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148)
  • * * *

    창밖으로 붉은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노을에 물든 하늘은 붉은빛이었고 반쯤 기운 석양은 이미 산 끝에 걸려 있었다.

    아리아드네가 긴장한 얼굴로 유진의 손바닥에 놓인 황금빛 반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유진이 손바닥에 놓인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는 손가락에 반지를 끼울 듯이 갖다 대었다 머뭇거리며 다시 내려놓았다.

    숨을 죽인 채 유진의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던 아리아드네가 맥이 탁 풀려 숨을 내쉬었다. 벌써 네 번째 시도였다. 아리아드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뭐 문제 있어?”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유진이 반지를 보고 있던 시선을 들었다.

    “아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무언가를 주저하는 기색으로 반지 끝만 만지작거렸다.

    ‘왜 하필이면 반지 같은걸.’

    유진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베아트리스야 별생각 없이 몸에 지닐 수 있는 액세서리 중에 아무거나 골랐겠지만.

    “어서 해 봐.”

    아리아드네가 잔뜩 기대한 표정으로 반짝 눈을 빛내며 유진을 재촉했다. 그의 복잡한 심경 따위는 짐작도 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어째 사소한 일에도 눈치를 보며 절절매는 건 이쪽이었다.

    한숨을 삼킨 유진이 반지를 굳이 두 번째 손가락에 끼웠다. 빠듯한 크기의 반지가 첫 번째 마디에 걸렸지만 무시하고 밀어 넣었다. 반지는 손가락 중간쯤에 걸려 더는 들어가지 않았다.

    유진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에서 실처럼 늘어진 황금색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바다 마녀의 물레에서 풀린 실이라도 되는 양 공기 중에 떠도는 황금색 빛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주위를 감싸는 빛 사이로 청아한 노랫소리가 들렸다. 잠든 아이를 달래는 것 같은 안온하고 따뜻한 노래였다.

    반지에서 터져 나온 금색 빛이 노랫소리에 맞추어 허공을 맴돌다 그 사이로 낯선 풍경이 나타났다.

    빛의 폭풍 한가운데서 눈을 감은 채 노래를 부르고 있는 이는 바로 베아트리스였다. 베아트리스의 황금빛 머리카락이 노랫소리에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베아트리스가 감은 눈을 천천히 떴다. 황금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눈동자가 릭센에 있는 유진에게 닿았다.

    “유진!”

    눈을 뜬 베아트리스가 두 손을 붕붕 흔들며 유진을 불렀다. 유진은 제 두 번째 손가락에 걸린 금색 반지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가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지내고 있지?”

    두 손을 흔들며 반가워하는 베아트리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지만, 유진은 마냥 반가워할 수만은 없었다.

    ―또 나만 혼자야. 이럴 거면 처음부터 오지 말지.

    살리바에서 베아트리스와 그렇게 헤어지고는 내내 마음에 걸렸다.

    베아트리스를 위해서라고 했지만 어쩌면 베아트리스의 맹목적인 기대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것뿐인지도 몰랐다. 베아트리스의 황금빛 눈동자가 저를 쫓아다닐 때면 미뤄 둔 숙제를 발견한 것처럼 마음이 갑갑해지곤 했다.

    “응! 유진도 잘 지내지? 아리아드네는?”

    순수한 애정을 담뿍 담은 얼굴이 유진을 더 불편하게 했다. 베아트리스의 물음에 유진이 제 옆에서 기대로 반짝이고 있을 아리아드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여기…….”

    하지만 유진의 예상과는 달리 아리아드네는 그의 곁에 없었다.

    “거기서 뭐 해?”

    창가에 붙어 있던 아리아드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았다.

    “어두워야 더 잘 보일 것 같아서.”

    아리아드네는 커튼의 끄트머리를 손에 쥔 채로 답했다. 유진은 두꺼운 커튼으로 창을 가려 어느새 어둑해진 방 안을 둘러보았다.

    정말 저 여자는 무슨 생각인 걸까. 고용인 하나 두지 않은 방 안에 남자와 단둘이 있으면서 빛마저 가리고는.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리아드네에게로 다가갔다. 어둠 속에서도 여자의 형태만은 선명했다. 아리아드네는 새파란 눈동자를 들어 유진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눈동자는 가을 하늘처럼 그저 맑기만 했다.

    유진은 천천히 몸을 내렸다. 여자의 희미한 숨이 목덜미에 닿았다. 긴장이라고는 솜털만큼도 없는 평온한 호흡이었다. 마치 혈육이라도 대하는 것 같은 여자의 태도에 허탈할 지경이었다.

    함께 있으면 속이 조이는 것처럼 불편하고 초조한 건 늘 자신이었다. 사랑을 고백한 여자는 저토록 태연한데.

    “어두워야 더 잘 보이는 게 아니라 그 반대야.”

    유진은 여자의 어깨너머로 손을 뻗어 커튼을 젖혔다. 방 안 가득 햇살이 밀려들었다.

    “해 질 녘이라는 단서가 붙은 건 그게 필요하다는 말이라서. 햇빛이 들어와야 해.”

    뒤돌아선 유진을 따라 조르르 쫓아온 여자가 찬란한 금빛 너머 베아트리스를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나 여기 있어, 베아트리스.”

    “아리아드네!”

    베아트리스가 반색하며 아리아드네를 불렀다.

    “뭐야, 둘 다 그렇게 가 버리고.”

    “미안해. 그땐 너무 급해서 네게 연락할 생각도 못 했어.”

    “이번에도 내가 연락 안 했으면 새까맣게 잊었을 거면서!”

    “아니야. 잘 지내고 있지?”

    특별한 대화를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베아트리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통 알 수 없었던 유진과는 달리 아리아드네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럼 이젠 보름날 해 질 녘마다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거야? 나도 저 반지만 끼면 베아트리스와 만날 수 있어?”

    아리아드네가 유진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리아드네는 성력이 없으니까 유진이 곁에 있을 때만.”

    “아, 베아트리스의 성력이 담긴 반지만으론 안 되는구나.”

    “어떤 물건만으로 공간을 연결하려면 나 정도 성력으론 안 돼.”

    베아트리스의 설명에 아리아드네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베아트리스가 안 되면 누구도 안 되는 거잖아.”

    “그런가?”

    베아트리스가 배시시 웃으며 이마를 긁적였다. 베아트리스가 교황의 친딸로 인정받은 것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강한 성력 때문이었다.

    “다음 보름에 또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베아트리스의 사랑스러운 목소리는 아직도 선명한데, 살리바에 있을 그녀의 모습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어느새 해는 서쪽으로 훌쩍 기울어 산등성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러게. 이렇게 직접 보니까 편지 같은 거보다 훨씬 좋다. 다음 보름에 다시 봐.”

    “건강하게 잘 지내고.”

    아리아드네와 유진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이던 베아트리스가 두 손을 크게 흔들며 활짝 웃었다.

    “유진이랑 아리아드네도 다음에 볼 때까지 잘 지내고 있어!”

    점점 흐릿해진 베아트리스의 모습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흩어졌다. 공중에 잔상처럼 남은 황금빛마저 사라지자 아리아드네는 마치 꿈을 꾸다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상해. 조금 전까지 여기서 베아트리스가 웃고 말하고 있었는데.”

    아리아드네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리켰던 손을 거두며 몸을 돌렸다.

    붉은빛으로 물든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사라진 해가 붉게 물들인 하늘을 바라보는 그는 어딘가 심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살리바에 혼자 남은 베아트리스가 걱정되는 걸까.’

    아리아드네가 유진에게 막 다가서려는 순간이었다.

    “아리아드네 님, 저 신시아입니다.”

    문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신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크 소리에 창밖을 보고 있던 유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심란한 표정 따윈 말끔히 지워 낸 얼굴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유진에게 다가가려던 몸을 틀어 자리에 앉았다. 바라지 않는 관심은 폭력이나 마찬가지니까. 좀 더 기다려야겠지.

    “들어와.”

    아리아드네는 짧은 말로 허락을 알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신시아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단 말은 들었습니다만 급하게 말씀드릴 일이 있어서요.”

    “괜찮아. 다 끝났어. 무슨 일이야?”

    “지난번에 말씀드린 신학자 중에 한 사람이 지금 당장 아리아드네 님을 뵈어야겠다고 합니다.”

    엘바에 가호를 내렸다는 ‘황금의 주인’에 관해 알아보고자 고대 신에 능한 신학자를 수배한 적이 있었다. 신시아는 재빠르게 고대 신에 능한 신학자 열 명 정도를 추려 그들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퍼부었다.

    그들 중 하나가 아리아드네를 보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곧 불러들여 성과를 들어 볼까 하던 참이었지만.

    “지금 당장?”

    제아무리 이름난 학자라 해도 평민에 불과했다. 그 부모나, 부모의 부모가 남작이나 자작 위를 가진 혈통이라 해도 아리아드네로선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따로 안면이 있는 것도 아닌데 예고도 없이 들이닥쳐서 지금 당장 봐야겠다니……. 대단히 무례한 자이거나 그만큼 급하고 긴한 용건이라는 거겠지.

    “들일까요?”

    신시아의 물음에 아리아드네는 주저 없이 답했다.

    “그렇게 해.”

    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무례한 자라면 쫓아 보내면 될 일이고, 마땅한 용건이라면 듣지 않는 것이 손해였다.

    신시아 선에서 돌려보내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을 터. 그것이 무엇일지는 아리아드네도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메르디에스 공녀 저하를 뵈옵니다.”

    신시아의 안내로 방에 든 중년 남자가 바닥에 이마를 붙이며 인사했다. 잔뜩 긴장한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섞여 있었다.

    “일어나 앉지.”

    아리아드네의 말에 시종이 낮은 의자를 가져왔다. 중년 남자는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시종이 가져다준 의자에 몸을 붙였다.

    “이름은?”

    “저는 신학을 업으로 삼고 있는 레스터라고 합니다.”

    중년 남자는 자신을 레스터라고 소개했다. 아리아드네는 팔짱을 낀 채로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래, 레스터. 나를 지금 당장 봐야겠다고 했다면서?”

    “중요한 단서를 발견하면 지체 말고 말하라 하시어―”

    “내게 말하란 말은 아니었는데.”

    레스터의 대답을 자른 아리아드네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굳이 나를 찾은 걸 보면 내가 바라는 답을 찾았다는 말이겠지?”

    꿀꺽, 레스터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움직였다. 침을 삼킨 레스터가 입을 열었다.

    “황금의 주인이 누구를 뜻하는 것인지 짐작하는 바가 있습니다.”

    아리아드네의 짐작대로였다.

    “그게 누구지?”

    “가장 강대한 권능을 가졌으며 이 땅의 모든 질서를 세운 황금의 주인은 바로―”

    레스터는 아리아드네가 원하는 답을 갖고 있었다.

    “신 중의 신이라 불리는 모라입니다.”

    “모라?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인데.”

    아리아드네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페렌트의 다섯 기둥이라 불리는 메르디에스의 다음 주인이었다. 신학 정도야 교양 수준은 넘어선 지 오래였다.

    “그러실 겁니다. 그 이름은 기록된 일조차 없으니까요.”

    거대한 무언가에 압도당한 사람처럼 레스터는 맞잡은 두 손을 잘게 떨었다.

    아리아드네가 물었다.

    “기록되지도 않은 이름을 어떻게 알고?”

    “신화란 본디 기록되어 드러난 것보다 숨겨진 것이 훨씬 큰 법이니까요. 모라라는 그 이름은―”

    아리아드네의 곧고 하얀 손이 레스터의 말을 끊어 냈다. 그녀는 제 궁금함이 우선이었다.

    “내가 이제 와 신학을 배우자는 건 아니니 자네 설명을 들어 보지. 황금의 주인이 모라라는 근거가 뭐지?”

    여러 번 심호흡을 한 레스터가 품에 안고 온 두루마리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저는 이 땅에 남은 신의 흔적을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오래된 신전, 성물, 특이한 동식물 같은 것이 제 연구 분야입니다.”

    아리아드네는 레스터가 펼쳐 놓은 양피지를 뒤적거리며 설명을 들었다. 이는 레스터가 평생 연구한 결과물이었다.

    “오래된 신전은 과거 이 땅에 신이 존재했다는 가장 확실한 흔적입니다. 신전은 그 자체로 모셨던 신의 힘이 깃든 곳입니다. 모셨던 신이 누구인지에 따라 신전은 각기 다른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과거 인간들은 강대한 권능을 지닌 신을 두려워하고 흠모했다. 신의 권능을 흠모한 자들은 세력을 이루어 신전을 짓고, 신을 섬겼다. 그리고 신은 자신을 따르는 자에게 권능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하지만 신들이 이 땅을 떠나자 신전은 버려졌고, 버려진 신전은 골칫덩이로 전락했다. 신전이 그렇게 폐물(廢物)이 되어갈 때, 신이 남긴 또 다른 흔적인 성물은 보물로 추앙받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성물은 이용할 수 있고 신전은 그렇지 못했으니까.

    버려진 신전 주위에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해괴한 동식물이 자라고 마물이 들끓었다. 신전 주위의 마물을 소탕할 때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신전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때, 마물을 소탕하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싸워야 하는 대상은 신전 주위의 마물이 아니라 신전을 지키려 하는 사람들이었다.

    ‘성물에 반발력을 지닌 인간이 마물로 변하는 거라면, 신전 주위에서 마물이 자주 발견된 것도 그런 이유였겠지.’

    아리아드네는 오래된 신전 그림들을 뒤적이며 그렇게 생각했다.

    “얼마 전 엘바에서 귀환한 분들이 엘바의 신전을 세밀하게 그린 스케치를 보여 주셨습니다. 엘바의 신전은 제가 오래도록 찾아 헤매었으나 끝내 그 주인을 알 수 없었던 이 땅 곳곳에 흩어진 신전과 흡사한 형태였습니다.”

    레스터가 엘바의 신전을 그린 스케치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엘바의 신전과 흡사한 형태의 신전이 더 있다는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하나의 신전이 아니라 여러 개의 신전을 거느린 신이라. 아리아드네는 느슨하게 기대 있던 몸을 바로 곧추세웠다.

    레스터는 두루마리에서 여러 장의 그림을 꺼내어 늘어놓았다. 기둥의 모양과 건축 양식이 흡사한 그림들이 줄줄이 딸려 나왔다.

    “강대한 신을 모셨던 신전일수록 더 빨리 사라졌습니다.”

    “그렇겠지. 그럴수록 마물이 더 많이 들끓었을 테니까.”

    “그래서 ‘모라’는 그 이름조차 남지 않은 겁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나 고문서에 흩어진 조각을 이어 최근에야 겨우 알게 된 이름입니다.”

    레스터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높아졌다. 손의 떨림도 점점 커져 레스터의 손에 들린 양피지가 와락 구겨졌다.

    “무엇보다 엘바의 신전에서 발견하셨다는 이 문구 말입니다.”

    주름진 손가락이 가리킨 것은 엘바의 신전 중앙에 자리하고 있던 조각상 그림이었다.

    긴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여자와 상체가 마모되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네발짐승. 그리고 여자의 발치에 새겨진 문구.

    「혼돈에서 태어나 이 땅의 질서를 세운 황금의 주인이시여.」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혼돈에서 태어나 이 땅의 질서를 세웠다는 이 부분입니다.”

    아리아드네가 신을 칭할 때면 으레 붙는 표현이려니 생각하고 넘긴 부분이었다.

    “신의 탄생을 말할 때면 흔하게 붙는 수식어가 아닌가? 최초니, 혼돈이니, 창세의 순간이니 하는 것들은.”

    레스터는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벌게진 얼굴로 입만 뻐끔거렸다. 몇 번의 심호흡으로 겨우 진정한 레스터가 물었다.

    “혼돈한 세상을 가르는 최초의 질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

    최초의 질서라. 아리아드네가 말해 보라는 듯 턱짓을 하자 레스터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시간입니다.”

    쿵.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리아드네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열었다.

    “그렇다면 그 모라라는 신이 다스리는 권능이…….”

    아리아드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유진을 확인했다. 붉은빛이 비쳐 든 유진의 옆얼굴이 깎아지른 벼랑 위에 선 것처럼 위태해 보였다.

    아리아드네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시간이란 말인가?”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레스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제 결론이 틀릴 것이라고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몸짓이었다.

    ‘엘바의 신전이 시간의 권능을 지녔던 모라를 모신 곳이라고?’

    여기에 생각이 미친 아리아드네가 눈가를 좁혔다.

    “잠깐, 엘바에 내려진 가호는 공간을 다루는 것이었는데?”

    분명 시몬은 그렇게 말했다. 엘바는 황금의 주인이 가호를 내린 땅이라고. 황금의 가호를 지켜 왔다던 시몬은 신전 주위의 공간을 자유자재로 다뤘다. 황금의 주인이 시간의 권능을 지녔던 ‘모라’라면 앞뒤가 맞지 않았다.

    아리아드네의 중얼거림을 들은 레스터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바의 신전에 모라의 가호가 아직 유지되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부디 제가 그곳을 조사할 수 있도록―”

    “네 요구를 말하러 온 자리가 아닐 텐데.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해.”

    서늘한 목소리가 흥분에 겨운 레스터의 목소리를 갈랐다.

    “엘바에 내린 가호가 모라의 것이라면, 어째서 그것이 시간이 아니라 공간에 관련된 것이지?”

    아리아드네의 서릿발 같은 물음에 레스터는 다시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시간과 공간은 본디 하나이니까요.”

    시간과 공간이…….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아리아드네 귓가에서 맴도는 것 같았다. 불안으로 가슴이 떨렸다.

    ‘대체 내가 알고 있던 건 뭐야.’

    눈을 가리고 길을 걸은 꼴이었다. 바로 눈앞에 답이 있었는데.

    “시간과 공간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공간이 존재하면 그곳에는 시간이 흐르고, 시간이 흐르는 장소는 공간이 됩니다. 시간과 공간은 독립된 변수가 아니라 상호 종속된 개념이니 시간을 다스리는 권능이 공간을 다스리는 것으로 발현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레스터의 설명이 끝났지만 아리아드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레스터가 불안한 눈동자를 수십 번 끔벅인 다음에야 아리아드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시간과 공간이 별개가 아니라고…….”

    아리아드네의 시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유진의 얼굴을 지나쳐 그의 손가락에 걸린 금색 반지에 닿았다.

    “성력은 기본적으로 신의 힘을 빌리는 거지?”

    성물에 깃든 것은 신의 힘이다. 성물에 대한 친화력, 성력은 즉 신의 힘을 빌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네, 그렇습니다.”

    갑자기 튀어 버린 화제에 어리둥절해진 레스터가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그럼 어느 신의 힘을 빌리느냐에 따라 그 형태가 다를 수도 있겠네.”

    “그건 저도 잘…….”

    테티스의 권속인 무렉스가 힘을 사용할 때면 검은 연기가 그녀를 감쌌다.

    “모라가 황금의 주인이라 불리는 건 무엇 때문인가?”

    그 의도를 조금도 짐작할 수 없는 질문이 연이어 이어졌다. 레스터는 간신히 머리를 굴려 어물어물 대답을 늘어놓았다.

    “아이들이 보는 동화에서도 시간을 종종 황금 실에 비유하곤 하잖습니까? 아마도 황금은 가장 고귀한 것을 뜻하는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니, 그건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아리아드네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머리를 알고 있었다. 성 상티모니아 최고의 성물이라 불리는 카푸트.

    마치 공기 중에 금빛 휘장이 녹아든 것 같았던 엘바의 풍경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리고 조금 전 보았던 금빛 폭풍 속에 갇힌 것 같았던 베아트리스의 모습까지. 그 모두가 모라의 힘이었다.

    모라가 황금의 주인이라 불리는 것은 모라의 권능이 그런 형태이기 때문이었다.

    카푸트의 성물을 가진 유진은 시간을 다루고, 시몬은 엘바의 공간을 왜곡했다. 베아트리스는 멀리 떨어진 두 공간을 연결했으며, 그리고…….

    아리아드네는 제 몸에서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조각조각 깨질 것 같은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는 겨우 입을 열었다.

    “신시아, 이 자가 엘바의 신전을 연구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줘. 레스터, 오늘 만남은 즐거웠네. 앞으로 자네의 모든 연구는 메르디에스 이름으로 진행될 거라고 약속하지.”

    이만 나가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레스터는 불만을 품기보다는 뜻밖의 소득에 만족하며 돌아갔다.

    달칵, 문이 닫히자 아리아드네는 그대로 무너져 쓰러졌다. 숨이 모자라 가슴이 뻐근했다. 유진이 다가와 아리아드네의 어깨를 잡았다.

    “괜찮아?”

    유진의 물음에 아리아드네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침착하려 했지만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열로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카이엔이야.”

    아리아드네의 말에 내내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이 팍 찌그러졌다. 하지만 곧 유진은 아리아드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챘다. 제 앞의 유진을 붙든 아리아드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바의 마물을 운반한 건 카이엔이었어.”

    시몬이 성물을 이용해 만들어 낸 엘바의 마물들. 아리아드네는 카이엔의 숨겨진 힘이 그 마물들이었음을 확신했다.

    ―갑자기 나타난 것도 그렇고 시몬은 공간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었나 봐. 이곳의 마물도 그렇게 운반한 걸까?

    처음에는 시몬이 엘바의 마물들을 어딘가로 옮긴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엘바의 서쪽 숲에서 만난 그는 공간을 자유자재로 다루었으니까.

    ―시몬의 능력은 서쪽 숲에 국한된 것이었을 가능성이 커. 시몬의 능력이라기보다 랭스턴이 누군가에게 한 자락 얻은 능력이었을 테고.

    하지만 시몬의 능력은 엘바의 서쪽 숲에 내린 가호를 빌린 것에 불과했다. 그의 능력은 ‘엘바의 서쪽 숲’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다면 별안간 메르디에스 영지의 반 호수에 나타난 메로우나 메르디에스 사냥터에 나타났던 마물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마물들이 어떻게 엘바에서 한참 떨어진 장소에 갑자기 나타날 수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그 고리에 다가갈 수 있었다.

    “케이루스의 성물에도 모라의 힘이 깃든 거라면 가능해.”

    케이루스의 성물 ‘별의 그릇’. 유진은 별의 그릇이 자신이 찾던 물건일 거라고 했다.

    카푸트와 별의 그릇이 모두 모라의 성물이라면, 이미 카푸트를 지닌 유진이 모라의 또 다른 흔적인 별의 그릇을 찾아 헤맨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시몬이 엘바의 공간을 왜곡하고, 베아트리스가 멀리 떨어진 두 공간을 이었듯이, 카이엔은 모라의 힘이 담긴 별의 그릇을 이용해서 마물을 운반할 수 있었던 거야.”

    시몬이 아리아드네가 엘바에 올 것을 알고도 그곳의 마물을 모두 빼돌리지 않았던 이유도 납득이 갔다.

    아리아드네의 짐작대로라면 엘바 내에서 마물을 만들어 내는 것은 시몬의 역할이지만, 엘바를 떠난 마물은 카이엔의 것이다.

    시몬은 제가 애써 만들어 낸 마물을 카이엔이 홀랑 집어삼키게 될까 봐 경계했겠지. 그것이 시몬의 패착이었다. 포기해야 할 때를 놓친 것.

    ―이, 이럴 수는 없는데……. 엘바에서 황금의 가호를 지켜 온 랭스턴을 이길 사람이 존재할 리가 없는데…….

    포기할 생각조차 하지 않은 건 제 능력을 과신한 탓이었겠지만.

    “이럴 때가 아니야.”

    아리아드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아무 곳에서나 불쑥 솟아나는 마물을 대체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그때, 곧고 단정한 손가락이 아리아드네의 손목을 쥐었다. 서늘한 감촉에 아리아드네가 유진을 내려다보았다.

    유진이 아리아드네를 가볍게 잡아당겨 자리에 앉혔다. 서늘한 손이 이마와 눈을 반쯤 덮었다.

    “제약이 있을 거야. 잘 생각해 봐. 그게 뭘지.”

    손만큼이나 서늘한 목소리가 아리아드네의 귓가로 흘러 들어왔다. 아리아드네가 숨을 고르며 유진의 손 아래에서 눈을 감았다.

    뜨거워졌던 머리가 천천히 식었다. 유진의 말이 옳았다. 카이엔이 아무 제약 없이 마물을 불러낼 수 있었다면, 제 앞길을 막는 자들을 모조리 죽여 없앴겠지. 왕후인 칼이나, 2왕자 루안, 다섯 가문의 주인들까지.

    침실에 마물이 뚝 떨어지는 건 외부에서 침입하는 암살자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럴 수 있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리 없다.

    아리아드네는 한결 차분해진 머리로 제가 놓친 것이 없나 천천히 되짚었다.

    엘바의 마물들, 과거 메르디에스 사냥터에 나타난 마물, 그리고 반 호수에 나타났던…….

    “……메로우.”

    아리아드네가 마침내 제 기억 속에서 단서를 찾아냈다. 그녀가 제 눈을 가린 유진의 손을 끌어 내리며 말했다.

    “반 호수에 나타난 메로우가 이상해. 메로우는 바닷가에서 나타나는 게 보통이란 말이야. 메로우를 만들어 내는 성물이 바다에 잠겨 있었다거나, 아니면 바다에서 힘을 발휘한다거나 그런 이유가 있겠지.”

    메로우를 만들어 낸 시몬이야 더 정확히 알고 있겠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런데 호수에서 메로우가 나타난 건 처음 있는 일이야.”

    어긋난 데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아마도 그 인간이 보낸 거겠지.”

    아리아드네는 뿌옇게 흐려졌던 머릿속이 점점 선명해지는 기분이었다. 유진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꼬인 실타래들이 차근차근 풀려나갔다.

    “그런데 왜? 날 노린 거라기엔 말이 안 돼. 그날 내가 그곳에 간 건 예정에 없었던 일이니까. 그렇다고 카이엔이 그 일을 벌여 얻은 수확도 없었어.”

    아리아드네가 반 호수에 가지 않았던 과거에도 메로우는 나타났다. 그렇다면 메로우의 출현은 아리아드네를 위협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메로우를 막지 못했던 과거에 적지 않은 사상자가 발생하긴 했으나, 그것이 카이엔의 목적이라기엔 아귀가 맞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자체가 목적이었겠지.”

    “맞아. 카이엔은 확인해야 했던 거야. 반 호수에 마물을 보내는 것이 가능한지.”

    유진은 마치 아리아드네의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반응했다. 그것이 불쾌하다기보다는 든든했다. 유진의 반응에 아리아드네는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호수 아래엔 뭐가 있지?”

    유진의 물음은 확인에 가까웠다.

    “무너진 신전.”

    아리아드네의 대답에 유진의 회색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거로군.”

    “카이엔은 반 호수 아래에 잠긴 신전이 모라의 신전이 맞는지 확인해야 했던 거야.”

    반 호수 아래에 무너진 신전이 있다는 것은 메르디에스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아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오래전 깊은 호수 아래 잠겨 버린 신전이 누구를 섬기던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이엔에게는 그것을 확인할 방법이 있었다. 반 호수 아래 잠긴 신전이 모라의 신전이라면 호수에서 카이엔이 보낸 마물이 나타날 테니까.

    “……카이엔은 원하는 때에 또다시 마물을 보내기 위해서 미리 확인해 본 거야.”

    반 호수 건너편에는 메르디에스의 사냥터가 있었다. 그리고 아리아드네와 카이엔의 결혼식 석 달 전, 레너드와 커티스는 메르디에스 사냥터에서 갑자기 나타난 마물과 맞닥뜨렸다.

    레너드와 커티스, 둘 중 누가 죽든 카이엔에게는 손해가 아니었다. 레너드가 죽는다면 메르디에스가 제 수중에 떨어지는 셈이고, 커티스가 죽는다면 휘청이던 캐롤린을 송두리째 무너트릴 수 있었을 테니까.

    결국, 그날 사냥터에서 커티스는 레너드를 구하고 죽었다.

    “곳곳에 흩어진 모라의 신전. 카이엔이 마물을 운반하는 데 그 신전들을 이용하고 있는 게 분명해.”

    “그래.”

    유진은 아리아드네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아리아드네는 제 신경이 온통 카이엔의 음모를 밝히는 것에만 쏠렸던 것이 미안했다. 시간의 권능을 가진 신이라니. 그 존재는 유진에게도 더 없이 충격이었을 텐데.

    레스터의 이야기를 들을 때, 벼랑 끝에 선 사람처럼 위태로웠던 유진의 얼굴을 기억했다. 아리아드네는 담담한 얼굴로 의미 없이 제 머리끝을 만지는 남자를 샅샅이 살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당신은 괜찮아?”

    몇 번이나 입 안에서 말을 골랐지만 기껏 꺼내 놓은 건 이런 것이었다.

    “뭐가?”

    하지만 고민 끝에 내놓은 질문은 남자가 둘러놓은 두꺼운 벽에 가로막혔다. 바라지 않는 관심은 폭력이나 마찬가지라고,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이렇게 제 속을 감출 때면 한없이 조급해지곤 했다.

    “뭐든.”

    아리아드네는 유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당신을 의지하는 만큼 당신도 내게 기대 줘.’

    꺼내 놓기에 성급한 투정은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