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148)

* * *

메르디에스의 녹주궁은 온통 벌집을 들쑤셔 놓은 것처럼 수선스러웠다. 아리아드네가 갑작스러운 귀환을 결정한 탓이었다.

녹주궁의 고용인들은 갑작스러운 명에 의아해하면서도 착실히 일행의 귀환 준비를 도왔다. 짐꾸러미가 차곡차곡 쌓여 마차를 가득 채웠다.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지휘하던 캐롤린이 모습을 드러낸 아리아드네에게 다가가 말했다.

“리아,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자고 할 줄은 몰랐어. 성주님께서야 목이 빠지게 기다리셨겠지만.”

아리아드네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릭센에 온 목적은 파혼이었는 걸. 파혼했으니 남아야 할 이유도 없는 거지.”

“그래, 왕도에 겨울이 오기 전에 돌아가서 다행이야.”

캐롤린은 설렘이 가득한 눈으로 남쪽을 바라보았다. 남쪽에는 캐롤린이 평생 자란 고향 땅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리아드네가 캐롤린을 향해 슬쩍 고갯짓하더니 짐마차 뒤로 몸을 숨겼다. 캐롤린은 자연스럽게 아리아드네를 뒤따랐다.

짐 싣는 것이 끝난 마차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번잡한 소음이 한결 멀어졌다. 캐롤린을 기다리고 있던 아리아드네가 입을 열었다.

“캐롤린, 난 안 돌아가.”

무슨 말인가 하여 가늘게 좁혀졌던 보랏빛 눈동자가 이윽고 크게 벌어졌다.

“……무슨 말이야. 모두가 널 얼마나―”

“그래서 못 가는 거야.”

모두가 엘바로 떠난 아리아드네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릭센을 거치느라 길어진 일정에 다들 안달이었다. 이를 모를 아리아드네가 아니었다.

더없이 단호한 어조에 캐롤린은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당황한 캐롤린의 얼굴에 아리아드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엘바에서 만들어 낸 마물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았어.”

이어진 이야기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케이루스의 성물에 얽힌 비밀과 1왕자 카이엔의 계략, 반 호수에 나타났던 메로우까지도.

캐롤린은 너무 많은 것들을 갑작스럽게 알게 되어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끔찍했다.

리스벨 백작가는 페렌트의 귀족이었으나, 왕가에 대단한 충성심이 있진 않았다. 리스벨은 메르디에스의 가신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이 나라를, 페렌트를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이 나라를 카이엔과 케이루스가 모조리 망치고 있었다.

캐롤린은 분노하고 절망했다.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휘청이는 캐롤린의 몸을 아리아드네가 붙잡았다.

“그러니까 캐롤린, 네가 메르디에스에 돌아가서 아버지께 전해 줘. 편지로는 전할 수 없어.”

새파란 눈동자가 수천 년 동안 녹지 않은 빙하처럼 단단했다. 캐롤린은 아리아드네가 부쩍 멀게 느껴졌다. 바로 앞에 있는데도 손이 닿지 않을 것만 같았다. 캐롤린은 아리아드네를 양손으로 꽉 붙들었다.

“그런데 넌 어디를 가려는 거야?”

아리아드네의 푸른 눈동자가 북쪽 하늘을 응시했다.

“그동안 너무 평화로웠잖아. 모두 무기를 놓은 지 너무 오래됐어.”

프레모 대륙에서 감히 페렌트를 위협할 세력은 전무했다.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프레모의 절대적인 패자(霸者)로 군림해 온 페렌트였으나, 녹슨 칼은 무뎌지기 마련이다.

군사력으로만 따지면 페렌트의 힘은 셋으로 나뉘어 주야장천 싸움만 해 대는 서대륙 삼국(三國) 중 일국(一國)을 겨우 웃돌 것이란 평가가 보통이었다.

더구나 페렌트 내의 무력 단체들은 실전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하지만 페렌트에서도 칼을 벼리고, 사선을 넘나들며 싸우는 무인들이 모인 곳이 있었다.

“난 리뮈르로 갈 거야. 전력 문제만은 아니야. 내가 카이엔이라면, 리뮈르를 등 뒤에 둔 채로 일을 시작하지 않아.”

하늘까지 맞닿은 디움 산맥의 마물로부터 페렌트를 지키는 얼음과 눈의 땅 리뮈르.

리뮈르의 기사들은 페렌트 최고의 정예일 뿐만 아니라 실전 경험 또한 풍부했다. 하지만 리뮈르는 명예를 목숨처럼 여겼다. 부정과 결탁하느니 제 손으로 목을 잘라 낼 이들이었다.

그리하여 과거, 왕이 된 카이엔이 처음으로 칼을 겨눈 상대도 바로 리뮈르였다.

“메르디에스가 등을 돌렸으니, 조급해진 카이엔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건 바로 리뮈르야. 카이엔이 리뮈르를 치기 전에 힘을 합쳐야지.”

리뮈르가 위험했다. 카이엔이 리뮈르를 무너뜨리기 전에 연합을 구축해야 했다.

하지만 그 리뮈르였다. 누가 간다고 해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다. 남을 시킬 수 없으니 제가 하는 수밖에.

그리고 지금 리뮈르에 가야 하는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리뮈르의 성물 심연의 눈, 그것을 볼 수 있는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마치 하늘이 리뮈르로 가야 할 때를 정해 주는 기분이었다.

아리아드네는 태양에 가려 달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내쉬었다. 입김이 하얗게 부서졌다. 어느새 바람이 많이 차가워졌다.

계절은 아직도 가을 초입인데, 왕궁의 나무에는 이른 낙엽들이 바람에 날려 우수수 떨어졌다. 아리아드네는 떨어지는 낙엽을 잡을 듯이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바스락, 낙엽을 밟는 소리와 함께 중년 여자가 나타났다.

“아리아드네 님, 여기 계셨습니까?”

신시아였다.

“떠나실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담담한 미소를 지은 신시아가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신시아. 무리한 일정에 맞추느라 고생 많았어.”

“제 일인걸요. 길 안내는 엘바에서 귀환한 조셉이 맡을 겁니다.”

“조셉이라면 걱정 없지.”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크를 죽인 사람들이 모두 밝혀질 때까지 자신을 곁에 둬 달라던 조셉의 부탁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셉은 평생 대륙 곳곳을 누빈 노련한 상인이었다. 길 안내를 맡기엔 제격이었다.

품에서 편지를 하나 꺼낸 아리아드네가 주위를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신시아, 이것을 2왕자께 전해 줘. 전에 내가 말한 거 잊지 않았지?”

“물론입니―”

신시아가 편지를 받으려 내밀었던 손을 황급히 거두며 몸을 낮췄다.

“1왕자 전하를 뵙습니다.”

듣기만 해도 불쾌한 호칭이었다. 표정이 굳은 아리아드네가 뒤쪽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붉은 기가 도는 금발, 탁하게 가라앉은 갈색 눈동자. 카이엔이 그곳에 있었다. 그가 빙긋 웃으며 아리아드네를 향해 다가왔다.

“아리아드네, 그대 떠난다면서?”

가까이 다가온 그가 고개를 숙여 아리아드네와 눈을 마주쳤다.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 갈색 눈동자가 번뜩이며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카이엔의 눈동자가 나무의 죽은 껍질 같다고 생각했다.

“제가 수도에 남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아리아드네는 피하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마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마다 일일이 제 분노를 드러내 카이엔의 배를 불려 주고 싶진 않았다.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아리아드네가 아쉬운지 몸을 바로 편 카이엔이 턱을 슬쩍 문질렀다.

“아쉽군. 이대로 그대를 보내야 한다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애초에 길게 상대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카이엔을 강제로 끌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자리만 지켰다.

그리고 그런 냉대쯤이야 예상했다는 듯이 카이엔은 아랑곳하지 않고 느긋한 태도로 아리아드네 근처를 맴돌았다. 빙글거리던 카이엔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참, 얼마 전에 청석궁에 다녀갔다지? 그대가 루안과 친분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마치 먹잇감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만족스러웠다. 카이엔은 짐마차 너머 삐죽 솟은 유진의 검은 머리카락을 눈으로 가리켰다.

“아니면 저치가 리카서스의 성물이 필요하다던가?”

입꼬리를 늘어뜨린 카이엔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유진이 찾는 것은 케이루스의 성물인 별의 그릇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유진에게 알려 준 이가 바로 카이엔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카이엔의 미소 아래 감춰진 진심이 무엇인지 알았다. 유진은 네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자만. 저 남자도 결국 카이엔 자신처럼 널 배신할 거라는 확신.

카이엔은 유진이 케이루스의 성물을 본 일을 아리아드네에게 말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카이엔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제 약점을 스스로 고해하는 일 따위 카이엔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일 테니까.

그는 유진이 제 거래를 받아들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카이엔이라면 응당 그리했을 테니까.

아리아드네는 저 새까만 속내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불쾌해졌다.

“제가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전하께서 관여하실 일이 아닙니다.”

아리아드네 손에 들려 있던 빳빳한 종이가 와락 구겨졌다. 신시아를 통해 루안에게 건네주려 했던 편지였다.

“그래 그렇지. 메르디에스는 향후 3대가 케이루스의 피를 이은 누구와도 혼인하지 않겠노라 그리 약조했으니…….”

십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카이엔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내 동생과 전 약혼녀가 어찌 될까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겠지.”

카이엔이 아리아드네를 살피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입가에 빙글거리는 웃음을 걸었다.

‘내가 청석궁에 다녀갔다는 말을 듣고 저것을 걱정했던가? 메르디에스가 루안을 지지할까 봐?’

그의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아리아드네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명백한 비웃음에도 카이엔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대, 혼인이 아니더라도 동맹은 얼마든지 맺을 수 있지 않나?”

정말 메르디에스가 루안의 편에 설까 그것이 걱정되어 확인하러 온 것일까.

“루안이든 아니면 나든.”

아니면, 그저 아리아드네의 속을 헤집는 것이 목적일까. 최소한의 가면마저 집어치운 저 얼굴은 아리아드네가 기억하는 과거 그대로였다.

“전하, 그때 드린 약조는 케이루스의 후계 싸움에 메르디에스는 관여하지 않겠노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2왕자 전하와 손을 잡을까 염려되시는 거라면 다시 말씀드리지요.”

아리아드네는 성가신 벌레를 쫓는 심정으로 말했다.

“메르디에스를 케이루스의 후계 싸움에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단호한 어조로 못 박았지만, 이도 부족할까 싶어 아리아드네는 다시 덧붙였다.

“이 말을 적은 공식적인 문서가 필요하십니까? 그러시다면 오늘 안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긴 날벌레가 귓가에서 윙윙 날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손을 휘저어도 그때뿐, 불을 밝히고 찾아내 잡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 싸움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따위 몇 마디 말을 주고받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아리아드네의 싸늘한 말에도 카이엔은 혼자서만 봄을 맞이한 것처럼 기꺼워했다.

“아니, 사랑해 마지않는 그대의 말인데 믿어야지.”

그따위 말을 지껄이는 얼굴은 사랑을 속삭이던 그 시절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언제든 원하면 사랑하는 얼굴쯤이야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

“그대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지.”

그렇게 말한 카이엔은 산뜻한 태도로 몸을 틀었다. 루안과 모종의 거래를 한 건 아니냐고 물은 적도 없는 것처럼.

“그리고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내 방해물은 내가 치울 테니까.”

‘방해물?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아리아드네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제 속의 불안을 털어 내려 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가 떨쳐 내려 할수록 카이엔이 남기고 간 말이 진득하게 달라붙어 그녀를 괴롭혔다.

―공녀, 저는 곧 죽을 겁니다.

담담하게 제 죽음을 말하던 루안의 목소리가 아리아드네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온갖 것들로 가득 찬 머리가 지독하게 무거웠다. 아리아드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리아?”

캐롤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아리아드네를 불렀다. 고개를 든 아리아드네가 제 치마를 말아 쥐었다.

“나 청석궁에 좀 다녀와야겠어.”

짐을 다 싣는 대로 릭센을 떠나기로 한 마당에 갑자기 청석궁에 가야겠다니. 당황한 신시아와 캐롤린이 아리아드네를 불렀다.

“네? 아리아드네 님!”

“리아!”

아리아드네는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청석궁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단단한 손에 붙들렸다.

“무슨 일이야?”

유진이었다. 어느새 뒤따라온 유진이 아리아드네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아리아드네는 뭐라 말할 듯이 입을 달싹였다가 이내 다물었다.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제가 죽은 뒤에도 가끔 렉사를 찾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 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꽁꽁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아리아드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한참 후에야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추운 건 질색이야.”

앞뒤를 모조리 잘라먹은 뜬금없는 말에도 유진은 아리아드네를 재촉하지 않았다.

“아무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유진의 기다림에도 아리아드네는 여전히 두서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아리아드네에게 죽음이란 늘 차가운 것이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경험한 죽음은 생모 파시파에의 죽음이었다. 파시파에가 죽은 날, 메르디에스에는 눈이 내렸다.

그리고, 아리아드네 제 죽음이 그러했다. 제 몸뚱이가 바닥에 떨어졌던 그때도, 얼어붙은 몸이 깨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추운 것도, 죽음도 죄 싫었다.

“어린애 같은 소리라는 거 알아.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할 거야. 그래서, 그래서…….”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 같은 건 이루어질 리 없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조용히 아리아드네의 말을 들어 주던 유진이 낮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그래. 내 눈앞에서 누군가 죽어 가는 건 진짜 지긋지긋해.”

검붉은 피, 점차 잦아드는 호흡, 차갑게 굳어 가는 몸, 초점을 잃은 눈동자. 유진은 그것들에 좀처럼 익숙해질 수 없었다. 죽음을 지켜만 봐야 하는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견딜 수가 없었다.

“누가 어린애 같은 소리래. 다들 겁쟁이라서 그런 말 못 하는 것뿐이야.”

정말로 그런 세상이 올 수만 있다면 그는 기꺼이 제 몸을 바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더욱 궁금했다. 아리아드네가 말하는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이, 그녀가 꿈을 이룬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서느런 손이 아리아드네의 머리 위에 조심스럽게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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