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148)
  • * * *

    청람색 궁은 아리아드네의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불구하고 그 주인처럼 차분한 모습이었다.

    “공녀, 기별도 없이 어쩐 일입니까?”

    사람 좋은 낯을 한 루안이 아리아드네를 반가이 맞았다.

    “전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주위를 물려 주십시오.”

    루안은 이유도 묻지 않고 아리아드네의 요청에 순순히 응했다.

    “렉사를 보러 오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누가 왔다고?”

    물줄기와 함께 새끼손가락만 한 해마가 둥실 공중에 떠올랐다.

    “렉사, 공녀와 방문자님이 널 보러 오셨나 봐.”

    루안은 렉사를 보며 기쁜 듯이 웃었다. 아리아드네는 그 얼굴을 마주한 순간, 솜뭉치를 욱여넣은 것처럼 목이 꽉 메었다. 그녀는 목구멍에 걸린 말을 내던지듯 꺼내 놓았다.

    “전하, 릭센을 떠나십시오.”

    루안은 제 손바닥 위에 렉사를 올려놓고 즐거이 웃던 얼굴 그대로 아리아드네를 보며 물었다.

    “네? 릭센을 떠나라니요?”

    그런 생각 같은 건 해 본 적도 없는 얼굴이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아리아드네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하께서 이곳에 남으셔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공녀, 제 거취는 공녀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날 제가 괜한 말을 했나 봅니다.”

    “……전하께 페렌트의 왕위나 리카서스의 작위가 의미가 있습니까?”

    짙은 남색 눈동자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루안은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말을 할 거라면 그만 돌아가십시오.”

    등을 돌린 루안이 렉사를 품에 안은 채로 응접실을 나서려 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루안이 이곳에서 벗어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진정한 끝? 성물의 예언?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요. 그 끝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끝까지 물고 늘어지자 루안도 더는 걸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해마의 모습을 한 무렉스가 루안의 품에서 벗어나려 바동거렸다.

    “루안, 너 설마 그 예언을…….”

    렉사를 쥐고 있는 루안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렉사가 올려다본 루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렉사는 더는 묻지 않고 루안의 품에서 벗어났다.

    “얼마 남지 않았다고요? 전하의 끝이 언제일지는 아직 아무도 몰라요.”

    여자아이의 모습을 한 렉사가 루안을 지키듯 아리아드네를 막아섰다.

    “메르디에스의 딸아, 그건 네가 참견할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루안을 가리고 선 렉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 끝을 백 년 뒤로 만들면 되잖아요. 수천 년을 이어져 내려온 성물에게 백 년쯤이야 머지않은 시간일지도 모르잖아요.”

    “그만!”

    렉사의 등 뒤로 검푸른 물이 아리아드네를 위협하듯 넘실거렸다.

    “네가 뭘 안다고 떠들어.”

    철이 들기도 전에 죽을 날을 받아 놓은 루안이었다. 무엇을 욕심내기도 전에 포기하는 것이 익숙한 아이였다.

    제가 대체 뭐라고. 렉사는 같잖은 동정심을 앞세워 루안의 여린 속을 할퀴어 대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살고 싶으시잖아요.”

    “그만! 그만하래도!”

    시꺼먼 물이 아리아드네를 덮칠 듯이 높이 치솟았다가 그 자리에 멈추었다. 렉사가 씩씩대며 아리아드네의 등 뒤에 있는 유진을 노려보았다.

    그때, 아리아드네가 여전히 그 자리에 굳은 채로 멈춘 루안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렉사와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분명 그렇게 말했으면서, 왜 살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지. 아리아드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투두둑. 렉사가 공중에 띄웠던 물이 그대로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전하께 가장 중요한 건 그것 아닌가요?”

    렉사는 무엇을 기대하는 사람처럼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루안을 바라보았다.

    “부디 포기하지 말아 주세요.”

    고개 숙인 루안의 얼굴에서 작은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그것을 본 렉사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렉사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가닥가닥 흘러나왔다. 연기는 렉사의 몸을 중심으로 나선형으로 뱅글뱅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검은 소용돌이 중심에 자리한 렉사의 옷자락이 펄럭이며 크게 부풀어 올랐다.

    “내 너를 반드시―”

    털썩 자리에 주저앉은 루안이 렉사를 끌어안았다.

    “렉사, 그만해.”

    축축한 것이 렉사의 어깨와 목 뒤에 닿았다. 렉사를 감싼 검은 연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괜히 힘 빼지 마.”

    여느 때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렉사를 도닥인 루안이 고개를 들었다. 젖은 눈동자는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저는 어떻게 죽을지만 고민했지 죽지 않는 방법 같은 건 생각해 보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죽은 뒤에 혼자 남을 렉사만 걱정했지 렉사를 떠나지 않는 방법이 있다는 건 생각도 못 했어요.”

    렉사 앞에 무릎 꿇은 루안이 작고 앙증맞은 손을 살며시 쥐며 물었다.

    “렉사, 지금처럼 좋은 환경이 아니라도 나와 함께 갈래?”

    마주한 두 쌍의 눈동자는 같은 색에서 뽑아낸 것처럼 똑 닮아 있었다. 렉사는 괜스레 고개를 팩하니 돌리며 면박을 주듯 말했다.

    “물어 뭣 하느냐. 계약은 내게도 유효하다. 계약자를 버리는 일 따윈 하지 않는다.”

    고개를 돌린 렉사의 얼굴이 잘 여문 복숭아처럼 붉었다.

    “루안, 넌 내게 하나뿐인 계약자다.”

    바보처럼 눈만 끔벅이고 있던 루안이 이상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 그럼 숙부님은―”

    “호른을 가진 계약자가 우선이다.”

    하나뿐인 계약자라는 말에 루안이 리카서스 공작 알프레드를 들먹이자 렉사는 아무 말이나 되는대로 덧붙였다. 그것을 들은 루안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호른은 두고 갈랬는데…….”

    ‘저 바보 같은 게.’

    렉사가 흘겨보자 루안이 저만 믿으라는 듯이 싱긋 웃었다.

    “내가 꼭 챙길게.”

    ‘애가 착하긴 착한데…….’

    앞날이 캄캄해 렉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하, 저도 이만 떠나야 해서 전하의 뒤를 보아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위장 신분과 임시 거처는 마련해 두었으니, 릭센을 떠나시려거든 메르디에스 상단주인 신시아 버넷에게 연락하십시오.”

    “아, 그런 게 필요하겠군요.”

    루안은 감탄사를 뱉으며 두 손바닥을 가볍게 부딪쳤다. 신분이니 거처니 그런 것 따윈 생각지도 못한 눈치였다. 렉사가 갑갑하다는 듯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아리아드네가 웃으며 미리 준비해 둔 편지를 건넸다.

    “전하, 부디 무탈하십시오. 행운을 빌겠습니다.”

    “공녀께서도 무사히 귀환하시길 빌겠습니다.”

    편지를 받아 든 루안이 할 말이 남은 것처럼 머뭇거렸다.

    “저, 감사합니다, 공녀. 제게 포기하지 말라고 해 주셔서.”

    루안의 눈동자가 굳은 결심으로 반짝였다.

    “꼭 살아남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홀가분한 얼굴로 싱긋 웃는 루안의 한 손에는 자그마한 손이 꼭 붙들린 채였다. 렉사는 그러거나 말거나 저와는 상관없다는 듯이 딴청이었다.

    “바쁘다면서 어서 가 보거라.”

    “렉사, 만나서 반가웠어.”

    아리아드네가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듯이 렉사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인사를 건넸다. 수천 년을 살아온 존재라 해도 겉모습이 이러니 있지도 않은 여동생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 손에 제 머리를 맡긴 채로 가만히 있던 렉사가 떠나려는 아리아드네를 붙잡았다.

    “잠깐. 네게 선물 하나를 주마.”

    렉사가 손을 휘두르자 반짝이는 물줄기가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물줄기는 소용돌이처럼 휘휘 감기더니 점차 부피를 줄여 엄지와 검지로 만든 원만 한 크기가 되었다.

    렉사가 공중을 휘젓던 손가락을 멈추자 물줄기는 투명한 구슬이 되어 아리아드네의 손 위로 툭 떨어졌다.

    “가지거라. 그게 있으면 물에 빠져도 한 번은 살 수 있겠지.”

    “고마워, 렉사.”

    아리아드네는 렉사가 만들어 준 구슬을 품에 넣고, 서둘러 청석궁을 떠났다. 지체한 시간이 적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 아리아드네는 반쯤 뛰는 것 같은 걸음으로 녹주궁으로 돌아왔다. 이미 떠날 준비를 마친 사람들이 아리아드네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 다 끝났어.”

    훌쩍 마차에 오른 아리아드네가 준비된 옷과 가발로 변장을 마쳤다. 마차 안에는 메르디에스까지 아리아드네 대역을 맡은 시녀와 캐롤린이 함께였다. 캐롤린은 아리아드네가 쓴 갈색 가발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꼼꼼히 고정해 주고는 이윽고 손을 떼었다.

    “리아, 잘 다녀와.”

    이젠 정말 떠날 시간이었다. 아리아드네가 캐롤린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

    “캐롤린,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모두를 부탁해. 아버지도, 백작님도.”

    캐롤린에게 무거운 짐을 얹어 주는 것 같아서 미안했다. 하지만 카이엔이 반 호수를 이용해서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다.

    메르디에스 사냥터에서 리스벨 백작 커티스가 목숨을 잃었던 시기가 채 두 달이 남지 않았다. 아리아드네가 리뮈르로 떠나야 하는 이때, 캐롤린밖에는 믿을 사람이 없었다.

    “응, 잘 지키고 있을게. 걱정 안 해도 돼. 나는 언제나 네 대신인걸.”

    캐롤린이 저럴 때면 아리아드네는 덜컥 불안해지곤 했다. 아리아드네가 캐롤린의 얼굴을 양손으로 단단히 고정한 채로 말했다.

    “아니, 넌 누구 대신도 아니야. 너는 너야. 알지? 내 말.”

    캐롤린은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보랏빛 눈을 곱게 접었다.

    “알아. 너나 다치지 마. 제발 성급하게 굴지 말고.”

    결국에 잔소리만 되돌려받은 아리아드네가 피식 웃으며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나중에 봐.”

    “응. 기다릴게.”

    캐롤린의 그 말을 끝으로 굳게 닫힌 마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마차를 앞뒤로 감싼 행렬이 줄줄이 왕궁을 떠났다. 북적이던 사람들이 떠난 궁은 마치 텅 빈 것처럼 적막했다.

    ‘이제 나도 가 볼까.’

    아리아드네가 팔을 쭉 뻗었다가 늘어뜨리며 궁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밤, 갈색 머리를 한 시녀와 종자 몇이 은밀히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왕도를 빠져나갔다. 북쪽을 가리키는 별을 따라 움직이는 그림자가 어두운 골목길에 길게 늘어졌다.

    * * *

    삼엄한 경계를 자랑하는 페렌트의 왕궁, 그중에서도 가장 경계가 삼엄한 곳을 꼽으라면 단연 왕의 내실이었다.

    왕의 내실은 왕의 가장 사적인 영역인 동시에 가장 정치적인 공간이었다. 왕의 내실에 들어갈 수 있느냐가 권력의 척도로 여겨졌으며, 그곳에서 은밀하게 내려지는 결정이 나라의 향방을 좌우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왕이 최소한의 권력이나마 손에 쥐고 있을 때 이야기였다.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왕에게 내실이란 조금 화려한 방에 지나지 않았다.

    다그마르의 부름을 받은 카이엔은 모처럼 왕의 내실에 들었다. 다그마르는 제 아들을 보는 데도 왕후의 눈치를 보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없는 왕의 내실에서조차 다그마르는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불안하고 초조한 기색이었다. 그에 비해 카이엔은 제 방에 앉은 것처럼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그는 맞은편에 앉은 제 어머니를 무감하게 바라보았다.

    흐릿한 이목구비, 평범하기 짝이 없는 갈색 머리, 기품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자태. 지금 이 모습 그대로 길거리에 떨어져 사람들 사이에 섞여도 아무도 그녀를 주목하지 않을 거다.

    페렌트를 다스리는 왕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희미한 존재감. 카이엔은 제 어머니가 선택받은 사람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었다. 시골의 촌부(村婦)와 눈앞의 다그마르는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머리에 쓴 보관(寶冠)의 무게조차 이기지 못해 이를 떼어 놓기 일쑤였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다그마르의 갈색 머리카락은 힘없이 늘어뜨린 것이 전부였다.

    ‘지방 영주의 셋째 딸 정도로 태어났으면 딱 적당했을 텐데…….’

    카이엔은 눈앞의 다그마르를 그렇게 평가하며 지루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다그마르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메르디에스 공녀가 떠났다지?”

    기껏 사람을 불러 놓고, 내내 눈치만 보다 겨우 꺼낸 말이 고작 저따윈가. 한심할 지경이었다.

    “네.”

    “네 속이 말이 아니겠구나.”

    “…….”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무슨 말이라도 해 보려던 다그마르는 카이엔의 냉랭한 태도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저를 보는 아들의 서늘한 눈과 마주할 때마다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다.

    “미안하구나.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해서.”

    그리고 그 끝은 늘 그렇듯 다그마르의 사과였다.

    “괜찮습니다.”

    마치 칼로 싹둑 베어 내는 것 같은 말투였다. 애초에 당신에겐 기대한 것도 없으니까. 다그마르는 카이엔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 심장이 죄어들었다.

    “더 좋은 짝이 나타날 테니 너무 상심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카이엔을 위로하던 다그마르는 흡, 하는 소리와 함께 뒷말을 삼켰다. 그저 서늘하기만 하던 아들의 눈동자에 명백한 조롱과 분노가 담겼다.

    “더 좋은 짝이라고 하셨습니까? 제게 메르디에스의 딸보다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카이엔…….”

    카이엔의 분노와 마주한 다그마르는 새하얗게 질린 채로 몸을 떨었다. 그리고 카이엔은 그런 다그마르 때문에 더욱 분노했다.

    “왕의 적장자로 태어나 마땅히 누렸어야 하는 것들을!”

    이제껏 그가 겪어야 했던 수모와 고난이 새삼 억울했다.

    “구걸하게 만든 게 누구십니까!”

    눈앞의 저 여자 때문에. 모든 것은 저 여자 때문에.

    “당신이 제게 주었어야 마땅한 제 자리를 찾기 위해 제가 무엇을 해야 했는지 아십니까?”

    세력이 없는 왕자로 남지 않기 위해 아리아드네에게 매달려야 했고, 세력이 없는 왕자라 아리아드네가 제 곁을 떠났다.

    “나, 나는…….”

    벌벌 떠는 다그마르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그는 반드시 되찾아야 했다. 가장 높은 자리와 가장 아름다운 여자, 마땅히 제 것이어야 했던 그 모든 것을.

    카이엔이 색색, 가쁜 숨을 내쉬는 다그마르에게로 다가갔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제게 주실 수 있는 것이 하나 남지 않았습니까?”

    다그마르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벌어졌다.

    “지금이 제게 그것을 주셔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그런 다그마르를 카이엔이 탐욕에 가득 찬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다그마르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숨을 헐떡이며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카이엔에게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은…….

    탁, 소리를 내며 카이엔이 탁자 위에 유리병 하나를 올려 두었다. 무색의 물이 섬세한 유리병 안에 담겨 있었다.

    “설, 설마…….”

    다그마르의 갈색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녀는 주춤주춤 몸을 물리며 거세게 도리질을 쳤다.

    “아버지의 진심을 언제까지 외면하실 작정입니까, 어머니.”

    다가온 카이엔이 다그마르의 손에 억지로 유리병을 쥐여 주며 속삭였다.

    “그게 대체 무슨…….”

    다그마르는 제가 들은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머리로 이해하기도 전에 눈앞이 하얗게 번져 갔다. 카이엔은 그런 그녀에게 또다시 속삭였다.

    “어머니, 아버지는 단 한 순간도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소리만 남은 세상에 카이엔의 말소리가 날카로운 송곳처럼 귓가에 내리꽂혔다.

    “아니,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우리는 서로 사랑했어. 사랑했어, 분명 그 사람은 나를, 나를…….”

    다그마르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녀의 삶에 남은 것이라곤 그 사람과 사랑했던 기억뿐이었다. 그것마저 거짓이라면…….

    “제 나라와 사람들을 인질로 잡힌 아버지가 하는 사랑한다는 말이 진심인 줄 아셨습니까?”

    칼처럼 날카로운 말이 다그마르의 폐부를 사정없이 찔렀다.

    “아버지께 어머니는 제 모든 삶을 무너트린 약탈자에 불과합니다. 정말 모르셨습니까?”

    소국 아로스의 왕자였던 그에게 첫눈에 반하여 청혼했다. 늘 소심했던 다그마르가 제 인생에서 용기를 낸 유일한 순간이었다. 제 용기가 그에게는 폭력이었던 걸까.

    “아니, 아니야. 그이는…….”

    잿더미에서 죽은 불씨를 뒤적이는 사람처럼, 다그마르는 제 기억을 다급히 뒤졌다. 그가 자신을 사랑했음을 증명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넌 나를 조금도 닮지 않았구나. 나는 언제쯤이면 그 여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카이엔은 오래전 누군가가 제게 건넸던 말을 다그마르에게 돌려주었다. 그 말을 한 것이 누구인지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마침내 다그마르는 모든 부정을 멈췄다.

    언젠가 들었던 별의 예언이 벼락처럼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가려진 진실이 드러나고 거짓이 무너지면 죽음은 너를 찾으리라.’

    언제나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목격한 자신에게 더한 고통은 없을 거라고.

    하지만 아니었다. 제 삶에서 유일하게 빛났던 것인 사랑마저 거짓에 불과했다.

    그 거짓이 무너지자 남은 것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나락으로 처박은 자신뿐이었다.

    “어머니의 역할을 잊지 마십시오. 어머니는 제 자리를 잠시 맡아 두었을 뿐이라는 걸.”

    다그마르에게서 멀어진 카이엔이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것처럼 천천히 몸을 숙였다. 이윽고 숙였던 몸을 일으킨 카이엔은 그대로 내실의 문을 닫았다.

    공허한 눈을 한 다그마르의 모습이 내실 너머로 사라졌다.

    쿵, 육중한 문이 닫히는 소리에 내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프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주인이자 케이루스의 마지막 희망인 카이엔이 왕과의 독대를 마치고 내실에서 막 빠져나온 참이었다.

    제프리는 왕의 거처에서 벗어나는 카이엔의 뒤를 소리 나지 않게 따랐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제프리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전하, 메르디에스 공녀는 메르디에스 영지로 귀환하지 않았습니다. 시녀가 공녀로 위장했음을 확인했습니다.”

    제프리의 보고에 카이엔은 마치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눈앞에 둔 것처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엄지로 제 턱을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아리아드네, 너무 멀리 가면 돌아오는 길이 고될 거야.”

    아리아드네의 가장 뼈아픈 실수가 자신과 파혼한 것이 되도록 만들어 줄 속셈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잠시 놓은 척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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