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148)
  • * * *

    “이것 봐. 숨만 쉬어도 입김이 하얗게 부서질 것 같아.”

    아리아드네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메르디에스라면 막 가을에 들어섰을 시기인데, 이곳은 벌써 한겨울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어떻게 공기가 이렇지? 메르디에스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거야.”

    온화한 기후의 메르디에스에서 자란 아리아드네에게 공기란 기본적으로 포근한 것이었다. 과거 왕도에서 생활하며 몇 번의 겨울을 보낸 것으로 추위는 경험할 만큼 경험해 봤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웬걸. 릭센의 겨울은 겨울도 아니었다. 공기가 이렇게까지 차가울 수 있다니 신기하기만 했다.

    “그런데 아직 리뮈르의 땅에는 발도 들이지 않은 거잖아. 여기서 더 추워진다고? 정말?”

    “리뮈르가 괜히 얼음과 눈의 땅이라고 불리는 게 아닙니다.”

    신중한 눈으로 방향을 살피던 조셉이 대답했다. 조셉은 외길에서도 신경을 늦추지 않았다. 그는 길 안내라는 익숙한 일에도 막중한 부담을 느끼는 듯했다. 마크의 죽음은 조셉의 탓이 아닌데…….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동료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인지 그는 때때로 어두운 얼굴을 했다.

    아리아드네는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조셉의 마음을 이해했다. 네 탓이 아니라는 위로는 하지 않았다. 그런 위로조차 받아들일 수 없었던 순간이 아리아드네에게도 있었다.

    주위 지형을 유심히 살피던 조셉이 손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곧 마을이 나타날 겁니다. 그곳에서 연락을 취하시면 됩니다. 겨울 산을 넘으려면 몇 가지 준비도 필요할 테고요.”

    아리아드네는 두툼한 겨울 장갑을 다시 여미고는 고삐를 쥐었다. 저 산만 넘으면 드디어 리뮈르였다.

    아리아드네 일행이 도착한 곳은 산의 초입에 자리한 작은 마을이었다. 나무로 지은 집들은 크기가 작고 폐쇄적인 구조였다. 추위를 막기 위한 것인 듯했다.

    “작은 마을에선 보통 이런 식당이 여관을 겸합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지요.”

    조셉이 마을 중앙에 위치한 식당의 나무문을 열었다. 후끈한 열기와 탁한 공기가 훅 얼굴을 덮쳤다. 아리아드네는 눈을 살짝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왁자지껄한 소음이 일순 멎었다가 터져 나오듯 이어졌다. 힐끗거리는 시선은 이방인들을 향해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내부를 둘러보았다. 군데군데 빈자리가 있긴 했지만 적당한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고민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회색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유진이 아무 곳에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리아드네는 그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시야가 확보되는 것도 아니고, 문은 등지고. 이래도 돼?”

    로브의 후드를 벗은 유진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내리다 고개를 들었다.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누가 오든 손끝 하나 못 건드릴 텐데.”

    “하긴…….”

    아리아드네는 제 일행의 면면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주억였다. 유진의 무력이야 두말할 것도 없지만 나머지 한 사람 역시 대적할 사람을 찾기 힘든 실력자였다.

    “경, 얼마 안 남았으니까 힘내요.”

    “저는 대체 왜 여기까지…….”

    페렌트의 북쪽 끝까지 끌려오고도 희망을 버리지 못한 리카르도가 지친 어조로 말을 흐렸다. 성기사단 제복을 벗은 리카르도는 생각보다 훨씬 앳된 얼굴이었다. 긴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서 그런 걸까.

    릭센을 벗어난 일행은 혹시 모를 눈을 피하고자 조금씩 모습을 바꾸었다.

    아리아드네의 머리카락은 결이 나쁜 갈색 가발로 가렸고, 유진은 이곳의 옷을 입었다. 리카르도는 성기사단 제복을 벗고, 긴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다.

    그것만으로도 다들 인상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그 속이야 어떻든 겉모습은 평범한 여행자였다.

    식당 주인에게 가 메뉴판을 보며 몇 가지 주문을 마친 조셉이 곧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로 돌아온 조셉이 종이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상단주님께서 보낸 서신입니다.”

    여관을 겸한 식당일 뿐 아니라 우편국 역할도 같이하는 모양이었다.

    ‘리뮈르에 도착하기 전까진 다른 마을이 없으니 한동안 연락을 못 하겠네.’

    아리아드네는 봉투를 뜯어 편지를 빠르게 읽어 내렸다. 편지의 내용은 길지 않았다. 아리아드네가 요청한 리뮈르에 관한 정보 몇 가지, 그리고 왕도 릭센의 소식이었다.

    왕궁에 남은 메르디에스 측 사람들은 천천히 몸을 빼는 중이며, 루안도 곧 왕도를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신시아가 알려 준 대로라면 루안이 수도를 떠나기로 한 날은 바로 오늘이었다.

    “잘됐다.”

    내내 가슴 한쪽에 돌이 박힌 것처럼 불편했는데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리아드네는 다 읽은 편지를 물에 적신 뒤 아무렇게나 버렸다. 물에 녹는 잉크만 사라져 편지의 내용은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것으로 둔갑했다.

    “아까 말한 건 준비해 뒀소. 확인해 보겠소?”

    식당 주인이 바깥을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식당에 여관에 우편국에 상점까지. 정말 안 하는 게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물건 점검을 위해 바깥으로 나서는 조셉을 따라 일어났다. 날이 밝을 때 조금이라도 더 움직여 둬야 했다.

    “방한 로브와 산악용 부츠, 식량과 지도. 모두 이상 없습니다. 오늘 출발하시겠습니까?”

    “그래야지.”

    아리아드네는 이곳에서 새로 산 말 위로 올랐다. 겨울 산을 오르기 위해 사들인 것으로, 크기는 보통 말보다 작고 털이 뻣뻣했다. 뿔이 없는 것만 빼면 말보다도 순록에 가까운 생김새였다.

    아리아드네 일행은 천천히 말을 몰아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리뮈르 서남쪽을 둘러싼 에움 산맥은 하늘까지 맞닿은 산이라 불리는 디움 산맥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작은 줄기였다.

    에움 산맥의 산 중에서도 일행이 오르고 있는 포르타는 경사가 완만하고 통행량이 많아 리뮈르로 가는 주요 관문 중 하나였다.

    “겨울에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동쪽으로 둘러 가는 사람이 훨씬 많지만요.”

    산을 피해 동쪽으로 둘러 가면 보름은 족히 더 걸린다. 지금 같은 시기에 그런 늑장을 부릴 여유는 없었다.

    두어 시간쯤 산을 올랐을 때였다. 맑은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몰려온 회색 구름이 해를 가렸다.

    후두둑, 갑자기 쏟아진 빗방울이 뾰족한 잎을 때리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시기에 비가?”

    당황한 조셉이 허둥지둥 말에서 내려 풀숲으로 몸을 숨겼다. 일행은 조셉을 따라 그나마 비를 피할 만한 곳을 찾아 겨우 몸을 가렸다.

    이렇게 추운데 눈이 아니라 비가 오다니. 아리아드네는 방한 로브로 몸을 덮은 채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쏟아진 비로 체온이 떨어져 으슬으슬 몸이 추웠다. 아리아드네는 양팔로 제 몸을 감쌌다.

    ‘설마 비 좀 맞았다고 죽진 않겠지.’

    ―가지거라. 그게 있으면 물에 빠져도 한 번은 살 수 있겠지.

    문득 렉사가 주었던 구슬이 떠올랐다. 아리아드네는 품을 뒤져 투명한 구슬을 꺼냈다. 구슬 안에는 소용돌이 모양으로 굳은 액체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잘 떠났으려나.’

    아리아드네는 다시 구슬을 가슴에 품고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도 비가 내릴까. 떠나는 길이 불편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구름은 끝없이 비를 쏟아 냈다.

    * * *

    카이엔은 렉사가 남긴 검푸른 결정에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그것은 죽은 루안의 입 안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혹시나 그것이 어떤 불가사의한 일을 일으킬까 지켜보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저것이 정말 리카서스의 성물 무렉스의 호른이었나?’

    카이엔은 이 모든 것을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다음이라 더 그랬다.

    ‘왕후가 겨우 어린아이 모습을 한 저것을 어쩌지 못해 반정을 일으켰단 말인가.’

    카이엔은 늘 태산처럼 느껴졌던 칼이 우스워졌다. 키득키득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크크큭, 크흑…….”

    칼을 비웃은 대가는 혹독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다. 쿨럭, 목으로 피가 한 움큼 넘어왔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뼈가 찢어진 속을 헤집는 것 같았다.

    카이엔은 조금이라도 통증을 덜어 보려 가슴께를 지그시 눌렀다. 손가락 끝에 딱딱한 물체가 닿았다. 그는 더듬거리는 손으로 그 물체를 끄집어냈다.

    한 뼘보다 조금 긴 무언가의 뼈, 케이루스의 성물인 별의 그릇이었다.

    ―너, 제법 이상한 힘을 쓰는구나.

    ‘무렉스의 호른이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이것 때문일까?’

    카이엔은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필사적으로 쫓았던 그 빛을 떠올렸다.

    ‘하늘이 나를 돕는군.’

    그는 입가에 흐르는 붉은 피를 닦으며 죽은 루안에게 다가갔다. 카이엔이 시종을 향해 눈짓하자 그가 루안의 등에 박힌 칼을 뽑았다.

    그것을 지켜보던 카이엔이 원통형 모양의 목함을 꺼냈다. 목함을 거꾸로 뒤집자 그 속에 든 모래가 루안의 몸 위로 쏟아졌다.

    모래 속에 파묻힌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루안의 몸 위를 기었다. 목함의 모래 속에 있었던 것은 손가락 두 개만 한 크기의 붉은 거머리였다.

    거머리의 머리 쪽에는 붉은 실처럼 보이는 것이 어지럽게 늘어져 있었다. 체모라고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잔털이 전부이면서 머리 쪽에만 유독 길게 털이 자라는 것이 꼭 인간의 머리카락 같았다.

    붉은 거머리는 루안의 몸 위를 천천히 기다가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팍을 물어뜯었다. 끔찍한 광경에 시종은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저 붉은 거머리는 서대륙의 마물로 ‘사막 거머리’라고도 불렸다. 서대륙의 마물인 만큼 페렌트에는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

    사막 거머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심장. 사막 거머리는 심장을 파먹기 위해 몸에 구멍을 내고, 심장을 해치운 다음에는 반대쪽으로 기어 나온다.

    사막 거머리가 들어간 구멍은 작고 깨끗한 데 반해 그것이 나온 구멍은 마치 뜯겨 나간 것처럼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원하는 것을 한껏 먹은 사막 거머리가 꾸물거리며 루안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처음의 네 배만 한 크기로 불어난 사막 거머리는 느리게 움직이다 이윽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카이엔은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난 루안의 몸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사막 거머리가 만들어 낸 상처는 유진 그자가 사용하는 풀멘의 흔적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흡사했다.

    엘바에서 유진이 어떻게 활약했는지 낱낱이 전해 들은 터라 정면 승부는 처음부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렵지 않을 거라 여겼던 회유도 지지부진했다.

    그자를 적으로 돌리고 싶진 않았다. 피할 수도, 맞설 수도 없으니 덫을 만드는 수밖에. 좀 더 운신의 폭이 좁아져야 제 제안을 받아들일 테지.

    사막 거머리는 식사를 하고 나면 소화가 끝날 때까지 잠을 자는 습성이 있었다. 카이엔은 잠이 든 사막 거머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엘바에서 유진이 마물의 사체에 남긴 풀멘의 흔적을 보고받았을 때부터 써먹을 데가 있을 줄은 알았다만 그 시기가 이렇게 이를 줄이야.

    카이엔은 배불리 먹고 늘어진 사막 거머리의 몸 위로 발을 올렸다.

    ‘잘해 주었다. 하지만 네 쓸모도 이것으로 끝이다.’

    카이엔의 발에 짓이겨진 사막 거머리는 본디 모양을 알 수 없게 뭉개졌다.

    “흐, 흐윽.”

    울음과 구역질이 섞인 소리로 시종이 제 존재를 알렸다. 카이엔은 천천히 시종에게로 다가갔다. 시종은 루안의 몸에서 빼낸 칼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두 손에 꼭 쥐고는 달달 떨었다.

    퍼억, 카이엔이 시종의 손목을 거세게 발로 찼다. 손목에 들린 칼이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카이엔은 몸을 굽혀 바닥에 떨어진 칼을 줍고는 시종의 가슴팍을 날로 쿡쿡 찔렀다.

    “네 역할은 여기까지다.”

    그렇게 말한 카이엔이 받으라는 듯 쥐고 있던 칼을 건넸다. 그 의미를 모를 수가 없었다. 설마설마하던 일이 벌어지자 시종은 카이엔의 다리를 붙잡으며 매달렸다.

    “……2왕자 전하만 죽이면 저, 저희 가족은 살려 주신다고…….”

    조금 전 사막 거머리를 짓밟던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얼굴을 한 카이엔이 시종을 내려다보았다. 시종에게 잡힌 발을 떨쳐 낸 카이엔이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에 끝까지 2왕자를 지키려던 누구 하나쯤은 있어야 좀 더 그럴듯하지.”

    “제, 제…… 발 목숨만은…….”

    “왕후가 제 아들을 지키지 못한 수하들을 곱게 내버려 둘 줄 알았나?”

    그 말에 시종의 낯빛이 창백하게 변했다. 어떻게 해도 자신은 살아남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만 여기서 죽으면 그 공을 인정받아 네 가족들은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텐데. 네 목숨이 네 가족들의 남은 인생보다 더 가치로운가?”

    시종은 작위만 간신히 남은 몰락 귀족의 장남이었다. 아무리 일해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이 지긋지긋했다.

    처음 카이엔의 손을 잡은 건 돈 때문이었다. 청석궁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것들을 알려 주는 것뿐인데 제법 두둑한 돈을 받았다.

    남자는 그 돈으로 가족들을 부양했다. 버터를 가득 넣은 흰 빵과 갓 짠 우유, 몸에 딱 맞는 새 옷, 비가 새지 않는 집.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하지만 카이엔은 점점 더 은밀한 정보를 원했고, 그럴수록 남자가 받는 돈과 죄책감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몇 번이나 더는 못하겠다고 빌고 또 빌었다.

    ―너 정도 되는 사람을 또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지. 발을 빼고 싶나?

    ―그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네 입을 어떻게 믿지?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그보다 훨씬 쉽고 깔끔한 방법이 있지.

    ―…….

    ―죽으면 되잖나. 네 뜻만 있으면 얼마든지 끝낼 수 있는데 왜 내게 매달리는지 나는 도통 모르겠군.

    그가 빠진 것이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이었음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세작 노릇을 그만 끝내고 싶다고 했지? 이 일만 잘해 주면 더는 네게 그런 일을 시키지 않겠다.

    남자는 직감했다. 카이엔이 시키려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싫은가? 마지막으로 이 일만 끝내면 평생 일하지 않아도 네 가족이 풍족하게 살 수 있는 돈을 주겠다.

    ―……하겠습니다.

    ―2왕자의 심장에 칼을 꽂아라.

    ―그,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발, 그것만 아니라면 무엇이라도 할 테니…….

    ―2왕자의 심장에 칼을 꽂지 못하면 심장에 칼이 꽂히는 건 네 가족들이 되겠지.

    남자는 덜덜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카이엔이 내미는 손을 잡은 것부터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저희 가족은 틀, 림없이 살려……주시는 거지요?”

    “걱정 마라. 내가 필요한 건 네 목숨이지 네 가족의 목숨이 아니니까.”

    남자는 마침내 칼을 받아 들었다. 모두가 죽느냐, 가족이라도 사느냐. 처음부터 남자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남자가 쓰러지기를 기다린 카이엔은 목함의 반대쪽 입구를 열어 또 한 마리의 사막 거머리를 꺼냈다. 마물이라 부르기에도 우스운 놈이지만 지금 그에겐 억만금을 주고도 못 살 귀물이었다.

    시종의 심장을 파먹고 잠이 든 사막 거머리를 처리한 카이엔이 청석궁을 나섰다. 궁을 봉쇄하며 지키고 있던 제프리가 고개를 숙였다.

    “모두 끝났다. 청석궁에서 2왕자 루안이 이계의 방문자로부터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그자의 목적은 루안이 가진 리카서스의 성물이었던 듯하다. 루안의 시종이 이를 막으려다 함께 사망했다. 루안과 그 시종의 사체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흔적은 이계의 방문자가 엘바에서 처리한 마물에 남은 흔적과 동일하다.”

    카이엔은 제프리가 처리해야 할 시나리오를 막힘없이 읊었다. 울컥, 속에서 다시 피가 치밀어 올랐다. 입가를 가린 카이엔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렀다.

    “전하, 상처는…….”

    카이엔은 손을 들어 자신을 부축하려는 제프리를 막았다.

    “나 또한 같은 시각 왕궁에서 정체 모를 괴한에게 피습당했으나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카이엔은 제프리가 받쳐 드는 흰 천으로 입을 막았다. 피와 살점이 섞인 덩어리들이 떨어졌다.

    “저쪽은?”

    카이엔은 가슴의 통증으로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하며 물었다.

    “뜻하신 바를 이루셨습니다, 제주님.”

    제프리가 넙죽 엎드렸다. 양팔과 양 무릎, 머리가 모두 바닥에 닿았다. 이런 예를 받을 수 있는 건 페렌트에서 오직 한 명뿐이었다.

    카이엔은 왕에게 취해야 할 예를 올리는 제 수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평생 그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던 어머니였지만 마지막만큼은 그래도 부모의 도리를 한 모양이었다.

    카이엔 뒤로 보이는 왕궁의 하늘에는 구름조차 없이 깨끗했다. 새파란 하늘에는 아무런 기도 나부끼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시간을 오래 끌지 않아 다행이군.”

    카이엔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서둘러서는 안 된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케이루스를 차지한 것은 시작일 뿐, 절대 끝이 아니었다.

    “하나씩 가져와야지.”

    제 것이어야 마땅한 권력과 자리, 그리고…….

    “아리아드네, 그대를 되찾을 날도 머지않았어.”

    그녀까지도. 카이엔이 지금 내딛는 걸음은 그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한 한 걸음이었다.

    신발 밑창에 진득하게 들러붙은 사막 거머리의 살점과 피가 카이엔이 걷는 걸음마다 흔적을 남겼다. 그가 지나간 길은 피로 물들어 붉게 변했다.

    카이엔이 떠난 청석궁에는 2왕자 루안과 시종의 처참한 사체만이 남았다. 서느런 바람이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리카서스의 주인을 선택한다는 리카서스의 성물 무렉스의 호른은 2왕자 루안을 선택한 것을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페렌트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쟁 중 하나인 케이루스-메르디에스 내전이 일어난 원인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프레모 대륙 유일의 거부라 불릴 정도로 막대한 부를 쌓은 메르디에스가 금력(金力)을 앞세운 것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고, 케이루스의 지나친 견제가 자초한 것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2왕자 루안의 죽음이 케이루스-메르디에스 내전을 알리는 효시가 된 것만은 확실하다.

    케이루스의 장자 카이엔과 메르디에스의 독녀 아리아드네의 파혼으로 시작된 갈등은 2왕자 루안의 죽음으로 표면화되기에 이른다.

    케이루스 측에서 2왕자 루안을 살해한 범인으로 이계의 방문자 유진을 지목한 것이 그 원인이었다.

    당시 이계의 방문자 유진은 메르디에스 공녀 아리아드네와 동행하였기에, 메르디에스에서는 케이루스 측에서 2왕자 루안을 살해한 범인으로 유진을 지목한 것이 아리아드네를 흠집 내기 위한 것이 아니냐며 반발했다.

    양 가는 이후 첨예하게 대립하다 그해 겨울, ‘유월의 폭설’을 계기로 내전을 선포한다.

    <중략>

    케이루스-메르디에스 내전과 관련된 야사(野史)에서 뭇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것은 단연 케이루스의 성물 ‘별의 그릇’이 내린 예언들일 것이다.

    2왕자 루안이 받은 예언은 ‘머지않아 진정한 끝이 오리니 네 죽음이 그 시작을 알리리라.’라고 알려져 있다.

    이 예언에 대한 해석 또한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대표적인 것은 케이루스-메르디에스 내전이 2왕자 루안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해석이다.

    -발트 저, 페렌트 전쟁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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