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빠트린 것이 없나 잘 생각하래도.”
렉사가 지나치게 단출한 루안의 짐꾸러미를 바라보며 채근했다. 루안은 렉사의 지적에 짐꾸러미를 뒤적이더니 이내 고개를 들었다.
“뭐가…… 더 필요하려나?”
“귀중품이나 뭐 그런 돈이 될 만한 건 하나라도 더 챙겨야지. 인간이란 돈이 없으면 하루도 못 사는 족속이 아니더냐.”
핀잔을 주는 듯한 어조에 머쓱해진 루안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지만 난 돈은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데…….”
돈이 필요 없다니. 인간이 아닌 렉사조차도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말인지 알았다.
“네가 이제까지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누린 것들을 유지하려면, 아니 그 반의반이라도 흉내 내려면 얼마가 드는지 알긴 하느냐?”
답답해진 렉사가 뾰족한 말투로 루안을 다그쳤다.
“렉사는 알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렇게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기껏 잘난 척해 놓고 모른다고 하기에는 면이 서질 않았다.
순진한 눈동자를 끔벅이며 제 대답만 기다리는 꼴을 보니 더 그랬다. 렉사는 팩 고개를 돌리며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아무튼 챙길 수 있는 만큼은 챙겨야지.”
흐음, 고민스러운 듯 한숨을 내쉰 루안이 제 방 안을 뒤적이며 짐꾸러미를 바라보았다.
“가벼운 외출처럼 보이려면 짐이 너무 많아도 안 될 것 같은데…….”
왕궁만 빠져나가면 메르디에스 상단주인 버넷 부인 쪽에서 보낸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했다. 하지만 평소 청석궁을 나서는 일도 드물었던 루안이었다. 왕궁을 빠져나가는 동안 사람들의 시선을 온전히 피하기란 불가능했다.
청석궁의 사용인은 모두 물려 놓았다지만, 루안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왕궁에는 수백의 눈이 있었다. 보란 듯이 한 짐 꾸려서는 사람들의 주목을 피하지 못할 것 같았다.
적당한 것을 찾지 못한 루안이 새끼손가락만 한 무렉스에게로 다가왔다.
“버넷 부인께 십만 골드 정도를 미리 보냈는데 이걸로는 부족할까?”
십만 골드? 렉사의 새끼손톱 반만 한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렉사가 인간사에 아무리 무지하다 해도 그 돈이 어마어마한 돈이라는 정도는 알았다. 아니, 그것보다 저 미련퉁이가 돈을 빼돌릴 생각을 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내 선에서 처분할 수 있는 재산은 그 정도가 한계라서 더는 어려운데…….”
루안이 말끝을 흐렸다. 루안 생각에도 렉사의 걱정은 타당했다. 급하게 떠나느라 더 큰돈을 마련하지 못한 것이 루안 또한 마음에 걸렸다.
기실 십만 골드면 둘이서 평생을 도피한다 해도 부족하지 않을 자금이었다. 하지만 렉사나 루안이나 경제 감각이 없기는 매한가지라 그 돈이 어느 정도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부족해도 좀 참아 줘.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내가 어떻게든 더 구해 볼게. 렉사가 불편하지 않도록.”
그렇게 말하는 다정한 목소리는 여느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렉사는 변함없는 루안의 애정에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바다를 다스리는 위대한 신 테티스의 권속이니라. 인간의 물질 따위에 기대지 않아도 내 능력으로 내 한 몸 건사하는 것은 일도 아니야.”
“응, 알아.”
렉사를 품에 숨긴 루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럼 갈까?”
루안의 품에 몸을 숨긴 렉사는 그가 제 모습을 보지 못할 것을 알고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마치 그런 렉사의 모습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루안이 마지막으로 무렉스의 호른을 챙겨 짐꾸러미에 담았다.
―무렉스, 네게도 집이 필요하겠지. 이것을 네 집으로 삼아라.
그렇게 말하며 이것을 렉사에게 주었던 존재가 있었다.
밤바다의 파도처럼 너울거리는 검은 머리카락, 심해처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검푸른 눈. 그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서러워지는 누군가가.
신의 일부로 태어난 권속에게 망각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잊을 수 없다는 것은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제 몸과 영혼을 만들어 준 존재가 자신을 이곳에 남겨 두고 떠난 그날의 슬픔과 괴로움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테티스가 이곳을 떠나고도, 제가 기댈 곳은 오직 테티스가 남겨 준 호른뿐이었다.
낮이고 밤이고 그곳에서 잠들었다. 잠들 때마다 차라리 깨어나지 말았으면 매일 같이 그런 생각을 했다.
“렉사?”
심해에 비친 한 줄기 빛처럼 따스한 목소리가 자신을 불렀다. 루안은 무슨 권능을 지녔기에 보이지도 않는 제 기분을 알아차리는 걸까.
“무엇을 하느냐. 어서 가지 않고.”
“응, 내가 나오랄 때까지 절대 나오면 안 돼.”
“그래.”
“그럼 가자.”
하지만 슬픔 속에서도 행복은 피어난다. 잊을 수 없는 그날의 기억 위로 루안과의 추억이 차곡차곡 쌓였다.
한 달 중 하루는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보름 중 하루, 열흘 중 하루, 닷새 중 하루. 그렇게 웃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이제는 슬픔과 같은 크기의 행복이 렉사 안에 자리 잡았다.
렉사는 일정하게 흔들리는 루안의 품에서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 바닷물이 담긴 푸른 구체가 렉사의 몸을 감쌌다.
찰랑이는 물소리, 염분이 섞인 바닷물의 비릿한 향기, 그리고 미세하게 느껴지는 루안의 체향까지도. 이 모든 것이 제 몸만큼이나 익숙했다.
안온한 평화. 수천 년을 살아왔지만 렉사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알지 못했다.
영원토록 이어질 것 같았던 평화가 이윽고 뚝, 멈추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공기에 렉사는 천천히 감은 눈을 떴다.
“내 아우께선 어딜 가시려나.”
검은 기름처럼 불쾌하고 음습한 목소리였다.
“……형님.”
좀처럼 동요하는 법이 없는 루안의 목소리에 떨림이 섞였다. 렉사가 제 몸을 감싸고 있던 푸른 구체를 거두었다.
그러자 다시 거짓말처럼 제 상태를 눈치챈 루안이 렉사가 있는 가슴께를 꾹 눌러 왔다. 어린 계약자의 만류에 렉사는 제 기운을 눌렀다.
“형님께서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짐짓 태연한 목소리를 꾸며 낸 루안이 카이엔에게 물었다. 왕궁은커녕 청석궁을 벗어나기도 전이었다.
‘제발 별일이 아니기를.’
루안은 떨리는 손을 뒤로 감추었다.
“내가 못 올 데를 왔는가?”
카이엔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물었다. 공식 석상에서조차 데면데면한 형제 사이였다. 서로의 거처를 드나드는 일 따위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루안은 카이엔이 불편했다. 미안한 마음은 얼마간 있었으나 그렇다고 가까이하고 싶진 않았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욕망으로 가득한 카이엔의 눈동자를 볼 때면 익숙한 다른 얼굴이 떠오르곤 했다. 언제나 어렵고 불편했던 아버지의 얼굴이.
“그것은 아니지만…….”
“아니라니 다행이군.”
마치 집구경이라도 하는 것 같은 가벼운 걸음으로 카이엔은 청석궁을 휘젓고 다녔다. 뒤로 감춘 루안의 손에서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저벅저벅, 적막함을 깨트리는 발소리가 루안과 점점 가까워졌다.
“빈틈없는 왕후께서도 청석궁만큼은 제 수족으로 다 채웠다 그리 믿으시지.”
그게 무슨……. 혼란스러운 루안의 눈앞에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왕궁에서 케이루스의 눈과 손이 닿지 않은 곳은 어디에도 없는데 말이야.”
카이엔의 등 뒤에 선 것은 루안의 시종이었다. 그는 루안이 제법 가까이 두고 곁을 내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오늘은 모두 궁을 비우라 일렀을 텐데. 자네는 어찌하여 궁에 남았나?”
루안이 아니라 카이엔 뒤에 선 시종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루안은 참담한 심정에 눈을 감았다.
“아우님이야말로 대체 어디를 가기에 궁까지 비웠나?”
루안이 궁의 사용인들에게 준 휴가는 이틀. 가벼운 외출로 둘러댈 수는 없었다.
“작위 승계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 전에 리카서스에 좀 다녀올까 합니다.”
단출한 루안의 짐을 힐끗 본 카이엔이 물었다.
“왕후께도 말씀드리지 않고 말인가? 하긴, 말씀드렸을 리가 없지. 왕후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왕궁을 떠나려던 것이 아닌가.”
가을 사냥을 떠난 칼이 왕궁으로 돌아오는 것은 이틀 뒤. 계획한 대로만 된다면 루안이 완전히 왕도를 떠난 다음이었다.
카이엔이 아버지를 언급하자 루안은 목에 가시라도 걸린 것처럼 불편해졌다. 칼의 행동이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칼은 제 아버지였다. 루안은 차마 아버지를 외면하지 못했다.
그러니 자신은 아버지의 악행을 방관한 공범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죄책감이 루안을 짓눌렀다.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렉사와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전하께 가장 중요한 건 그것 아닌가요?
―부디 포기하지 말아 주세요.
제 육신을 만들어 준 아버지를 버리고서라도, 제가 지은 죄를 모두 외면하고서라도, 지키고 싶은 것이 있었다.
“제가 다스릴 땅입니다. 그곳을 가는데 어찌하여 아버지의 허락이 필요합니까?”
루안의 대답에 카이엔은 비식거리며 낮은 소리로 웃었다.
“그렇지. 내 귀한 아우님은 곧 리카서스 공작이 되실 몸이었지.”
비아냥거리는 카이엔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마치 악귀에라도 씐 듯한 얼굴이었다. 루안은 불길한 예감에 저도 모르게 주춤하며 뒷걸음질 쳤다.
“물론 여기서 살아남는다면 말이지만.”
그 말과 동시에 내내 카이엔의 뒤에 서 있던 시종이 루안을 향해 사납게 짓쳐들어왔다. 시종의 손에 들린 칼끝이 루안의 심장을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파앙! 하는 소리가 칼끝에서 터져 나왔다. 칼이 살을 가르고 뼈를 부수었다면 결코 날 리 없는 소리였다. 시종의 손에 들린 칼은 공중에 떠오른 검푸른 물의 장막에 막혀 있었다.
그리고 그 끝은 사나운 물길에 산산이 터져 나간 채였다. 시종은 별안간 나타난 물의 장막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웬 여자아이 하나가 물의 장막 너머 루안을 지키듯이 서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푸른빛이 도는 검은 눈동자, 도자기처럼 매끄러운 피부. 마치 이국의 인형처럼 깜찍한 생김새였다.
하지만 여자아이의 귀여운 외모와는 별개로 마주하는 것만으로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의 껍데기를 쓰고 있지만 저런 것이 사람일 리가 없었다. 마주한 순간 느낀 이질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네댓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아이의 양손에 맺힌 검푸른 물이 소용돌이 모양으로 거세게 휘돌고 있었다. 무기질의 싸늘한 눈동자가 공포에 질려 주춤거리는 시종에게 닿았다.
“죽어라.”
여자아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끝에서 뻗어 나간 검푸른 소용돌이가 시종의 가슴팍을 강하게 때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시종을 덮쳤다. 둔탁한 망치로 내려치는 것도 같고, 날카로운 송곳이 온몸을 찌르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든 건 내부의 장기들이 갈가리 찢어지는 듯한 아픔이었다. 울컥 피를 토한 시종이 그 자리에서 쓰러져 한 차례 부르르 떨더니 이윽고 팔다리가 힘없이 늘어졌다.
“쓸모없는 것 같으니…….”
카이엔이 쓰러진 시종을 보며 으드득 이를 갈았다. 오늘 반드시 루안을 죽여야 했다.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했다. 왕후가 왕궁을 비운 때를 맞춰 루안이 청석궁 사용인을 모두 물렸다. 마치 자신을 죽여 달라는 것처럼.
그런데 어째서 일이 이렇게 틀어졌는가. 이 모든 것은 그의 앞을 막아선 ‘저것’ 때문이었다. 대체 저것이 무엇이기에.
카이엔의 눈동자가 분노로 타올랐다. 담담히 그 눈동자를 마주한 그것이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 계약자를 해하려 한 것이 너냐?”
계약자? 그렇다면 저것의 정체는…….
“……무렉스의 호른?”
카이엔은 어렵지 않게 저것의 정체를 짐작했다. 그러고 보니 마치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둡고 깊은 바다처럼 칙칙한 모양새가 아닌가.
“하, 리카서스의 주인을 선택한다는 성물이 이것이었나?”
조금 전까지 분노로 떨던 카이엔은 실성이라도 한 것처럼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상상이나 했겠는가. 리카서스의 성물이 어린 계집일 줄이야.
“내가 무엇이건 너 따위가 알아 무엇하겠느냐. 넌 이 자리에서 죽을 텐데.”
렉사의 머리카락이 바람 한 점 없는 공간에서 가닥가닥 뻗쳐올랐다. 렉사에게서 새어 나온 검은 연기가 카이엔의 몸에 채찍처럼 감겨 그를 묶어 두었다.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카이엔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입을 벌렸다. 벌어진 입으로 물이 끝도 없이 들어왔다.
입만이 아니었다. 온몸에 난 구멍으로 물이 들어찼다. 이대로 죽는다면 카이엔의 사인은 익사였다. 그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렸다.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왜! 왜 내가 여기서 죽어야 해!’
하지만 아무리 버둥거려도 숨을 쉴 수 없는 시간이 길어지자 의식이 점차 멀어졌다. 그는 가물가물 멀어지는 의식의 끝에서 자그마한 빛을 발견했다.
카이엔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기에 다가가면 살 수 있다. 그는 허우적거리며 빛을 잡을 듯이 움켜쥐었다. 섬광이 번쩍 빛나더니 카이엔을 덮쳤다.
“허억…… 헉, 헉.”
카이엔은 쿨럭대며 온몸 가득 들어찬 물을 토해 냈다.
“너, 제법 이상한 힘을 쓰는구나.”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여자아이가 엄지와 검지를 부딪쳐 딱 하는 소리를 냈다. 수십 개의 작은 물회오리가 공중에 나타나 카이엔의 위로 쏟아졌다. 수십 개의 주먹이 마구잡이로 난타하는 듯한 고통이었다.
카이엔은 뼈가 부러지고, 피부가 찢겨 나갔다. 하지만 마치 내장을 직접 때리는 듯한 고통이 그 모든 것을 압도했다. 카이엔의 벌어진 입에서는 끝없이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카이엔은 숨이 멎은 듯 늘어졌다가도 이내 꿈틀거리며 살아났다.
“같잖은 힘을 쓴다만 네 생명이 무한하진 않겠지.”
렉사는 지겨운 얼굴로 양팔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화살처럼 끝이 뾰족한 물줄기가 카이엔을 향해 날아들었다. 끔찍한 고통을 예상하며 카이엔은 질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진작 닥쳤어야 할 고통은 좀처럼 소식이 없었다. 카이엔은 움찔거리며 감은 눈을 떴다. 뾰족한 물 화살이 카이엔의 눈동자를 찌르려는 순간이었다. 아니, 찌르려던 순간에 멈춰 있었다.
수십 개의 물 화살이 카이엔을 향해 날아들던 모습 그대로 멈추어 있었다. 카이엔은 여자아이의 농간인가 하여 고개를 들었다. 여자아이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카이엔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윽고 이를 앙다문 렉사가 양팔을 크게 휘둘렀다. 공중에서 멈추었던 물 화살이 카이엔을 향해 날아들 듯이 흔들렸다가 이내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여자아이는 지치지도 않고 연거푸 물을 불러 모았으나, 카이엔을 덮칠 듯이 밀려들었던 물은 가까워지기도 전에 힘을 잃고 사라졌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저것이 점점 힘이 빠지는 모양이었다. 불러들이는 물의 양도, 기세도 점점 줄어들었다.
여자아이의 모습이 그림이 지워지는 것처럼 흐릿해졌다. 카이엔은 무렉스의 호른이 처음 봤을 때보다 좀 어려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것은 제 존재가 지워지더라도 카이엔을 죽이겠다는 듯 두 손을 벌렸다. 고작해야 한 컵이나 될까 싶은 작은 물방울이 두 손에 맺혔다.
“하지 마. 그만해, 렉사. 제발…….”
어느새 루안을 지키던 물의 장막마저 사라졌다. 물의 장막에서 벗어난 루안이 뒤에서 렉사를 끌어안았다.
루안은 버릇처럼 렉사를 쓰다듬으려다 멈칫했다. 그새 렉사는 한 뼘도 넘게 줄어든 상태였다. 가슴이 아파서 렉사의 몸에 닿지도 못한 손은 허공으로 툭 떨어졌다.
“……지금도 이렇게 작아졌는데, 더 작아지면 어쩌려고 그래.”
렉사의 생명을 깎아서 사는 짓 따윈 조금도 하고 싶지 않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푸른 눈동자가 루안을 보며 물었다.
“알고 있었어?”
렉사가 죽을힘을 다해 제게 숨기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는 척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루안은 떨리는 손으로 렉사의 얼굴을 감쌌다. 물처럼 서늘한 감촉이 닿아 왔다.
“내가 어떻게 몰라. 네가 줄어들 때마다 내 심장을 떼어 내는 것 같았어.”
렉사를 만들었다는 그 존재처럼 제 몸을 떼어 렉사에게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죽을 이 몸뚱이도 의미가 없진 않을 텐데.
루안은 점점 흐릿해지는 렉사를 부둥켜안으며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제발, 렉사, 제발……. 나를 떠나지 마. 나보다 먼저 사라지지 마.”
이제야 드러낸 제 진심 앞에 루안은 엎드려 통곡했다.
루안이 가장 무서웠던 것은 아버지가 지은 죄의 무게도, 죽을 제 운명도, 제가 죽고 혼자 남을 렉사도 아니었다. 렉사마저 사라진 세상에 홀로 남는 것이었다.
“렉사, 내 세계는 너야. 네가 없으면 나는, 나는…….”
렉사가 사라진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늘 그림자처럼 저를 따라다니던 제 죽음이 손에 박힌 가시라면, 렉사의 죽음은 머리에 박힌 대못이었다. 제 죽음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렉사만 살 수 있다면.
렉사만 살아 있다면 루안이 죽어도 그의 세계는 끝이 아니었다. 하지만 렉사가 죽는다면 루안이 살아도 그의 세계는 끝이었다.
“그러니까 사라지지 마, 제발…….”
불멸의 영혼을 지닌 인간은 죽어도 끝이 아니다. 하지만 신의 권속인 렉사에게 죽음이란 소멸을 의미했다.
루안은 그것이 못 견디게 서러웠다. 둘 중 하나가 소멸해야 한다면 그것은 자기여야 했다. 제 영혼을 깎아 렉사의 영혼을 채울 수 있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렇게 할 텐데.
“울지 마라, 루안.”
평소의 장난기와 투정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이어 서늘한 물줄기가 루안의 얼굴을 씻어 내렸다. 아무렇지 않게 내어 주는 저 다정함에 제가 너무 기댄 탓일까.
루안이 렉사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물에 닿으면 이 손이 녹아 사라질 것만 같았다.
렉사는 오래된 시간 속에 슬픔마저 깎여 나간 것처럼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사라지는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야. 그것은 세계의 법칙이다.”
렉사가 살아온 시간은 너무 길었다. 사는 것이 고통이었을 만큼.
“내 너를 만났으니 이대로 사라져도 조금도 억울하지 않다.”
하지만 그 시간들을 견뎌 냈기에 루안을 만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렉사는 충분했다.
렉사는 자신에게 매달리는 루안을 떼어 내고 카이엔을 향해 걸었다. 자박, 힘껏 발을 뻗어도 움직인 거리는 겨우 한 뼘에 불과했다.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렉사는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는 카이엔과 마주 섰다. 무슨 수를 쓴 건지 알 수 없지만, 저쪽도 한계였다. 저자를 죽이지 않으면 루안은 편히 살 수 없다.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 렉사는 양손을 들어 물을 불러들였다. 허공에 물로 만든 수백 개의 검푸른 구슬이 둥둥 떠올랐다. 온몸이 뚫리고도 살 수 있을까.
“루안, 네가 살 수 있는 길을 터주는 것. 그것이 내 마지막 할 일이다.”
물이 선명한 색을 띨수록 렉사는 점점 흐릿해졌다. 렉사의 온몸에서 검은 연기가 가닥가닥 흘러나왔다. 루안이 소리를 지르며 렉사를 만류하려던 그때였다.
“아니, 그러지―”
루안의 말은 끝을 맺지 못한 채 흩어졌다.
그리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누군가의 살을 뚫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렉사의 구슬은 여전히 허공에서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었다. 렉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렉, 사.”
루안의 가슴팍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렉사를 말리려는 듯 뻗은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이윽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루안의 몸이 무너졌다. 쓰러진 루안의 등에는 단도가 깊게 박혀 있었다.
그 남자였다. 조금 전, 렉사의 공격을 받고 쓰러졌던 시종. 그가 루안을 찌른 단도의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죄, 죄송…… 전하, 죄송합…… 니다. 저도, 어쩔…… 수, 가…….”
시종은 덜덜 떨면서 단도에서 손을 놓고는 엉거주춤 물러났다.
렉사의 주위를 돌던 구슬들이 그대로 쏟아졌다. 제가 부른 물에 흠뻑 젖은 렉사가 천천히 루안에게로 다가갔다. 서늘한 손이 루안의 목을 짚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루안의 맥은 희미했다.
“미안하다. 결국 나 때문에 네가 죽는구나.”
그렇게 말하는 렉사의 얼굴은 온통 물에 젖어 있었다. 그것이 꼭 렉사의 눈물처럼 느껴졌다. 루안은 죽어 가면서도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아, 니…… 너…… 때문에, 살……았어…….”
이 지경이 되어서도 제 계약자는 조금도 남을 원망할 줄 몰랐다.
‘바보 같으니라고.’
루안이 렉사의 손을 잡으려는 듯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렉사는 제 손을 내줄 수가 없었다. 손목 아래 손이 있어야 할 자리가 투명했다.
허우적거리던 손이 간신히 렉사의 팔뚝을 잡았다. 루안이 렉사를 보며 힘겹게 입을 달싹였다.
‘이것이 이 아이가 하는 마지막 말이 되리라.’
렉사는 직감했다.
“……렉, 사……. 어, 서 도망…….”
루안은 마지막 말조차 다 하지 못했다. 힘을 잃은 머리가 렉사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하지만 루안의 머리는 렉사의 무릎에 닿지 못했다. 희미한 잔상만 남은 렉사의 무릎은 어느새 투명해진 상태였다.
렉사는 제가 죽이지 못한 것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루안을 찌른 시종이 렉사의 차가운 시선에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저었다.
“나, 나도…… 어쩔 수가, 어쩔…… 수가…….”
시종에게 무슨 이유가 있건 그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미치도록 저자를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 시종의 손가락 하나도 부러뜨릴 수 없었다.
렉사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카이엔이 신중한 눈으로 자신을 살피고 있었다. 혹시나 마지막 숨긴 힘이 있진 않을까 경계하는 눈이었다.
하지만 렉사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렉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도 머지않았구나, 죽을 날이.”
케이루스의 성물이 저자에게 내린 저주가 무엇인지 렉사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떠한 것이든 제 죽음과 관련된 것일 터.
렉사는 불타는 것처럼 분노하는 카이엔의 눈동자를 보며 말을 골랐다. 욕망이 덕지덕지 들러붙은 자였다. 저런 자들의 말로는 하나같이 뻔했다.
저것이 내내 잊지 못하다가 마침내 그것에 먹혀 스스로 고꾸라질 만한 말을 해 주고 싶었다. 렉사는 눈을 접으며 웃었다. 마치 카이엔의 몰락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저것을 죽이는 건 무엇이 될까. 렉사는 도박을 하기로 했다.
“너, 여자에게 죽는구나.”
쨍하니 굳어 있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아, 맞혔나?’
렉사는 이번에는 진심으로 웃었다.
“너희 그 역겨운 성물들이란 하나같이!”
그자가 입가로 피를 뚝뚝 흘리며 렉사를 향해 다가왔다.
카이엔이 렉사를 향해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렉사의 남은 몸은 이미 투명해져 그자의 칼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만 가를 뿐이었다. 쉭쉭,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난잡하게 울렸다.
저것은 이쯤 하면 됐다. 렉사가 고개를 돌려 죽은 루안을 내려다보았다. 칼에 찔려 붉게 물든 등에 살며시 얼굴을 대었다.
“나약하고, 어리석은, 그리하여 사랑스러운 나의 계약자야.”
렉사의 부름에 루안은 답하지 않았다. 렉사는 대답을 채근하듯 루안의 등에 얼굴을 비볐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흐릿한 형체만 남은 몸은 이젠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했다.
눈앞이 점점 흐려졌다. 눈이 사라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어 세상을 채운 소리마저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호른 속에 몸을 숨겼을 때처럼 웅웅거리는 작은 진동만이 간신히 느껴졌다.
‘렉사.’
렉사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다정하고 따뜻한 목소리가 자신을 불렀다. 제 귀는 이미 먹었으니, 이것은 머리가 기억하는 소리였다.
그분께서 준 이름보다 루안이 불러 주는 그 이름이 더 달콤했다. 그분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아픔보다 그를 두고 가야 하는 슬픔이 더 컸다.
‘권속이 자신을 만든 신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를 만들다니. 나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고 말았구나. 그래서 너를 먼저 보내는 벌을 받나 보다.’
렉사의 검은 머리카락이 공기 중에 녹아들며 천천히 사라졌다.
‘루안, 너는 불멸의 영혼을 지닌 인간이니 다시 태어나 다른 생을 살겠지. 하지만 나는…….’
차마 버리지 못한 마지막 미련이 렉사 주위를 맴돌았다.
‘나는, 다시는 널 만날 수 없겠지.’
렉사의 오른쪽 가슴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검푸른 결정이 반짝 빛을 내며 공중에 떠올랐다. 권속의 심장이었다. 심장이 떨어져 나온 렉사의 몸은 더욱 빠르게 공기 중으로 녹아들었다.
렉사의 몸이 사라진 자리에는 수백 개의 물방울이 생겨났다. 산란하는 빛을 받아 반짝이던 물방울은 이윽고 거품처럼 흩어졌다.
사라진 물방울 사이로 검푸른 결정체가 툭 떨어졌다. 손가락 한 마디나 될 법한 것이 내뿜는 요요한 광채에 카이엔은 홀린 듯이 다가섰다.
렉사의 눈동자처럼 검고 푸른빛을 띤 액체는 형용할 수 없는 광채를 띠고 있었다. 세상에 반짝이는 것은 모두 모아다 녹인 것처럼 아름다운 빛이었다.
하지만 루안의 얼굴 위로 떨어진 결정체는 햇빛을 받은 눈처럼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또르르, 렉사가 남긴 마지막 흔적이 그녀의 마지막 계약자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네가 리카서스의 아이냐?
―네, 루안이라고 합니다. 무렉스시여.
―널 리카서스의 다음 주인으로 삼겠다. 무렉스의 호른은 이제 네 것이다.
그때, 루안의 짐가방에서 석회질의 호른이 굴러떨어졌다. 주인을 잃은 성물은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불어오는 바람에 그대로 흩어졌다.
유난히도 혹독했던 그해의 겨울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