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148)
  • * * *

    베아트리스는 퉁퉁 부은 얼굴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 채로 살리바 대신전의 정원을 가로질렀다. 고개를 숙인 베아트리스 위로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성녀님?”

    울림이 풍부한 저음이 베아트리스를 불렀다. 베아트리스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여름의 신록처럼 따스한 눈동자가 베아트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브래들리 백작가의 차남, 레이먼드 브래들리였다.

    엘바의 뒷정리를 위해 살리바에 남은 레이먼드는 가끔 베아트리스의 말 상대가 되어 주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베아트리스는 짐을 싣는 인부들로 북적이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레이먼드도 떠나요?”

    기껏 삼킨 눈물이 다시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베아트리스의 황금색 눈동자에 가득 차오른 눈물을 본 레이먼드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아니요. 제가 아니라 엘바에서 조사를 마친 조사단 중 일부가 메르디에스로 귀환하는 겁니다. 저는 아직 뒷정리할 것이 있어서 몇 달 더 머무를 예정입니다.”

    그때, 레이먼드의 왼쪽 어깨에 붉은 반점이 찍힌 흰 비둘기가 내려앉았다. 레이먼드는 비둘기의 발목에 달린 나무 대롱에서 돌돌 말린 서신을 꺼내 읽었다.

    틸레가 가지고 온 것은 메르디에스 상단주인 신시아가 직접 보내온 편지였다. 엘바의 오래된 신전과 성 상티모니아의 교황 아그네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으니 협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레이먼드는 확인한 편지를 그대로 물에 흘려보냈다. 종이는 물에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읏차, 굽혔던 몸을 일으킨 레이먼드가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한 표정으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몇 달 더 신세 질 예정인데 그래도 될까요?”

    “아, 네.”

    베아트리스의 대답에 레이먼드가 한숨 돌렸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메르디에스가 살리바에 머무르는 건 이미 합의가 끝난 일이었다. 레이먼드가 살리바에서 얼마를 더 머무르건 베아트리스의 허락 따위는 필요 없었다.

    ‘이상한 사람이야.’

    레이먼드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다가와 무심히 온기를 나눠 주곤 했다. 베아트리스의 가슴을 가득 채웠던 서러움이 천천히 씻겨 나갔다.

    “아, 혹시 아리아드네나 방문자님께 보낼 서신이 있으시면 맡겨 주십시오.”

    그렇게 말한 레이먼드가 짐꾼을 지휘하는 사내 하나를 불러 세웠다.

    “이 자가 직접 전달할 겁니다.”

    엘바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 조셉이었다. 조셉은 메르디에스로 돌아가지 않고 릭센에 있는 아리아드네의 지원을 자처했다. 조셉을 포함한 열댓 명의 인원이 이틀 뒤 릭센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고개를 숙인 베아트리스가 발끝으로 흙바닥을 짓이기며 웅얼거렸다.

    “서신 같은 거 말고 나도 만나고 싶은데…….”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편지는 받아 봤자 더 쓸쓸하기만 했다.

    ‘이렇게 오래 못 볼 줄은 몰랐는데…….’

    베아트리스는 다시금 밀려드는 서러움에 눈가가 시큰거렸다. 레이먼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내가 또 곤란하게 했나 봐.’

    베아트리스가 고개를 들어 애써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나도 알아요. 투정인 거. 얼른 가서 편지 써야겠다. 내가 편지 가져올 때까지 떠나지 말아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람이 닿은 자리가 유난히도 시렸다. 어느새 얼굴은 넘쳐흐른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런 자신이 싫었다. 더구나 우는 얼굴을 숨기지도 못했다. 뒤따라온 레이먼드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베아트리스를 불렀다.

    “성녀님…….”

    또다시 울컥 울음이 새어 나왔다.

    “나, 너무 바보 같아. 다들 말로만 떠받들어 주면서 내가 하고 싶은 건 아무것도 못 하게 하는데 난 아무 말도 못 해.”

    묵혀 두었던 서러움이 울음과 함께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레이먼드와 이런 이야기를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별다른 위로도, 대단한 충고도 없었다. 레이먼드는 그저 울음과 서러움을 쏟아 내는 베아트리스 옆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한참 후에야 겨우 울음을 그친 베아트리스가 근처 정원석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기운이 쭉 빠져서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아리아드네라면 이렇게 답답하게 살지 않겠죠?”

    어머니 앞에서도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하는 아리아드네가 부럽고 대단했다. 자신은 아그네스 앞에만 서면 할 말을 죄다 까먹기 일쑤인데…….

    베아트리스의 물음에 레이먼드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했겠죠.”

    언제나 당당했던 제 사촌 누이는 어릴 때부터 참으로 남달랐다. 어린 아리아드네가 제 마음에 안 든다며 파티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것만 해도 여러 번이었다. 그것도 큰 문제 삼기 어려울 정도로만.

    레너드가 왜 그랬느냐고 물어 오면 아리아드네는 숨기는 것 없이 일목요연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앞뒤 이야기를 들어 보면 마냥 잘못한 것도 아니라 레너드는 크게 혼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성녀님은 아리아드네가 아니시지 않습니까?”

    모두가 똑같은 얼굴로 똑같은 말을 하는 세상은 얼마나 끔찍한가.

    “아리아드네는 성격이 급한 데가 있어서 앞뒤 없이 저지르고는 후회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리스벨 영애를 붙들고 자기랑 반반 섞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그렇게 참는 일 없이 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사는 아리아드네에게도 후회의 순간은 찾아왔다. 당시에는 최선이었던 선택도 돌이켜 보면 최악이 되는 것이 삶이었다.

    “아리아드네의 대단한 점은 그렇게 후회하고도 후회할 일을 끝없이 하는 데에 있죠. 그 과감성이랄까, 용감함은 분명 평범하진 않죠.”

    아리아드네의 대단한 점은 그것이었다. 어떤 일을 겪어도 꺾이지 않는 것.

    “하지만 세상 모두가 아리아드네 같으면 분쟁이 끊이지 않을 겁니다. 평화를 지향하는 저로서는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아리아드네가 제 소중한 동생인 것과는 별개로요.”

    아리아드네 곁에 있다가 입은 피해는 단연 캐롤린이 압도적이었으나 레이먼드도 만만치 않았다. 사랑하는 동생이지만 아리아드네 같은 사람은 그녀 하나로 충분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 모두가 똑같은 성격이면, 저 같은 장사치들은 굶어 죽을 겁니다.”

    말을 마친 레이먼드가 싱긋 웃으며 멍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베아트리스의 젖은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사람들이 다 달라야 다양한 물건을 살 테고, 다양한 물건을 팔아야 많은 돈을 벌지요.”

    사시겠습니까, 레이먼드가 베아트리스의 눈물을 닦은 손수건을 그 손에 쥐여 주며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베아트리스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쥔 손수건의 감촉이 보드라웠다.

    “내가, 지금처럼 이래야 레이먼드가 돈을 번다고요?”

    “말이 그렇게 되나요?”

    레이먼드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이 답답하고 맹한 아가씨가 저를 유쾌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

    베아트리스처럼 귀가 얇고, 셈이 느린 사람은 장사치들에겐 몹시 소중한 유형의 사람이긴 했다. 웬만큼 써서는 표도 나지 않을 만큼 돈이 많다는 점은 더 그랬다.

    하지만 지금 레이먼드가 즐거운 것은 베아트리스에게 물건을 팔아서도, 미래의 권력자와 인연을 만들어서도 아니었다.

    조그만 머리로 고민하고, 노력하고, 또 좌절하고. 그렇게 온 힘을 쏟는 베아트리스를 보고 있으려니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응원하게 되었다.

    웃음을 터트리는 레이먼드를 가만히 바라보던 베아트리스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아리아드네도, 레이먼드도 이상해요. 되게 다른데 닮았어.”

    “어떤 점이 닮았습니까?”

    “대화하고 나면 머리가 가벼워져요. 여기도.”

    제 가슴께를 가리킨 베아트리스가 홀가분한 얼굴로 웃었다. 서러움이 사라진 자리에는 그리움만 남았다. 보고 싶은 얼굴들이 하늘의 별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결코 닿을 수 없는.

    “보고 싶다.”

    베아트리스의 황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제 머리카락이 너울너울 날리는 것을 지켜보던 베아트리스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폴짝 뛰었다.

    “아, 맞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나 편지 필요 없는데!”

    말을 마친 베아트리스가 어딘가로 바쁘게 향하더니 잊은 것이 있다는 듯 다시 돌아왔다.

    “레이먼드도 같이 갈래요?”

    그러고는 레이먼드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손을 잡아끌었다. 반쯤 달리는 것 같은 걸음걸이로 제 방에 도착한 베아트리스가 레지나를 불렀다.

    “레지나, 나 반지, 반지 하나만 꺼내 봐.”

    “네? 베아트리스 님 갑자기 무슨…….”

    레지나는 갑자기 들이닥쳐 반지를 찾는 베아트리스가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앞뒤 상황을 파악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이런 레지나가 답답한지 베아트리스는 정리된 방 안을 마구잡이로 뒤지기 시작했다.

    “여기 있다.”

    죄다 뒤집어 놓은 서랍장에서 반지를 무더기로 발견한 베아트리스가 그중 하나를 골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그리고 반지를 손에 든 채로 성가 비슷한 것을 영창했다. 베아트리스의 노래에 맞추어 손끝에서 터져 나온 황금색 빛이 허공을 수놓았다.

    “찬란한 저 하늘의 태양은 달을 그리고, 영광된 저 하늘의 달은 사라진 태양을 그리네.

    하지만 해가 뜨고, 달이 지는 것은 별의 숙명. 하지만 달이 뜨고, 해가 지는 것은 별의 숙명.

    잠든 네 곁을 지키는 별이 되리라. 찬란한 금빛이 너를 비추는 동안, 널 찾아온 악몽을 피해 꼭꼭 숨어라. 해가 악몽을 살라 버릴 때까지 꼭꼭 숨어라.

    찬란한 금빛이 우리를 어루만지네. 찬란한 금빛만이 우리를 살게 하리라. 찬란한 금빛이 우리를 어루만지네. 찬란한 금빛만이 우리를 살게 하리라.”

    베아트리스의 영롱한 목소리가 마치 빛처럼 반짝이며 모든 것을 감싸 안았다. 노래에 맞추어 춤추듯 허공을 수놓은 빛이 베아트리스 손 위에 놓인 반지 주위를 맴돌았다. 빛의 폭풍 한가운데 자리한 베아트리스의 황금빛 머리카락이 너울거렸다.

    이전까지 레이먼드는 베아트리스가 성녀라고 하지만, 베아트리스의 힘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하지만 이토록 경이로운 광경을 보니 제 속에 있는지도 몰랐던 신앙심이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베아트리스를 감싸고 있던 빛이 가라앉았다. 베아트리스 손 위에 놓인 평범한 백금 반지는 어느새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처음 들어 보는 노래인데요. 성녀께서 성력을 사용하는 주문 같은 건가요?”

    레이먼드가 막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손 안에 든 반지를 요리조리 살펴보던 베아트리스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제가 좋아하는 노래예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노래라서…….”

    소중한 추억이라도 떠올리는 것처럼 아련한 얼굴을 한 베아트리스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영창은 그 자체로 무슨 힘이 있는 주문은 아니에요. 음, 성력을 이끌어 내는 습관이라고 해야 하나? 왜 똑같은 거리도 익숙한 길로 가면 빠르잖아요. 그런 것처럼 지름길을 만들어 주는 거예요.”

    느릿하게 설명을 마친 베아트리스가 작은 편지지에 몇 자를 휘갈기듯 적고는 반지와 함께 봉투 안에 동봉했다. 베아트리스가 레이먼드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자, 이것만 전해 주면 돼요.”

    맹하게만 봤던 베아트리스가 보여 주는 남다른 모습에 레이먼드는 제 가슴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레이먼드?”

    베아트리스는 멍하게 있는 레이먼드가 의아한 듯 봉투를 흔들며 재촉했다.

    레이먼드는 서둘러 봉투를 받아 들다 베아트리스와 손가락이 스치고 말았다. 손끝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베아트리스는 손이 닿은 것도 모르고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유진에게 전해 줘요. 보름날 해 질 녘에 이 반지를 끼고 있으면 나랑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레이먼드는 잠깐, 아주 잠깐 봉투에 든 반지가 욕심났다.

    * * *

    ‘머지않아 진정한 끝이 오리니 네 죽음이 그 시작을 알리리라.’

    아리아드네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댄 채 손톱으로 유리창을 톡톡, 두들겼다. 마치 세상의 멸망이라도 알리는 것 같은 불길한 예언이었다.

    하지만 예언에서 말한 진정한 끝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곱씹어 볼 겨를도 없었다. 머지않은 미래에 루안이 죽는다. 그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아득해졌다.

    과거, 아리아드네는 루안을 인질로 칼을 끌어내리고 카이엔을 왕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왕이 된 카이엔은 루안의 죽음을 빌미로 메르디에스를 무너뜨렸다.

    루안의 죽음은 제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끝은 자신의 죽음이었다.

    [오늘, 내 죽음으로 네 삶을 앗으리라.]

    ‘내가 죽고 난 그 세계는 어떻게 된 걸까. 내가 정말로 시간을 거슬러 온 것이라면 그 세계는 더는 존재하지 않겠지.’

    아리아드네는 다시 손톱으로 유리창을 톡톡, 두들겼다. 손끝이 시렸다.

    루안의 죽음으로 시작될 진정한 끝. 그 끝이 의미하는 것은 어쩌면 ‘아리아드네의 죽음으로 사라진 그 세계’일지도 몰랐다.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는 것만큼 진정한 끝이라는 말과 어울리는 건 또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아리아드네가 과거로 돌아온 것으로 그 예언은 효력을 다한 걸까, 아니면 이번에도 루안의 죽음을 시작으로 무언가의 끝이 다가오는 걸까. 루안의 죽음을 막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루안 곁에는 렉사가 있는데 그는 어떻게 죽은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문 의문점들은 누구도 답해 주는 이가 없었다. 답 없는 질문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유리창에서 전해지는 서늘한 감촉에 자연스럽게 파시파에가 죽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좀처럼 눈이 오지 않는 메르디에스가 눈으로 파묻힌 날이었다. 처음 보는 눈에 흠뻑 빠져 캐롤린과 정신없이 노는데 유모가 찾아와 말했다.

    [아리아드네 님, 성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왜? 나 좀 더 놀면 안 돼?]

    [공비 저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말에 아리아드네는 손에 들고 있던 눈 뭉치를 떨어트렸다. 통곡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캐롤린이 울고 있었다.

    ‘빨갛게 얼어붙은 볼이 아프지 않을까.’

    아리아드네는 어머니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순간에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에게 죽음이란 그렇게 시리고 차가운 것으로 남았다.

    손끝에 서늘함이 닿아 올 때마다 그날 본 루안의 웃음이 떠올랐다. 저 혼자 모든 것에서 벗어난 것 같은 초연한 그 얼굴이, 그럼에도 렉사를 향한 애정을 숨기지 못하던 그 따스함이.

    다시 추운 기억을 갖게 되는 걸까. 아리아드네는 제 손바닥을 차가운 창문에 붙였다. 한기가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역시 추운 건 싫었다.

    “아리아드네 님, 들어가겠습니다.”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신시아가 들어섰다. 품 안에 서류를 가득 안은 모습이었다.

    사람을 시켜도 되련만 성격이 급한 신시아는 제가 하는 것이 속 편하다며 고집을 부리곤 했다. 테이블 위에 서류 더미를 쿵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은 신시아가 물었다.

    “추운데 왜 그렇게 창에 붙어 계세요? 릭센의 기후에 익숙하지도 않으신 분이.”

    아리아드네는 창에서 손을 거두었다. 투명한 창에는 손자국이 그대로 남았다.

    “그냥.”

    제 손자국이 남은 창을 물끄러미 보던 아리아드네가 자리에 고쳐 앉았다. 신시아는 창밖에 무엇이 있나 슬쩍 보았다가 서류 더미로 시선을 내렸다.

    “일전에 고대 신에 능통한 신학자를 알아봐 달라고 하신 건이요.”

    “열 명 정도로 추렸다고 했잖아.”

    “네, 그런데 고대 신을 다룬 자료는 오래되어 훼손된 것이 대부분이라 접근이 제한된 경우가 많아서요.”

    희귀한 것은 언제나 귀한 대접을 받는다. 고대 신에 대한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접근이 제한되었단 말은 자료가 없는 건 아니란 말이지?”

    “네. 개인이 소유 중인 서적들은 최대한 값을 치른 다음에 연구 자료로 제공하고 있는데, 재단이나 기관에서 소유 중인 게 문제입니다.”

    신시아가 넘겨준 자료에는 각 재단이나 기관이 소유 중인 자료 목록이 정리되어 있었다. 아리아드네가 자료를 훑어보며 말했다.

    “재단이나 기관을 통째로 사들이는 건 어때?”

    “그것도 고려해 보긴 했는데 그렇게 되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만 그렇게 진행할까요?”

    신시아의 말대로였다. 그렇게 진행하다 보면 한두 계절을 넘기는 건 예사였다. 아리아드네는 빠른 결론을 원했다.

    “아니, 필요한 자료를 소장 중인 재단과 기관에 연구 지원을 하고 접근 권한을 얻어내는 쪽이 낫겠어. 그쪽이 빠르겠지?”

    연구 지원을 마다할 이유는 없을 테니까. 후원하는 학자 몇에게 자료 열람 권한을 달라는 것이 무리한 요구도 아니고.

    “네, 그럼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아리아드네가 손자국을 남겼던 창은 그새 말끔해져 있었다. 손에 닿았던 차가운 감각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머리에서는 루안의 얼굴이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아, 신시아. 그리고 새로운 신원이 필요할지도 몰라.”

    필요한 서류를 뒤적이던 신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왜냐는 물음은 하지 않았다.

    “네. 준비하겠습니다.”

    신시아는 담백한 태도로 그렇게 대답했다.

    “이십 대 중반의 남자와 일곱 살 정도의 여자아이.”

    “그럼 관계는 부녀로 할까요?”

    “동생이라기엔 나이 차가 좀 그런가?”

    “원하시는 대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혹시 모르니까 지낼 곳도 마련해 줘.”

    쓸 일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리아드네는 어떤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대강 마무리를 지은 듯 서류를 정리해 품에 안은 신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리고 엘바의 조사단 일부가 릭센으로 귀환했습니다.”

    “레이먼드에게 이야기는 들었어.”

    그렇지 않아도 레이먼드가 보낸 서신이 이틀 전 도착해 대략적인 상황은 파악하고 있었다.

    “만나 보시겠습니까? 책임자는 조셉입니다.”

    조셉은 엘바의 지옥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였다. 엘바에서 그 끔찍한 일을 겪었으니 쉬어도 좋으련만. 조셉은 아리아드네의 지원을 자처했다.

    “조셉이라…….”

    하지만 조셉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그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자리에서 일어나 신시아의 팔에 얹힌 서류 더미 일부를 제 팔로 옮겼다.

    “아, 그러실 필요는…….”

    신시아는 아리아드네가 제 짐을 나누어 든 것이 불편한지 종종거리며 쫓아왔다.

    “만나 봐야지.”

    아리아드네는 제 팔에 얹은 서류를 방을 지키고 선 시종에게 건네주었다.

    “조셉은 지금 어디 있어?”

    먼 길을 달려온 지원군을 만나 볼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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