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0/148)

* * *

아리아드네가 머무르며 녹주궁에 상주하는 인원이 부쩍 늘어난 탓에 조셉과 그 일행은 궁 바깥에 거처를 마련해야 했다.

조셉 일행의 거처는 메르디에스 상단 소유의 건물이었다. 릭센에 도착한 것이 오늘이라 당연히 거처에 있을 줄 알았는데 조셉은 릭센에 도착하자마자 볼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래? 기다리지 뭐.”

아리아드네는 1층 홀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중앙도 구석도 아닌 것이 애매한 위치인 데다가 소파나 테이블도 신경 쓰지 않은 티가 났다.

“저, 여기는 좀……. 응접실로 안내해 드릴까요?”

아리아드네를 안내한 하인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리아드네가 앉은 곳은 약속되지 않은 손님이 무작정 찾아와 몽니를 부릴 때나 안내하는 자리였다.

“아, 괜찮아. 좀 답답해서 그래.”

아리아드네가 개의치 말라는 듯 싱긋 웃었다. 하인은 그제야 안심한 듯 멀어졌다.

아리아드네는 바깥의 풍경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한 시간이나 되었을까? 조셉이 기운이 쭉 빠진 사람처럼 땅만 바라본 채 터덜터덜 걸으며 거처로 돌아왔다.

그러다 홀에 앉아 있는 아리아드네를 보고는 놀라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아리아드네 님, 별일 없으셨습니까?”

아리아드네는 놀란 조셉을 안심시키려 부러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괜찮아. 별일 있을 일이 뭐가 있어. 오는 데 어려움은 없었고?”

“상인이야 떠돌아다니는 게 일인 것을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옆구리에 낀 조셉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래, 어려운 결정을 해 주었어. 고마워.”

“……아닙니다.”

고개를 숙인 채로 한참을 망설이던 조셉이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아리아드네 님, 마크를 그렇게 죽인 사람들이 다 밝혀진 게 아니지요? 랭스턴 공작이 끝이 아닌 게지요?”

조셉의 눈동자가 두려움과 걱정으로 잘게 흔들렸다. 모자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래. 하지만 조셉, 아내와 아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잖아. 돌아가도 돼.”

아리아드네가 오늘 이곳에 온 이유이기도 했다. 조셉의 부담을 덜어 주고 싶었다.

“아내와 아들을 위해서라도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아리아드네 님, 무슨 일을 시켜도 좋으니 제발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조셉이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애걸했다. 그 뜻을 되돌릴 수 없음을 안 아리아드네가 조셉의 손을 붙잡아 일으켰다.

“아니야. 부탁은 내가 해야지. 나를 도와줘, 조셉.”

조셉의 두 손은 물기로 흥건했다. 그런 손이 부끄러운지 조셉은 아리아드네가 붙잡은 손을 빼내며 바지에 슥슥 닦았다.

이윽고 무언가가 떠오른 듯 제 바지춤을 더듬더니 이내 가슴께에서 무언가를 확인하고는 아리아드네에게 물었다.

“아, 그런데 방문자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전해 드릴 것이 있는데 좀처럼 뵐 수가 없어서요.”

조셉의 물음에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릭센에 도착하자마자 유진을 찾으러 갔다고? 조셉이 유진을 따로 찾을 만한 관계던가?’

아리아드네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유진은 왜?”

“성 상티모니아의 성녀님께서 방문자님께 전해 드리라며 맡기신 물건이 있습니다.”

“베아트리스가?”

무렉스와 루안을 만난 후유증은 아리아드네보다 유진이 훨씬 심각했다. 조셉보다야 제가 낫겠지 싶었다.

“뭔데? 내가 전해 줄게.”

아리아드네의 말에 조셉이 품에서 갈무리한 봉투 하나를 꺼내 놓았다.

“이것입니다.”

조셉에게 봉투를 건네받은 아리아드네가 손으로 슬쩍 더듬어 보았다.

‘편진가?’

아, 손끝에 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봉투 안에 든 것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내가 전해 줄게. 피곤할 텐데 쉬어.”

“네, 살펴 가십시오.”

조셉이 지내는 숙소에서 나온 아리아드네가 궁으로 돌아와 유진을 찾았다.

하지만 유진이 머무르는 방이야 말할 것도 없고, 궁의 어디에서도 유진은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오늘은 그만 포기해야 하나 생각할 때쯤 공중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왜.”

서늘한 목소리가 정원을 채웠다.

“베아트리스가 보냈대.”

아리아드네가 봉투를 들고 팔랑이며 말했다. 그것을 건네받은 유진이 봉투 입구를 열어 손바닥에 대고 거꾸로 털었다. 아무렇게나 쓴 편지와 금색 반지 하나가 굴러떨어졌다.

“웬 반지?”

반지를 본 아리아드네가 무심코 물었다.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유진이 반지를 도로 봉투에 집어넣으며 베아트리스가 쓴 편지를 내밀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연락 수단으로 만들었대.”

얼떨떨한 얼굴로 유진이 내민 편지를 받아 든 아리아드네가 방금 느낀 위화감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

유진이 아차 싶었는지 손등으로 이마를 가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런 게 뭔데? 무엇보다 당신이 나한테 왜 그걸 해명해?”

유진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아리아드네의 어깨를 쥐고는 더는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았다. 별로 힘을 주는 것 같지도 않은데 남자는 마치 벽처럼 단단해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조금만 더 다가서면 이대로 영영 도망갈 기세라 아리아드네는 숨통을 틔워 줄 작정으로 입을 열었다.

“더 안 물을 테니까 당신도 말해.”

“뭘?”

“당신 고민. 지금 온통 당신을 괴롭히는 거.”

묵직한 한숨 소리가 내려앉았다. 조금 뒤 유진의 입에서 낮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어쩌면 말이야. 내가 찾던 거 이미 찾았는지도 몰라.”

머리로는 잘됐다고, 다행이라고 그렇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유진은 아리아드네 파혼의 중재자가 되어 주고, 아리아드네는 유진이 성물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한 계약관계였다.

아리아드네의 파혼이 성사된 마당에 유진마저 찾던 물건을 찾았다고 하니, 둘 사이를 이어 주던 끈이 뚝 잘린 기분이었다.

“그래서 훌훌 날아갈 거야? 지상의 용건은 끝났으니까?”

아리아드네가 새까만 하늘을 가리키며 물었다.

“죽으란 소리야? 어딜 가.”

유진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가볍게 웃으며 긴 다리로 성큼 정원을 벗어났다. 아리아드네는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이내 보폭을 좁힌 유진이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유진이 걸음을 늦추자 멀어진 둘 사이의 거리가 한결 가까워졌다.

“아직 확실한 건 아냐. 그냥 여러모로 마음이 좀 복잡해서.”

그렇게 말하며 유진은 인공적으로 조성된 물길을 훌쩍 뛰어넘었다. 아리아드네는 별생각 없이 유진을 따라 넘으려다 멈칫했다.

평소라면 못 넘을 너비는 아닌데 오늘 입은 드레스가 보폭이 좁은 것이라 여의치 않았다. 주저하는 아리아드네를 본 유진이 다시금 넘어와 아리아드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아 준다고 건널 수 있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리아드네는 선선히 손을 내밀었다. 아리아드네가 유진이 내민 손에 제 손을 얹은 순간이었다.

그가 아리아드네의 손을 잡아당기며 허리를 끌어안았다. 남자의 서늘한 체온이 아리아드네를 감쌌다. 유진은 크게 힘들이는 기색도 없이 한쪽 팔로 아리아드네를 안은 채 물길을 건넜다.

반대편 땅에 발이 닿자 허리에 감긴 팔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떨어져 나갔다. 아리아드네는 제 몸에서 떨어져 냉큼 제자리로 돌아간 팔을 보며 말했다.

“매정해.”

“뭐가? 왜 도와줬는데도 불만이야?”

유진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일부러 저러는 거지. 가늘게 눈을 흘긴 아리아드네가 앞장서서 걸었다.

“잘생겨서 봐주는 줄 알아.”

그가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이 얼굴을 구겼다. 구긴 얼굴마저도 분위기 있어 보였다. 아리아드네는 그런 제가 어이가 없어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를 따라 발을 놀렸더니 곧 분수가 나타났다. 아리아드네는 분수 주위를 거닐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발아래 땅을 꾹꾹 밟았다.

입을 열면 아쉬움, 이기심, 미련, 그런 것들이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혹시나 그가 이제까지처럼 함께 하지 못한다고 해도 웃으며 보내 주고 싶었다.

‘어차피 곧 돌아올 텐데 뭐, 아니면 내가 가도 되고.’

아리아드네가 꾹꾹 누른 발자국 위를 유진의 묵직한 신발이 덮었다. 아리아드네는 새까만 신발에 시선을 고정했다.

“혹시…….”

목을 긁는 듯한 거친 목소리였다.

“케이루스가 가진 성물에 대해서도 알아?”

유진의 낮은 목소리가 마치 벼랑 끝에 선 것처럼 절박했다.

“케이루스의 성물이라…….”

아리아드네가 발로 흙바닥에 직직 문양을 그렸다. 흙바닥에 그려진 문양은 한쪽 뿔이 잘린 사슴과 차오르는 달이었다.

“이게 케이루스 왕가의 문장이야.”

천공의 케이루스, 케이루스가 가진 성물인 별의 그릇은 흔히 하늘의 별을 지배하는 성물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케이루스 왕가의 기원은 북방 이민족인데, 그 시조가 하늘에 제를 지내는 제관이었어. 케이루스의 성물은 하늘에 제를 지낼 때 쓰는 성물이었고.”

아리아드네는 땅바닥에 그린 케이루스의 문장 중 달을 톡톡, 짚으며 설명을 이었다. 달은 밤하늘에 존재하는 모든 별의 지배자였다.

“별을 지배하는 성물이니까 예언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 케이루스 왕족들에게 중요한 예언을 하나씩 내리는데…….”

축복이래서 그런 줄로만 알았지.

―케이루스의 성물이 왕족들에게 내리는 것이 저주라는 것이 알려지면 케이루스가 어찌 멀쩡하겠습니까. 그러니 축복이라 표현하는 것일 뿐입니다.

아직도 루안의 씁쓸한 목소리가 귓전에서 맴도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좋은 말은 아닌 것 같아.”

아리아드네가 흙바닥에 그린 케이루스 왕가의 문장을 발로 문질렀다. 성의 없이 그린 문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 가득한 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별을 보니까 기후를 예측하기에 유용하지. 가장 늦게 페렌트에 정착한 케이루스가 큰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그게 컸어. 별의 흐름을 읽고, 한 해의 주기를 계산하고, 그것을 토대로 자연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비장하게 물을 땐 언제고 정작 설명을 들은 유진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릭센에 왔으니 이 김에 볼 수 있음 보는 것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던 말이 유진의 얼굴을 보자 턱 막혔다.

서늘한 바람이 아리아드네의 몸을 쓸고 갔다. 이별은 언제나 차가움을 동반한다. 몸속에서 차오르는 한기에 소름이 돋았다.

“당신이 찾던 게 별의 그릇이야?”

유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이 곧 답이었다. 어째서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을까.

별의 그릇, 별을 지배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성물. 인류가 가진 최초의 시계는 바로 밤하늘의 별이었는데. 별을 지배하는 성물과 시간을 다루는 유진의 능력이 무관할 리 없는데…….

맹목적인 감정은 또다시 이성의 눈을 가리고 말았다.

과거, 유진이 다섯 가문의 성물 중 가장 먼저 본 것은 케이루스의 것이었다. 그를 케이루스의 땅으로 불러들인 건 카이엔이었다.

[케이루스의 성물을 먼저 보셨다면서요?]

케이루스의 성물을 본 유진이 다음으로 찾은 땅이 메르디에스였다. 카이엔의 권유가 있었다고 했다. 아리아드네는 유진을 결혼식장에 끌어들일 작정으로 메르디에스의 성물을 보여 주었다.

[이것이 메르디에스의 성물, 무량의 돌입니다.]

[새까맣고, 크군.]

무량의 돌을 본 유진의 반응은 지나치리만큼 담담했다. 이제야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케이루스의 성물을 가장 먼저 본 과거에는 다른 가문의 성물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을 테니까. 자신이 찾던 것이 무엇인지, 어디 있는지 이미 본 다음이니까.

언제 깨질지 모르는 얇디얇은 얼음 위에서 천방지축으로 뛰어놀다 발이 빠진 뒤에야 이곳이 어딘지 깨달은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어. 어떻게 그렇게 정신을 빼놓고 있을 수가 있었어.’

유진이 시간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을 뻔히 알았으면서, 과거와는 달리 무량의 돌을 보기 전 초조해하던 그를 보고서도.

아리아드네는 그 모든 것을 눈앞에 두고도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한 제 무신경함과 어리석음이 원망스러웠다. 다섯 가문의 성물 중 그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짐작하지 못하다니.

이래서야 유진이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다 이루게 해 주겠다는 결심도 거짓이 되어 버리지 않았나. 제 감정에 취해 당연히 알아챘어야 할 것들을 놓쳤다.

“나 당신한테 정말 할 말이 없네. 당신한테 하나도 도움이 못 되고 있잖아.”

성큼 다가온 유진이 아리아드네를 내려다보았다. 잿빛 눈동자가 일그러지고, 단정한 이마가 찌푸려졌다. 유진의 손이 아리아드네의 몸에 닿을 듯이 가까워졌다가 이내 허공만 움켜쥔 채 다시 멀어졌다.

“아직은 확실한 거 아니야. 남은 성물도 마저 볼 거고.”

유진은 한숨을 내쉬며 제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것에 찔린 듯한 상흔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날 ‘그것’을 마주한 것이 결코 꿈이 아니라는 듯이.

그는 제 손에 남은 상처를 볼 때마다 그날의 불쾌한 경험을 되새겨야만 했다.

“그날, 당신이 파혼한 날.”

싫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그의 단정한 이마에 골이 패었다.

“그자가 날 찾아왔어.”

“…….”

“당신 전 약혼자.”

차가운 바람에 아리아드네의 옅은 금발이 마구잡이로 흐트러졌다. 유진은 아리아드네의 머리카락을 귓바퀴 뒤로 넘겨주었다. 매끄러운 머리카락은 머무를 새도 없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당신이 찾는 물건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까요. 이래도 거절하시겠습니까?

그날, 유진을 찾아온 카이엔은 그렇게 말하며 거래를 제시했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아니, 카이엔이 무슨 말을 하든 유진의 반응은 마찬가지였을 거다. 처음 볼 때부터 그랬으니까.

저 면상을 보고 있노라면 화가 들끓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유진은 한껏 이죽거리며 대답했다.

―내가 찾는 게 무엇인지 안다고? 그것참 대단하네. 나도 모르는 걸 알고 있다니.

카이엔이 길이가 한 뼘 정도 되는 단검을 꺼내 보였다. 붉은 검집에 담긴 단검 주위로 희미한 금빛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것을 마주한 순간 속이 울렁거렸다.

―길이는 딱 이 정도. 색은 흰색, 아마도 무언가의 뼈.

단검을 다시 넣은 카이엔이 자신만만한 어조로 물었다.

―이래도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구체적인 어떤 형상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동시에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유진은 뒤집히는 속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당신이 적지 않은 시간 그것을 찾아 헤맨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 못 미더우면 보고 결정해도 상관없습니다.

카이엔은 느긋한 태도로 말하고는 가면 같은 웃음을 지었다.

제 예상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저 오만이 불쾌해서라도 그 자리를 떠났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이 불안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카이엔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유진은 침묵으로 동의했다.

카이엔이 유진을 데리고 간 곳은 왕이 거처하는 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건물이었다. 건물의 지붕은 돔 형태였는데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 언뜻 보면 지붕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주위가 지나치게 적막했다. 왕가의 성물을 보관한 곳이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경비가 없었다.

―사람은 잠시 물려 두었습니다.

카이엔은 내내 유진이 올 것을 확신한 듯이 행동했다. 익숙한 걸음걸이로 건물에 다가선 카이엔이 문을 열었다. 문 너머로 보이는 시커먼 어둠이 몹시도 불길했다.

유진은 내키지 않았으나 억지로 몸을 움직여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쿵, 카이엔이 잡고 있던 문이 뒤에서 닫히며 육중한 소리를 냈다.

유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서 빨리 확인하고 싶다는 초조함과 확인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불안함이 소용돌이처럼 뒤섞였다.

못 박힌 듯 자리에 선 유진을 힐끗 본 카이엔이 불을 붙인 등잔을 들고 앞장섰다. 바로 앞만 간신히 비추는 등잔에도 카이엔은 어려움 없이 계단을 올랐다.

나선형으로 된 계단이 끝나자 꼭대기 층이 나타났다. 그곳은 유리로 된 지붕이 머리 위에 펼쳐진 광대한 홀이었다. 홀 중앙에 서서 투명한 유리 너머 새까만 하늘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공중에 둥둥 뜬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늘에는 휘영청 달이 떠 있었다. 달빛이 유리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달빛이 쏟아지는 자리에 사람의 키만 한 유리관이 있었다.

유진은 마치 홀린 듯이 유리관 앞으로 다가갔다.

붉은 벨벳 쿠션 위에 놓인 것은 단검만 한 크기의 하얀 뼈였다. 달빛이 비친 뼈는 붉은 피가 스며든 흔적이 남아 있어 한층 더 기괴한 느낌이 들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케이루스의 성물이 가지는 의미를.

카이엔이 뭐라 지껄이든 그따위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유진은 케이루스의 성물을 보는 순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이 세계에 온 것은 바로 저것을 찾기 위해서다. 저것을 위해 이곳에 온 거다.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그를 지배했다. 평생 물을 찾아 헤맨 사람이 눈앞에 샘을 둔 것처럼 갈증이 났다.

유진은 오른손을 들어 유리를 깼다. 다른 무언가를 사용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유리 파편이 손에 박혀 피가 흘렀다. 하지만 고통 같은 것은 느낄 새도 없었다.

저것을 가져야 한다. 유진은 오로지 그 생각만으로 손을 뻗어 케이루스의 성물을 손에 쥐었다.

‘이젠 드디어…….’

이젠? 이것을 가져서 무엇을 하려고 했던가. 조금 전 자신이 한 생각조차 알 수 없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만 같았다.

가슴이 선뜩했다. 이것을 가지지 못하면 죽을 것 같던 조금 전과는 달리, 손 안에 든 물건이 불길하여 당장이라도 내던지고 싶었다.

‘……사랑, 죽음이…… 피할 수 없…….’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였다. 유진은 속을 쥐어짜는 것 같은 불쾌감에 손에 든 것을 내던졌다.

마치 온몸의 생기를 빨아 먹힌 듯이 숨이 막혔다.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처음 사막에서 피를 흘리며 깨어난 날도 이렇지는 않았다. 유진은 바닥에 쓰러져 헐떡였다.

―이건 대체 뭐야, 이 거지 같은 말은.

내내 지켜보고 있던 카이엔이 다가와 유진이 내던진 케이루스의 성물을 주워 들었다. 카이엔은 그것을 손에 쥐어 달빛에 비춰 보며 말했다.

―당신도 들었습니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달빛을 받은 흰 뼈는 황금색으로 빛났다. 유진은 마치 심장이 쪼개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겨우 뜬 눈으로 그 뼈를 바라보던 유진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진짜…… 지랄맞은, 물건이야.

그 뼈는 달빛을 받아 빛나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속에 빛을 품은 것처럼 뼈 자체에서 황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당신도 보입니까? 이 찬란한 빛이.

카이엔이 마치 경배하는 듯한 태도로 케이루스의 성물을 받쳐 들었다.

―가지시겠습니까?

쓰러진 유진에게 다가온 카이엔이 케이루스의 성물을 내밀었다. 유진은 손을 뻗으려다 끝내 손을 떨구고 말았다. 유리가 박힌 손바닥에서는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그것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머릿속이 쪼개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눈앞이 흐려졌다. 자신은 결코 저것을 가질 수 없다. 하지만 저것을 가져야만 했다.

―당신이 그토록 찾아 헤맨 물건을 눈앞에 두고도 가질 수 없다니.

카이엔이 바닥을 긁으며 괴로워하는 유진에게 다가와 나긋한 목소리로 지껄였다.

―하지만 성물의 주인인 제가 드리면 말이 달라지겠지요. 제가 원하는 것을 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드리겠습니다.

카이엔이 유진의 눈앞에서 그 뼈를 흔들었다. 케이루스의 성물이 다시 가까워지자 울컥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손바닥 가득 토해 낸 것은 피였다. 그렇지 않아도 유리가 박혀 엉망이던 손은 피범벅이 되었다.

유진이 발을 휘둘러 카이엔을 떼어 냈다. 저 남자도, 저 물건도 멀어지니 그나마 살 것 같았다. 가슴을 부여잡은 유진이 겨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닥쳐. 난 쓰레기와는 거래 안 해.

남자에게서 나는 악취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세상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저런 남자가 뭐가 좋다고.

―그건 제가 쓰레기이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아리아드네가 당신에게 실망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까?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유진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비틀거리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이 거래, 결코 거절하지 못할 걸 압니다. 그래도 너무 늦지 않았으면 합니다.

외곽에 쏟아지던 재앙만도 못한 남자가 끝까지 헛소리를 지껄였다. 그대로 무시하려던 유진이 뒤로 돌아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성물? 그거 그냥 귀신 들린 물건이잖아. 조심해.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쾅! 계단에서 내려온 유진은 그대로 문을 발로 차 두 동강 내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밤하늘의 별은 조금 전과 다름이 없건만 아리아드네가 제게 고백한 것과 저 거지 같은 물건을 본 것이 같은 날 일어난 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케이루스의 성물이 유진에게 지껄인 그 말이 죽음의 예언이라는 건 무렉스를 만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진짜 거지 같은 물건이었다.

“그 남자가 내게 케이루스의 성물을 보여 주면서 거래하자고 했어. 성물을 줄 테니, 자신이 원하는 걸 달라더군.”

유진은 최대한 담백하게 그날의 일을 말했다. 카이엔과 마주하며 느꼈던 부정적인 감정을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제 속의 저열함을 드러내 그녀 앞에 굳이 전시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리아드네가 천천히 손을 뻗어 유진의 왼쪽 소매를 잡았다.

“그 성물이 당신에게 꼭 필요한 거야?”

“몰라, 나도.”

가늘고 우아한 손가락이었다. 유진은 제 소매를 쥔 아리아드네의 손가락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게 찾던 건지는 어떻게 알았어?”

“확실한 건 아니라고 했잖아.”

“그래도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을 거잖아.”

유진은 아무 생각 없이 왼쪽 손을 들려다가 제 소매에 대롱대롱 매달린 것을 보고는 멈칫했다. 그는 제 소매를 쥔 아리아드네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 내 반대쪽 소매를 쥐여 주었다.

그러고서야 유진은 왼쪽 손을 들어 카푸트를 꺼냈다. 강렬한 기세로 황금빛 광채를 내뿜으며 젊은 남자의 머리가 둥실 떠올랐다. 언제 봐도 불쾌한 얼굴이었다.

“그냥 얘를 처음 봤을 때처럼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참 거지 같았어.”

진작 썩어 사라졌어야 할 시체를 마주한 불쾌함처럼, 유진은 케이루스의 성물에서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용납할 수 없는 것은 그 물건을 탐내는 자신이었다. 이 머리도, 그 뼛조각도 마땅히 제 것이라 여기는 너절한 욕망에 구역질이 났다.

유진의 표정을 뭐라 오해했는지 아리아드네가 단단히 각오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할 거야? 그 거래.”

마치 날씨를 묻는 것처럼 담담한 어조였다. 소매를 잡은 손이 떨리는 것도 모를 정도로 긴장한 주제에.

제게 부담이 되지 않으려 애쓰는 여자의 마음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그러자 자기혐오로 들끓던 가슴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이런 여자가 자신을 좋아한다니. 자신도 어쩌면 그렇게까지 엉망은 아닐지도 몰랐다. 기억이 없다고 해서,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하지만 전 약혼자를 보면 남자를 보는 여자의 안목이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아마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는 걸 알면 무슨 얼굴을 할까? 억울하다고 하려나. 예상외로 순순히 인정할지도 몰랐다.

유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할 거면 여기서 이 이야기를 왜 해.”

“할 거라도 말은 하고 가야지! 우리가 지낸 시간이 있는데!”

매정하다니까. 그렇게 덧붙인 아리아드네가 곧 이상한 점을 깨달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어진 눈동자가 이윽고 유진의 말뜻을 알아채고는 곱게 접혔다. 조금 전 담담함은 어디에 갔는지 아리아드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헤실헤실 웃었다.

유진이 부러 놀리듯 말했다.

“그래서 가라고?”

“아니!”

도망갈세라 냉큼 붙잡은 아리아드네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내 이기심으로 가지 말라기엔 당신에게도 중요한 일이잖아.”

호수 같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유진을 바라보았다. 저 눈을 보고 있으면 자꾸만 어떤 기대를 하게 된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도, 저 여자는 변하지 않을 거라는.

역시 아직은 새로이 발견한 이 희망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조금 더 그녀 곁에 머무르고 싶었다.

유진이 천천히 손을 들어 아리아드네의 얼굴을 감쌌다. 보드라운 살결이 손에 닿았다. 담담하던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숙이는가 싶더니 이내 떨리는 손으로 유진을 끌어안았다.

“가지 마.”

담담하던 목소리는 흔적도 없이 절절했다. 아리아드네가 절박한 손길로 유진을 꽉 붙들었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내가 그거 꼭 당신 손에 쥐여 줄게.”

살며시 고개를 든 눈동자가 그 속에 유진을 담았다.

“약속해.”

아리아드네가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기억하지? 결단과 약속.”

아리아드네는 다시금 새끼손가락의 의미를 되새겨 주고는 손가락을 거뒀다. 유진의 품에 얼굴을 기댄 채로 아리아드네가 물었다.

“근데 그냥 당신이 가져오면 안 돼?”

솜털 같은 숨결이 간지러웠다. 유진은 말끔한 아리아드네의 머리카락을 괜스레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도무지 손을 둘 데가 없었다.

유진은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쓰며 물었다.

“왕가의 성물을 탈취하라고?”

“응. 성물이 제 의지로 왔다고 그래. 이미 가져간 걸 어쩌겠어. 그렇다고 당신을 감옥에 가둘 거야? 죽일 거야?”

아리아드네는 뭐가 문제냐는 듯 태연했다. 얼굴을 든 아리아드네가 생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땐 내가 막아 줄 수 있어.”

“퍽도 믿음직스럽네.”

방황하던 손을 아리아드네 머리에 얹은 유진이 잔잔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찾던 건 맞는 것 같은데, 그 물건 가까이 가면 조금도 힘을 쓸 수가 없어. 아마 탈취하는 건 불가능할 거야.”

유진의 설명을 들은 아리아드네가 골치 아프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페렌트 왕궁 내에서는 나도 적극적으로 움직이기가 조금 그래.”

아리아드네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왕궁은 케이루스의 세력들이 너무 굳건해서 힘을 쓸 수가 없어. 왕후(王侯)조차도 다그마르 폐하의 유약함을 이용해 권세를 휘두르는 거고.”

왕도와 왕궁에 내린 케이루스의 세력들은 뿌리가 깊었다. 2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왕가와 함께 성장한 세력은 지나치게 공고해졌다.

“각 가문의 궁에 있는 소수의 인력을 제외하면, 빨래하는 사람들조차도 몇 대에 걸쳐 케이루스를 섬긴 사람들이야. 그들은 케이루스 왕가의 부흥을 제일 바라는 세력들이기도 해.”

그리고 그것은 카이엔의 가장 큰 힘이기도 했다. 케이루스의 현 주인은 다그마르였으나, 케이루스를 섬기는 자들이 제 주인으로 여기는 것은 케이루스의 부흥을 꿈꾸는 카이엔이었다.

카이엔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힘을 키울 수 있도록 도운 것은 아리아드네와 메르디에스였다. 그것이 제 목을 조르는 결과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카이엔과 케이루스를 섬기는 자들의 목적이 그를 왕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가문의 손발을 잘라 내는 것임을 너무 늦게 알았다.

“선왕께서 폐위된 뒤로 저들은 훨씬 더 교묘하고 조심스러워졌어. 케이루스의 성물을 가져오는 건 케이루스 왕가를 완전히 무너뜨리기 전에는 조금 힘들 것 같아.”

이미 저들은 우왕좌왕하다 리카서스에 크게 당한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칼은 25년이라는 세월 동안 왕을 손아귀에 틀어쥐고도 왕궁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거미줄처럼 촘촘히 엮인 저들의 연계는 쉬이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아리아드네가 원하는 것은 칼처럼 남에게 빌린 권세가 아니었다. 설사 카이엔을 끌어내린다 해도 저들을 그대로 둔다면 불씨를 품에 안고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들의 연계를 깨트리고, 온전한 왕이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조금만 기다려 줘.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뭐든 다 줄게.”

유진이 제게 바라는 것이 많았으면 했다. 그러면 한없이 안겨서 묶어 둘 수 있을 텐데. 내일이라도 훌쩍 떠날 것 같은 남자가 가끔 불안했다.

“됐어. 그런 거.”

유진은 욕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얼굴로 웃었다.

“진짜 그렇게 성자 같은 얼굴 하지 마. 어떻게 꾀어내야 할지 모르겠잖아.”

아리아드네가 허탈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아리아드네의 손에서 팔랑, 종이가 떨어졌다. 아리아드네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집어 들었다. 급하게 갈겨쓴 필체로 용건만 간단하게 적은 편지였다.

‘아, 베아트리스.’

조셉이 전해 준 베아트리스의 편지였다. 봉투에서 반지를 꺼낸 유진이 제게 편지를 건네주었던 것이 이제야 기억났다.

다른 데 정신이 팔려 까맣게 잊고 있었다. 빠르게 편지를 읽어 내린 아리아드네가 깜짝 놀라 유진에게 되물었다.

“보름날, 아까 그 반지를 끼고 있으면 베아트리스를 만날 수 있다는 거야?”

“아마도. 전에 교황과 그렇게 대화하는 걸 본 적이 있어.”

“그게 어떻게 가능해?”

“베아트리스가 자신의 성력을 이 반지에 담은 거야. 자신의 성력이 담긴 물건을 이용해서 공간을 잇는 거지. 늘 되는 건 아니고, 보름에만 되나 봐.”

아리아드네가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반지를 요리조리 살펴보며 말했다.

“신기해. 진짜 성녀님 같아.”

그냥 흔한 반지인 줄 알았는데 성물이라 불러도 과하지 않은 물건이었다.

“진짜 성녀님 아니야?”

아리아드네의 중얼거림에 유진이 이상한 말을 다 듣겠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네.”

아리아드네는 제가 한 말이 우스워 웃음을 터트렸다. 청명한 웃음소리가 밤공기 사이로 녹아들었다.

“보름이 언제지?”

아리아드네가 겨우 웃음을 삼키며 물었다.

“한 이삼일 남았으려나?”

유진이 밤하늘에 걸린 달을 보며 보름을 가늠했다. 보름이라기엔 조금 덜 찬 달이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만히 달을 올려다보던 아리아드네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작은 감탄사를 뱉었다.

“아, 맞아. 당신 남은 성물도 볼 거라 그랬지?”

“그래야지. 또 다른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조각은 하나가 아닐지도 모른다. 깨진 조각이 어디에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당장 죽음의 땅에 가지 않는다고 해서, 케이루스 성물을 손에 넣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제 기억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 우리도 곧 떠나야 해.”

“어디로?”

“얼음과 눈의 땅, 리뮈르.”

아리아드네가 하늘의 달을 가리키며 환하게 웃었다.

“곧 리뮈르의 성물이 떠오를 거거든.”

죽음의 땅에 가는 것은 리뮈르의 성물이 떠오른 뒤에, 다섯 가문의 성물을 모두 본 뒤에라도 늦지 않았다.

달빛을 받은 아리아드네의 옅은 금발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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