럽고 그런 문젠가.”

신전에서 자란 리카르도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겠지만, 아리아드네는 둘 중 어느 한쪽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역시나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한 리카르도가 머리를 기울였다. 턱선에 맞춰 자른 단발에서는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남자치고는 선이 여린 얼굴이었다. 파리하게 질린 입술이 몹시도 애처로워 그것을 지켜보는 마음이 불편했다.

“고귀한 메르디에스의 공녀께서 제가 성직자의 사생아임을 알고도 더럽다 여기지 않으십니까?”

“교황도, 랭스턴 공작도 다 성직자의 사생아인 마당에 무슨…….”

아리아드네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그네스 교황도, 랭스턴 공작이었던 시몬도, 전대 교황인 테오도로의 사생아가 아니던가. 같은 성직자의 사생아인데 교황의 사생아면 고결하고 그렇지 않으면 더러울 건 뭔가.

리카르도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썹 끝에 매달린 빗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생아를 낳은 성직자가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무슨 말이든 해 보랬더니 정말 제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었다.

“낳은?”

아리아드네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사생아를 ‘낳은’ 성직자라는 말은 성별을 제한하는 표현이었다. 신에게 출산의 은총이라도 받은 남자 성직자가 있는 게 아니라면.

“높은 위치에 올라간 성직자가 사생아를 두는 것은 흠이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수습 사제의 경우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당연한 이야기다. 작은 권력은 작은 흠으로도 무너지지만, 큰 권력은 그만한 흠으로는 무너지지 않는다. 큰 권력이 무너지는 것은 더 큰 권력이 누를 때였다.

“그런데 수습 사제 중 이런 문제로 자격을 잃는 것은 대부분이 여자 사제들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리카르도의 입술 사이로 희뿌연 숨결이 흩어졌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같은 금기를 범하더라도 흔적이 남기 때문입니다. 저 같은 흔적이.”

그는 잠시 고개를 내려 제 손을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것이 스스로의 선택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최소한 억울하진 않겠지만…….”

뒷말은 듣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 상대는 높은 직급의 사제, 성직자라는 것에 성적 매력을 느낀 고액의 기부금을 내는 귀족, 하다못해 힘쓰는 일을 위해 고용한 잡역부들까지. 신앙, 의지, 노력, 그런 것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권력, 금력, 완력, 그런 것이 모자랐기 때문입니다.”

흔한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어쩐지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춥기는 확실히 덜 추운 것 같군.’

아리아드네는 슬슬 열이 오르는 것 같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차가운 공기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그런 일이야 참고 넘긴다 해도 ‘저’ 같은 부정할 수 없는 흔적이 남으면 성직자로서의 삶이 끝나는 겁니다. 집으로 돌아간다고 받아 줄 리도 없으니 신전에 남아 잡일이나 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됩니다. 신전의 최하층이 바로 그렇게 버려진 사제들입니다. 신전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의 고아 절반은 저 같은 신세입니다. 사제의 몸에서 난 아이들은 성력이 발휘될 가능성이 높으니 신전으로서도 나쁜 장사는 아닌 셈입니다.”

‘시정잡배들이 따로 없군.’

아리아드네는 저절로 구겨지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힘없고 지켜 줄 이 없는 사제들을 겁박해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그렇게 낳은 아이는 다시 신전의 재산이 된다. 그 아이에게서 운 좋게 성력이 발휘된다 해도 뒷배가 없으니 이용만 당할 테고. 끝나지 않는 악순환이었다.

“다시 묻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잡아먹고 태어난 제가 정말 더럽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묻는 푸른 눈동자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자신을 더럽다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더러운 건 경이 아니라 신에 귀의한 사제의 의지를 무시한 사람이겠지.”

아픈 건 때린 사람이 아니라 맞은 사람이다. 아픈 사람이 잘못까지 뒤집어써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리카르도는 조금 멍한 얼굴로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자란 고아원은 수도원에 딸린 것이었는데, 그곳의 수도원장은 능히 추기경의 자리에 오를 만한 세력을 갖고도 그 자리를 거절한 사람이었습니다. 수도원장은 훌륭한 인품과 높은 학식으로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았습니다.”

‘원장은 또 왜…….’

아리아드네는 자신이 대화를 하는 건지, 리카르도의 혼잣말을 듣고 있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 고아원에는 저 말고도 수도원장을 닮은 아이가 족히 열은 되었지만, 그것은 수도원장의 평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폐쇄적인 수도원에서 수도원장을 닮은 사생아들이라니,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뻔했다. 개판이 따로 없었다.

수도원처럼 폐쇄적인 공간일수록 권력을 경계해야 한다. 저런 병폐를 막지 못한 것은 다스리는 자의 실책이었다.

그건 그렇고 평소 리카르도는 맹목적이다 싶을 정도로 성 상티모니아에 대한 믿음이 깊어 보였는데……. 이런 치부를 아리아드네에게 말하는 의도가 무엇이란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리카르도가 느릿하게 말을 이어 갔다.

“아그네스 성하께서 교황으로 즉위하신 후, 성 상티모니아 정화 사업이 있었습니다. 지위를 이용하여 사제를 겁박하고 그 몸을 취한 자, 금품을 받고 그것을 묵인한 자들의 목이 날아갔습니다. 제가 자란 고아원의 원장도 그때 죽었습니다. 원장은 평생 그런 짓을 하고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는데, 목이 잘린 원장의 얼굴에는 더러운 가래침이 가득했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리카르도는 아까보다 좀 더 창백해진 것을 제외하면 평소와 다른 점이 없었다. 앞을 보던 리카르도가 고개를 돌려 아리아드네를 응시했다.

“당신에겐 제 세상이 옳다 그르다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원장을 죽인 건 당신이 아니니까요. 제 세상의 옳고 그름을 정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저를 구원하신 그분뿐입니다. 저는 그분이 베라 하면 베고, 그분이 지키라 하면 지킬 것입니다.”

아니, 자신을 바라보는 줄 알았다. 아리아드네를 보는 리카르도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풀어진 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경, 괜찮아?”

그 말과 동시에 꼿꼿이 서 있던 리카르도가 갑자기 휘청했다. 아리아드네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저는 오직 성하의 뜻에 따, 라…….”

리카르도가 아리아드네 품으로 쓰러졌다. 느릿하게 중얼거리던 말은 점점 작아지더니 이윽고 멈춰 버렸다. 쌕쌕 숨을 쉬는 얼굴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추위는 익숙하다더니……. 아니, 그것보다 기사 체력이 뭐가 이래.’

아리아드네는 열이 올라 혼잣말만 잔뜩 하다 기절해 버린 기사를 품에 안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유진은 언제 오는 거야. 아, 진짜 무겁긴 왜 이렇게 무거워.’

아리아드네는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진 리카르도를 지탱하며 비 오는 숲을 애타게 바라보았다.

쏴아아아, 빗소리로 가득한 숲에 쌕쌕 기절한 기사의 숨소리가 더해졌다. 무거웠다. 리카르도도, 리카르도의 이야기도.

그 이야기를 들은 이상 모르던 때와 같을 순 없었다.

‘어쩐지 외면하고 싶더라니…….’

아리아드네는 자꾸만 미끄러지는 젖은 손을 로브에 닦고는 리카르도를 꽉 붙들었다. 과거로 돌아오고는 어째 점점 더 물러지는 것 같았다.

* * *

타닥타닥, 무엇인가가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고 있었다. 얼굴이 뜨거운 것이 외부의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속에서 치솟는 열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아, 입을 달싹여 보았지만 목이 잠겨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더듬거리며 주위를 짚어 보니 나무 질감이 느껴졌다.

드문드문 이어지던 기억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뚝 끊겼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천천히 눈을 뜨자 자신을 내려다보던 새파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아니, 추운 건 익숙하다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은 아리아드네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 마지막에 저 얼굴이 이렇게 가까이……. 가까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리카르도는 벼룩이 튀어 오르는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기억 사이로 이상한 장면이 끼어 있었다. 자신이 메르디에스 공녀 품으로 쓰러지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기억이.

“다행인 줄 알아. 두 시간 내로 안 일어나면 버리고 갈 생각이었으니까.”

아리아드네의 냉랭한 목소리가 리카르도의 상념을 싹둑 잘라 냈다. 기다렸다는 것이 거짓은 아닌 듯 다들 출발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아, 조금만 늦게 깨어났더라면.’

리카르도는 낙오될 기회를 놓친 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제게는 불행인 것 같습니다만.”

미련을 버리지 못한 리카르도가 투덜댔다. 그 말을 들은 아리아드네가 조셉과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리카르도를 돌아봤다. 표정이 사라진 얼굴이 낯설었다.

리카르도는 순간 숨을 멈췄다. 가까이 다가온 아리아드네가 리카르도의 턱을 억세게 쥐었다.

“잊지 마. 넌 교황이 메르디에스에 치른 배상금이라는 걸. 성기사단 부단장이 내 기대에 못 미치면, 메르디에스는 성 상티모니아에 더 많은 배상금을 요구할 거야.”

가늘고 보드라운 귀족 영애의 손이 제 턱을 쥔 것뿐인데 리카르도는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주인의 얼굴에 진흙을 묻힐 셈인가?”

차라리 제 손으로 제 목숨을 끊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만은 싫었다. 리카르도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좋아.”

제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빙긋 웃은 여자의 손이 마침내 떨어졌다. 리카르도는 멈췄던 숨을 내쉬었다.

아리아드네는 자신을 기다리는 조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높이 틀어 하나로 묶은 머리가 허공에서 달랑이며 흔들렸다.

퍼석한 갈색 가발로 원래 머리카락을 가렸지만, 눈에 띄는 외모는 조금도 가려지지 않았다. 동그란 이마와 높게 솟은 콧대, 선명한 눈매. 여자의 외모는 언제 어디서나 눈길을 잡아끌었다.

아무래도 열이 덜 내렸는지 리카르도는 아직도 바닥이 꿀렁이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지금이라도 두고 가자는 내 의견은 변함이 없어.”

그때, 구석에 기대 있던 유진이 몸을 곧추세우며 말했다. 리카르도는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 검을 들기 시작하면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겁내 본 적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전부 상대가 같은 인간일 때의 이야기였다. 저 남자는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는 존재였다.

뚜벅뚜벅, 유진이 리카르도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눈치를 보며 얼어 있는 리카르도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하지만 표정을 볼 수 없는 뒷모습에서조차 자신을 마땅찮게 여기는 것이 느껴졌다.

“당신도 그쯤 해 둬. 아무 일도 없었잖아.”

아리아드네가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로 말했다. 아마도 리카르도가 정신을 잃은 하룻밤 내내 이런 식의 설전이 이어졌던 모양이다.

리카르도는 그제야 상황의 심각함을 깨달았다. 유진이 조셉과 자리를 비우면서 자신을 두고 간 건 공녀를 지키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비를 맞고 기절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정신을 잃은 사이에 숲에서 산적이나 마물이 나타났다면…….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했다.

“그걸 말이라고 해? 저놈이 고작 저따위 실력인 줄 알았다면 애초에 당신을 두고 가지 않았을 거야.”

유진이 리카르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리카르도는 그 손이 저를 반으로 쪼개 놓을 것만 같아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유진이 내뿜는 살기등등한 기세에 리카르도는 물론 조셉마저도 하얗게 질려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유진과 마주한 여자만큼은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고도 태연했다. 성큼 유진에게 다가선 여자가 말했다.

“이젠 알았잖아.”

아리아드네는 슬며시 유진의 손가락에 제 손을 얽었다. 서로의 손가락이 엇갈려 맞물렸다.

“앞으론 당신이 내 옆에서 안 떨어지면 되겠네.”

그녀는 깍지 낀 손을 들어 살짝 흔들었다.

“진짜…….”

할 말을 잃은 유진이 반대쪽 손으로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가 그렇게 걱정이야?”

“당연한 소릴―”

유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당연하다는 그 대답에 아리아드네의 입 끝이 저절로 말려 올라갔다.

“당신은 아무래도 내가 너무 좋은가 봐.”

“지금 이게 왜 그쪽으로―”

하지만 이번에도 유진의 말은 그 끝을 맺지 못했다.

“나도 좋아.”

새파란 눈동자가 반달 모양으로 곱게 휘어졌다.

“많이.”

덧붙인 그 말에 유진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단단히 맞물린 손가락 끝에서부터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나쁜 예감이 들었다. 평생 이 여자를 이기지 못할 거라는 그런 나쁜 예감이.

“그럼 출발할까?”

싱긋 웃음을 지은 여자가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이곳에서 여자의 말을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행은 서둘러 짐을 꾸렸다. 하룻밤 동안 쉬지 않고 내린 비는 겨우 그쳤지만, 젖은 땅은 이동을 더디게 만들었다.

아리아드네 일행이 비를 피한 곳은 여행자나 조난자를 위한 쉘터였다. 혹한의 산을 넘다가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생겨나자 리뮈르는 영지와 가까운 산에 쉘터를 설치하고 관리했다.

유진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쉘터를 찾아낸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비가 쏟아지는 통에 챙기지 못한 말은 모두 달아나 버렸다. 걷는 수밖엔 도리가 없었다. 일행은 조셉의 안내에 따라 부지런히 길을 걸었다.

길을 살피는 선두는 조셉이, 아리아드네 곁은 유진이, 후미에는 리카르도가 각각 자리를 잡았다. 다들 어제와 다름이 없는데 뒤만 유독 부산스러웠다. 리카르도는 날벌레만 나타나도 검을 뽑아 들었다.

“경.”

아리아드네가 리카르도를 불렀다.

“……네.”

리카르도는 아리아드네 입에서 돌아가라는 말이 나올까 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리아드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처음부터 돌려보낼 마음 따윈 없었다. 그렇다고 편하게 해 주고 싶지도 않았다.

엘바에서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그것이 정말 시몬 혼자서 한 일일까? 사람을 마물로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시도를 거쳐야 했을까? 1년? 10년? 아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월 동안 쌓여온 결과일 거다.

성 상티모니아가 정보를 독점해 온 그 세월 동안 어떤 연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당했는지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었다.

―설사 성물에 대한 반발력을 가진 인간이 성물에 노출되어 마물이 되었다 해도 그것이 왜 성 상티모니아의 잘못입니까? 성물에 대한 친화력이 신의 은총이듯, 반발력 또한 신이 내린…….

리카르도가 그렇게 말했을 때는 성 상티모니아가 그토록 경배하는 성물을 죄 망가뜨리고 싶었다.

신의 뜻? 그게 대체 뭐라고. 리카르도의 신념을 모조리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리카르도가 믿는 것은 신이 아닌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순례의 길이 평안했는지 모르겠군요. 성 상티모니아의 축복 속에 평안하시길.

새까만 머리카락을 발끝까지 늘어트린 붉은 눈의 교황 아그네스.

지금이야 성 상티모니아의 유일한 정점에 자리하고 있지만, 그녀가 걸어온 길이 순탄치 않았으리라는 것 정돈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었다.

모계의 신분만 해도 그러할진대, 성 상티모니아 내에서 여자 사제 취급이 저렇다니. 아마 자신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월을 보냈겠지.

그에 비하면 자신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남자만을 후계로 삼는 리카서스가 아니라 메르디에스에 태어난 것도, 외동이라 후계를 경쟁할 동기가 없었던 것도,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

그에 비하면 아그네스는 운이 나빴다. 교황과 수습 사제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랭스턴 적녀 소생인 이복동생, 불길하다 여겨지는 붉은 눈.

아그네스는 나쁜 선택지만 잔뜩 가지고도 역대 가장 강력한 교황이 되었다. 그렇게 힘들게 손에 넣었건만, 손에 쥔 권력은 썩을 대로 썩은 부패의 온상. 그 부패는 누구의 책임인가.

―당신에겐 제 세상이 옳다 그르다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원장을 죽인 건 당신이 아니니까요.

‘최소한 쓰레기 하나는 치웠네.’

아리아드네는 점점 무거워지는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생각했다.

[비 전하께서, 아리아드네 님께서 잘못하신 게 아닙니다. 그러니…….]

[비 전하, 아리아드네 님! 아리아드네 님, 부디 보중…….]

왕이 되겠다고 결심한 건 제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서였다. 또다시 카이엔의 욕심에 제 사람들이 잡아먹히게 둘 순 없었다.

카이엔을 쓰러트리고 왕이 될 생각만 했다. 그 뒤의 일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이엔을 쓰러트리기 위한 길을 걸을수록 점점 물음이 늘어난다.

―엘바에서 실종된 사람들은 마물의 먹이나 사냥감만이 아니었던 거야. 마물의 재료이기도 했던 거지. 내 말이 틀려?

알버트를 찾으러 간 엘바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비밀과 마주했다.

―조……셉, ……를 ……죽, 여.

―마크를…… 마, 크가 원하는 대로…….

마물이 되어서도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마크가 그곳에 있었다.

―그런 일이야 참고 넘긴다 해도 ‘저’ 같은 부정할 수 없는 흔적이 남으면 성직자로서의 삶이 끝나는 겁니다.

성 상티모니아의 어둠이 그곳에만 있겠는가. 어둠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이젠 거의 다 왔습니다.”

돌아보는 조셉의 얼굴은 온통 땀으로 범벅이었다. 혹시라도 길을 잘못 들까 내내 긴장했던 얼굴이 겨우 펴졌다.

조셉이 이토록 절실한 이유를 알았다. 엘바에서의 일을 잊지 못하는 건 아리아드네만이 아니었다. 그러니 아리아드네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 모든 진실을 밝혀내야 할 책임이 남아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가파른 경사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올랐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일행이 포르타에서 비를 만났을 때, 산 저쪽에서는 눈이 쏟아졌던 모양이다.

리뮈르의 땅은 눈으로 덮여 온통 하얀색이었다. 눈이 쌓이지 않도록 경사진 지붕부터 눈에 닿아 목재가 썩을까 네 발을 달고 선 바닥까지, 모두 하얀 눈에 파묻혀 있었다.

리뮈르의 겨울은 해가 일찍 졌다. 등을 거는 것은 아이들의 몫인 듯 집마다 아이들이 내건 등이 지붕 밑에 달렸다.

노란 등이 하얀 눈에 반사되어 해가 져도 도시는 어둡지 않았다. 하얀 눈이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나는 어떤 왕이 될 것인가. 이젠 그것을 그려야 할 때였다.

아리아드네는 왕이 된 이후를 생각하지 않고, 왕이 되는 것에만 집착했던 사람을 알았다. 그는 제 권력에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까 봐 주위 사람을 모두 죽였다.

카이엔을 쓰러트리고, 카이엔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아리아드네는 동화 속의 풍경 같은 리뮈르의 땅으로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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