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아리아드네는 청석궁 시녀의 도움을 받아 뜨거운 수건으로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었다.
시녀가 몸을 씻겠냐고 물어왔으나 거절했다. 편하지 않은 사람에게 몸을 맡기는 성미도 아닐뿐더러 어차피 곧 돌아갈 터였다.
아리아드네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루안이 일어나 다시 한번 사과했다.
“여러 가지로 불편하셨지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루안은 아리아드네에게 자리를 권하며 준비한 차를 따랐다.
“추우실 듯하여 차를 준비했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리아드네는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눈앞의 루안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검푸른 빛깔의 머리카락, 짙은 남색의 눈동자. 리카서스의 특징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무렉스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권속과 계약하게 되면 외형적인 특징도 비슷해지는 걸까?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난 무렉스와 루안은 남매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닮은 모습이었다.
“최근 엘바에서 일어난 일을 해결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공녀께서 이토록 영민하시니 메르디에스의 복입니다.”
“과찬이십니다. 곧 리카서스의 작위를 승계하신다지요? 전하처럼 현명한 분을 주인으로 섬기게 된 리카서스가 복이지요.”
루안은 이런 식의 사교 대화가 익숙하지 않은 듯 별거 아닌 칭찬에도 쑥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말씀 감사합니다.”
화젯거리가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루안은 분주히 대화를 이어 갔다. 하지만 이 선한 왕자는 사교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잠시의 정적도 견디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것이 안돼 보여 아리아드네는 결국 모르는 척 따라 주는 것을 포기했다.
“전하, 대화가 끊길까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리아드네의 말에 루안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화할 시간을 벌어 주려고 이러시는 것 알고 있습니다. 저도 저 둘을 방해할 생각은 없으니 전하께서 이렇게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렉스가 부러 루안과 자신을 내보낸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유진의 반응으로 보아 리카서스의 성물은 그가 찾던 것이 아닌 듯했다.
하지만 무렉스가 유진에게 보인 반응과 유진이 무렉스에게 한 행동으로 보아 둘 사이에 얼마간 대화가 필요하리란 생각도 들었다.
단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고집스럽게 자신을 외면하던 유진의 모습이었다.
유진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가 찾는 무언가와 닿아 있을지도 모를 무렉스라는 존재 때문에 예민해진 것도 이해했다.
그래도 조금쯤은 의지해 줘도 좋으련만. 내내 혼자 끌어안고 버티는 것이 걱정되고 서운했다.
순식간에 의도를 간파당한 루안은 더 이상 억지로 화젯거리를 만들어 내지 않았다. 다만 렉사가 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 아쉬운 듯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시무룩해진 루안을 달랠 겸 웃으며 말했다.
“전하와 많이 닮았어요.”
“네?”
“렉사와 전하가 많이 닮았던걸요.”
“아니, 그럴 리가요. 렉사가 얼마나 귀여운데요.”
아니라고 하면서도 자신과 닮았다는 이야기가 기분 나쁘지 않은 듯 루안은 풀어진 얼굴로 렉사의 자랑을 늘어놓았다.
렉사의 이야기를 시작하자 몰라보게 생기가 도는 루안의 모습이 귀여웠다. 한참 렉사의 자랑을 늘어놓던 루안이 멋쩍은 얼굴로 물었다.
“많이 놀라셨죠?”
“신의 권속이 정말 존재했다니 놀랐어요.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은 더 놀랍지만요.”
아리아드네의 대답에 루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저도 렉사를 처음 보고는 일주일 내내 밤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잠에서 깨고 나면 이게 다 꿈일까 봐요.”
어린 루안에게 그 만남이 얼마나 경이로웠을지 능히 짐작되었다.
“아직도 가끔 렉사를 처음 본 날의 꿈을 꿉니다. 검푸른 머리카락을 발끝까지 늘어트린 채 널 리카서스의 다음 주인으로 삼겠다, 그렇게 말하던 렉사를. 어쩌면 저는 그때 렉사에게 반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루안이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그에게서 숨길 수 없는 애정이 자연스럽게 새어 나왔다. 선하고 따뜻한 품성에 어울리는 포근한 애정이었다.
“렉사도, 전하도 서로를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루안의 얼굴이 울음을 참는 것처럼 일그러졌다.
“저는 렉사와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기묘한 말이었다. 이별을 확신하는 것처럼.
“한 대에 한 명이라면 평생 함께하시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루안 다음 대의 계약자가 나타난다 해도 서로 보지 못하는 것도 아닐 텐데……. 순간, 아리아드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테티스의 권속인 렉사가 2왕자 곁에 있는데 그가 죽었어? 대체 어떻게?’
그리고 마치 그 생각을 들은 것처럼 루안이 대답했다.
“공녀, 저는 곧 죽을 겁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던 얼굴은 성자의 것처럼 초연하기만 했다.
“전하, 그게 대체 무슨…….”
“별의 예언을 아십니까?”
별의 예언이란 케이루스의 성물인 별의 그릇이 케이루스 왕족들에게 내리는 축복이었다.
“별의 축복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리아드네의 대답에 루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선왕 크리스티안 폐하께서는 별의 예언 때문에 몰락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것이 축복이겠습니까.”
선왕 크리스티안의 실정은 케이루스의 성물이 내린 예언으로부터 기인했다. 자신의 딸이 유례없이 강한 왕이 되리란 예언에 미친 왕은 고립무원을 자처했다.
“제가 들은 예언은 이것이었습니다.”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제가 들은 예언을 읊었다.
‘머지않아 진정한 끝이 오리니 네 죽음이 그 시작을 알리리라.’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덧붙인 루안은 잔잔한 어투로 말을 이어 갔다.
“왜 별의 그릇이 내리는 예언은 모두 그 자신의 죽음에 관한 것일까요?”
별의 예언에 그런 비밀이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선왕 폐하께서 들은 예언은 폐하의 죽음 뒤에 진정한 왕이 나타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제 딸이 유례없이 강한 왕이 되리라는 예언이라 해석한 것은, 크리스티안 폐하의 바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라도 믿고 싶었을 겁니다. 자신의 죽음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루안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처럼 시종 담담했다. 이야기를 듣는 것뿐인 아리아드네조차 이렇듯 혼란스러운데.
“왕가의 사람들은 그 예언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지만 결국 그 발버둥조차 예언으로 향하는 거름이 될 뿐입니다.”
아리아드네는 제 발밑이 진흙 구덩이 속으로 푹푹 빠지는 기분이었다. 켜켜이 쌓인 절망이 그녀를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예언에서 말하는 진정한 끝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제가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하고, 그것이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결말과 다르리란 것은 압니다.”
하지만 정작 진흙 구덩이에 빠진 당사자는 저토록 태연했다. 아리아드네는 루안을 볼 때마다 느꼈던 그 초연함의 정체를 이제야 깨달았다.
“케이루스의 성물이 왕족들에게 내리는 것이 저주라는 것이 알려지면 케이루스가 어찌 멀쩡하겠습니까. 그러니 축복이라 표현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어쩌면 저에게만은 그것이 축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루안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모든 욕심을 버렸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 루안에게 권력 따위가 무슨 의미를 지녔겠는가.
“제 끝이 그러할 것을 알아 저는 모든 욕심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제 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아 저는 제게 소중한 것을 아낄 수 있었습니다.”
렉사를 보던 그 말갛던 웃음이, 렉사와 함께할 때면 별처럼 빛나던 눈이, 그 포근한 애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니.
아리아드네는 가슴을 찌르는 듯한 둔통을 느꼈다. 선하고 사람 좋은 이 왕자가 오래도록 살아 제 지난 잘못을 씻어 주었으면 했다.
“전하, 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왕가의 비밀이 아닙니까?”
아니면 제게 말하지나 말 것이지. 아리아드네는 터져 나오는 뜨거운 숨을 삼켰다. 제게 이토록 큰 짐을 안기고도 여전히 사람 좋은 얼굴을 한 왕자는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렉사가 많이 기다렸습니다. 최근 들어 그렇게 들뜬 모습은 처음 보았습니다.”
루안은 렉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쁜 듯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렉사의 외로움은 너무 깊어서 저만으로는 안 되나 봅니다.”
리카서스란 이름이 이어져 온 것은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이었다. 렉사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홀로 견뎌 왔는지 루안조차 알지 못했다.
“제가 죽은 뒤에도 가끔 렉사를 찾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자신이 죽어도, 렉사에게는 또 다른 계약자가 생길 테지만. 그래도, 그래도…….
“다른 욕심은 다 버렸는데, 렉사만은 제가 없어도 계속 웃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것은 다 버려도 그 마음만은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 * *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땅이었다.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질척질척한 잿빛 세상에 점처럼 박힌 새까만 어둠. 그곳에 한 여자가 묶여 있었다. 겁에 질린 붉은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나쁜 짓을 하려는 게 아니다. 너 같은 이는 꿈도 꿀 수 없는 높은 지위를 준대도.
마치 천사처럼 달콤한 목소리가 여자 위에서 속삭였다. 여자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황금을 녹인 듯한 금발, 에메랄드 같은 녹빛의 눈동자. 목소리의 주인공은 교황의 정부이자 랭스턴 공작가의 적녀인 루이제였다.
루이제가 뾰족하게 갈린 손톱으로 여자의 얼굴을 긁어내렸다. 손톱이 지나간 자리에 가느다란 실선과 함께 핏방울이 맺혔다.
여자는 쓰라림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여자를 더욱 두렵게 하는 것은 아픔이 아닌 공포였다.
루이제의 손톱이 이번에는 여자의 입술을 긁어내렸다. 여자는 루이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얼굴을 흔들었다.
이번에는 악귀 같은 손아귀가 여자의 턱을 잡아챘다. 루이제가 여자의 입을 억지로 벌렸다. 긴 손톱이 거친 볼을 파고들었다. 여자는 입을 다문 채로 발버둥 쳐 보았으나 악귀 같은 손아귀에 지고 말았다.
여자의 입에 ‘그것’이 밀어 넣어졌다. 여자는 삼키지 않으려 구역질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기껏 먹인 그것을 뱉지 못하도록 루이제가 두꺼운 천으로 여자의 입을 막았다.
여자의 붉은 눈동자에서 피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칼로 에는 것 같은 차가운 바람에 눈물은 얼음이 되어 얼굴을 찔렀다.
―먹어. 그럼 다 편해져. 너도, 그리고 나도.
그토록 발버둥 쳤건만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여자는 입 안에 든 그것을 삼키고 말았다. 여자는 짐승 같은 울음을 토해 냈다. 결국, 여자는 괴물이 되고 말았다.
디움 산맥과 맞닿아 있는 살리바는 겨울이 빨리 온다.
아그네스는 추적추적 내리는 진눈깨비를 보며 그곳을 떠올렸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죽음의 땅, 아르체. 그곳에서 아그네스는 다시 태어났다.
비와 섞여 내리는 눈이 도시를 온통 회색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언제 보아도 참으로 지저분하고 우울한 색이 아닌가.
“성하, 이렇게 되면 엘바를 메르디에스에 통째로 넘겨준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꼬장꼬장한 노인의 목소리가 내실 가득 울려 퍼졌다.
아그네스는 창밖을 보던 몸을 돌려 저에게 목소리를 높이는 노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팡이에 의지한 몸을 꼿꼿하게 세운 노인이 아그네스의 한참 아래에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얗게 센 정수리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노인의 이름은 바실리오. 한 달 전, 성 상티모니아의 최고 의결 기구인 멘술라의 새 의장이 된 이였다.
“엘바가 메르디에스의 땅이더냐? 바실리오.”
아그네스가 느릿하게 발을 끌며 단 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황금 보화로 치장한 교황의 성좌였다.
아그네스는 파리한 손가락으로 주먹만 한 보석이 박힌 성좌의 팔걸이를 느릿하게 쓸었다. 참으로 성스럽고도 세속적인 물건이었다.
“실종된 사람들을 모두 찾을 때까지 머무를 수 있다는 말은 결국 ‘영구히’라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바실리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불만스레 터져 나왔다.
“그래, 언제든 드나들 수 있지. 하지만 엘바를 메르디에스에 개방한다는 것이 엘바를 넘긴다는 의미는 아니다. 엘바는 너무 폐쇄적이야. 이번의 이 사달도 엘바의 폐쇄성에서 기인한 게지.”
귀먹은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저리 시끄러운지. 아그네스는 성가신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랭스턴이 엘바를 왜 그토록 숨겼는지 정녕 모르십니까? 그곳은 황금의 주인이 가호를 내린 땅. 반드시 성 상티모니아의 권역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귀찮다는 듯 아예 눈을 감아 버렸던 아그네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검은 속눈썹 아래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열렸다.
“랭스턴의 피를 이은 자가 없다면 그 가호 또한 무용한 것. 랭스턴의 피를 이은 자라면 개새끼 한 마리 남기지 말고 모두 죽여라.”
서늘한 목소리가 얼음처럼 떨어졌다. 아그네스의 명에 놀란 바실리오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성하, 그리 결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아직 피아를 구별하지 못하는 아이 몇을 살려 성하의 아래에 두고 황금의 가호를 성하의 힘으로―”
한 손을 들어 바실리오의 말을 막은 아그네스가 천천히 단 위에서 내려와 그대로 바실리오의 지팡이를 걷어찼다.
지탱할 것을 잃은 노인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그네스가 검지로 바실리오의 턱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바실리오, 네 혀를 먼저 뽑아 주랴?”
바실리오는 교황의 새빨간 눈동자를 마주할 수 없어 질끈 눈을 감았다. 성 상티모니아 최고 의결 기구인 멘술라의 의장을 이렇게 대한 교황은 없었다.
하지만 바실리오는 정당한 항의는커녕 제 목이 그 자리에 붙어 있기만 바랄 뿐이었다.
한 달 전 멘술라의 전 의장 도미니코는 시몬과 결탁해 마물을 만들어 냈다는 죄명으로 처형당했다. 그 시신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엘바의 일로 아그네스를 적대하던 세력이 일시에 사라지고, 바실리오처럼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던 자들이 중용되었다. 바실리오를 놓아준 아그네스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대로 죽으면 그 아이들도 다시 태어나 새로운 시작을 하겠지. 하지만 그 피를 탐내기 시작하면 죽어도 죽은 게 아닌 게야. 시몬처럼 멍청한 미치광이라면 차라리 낫지. 영악한 미치광이가 나타나면 그때는 어찌하겠느냐? 시몬이 조금만 똑똑했어도 이렇게 쉽게 끝났을 일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금의 가호를 이대로 버릴 수는 없었다. 그것은 신을 섬기는 자로서 씻을 수 없는 대죄를 짓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모시는 신은 멀리 있고, 피의 교황이 지닌 권세는 막강했다. 아그네스에게 거역할 용기는 없었다. 바실리오는 침통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시체는?”
멀어진 아그네스가 물었다. 지팡이를 쥐고 자리에서 일어난 바실리오가 답했다.
“서쪽 숲 해안 폭포로 떨어졌습니다. 시체를 찾는 것은 불가합니다.”
처음부터 바실리오의 대답이 듣고 싶었던 것은 아닌 듯 아그네스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느릿한 걸음으로 선대 교황의 초상화 앞에 섰다.
선대 교황인 테오도로 3세는 그녀의 생부이기도 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테오도로의 초상화를 보던 아그네스가 다시 물었다.
“늙은 사자는?”
“지하 감옥에 있습니다.”
“아직도 제 아들이 자신을 구하러 돌아올 거라 외친다더냐?”
“그것이 대부인의 마지막 희망 아니겠습니까?”
테오도로의 초상화를 보고 있던 아그네스가 싸늘한 얼굴로 바실리오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제 실수를 깨달은 바실리오가 두려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인을 그리 부르나? 바실리오.”
송곳처럼 날카로운 질책이 내리꽂혔다.
“아직도 그 여자가 이 살리바의 안주인이고, 네가 모셔야 할 사람인가?”
바실리오는 선대 교황인 테오도로의 충복 중 하나였다. 바실리오는 평생을 테오도로의 정부인 루이제를 안주인 모시듯 모셨다. 오래된 습관은 쉬이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제가 부주의했습니다.”
“아직도 네 주인은 죽은 영감인 모양이야.”
웃음기 섞인 목소리였다. 바실리오는 그것이 더 두려웠다. 느릿하게 끌리는 발소리가 점차 바실리오에게로 다가왔다. 그가 질끈 눈을 감은 순간이었다.
“아, 어머니.”
그에게는 구원이나 다름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아트리스.”
아그네스가 한숨을 내쉬며 바실리오에게 나가라며 손짓했다. 바실리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꽁무니를 내빼듯이 교황의 내실을 빠져나갔다.
아그네스가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는 바실리오를 보며 피식 웃었다.
‘노인이 재빠르기도 하지.’
툭툭, 잎을 채운 파이프로 테이블을 두드린 아그네스가 베아트리스에게 물었다.
“내가 널 불렀던가?”
“부르진 않으셨지만…….”
고개를 숙인 베아트리스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용기를 짜내어 입을 열었다.
“엘바에서 큰일이 있었다 하여서, 유진도 그렇고 아리아드네도 아무 일 없는지…….”
괜찮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다. 물어봐도 다들 ‘괜찮다.’, ‘아무 일도 없다.’, ‘성녀님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 그렇게만 말했다. 저만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아그네스가 파이프를 깊게 빨아들였다. 흰 연기가 아그네스의 붉은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둘 다 무사하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것은 레지나에게 물어라.”
성 상티모니아의 수석 사제 레지나는 베아트리스의 훈육과 시중이 주 업무 중 하나였다. 베아트리스가 태어나 처음 안긴 품도, 처음 부른 이름도 아그네스가 아닌 레지나였다.
하지만 베아트리스의 외로움을 채우기에 레지나만으로는 부족했다.
아그네스가 빨아들이는 파이프에서 발간 불빛이 피어났다. 늘 무서웠던 붉은빛이 오늘따라 따스하게 느껴졌다.
망설이던 베아트리스가 용기를 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시몬이 죽었다는 말도 사실―”
“그것은 네 알 바 아니다. 알려 주는 것만 알면 충분하다고 내 늘 말하지 않았니?”
싹둑 잘린 질문의 끝이 서러워 베아트리스는 소매 끝을 잡아당겼다.
또, 또 저 소리. 언제까지 들려주는 것만 듣고, 보여 주는 것만 봐야 하는 걸까. 제 발로 갈 수 있는 곳도, 제 손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성도를 벗어나면 제 혼자 힘으론 단 하루도 살 수 없을 거다.
‘나는 어머니의 인형이 아닌데…….’
차오르는 눈물로 베아트리스의 눈앞이 흐려졌다. 심지어 자신은 인형조차 되지 못했다. 아그네스에게 자신은 귀찮기만 한 존재였으니까.
베아트리스가 뚝뚝 눈물을 흘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그네스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지나를 그냥 두어선 안 되겠구나.”
그 말에 퍼뜩 정신이 든 베아트리스가 아그네스에게 매달렸다.
“아, 아니에요. 어머니. 제가, 제가 떼를 써서…….”
레지나가 제 사람이 아니라 어머니의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 해도 베아트리스 곁에 있어 준 건 레지나뿐이었다.
“부디 레지나를 벌하지 마세요.”
베아트리스는 레지나마저 잃고 싶지 않았다. 아그네스가 눈물을 흘리는 베아트리스의 얼굴을 닦아 주며 말했다.
“베아트리스, 모든 것은 네 하기 나름이다. 알겠니?”
베아트리스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언제나 베아트리스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온전히 제 편이 되어 줄 사람도, 혼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도 아니었다.
‘어머니, 제발 저를 버리지 마세요. 어머니께 쓸모 있는 딸이 될게요.’
베아트리스는 아무도 듣지 못할 기도를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