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148)

* * *

아리아드네가 제 손바닥을 눈높이에 맞추어 들어 올린 채로 그것의 모양새를 요모조모 살폈다. 길쭉한 주둥이, 꼿꼿하게 선 몸체, 도르르 말린 꼬리, 말처럼 생긴 머리. 영락없는 해마였다.

“아, 그러니까 ‘무렉스의 호른’의 무렉스가 여기 이 해마라는…….”

“해마가 아니래도! 이 몸은 바다를 다스리는 위대한 신 테티스의―”

“시끄러우니까 그만 쫑알대.”

아리아드네의 말은 무렉스에게 막혔고, 무렉스의 말은 다시 유진에게 막혔다.

무렉스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것이 유진의 반응에 길길이 날뛰었다. 제아무리 신의 권속이라 한들 외양이 저래서야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이 몸이 친히 너를 상대해 주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지는 못할망―”

유진이 아리아드네의 손바닥 위에서 길길이 날뛰는 무렉스를 엄지와 검지로 집어 올렸다. 그는 당장이라도 집어 던질 것처럼 냉랭한 목소리로 해마― 아니, 무렉스에게 말했다.

“또 던져 줘?”

무렉스가 유진의 손가락 사이에서 몸부림을 치며 고래고래 노성을 질렀다.

“이노옴! 놔라, 놔! 놓으래도!”

무렉스가 화를 낼 때마다 응접실 가득한 수조의 물들이 그에 맞추어 거세게 출렁였다.

“렉사, 이러지 마.”

두 손으로 무렉스를 감싼 루안이 다정한 어조로 달래듯이 말했다. 무렉스는 긴 주둥이로 루안의 손바닥을 쿡쿡 찌르며 거세게 반항했다.

“아야, 아파.”

루안이 눈가를 찌푸리며 엄살을 부렸다. 그는 마치 해마 열 마리쯤은 키워 본 사람 같았다. 떼쓰는 무렉스를 다루는 것이 이렇게 능수능란할 수가 없었다.

루안은 무렉스가 아무리 패악을 부려도 다정한 미소와 상냥한 어조를 잃지 않았다. 이쯤 되니 루안이 역대 리카서스의 주인 가운데서 무렉스에게 유독 사랑받는 이유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루안의 엄살에 무렉스도 발버둥을 그만두고는 몸을 바로 세웠다. 공중에 동동 뜬 그것이 몹시 거만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지금 심기가 매우 불편하노라.”

“먹을 거 줄까?”

“나는 배가 고픈 게 아니다!”

“알아. 꼭 배가 고파야 먹나? 새우 먹을래?”

해마가 아니라고 길길이 날뛰더니 먹는 건 해마랑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해마― 아니, 무렉스는 새우라는 말에 솔깃했는지 사나운 기세가 한풀 꺾였다.

“네 성의가 기특하구나. 그럼 가져오너라.”

루안이 줄을 당기자 곧 둥근 수반에 곡식의 낱알만 한 투명한 새우가 물에 담긴 채로 들어왔다.

시종이 나가자 루안의 손 안에 몸을 숨겼던 무렉스가 수반 안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한 것이 무색하게 무렉스는 긴 주둥이로 물과 함께 새우를 빨아들였다.

새우를 먹고 기분이 좋아졌는지 무렉스는 꼬리를 흔들며 수반을 헤엄쳐 다녔다.

“물 온도는 좋아? 따뜻해?”

“적당하구나.”

“다행이다.”

아리아드네는 무렉스에게 지극정성인 루안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말하는 것만 빼면 정말 해마랑 다를 것이 하나 없는데……. 해마치고도 좀 작은 거 아닌가? 새낀가?’

아리아드네는 제 새끼손가락을 들어 무렉스와 견주어 보았다. 저 성격 나쁜 해마가 신의 권속이라니. 눈앞에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신화가 진짜였어? 신의 권속이라니…….”

아리아드네의 혼잣말을 들은 무렉스가 비아냥대는 어조로 말했다.

“요정왕이 준 성물을 가진 주제에 그런 소리를 잘도 하는구나.”

“무량의 돌? 그걸 진짜 요정왕이 줬다고?”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리아드네가 상기된 어조로 물었다.

자라면서 자연스레 믿지 않는 쪽으로 기울긴 했지만 아버지가 들려준 요정왕과 메르디에스 시조의 이야기는 아리아드네의 유년을 지배했다. 한때는 그 무지막지한 크기의 무량의 돌을 제 방에 두고 싶어 했을 정도니까.

아리아드네의 반응에 마치 비웃는 것 같은 소리를 낸 무렉스가 수면 아래로 잠겼다 올라오며 말했다.

“그 성물이 정말 마르지 않는 부를 주는지는 나도 모르겠다만, 요정왕이 메르디에스에 뭘 줬다는 건 사실이다. 뭘 줬는지까지는 몰라도.”

무렉스가 꼬리를 흔들며 덧붙였다.

“생명을 구해 준 대가이니 나쁜 것은 아니겠지.”

새삼 무렉스가 신화 속의 존재라는 것이 실감 났다.

“그럼 리카서스는 무얼 줬기에…….”

메르디에스의 시조가 요정왕의 목숨을 구해 준 이야기는 어려서부터 지겹도록 들었다.

‘그럼 리카서스는 무렉스를 어떻게 만났을까?’

아리아드네는 마치 열 살 아이로 돌아가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상기된 아리아드네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무렉스가 픽,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리카서스는 내게 피를 바쳤다.”

아리아드네는 제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얼어붙은 정적이 제가 들은 것이 사실임을 실감하게 했다.

무렉스는 얼어붙은 정적을 음미하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리카서스의 문을 연 그자는 내게 자자손손 제 피를 이은 자들을 모두 바칠 테니, 저를 도와 달라 했지.”

그러고 보면 옛날이야기 중에 꼭 저런 사람들이 있었다. 탐욕으로 똘똘 뭉쳐 한 치 앞도 못 보는 사람이.

아리아드네는 순식간에 동화에서 현실로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나는 한 대에 한 명에게 내 힘을 빌려주는 대신 리카서스의 피를 이은 자들을 부릴 권리를 얻었다.”

무렉스는 이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했다.

“피로 이어진 계약이니 리카서스의 피를 타고난 이상, 계약을 무를 방법은 없지. 아무리 저 잘난 인간이라 해도, 타고난 피를 바꿀 수야 없으니까.”

아리아드네도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한 적 있었다. 성물의 선택 따위 받았다고 치면 안 되나? 압도적인 세력을 가지고 누르면 그 정도 거짓을 꾸며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가문 내의 일이라면 더 그랬다.

하지만 무렉스의 말대로라면 칼이 그토록 압도적인 세력을 가지고도 리카서스를 쥘 수 없었던 이유가 모두 설명된다.

“이건…….”

아리아드네는 뒷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삼켰다. 힘을 얻기 위해 한 계약이 족쇄가 되어 버렸다.

‘이래서야…….’

하지만 아리아드네가 삼킨 말은 무렉스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왔다. 무렉스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다섯 가문의 주인을 이르는 말을 줄줄 읊었다.

“메르디에스의 성주(城主), 케이루스의 제주(祭主), 소르체의 가주(家主), 리뮈르의 대주(祋主) 그리고 리카서스의 예주(隸主).”

각 가문의 주인을 이르는 말은 모두 달랐다.

메르디에스는 가장 유서 깊은 성을 지녔다 하여 성주라 칭하였고, 케이루스는 하늘의 제사를 주관하니 제주라 불리었으며, 영지 전체가 하나의 가계를 이루고 있는 소르체는 가주, 디움 산맥으로부터 페렌트를 지키는 리뮈르는 대주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하지만 리카서스의 예주란 말만큼은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지 그 의미를 알기 어려웠다.

“그래, 노예 중 으뜸이란 말이 아니냐?”

무렉스에게 표정이 있다면 뿌듯한 미소를 지었을 법한 말투였다.

페렌트의 다섯 기둥이라 불리는 리카서스였다. 그런데 그 가문의 주인을 이르는 말 자체가 무렉스의 노예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니. 아리아드네는 자신까지 바닥으로 끌어내려진 기분이었다.

“힘이 탐난다고 제 피를 이은 자들을 모조리 노예로 바친 자가 바로 리카서스의 시조다.”

무렉스는 인간의 탐욕을 꾸짖는 것 같기도 했고, 그 어리석음을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무렉스가 꼬리를 흔들며 루안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루안, 억울하지 않으냐?”

“응?”

막 산호와 수초를 집어 든 루안이 제 앞에 다가온 무렉스 주위에 손에 든 것들을 둘러 주었다. 루안은 무렉스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처럼 굴었다. 그는 산호와 수초 따위로 무렉스를 꼭꼭 숨기는 것에만 열중했다.

“감쪽같다, 렉사! 숨어 있는 거 좋아하잖아.”

산호와 수초를 잔뜩 놓아두자 새끼손가락만 한 해마 따위는 금세 파묻혔다. 루안은 그것을 보고 아이처럼 좋아했다.

“흥, 누가 이런다고 좋아할 줄 알고?”

수풀 사이에서 뾰로통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수풀을 감은 채 흔들리는 꼬리를 보니 좋아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루안이 저토록 아무렇지 않으니 심각해진 자신이 도리어 우스웠다. 아리아드네는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무렉스를 불렀다.

“렉사?”

“무렉스 님.”

무렉스가 냉큼 호칭을 정정하고 나섰다. 아리아드네는 대수롭지 않게 원하는 대로 불러 주었다.

“무렉스 님, 근데 난 왜 같이 보자고 한 거야?”

그렇다고 원하는 대로 다 맞춰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저, 무엄한! 네 오늘 후회할 일을 여럿 하는구나.”

무렉스가 꼬리로 수면을 세차게 내리치며 아리아드네에게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 모습에 위협을 느끼기엔 무렉스의 외형이 너무 하찮았다.

유진이 ‘무렉스의 호른’을 쉽게 볼 거란 사실은 아리아드네도 이미 알고 있었다.

‘무렉스의 호른’을 보기 위한 조건은 성물의 허락. 그것이 신의 권속인 무렉스의 의지라는 것까지는 몰랐으나 아리아드네가 아는 과거에도 유진은 무리 없이 리카서스의 성물을 보았다. 실상을 알고 나니 신의 권속인 무렉스가 이계의 존재인 유진을 흥미로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나는 왜 보자고 했을까.’

아리아드네에게는 무렉스가 흥미로워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루안이 두 손에 물을 담아 꼬리로 분노를 표현하는 무렉스의 몸에 졸졸 흘려보냈다. 무렉스는 제 몸에 흐르는 물이 기분 좋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한결 기분이 좋아졌는지 무렉스가 수면을 오르락내리락 넘나들었다.

“흐으음, 메르디에스의 딸아, 너 최근에 이상한 일을 겪지 않았느냐?”

‘이상한 일? 최근 겪은 이상한 일이 한두 개여야 말이지.’

아리아드네는 그중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일까 생각하다 섬광처럼 한 가지 일을 떠올렸다.

과거로 돌아온 것. 그것보다 더 이상한 일은 없었다. 아리아드네가 놀란 얼굴로 무렉스를 바라보았다.

“그런 눈으로 봐도 말해 줄 건 없다. 네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도 모르니까. 다만 네게 심상찮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만 알겠구나.”

해마의 표정 따위 읽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아리아드네는 자신을 보는 무렉스의 얼굴이 마치 비웃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웬 머저리 같은 것이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고 있으니 내 어찌 너를 보지 않고 배겨.”

아리아드네는 무렉스의 말에 저도 모르게 유진을 바라보았다. 내내 불쾌한 듯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유진이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아까 지껄인 거 다 무슨 소리야?”

유진의 물음에 무렉스는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무렉스는 마치 노래를 하는 것처럼 음절마다 음계를 붙여 가며 흥얼거렸다.

“외로움에 미친 추악한 짐승, 실패한 염원을 포기하지 못하는 미련퉁이, 제 반쪽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장님, 심장이 파먹히고 껍데기만 남은 머저리. 왜 더 말해 주랴?”

무렉스는 말을 마치고도 키득키득 웃으며 비아냥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서둘러 따라 일어선 루안이 그를 막아서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크게 힘들이지 않고 루안을 옆으로 치운 유진이 수반에 있던 무렉스를 손가락으로 집어 올렸다.

“더 해 봐.”

“왜? 궁금해? 제 속에 누가 들어앉았는지도 모르는 멍청한 족속아.”

무렉스는 조금도 겁먹지 않고 계속해서 이죽댔다. 유진이 그런 무렉스를 내려다보며 비웃듯이 말했다.

“그러는 넌, 네 위대한 신은 어디 가고 너만 이 땅에 남았지? 버림받았나?”

그건 물음이 아니었다. 확신이었다.

무렉스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응접실 안의 수조들이 세차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수조 안에 든 물이 출렁이며 수조 밖으로 흘러내렸다. 이제껏 부린 화는 거짓이었던 것처럼 무렉스에게서 거센 분노가 일시에 터져 나왔다.

“그분은! 그분께서는!”

“널 버린 그분은.”

무렉스가 거친 목소리로 내지르는 고함을, 더없이 침착한 목소리의 유진이 정정하는 것처럼 받아쳤다.

“아니, 아니!”

무렉스의 사나운 부정과 함께 방 안의 물들이 성난 파도처럼 몸을 일으켰다.

“널 버리고 떠난 이를 아직 그리나? 어리석게.”

“그럼 잊어? 제 몸에서 뼈와 피와 살을 떼어 내 몸을 만들고, 그 몸에 영혼을 심어 주신 분을 그럼 잊어?”

성난 파도처럼 몸을 일으킨 물이 유진을 잡아 삼킬 듯이 덮쳤다. 하지만 그 물은 유진에게 닿기도 전에 다시 수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무렉스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가닥가닥 흘러나왔다.

“내 근원을 잊지 못하는 것이 어리석다 했나? 네가? 네가? 네가!”

무렉스의 분노에 찬 고함과 함께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수적(水滴:물방울)이 공중에 나타났다. 공중에 나타난 검푸른 빛깔의 물이 무렉스 주위를 맴돌았다.

무렉스에게서 흘러나온 검은 연기가 점점 짙어져 그 주변을 완전히 감쌌다. 이윽고 공중을 떠다니던 수적이 무렉스를 둘러싼 검은 연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졌다.

물이 사라진 자리에는 검푸른 빛깔의 머리카락을 가진 예닐곱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새하얗고 통통한 볼이며, 앙증맞은 입술,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귀여운 어린아이의 외형이었으나,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라는 것은.

다른 것은 전부 그림인데 그 아이만 툭 튀어나온 조각 같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이질감이 느껴졌다.

“렉사, 그러지―”

“닥쳐라, 루안.”

만류하는 루안마저 밀어낸 그것이 유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나를 모욕하는 것도 모자라 감히 그분을 욕되게 하다니. 내 오늘 너를 결―”

그리고, 여자아이의 형상을 한 무렉스가 유진을 향해 손을 내지른 순간이었다. 응접실 천장에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갑자기 쏟아졌다.

별안간 닥친 일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흠뻑 젖었다. 뚝뚝, 무렉스의 검은 머리에서도 물이 떨어져 내렸다.

분노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무렉스가 휙 고개를 쳐들었다. 두 손에 무렉스의 호른을 들고 있던 루안이 멈칫 뒤로 물러났다.

“루안, 너어어어!”

아이의 모습을 한 무렉스가 루안에게로 달려들었다. 루안이 저를 향해 달려든 무렉스를 꼭 끌어안았다.

“미안, 네가 다칠 것 같았어.”

무렉스는 루안의 품에 안긴 채로 무엇이라 말하며 버둥거렸으나 소리가 반쯤 먹혀 웅얼거리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렉사, 왜 더 어려졌어?”

루안의 물음에 꼼지락거리며 그 품에서 벗어난 무렉스가 불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린 쪽이 더 귀엽지 않으냐?”

루안이 흠뻑 젖은 무렉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렉사는 어떤 모습이라도 귀여워.”

무렉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흠뻑 젖은 아리아드네를 힐끗 본 무렉스가 말했다.

“루안, 메르디에스의 딸에게 갈아입을 옷을 줘야겠구나.”

“응? 아, 그렇지.”

무렉스의 말에 놀란 듯 퍼뜩 고개를 든 루안이 아리아드네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메르디에스 공녀. 옷을 갈아입으실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리아드네는 물로 난장판이 된 응접실을 둘러보았다. 시선의 끝에 유진이 걸렸으나, 그는 무렉스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다녀올게.”

머리카락을 모아 물기를 한번 짜낸 아리아드네가 루안을 따라 응접실을 나갔다. 응접실의 문이 닫히고, 유진과 무렉스 둘만 남은 공간에는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렉사는 손을 휘둘러 제 몸의 물기를 날렸다. 제가 끌어온 물이었다. 다시 돌려보내는 것이 어려울 리 없다. 그리고 이런 제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가 루안이었다.

“순하긴 해도 우둔한 아이는 아니니, 너와 천천히 이야기할 시간 정돈 있겠지.”

렉사가 흠뻑 젖은 유진을 보며 말했다.

“물어라. 내가 할 수 있는 답이 많진 않겠지만.”

유진은 젖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을 뒤집어썼더니 그나마 정신이 들었다. 저것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녹아내리는 듯한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분노가 식고 나자 그 감정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답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도 막막하기만 했다.

“신이라는 존재가 정말 이 땅에 있었나? 그것이 너를 만들었고?”

유진의 물음에 무렉스의 새까만 눈동자가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그 말을 하는 여자아이의 목소리는 마치 노파의 것처럼 피로했다.

“신이 부리는 권속은 신의 일부다. 신께서 제 몸의 일부를 떼어 몸을 만들고, 제 권능을 불어 넣어 영혼을 심지.”

허공을 보는 렉사의 눈동자는 나뭇잎이 모두 떨어진 맨 가지처럼 버석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권속은 근원으로부터 분리된 슬픔을 안고 태어난다. 모든 권속이 지니는 가장 강렬한 소망은 자신을 만든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니 권속에게 그 몸과 영혼을 만든 신이란 잊을 수도, 원망할 수도 없는 존재다.”

렉사는 자신을 감싸고 있던 가시를 벗은 듯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바다를 다스리는 위대한 신 테티스의 마지막 권속 무렉스, 마지막이란 말은 처음이 존재한다는 말이었다.

“마지막 권속이란 말은 네 주인에게 너 말고 다른 권속도 있었단 말인가?”

유진의 물음에 렉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몸의 일부를 떼어 만드는 것이니 신이라 해도 무한정 권속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위대하고 강한 신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권속을 가지나, 미약하고 약한 신은 그렇지 못하다. 그리고 신들은 언제나 처음 만든 권속에게 가장 많은 공을 들이지.”

말을 마친 렉사가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

“네 주인은 이 땅을 떠났나?”

유진이 물었다.

“나를 만들어 준 그분은 해신의 수많은 딸 중 하나였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마지막 권속이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나약하고 미미한 존재.”

“정말 너를 두고 떠난 주인을 원망하지 않나?”

렉사는 손가락을 들어 허공에 띄운 물줄기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분께서 아무 도움이 안 되는 무능한 권속 따위를 이 땅에 버리고 갔다 하여, 나를 만들어 준 그분을 어찌 원망하겠나. 네 손이나 발이 너를 원망하더냐? 내가 만들어진 순간부터 내 운명은 결정된 셈이지. 내 존재가 멸할 때까지 오직 그분만을 그리워하고 슬퍼하도록.”

대답을 들은 유진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별 거지 같은 관계도 다 있군.”

렉사는 그 말을 하는 유진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한참이고 바라보았다. 그것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는 이상하다.”

웃음은 곧 사라졌다.

유진이 렉사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새까만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저 속에 비친 남자가 정말 자신인가? 그는 그것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

“나는 뭐지?”

그 질문은 내내 유진을 괴롭혔다.

“그건 내가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어떤 생명도 살지 못하는 죽음의 땅, 그곳에 가면 알게 될지도.”

“그곳에는 뭐가 있지?”

“아무것도.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나?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땅이라고.”

그 말을 들은 유진은 오히려 길을 잃은 사람처럼 가만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곳으로 떠나면 그러면 알 수 있을까. 그토록 갈구하던 제 시작을.

하지만…….

―나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것 같은데.

그녀가 입 맞춘 자리가 불에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어쩌면, 하는 기대를 품었다. 자신도 어딘가에, 누군가에 속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겨우 발견한 희망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 시작을 알고 싶다는 오랜 열망은 그녀의 곁에 남고 싶다는 새로운 희망 앞에서 빛을 잃었다.

렉사는 마치 그의 망설임을 모두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덧붙였다.

“때론 알지 못하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네 무지 또한 네 선택의 결과. 굳이 기억을 되찾으려 할 필요가 있나?”

유진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존재의 이유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제 기억을 찾는 것을 잠시 미룰 수는 있어도, 영원히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기억을 찾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너는 네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지울 텐가?”

유진의 물음에 렉사 또한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모든 것을 안고 소멸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운명이다.”

신의 힘으로 태어난 자신에게 망각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 끝도 얼마 남지 않았고.”

그나마 끝이 있다는 것이 다행인가.

“불멸의 영혼을 가진 것은 오직 인간뿐, 나에겐 주어진 수명이 없을 뿐이지 그 끝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소멸의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시간이었다.

“외로워서 미쳤던 게지. 인간의 몸으로 지내는 것이 내 명을 얼마나 깎아 먹는지 알면서도.”

정을 떼려고 아무리 모질게 굴어도 그 아이는 늘 웃는 얼굴이었다. 결국 지는 건 언제나 자신이었다.

―렉사라고 불러도 돼?

―뭐? 그분이 붙여 준 이름을 감히 네 마음대로 고쳐 부르겠단 말이냐?

―……안 돼?

―……한 번만이다.

―응. 렉사!

한 번만이라는 다짐은 렉사도, 루안도 지켜지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렉사, 새우 먹을래?

―이 몸은 위대한 테티스의 권속. 나는 무엇을 먹어야만 생을 이어 가는 열등한 존재와는 다르다.

―아, 좋아할 줄 알았는데…….

―……하지만 먹는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니까. 줘 보든가.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해마나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 속까지 그런 것은 아니니까. 그런데 루안이 주는 것에서는 단맛이 났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싸우는 게 싫어. 그런데 내 존재가 사람들을 싸우게 해.

―누가 널 귀찮게 하느냐? 내가 죽여 주랴?

―그런 무서운 말 하지 마. 렉사의 힘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거잖아.

―……내가 뭘, 어쨌다고?

―응. 책에서 봤어. 풍랑이 일었을 때 렉사가 사람들을 지켜 준 거! 납치된 아이들을 구하려고 파도를 일으킨 것도.

그저 계약에 따라 한 일이었다. 누군가를 지켜야겠다는 생각 같은 건 해 본 적도 없었다.

제가 한 일 중에는 인간의 기준으로 옳은 것보다 그렇지 못한 일이 훨씬 많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인간들의 일이야 제 알 바 아니니까.

루안이 읽었다는 책에 적힌 내용도 사실과는 달랐다. 저들 좋을 대로 이리저리 바꾼 내용은 과장되거나 왜곡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다 보니 앞뒤가 맞지 않는 것들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그 기록에 적힌 것 중 사실도 있었다. 강대한 힘. 신들이 보기엔 별거 아닌 힘이라도 인간에겐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때의 자신은 지금보다 부릴 수 있는 물도, 물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도 훨씬 많았다. 약해진 렉사는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너 정도는 지켜 주마.

―고마워, 렉사. 그럼 렉사는 내가 지켜 줄게.

―인간 따위가 신의 권속인 나를?

―그런가?

자신을 만든 신조차 너를 지켜 주겠노라는 말은 한 적 없었다. 처음 듣는 그 말은 제법 따뜻하고, 조금 슬펐다.

이전의 계약자들은 원하는 것이 있을 때만 무렉스를 찾았다. 그들은 자신의 힘을 빌리면서도 제가 마치 낫을 든 사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벌벌 떨었다.

하지만 루안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루안이 바라는 것은 그저 렉사와 함께 있는 것뿐이었다. 이번 계약자는 아무래도 좀 모자란 것 같았다.

―너는 친구도 없느냐? 인간들은 또래끼리 노는 걸 좋아하던데…….

―아무도 나랑 놀고 싶어 하지 않아. 아버지께서 무섭게 하시니까. 형님도 날 싫어하고.

―…….

―그래도 난 렉사가 있으니까. 난 렉사만 있으면 돼.

이상한 인간. 인간이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는 족속이다.

―렉사, 나 오늘 예언 들으러 간다.

―흥, 그따위 것.

그날, 루안은 케이루스의 성물로부터 예언을 듣는다며 들떠 있었다. 렉사는 루안이 다른 성물을 두고 들뜬 것이 싫어 툴툴거렸다. 지금 생각하니 그토록 멍청한 일이 또 있을까 싶지만.

“넌 성물을 본 대가로 소원 하나를 들어준다지?”

유진이 말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케이루스의 성물을 아느냐?”

그 말에 꽉 다물린 그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유진의 반응에 렉사는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너도 보았군. 나도 루안의 품에서 그 물건을 본 적이 있지. 그런 불길한 물건은 나도 처음 보았다.”

다시 떠올려도 끔찍한 물건이었다. 그런 불길한 것이 성물이라니. 그것은 귀물(鬼物)이라 불러야 옳았다.

“케이루스의 성물은 케이루스의 아이들에게 예언을 내린다. 저주와도 같은 예언을.”

그날 루안이 그 예언을 듣지 못하도록 막았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후회스러웠다.

“그것이 내리는 예언은 언제나 하나다.”

예언을 들은 인간은 그것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그 귀물이 알려 주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본인의 죽음. 루안은 곧 죽을 거다.”

그러니 축복이 아니라 저주인 거다. 예언을 들은 이들은 그 예언에 매여 파멸로 치닫게 되니까.

―렉사, 나 죽어?

예언을 들은 루안이 돌아와 처음 한 말이 그것이었다.

인간의 죽음이야 지겨울 정도로 지켜봤다. 그러니 루안이 죽는 것도 당연한 일이어야 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렉사는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어린 주제에 못 하는 말이 없구나.

―내가 그런 거 아닌데. 나 죽는다고 했는데……. 그럼 이젠 렉사도 못 봐?

렉사를 닮은 루안의 눈동자에서 방울진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렉사는 그날 청석궁 주위를 흐르는 해자의 물을 모두 날려 버렸다.

“그 예언을 믿나?”

유진이 물었다. 예언이니, 신이니, 권속이니 하는 그따위 것들은 조금도 믿기 싫다는 얼굴로.

“너도 보았으면 알 텐데.”

렉사도 그 예언이 루안만은 비껴가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것에 씐 강렬한 원념을. 그건 몇몇의 의지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하지만 거센 조류처럼, 휘몰아치는 폭풍처럼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렉사에게 소멸의 시기가 가까워진 것처럼.

“나는 얼마 남지 않았다. 다른 것은 상관없어. 내가 루안을 지키지 못하거든…….”

존재의 소멸이야 정해진 법칙이니 아쉬워할 것도 슬퍼할 일도 아니었다. 루안만 아니라면.

소멸이 가까워진 이때 루안을 만나게 된 것은 무슨 뜻이란 말인가. 렉사는 참담한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저 어린 것을 어찌 혼자 둘까.

“나더러 저 왕자를 지키란 말인가?”

“아무리 너라 한들 죽음으로부터 어찌 인간을 지키겠느냐.”

렉사는 감은 눈을 천천히 떴다. 눈을 감아도, 떠도 제 세상에는 오직 그 아이만이 가득했다.

“저 아이를 죽인 자를 죽여 다오. 그것이 내 요구 조건이다.”

‘내 너를 지키지 못한다면 네 복수라도 해야지.’

렉사는 루안의 죽음을 안 순간부터 그것을 대신해 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약속해 다오.”

말을 마친 렉사가 유진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오의 햇빛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빛을 받은 물방울이 반짝이며 렉사 주위를 맴돌았다.

“약속하지.”

이래서야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유진은 렉사의 요구를 승낙했다. 렉사는 마침내 제 오래된 근심을 털어 버릴 수 있었다.

“외롭지 않았나?”

유진은 마치 화석처럼 굳어진 눈동자를 보며 물었다.

“너무 긴 시간이었다. 어서 끝이 오기만을 바랄 정도로.”

렉사에게 후회, 미련, 외로움, 그런 것들은 너무 익숙하여 제 몸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익숙하다고 해서 그것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모두 순간에 지나지 않더구나. 지나간 시간이라 그런가. 외로움도, 슬픔도, 애정도 지나고 나면 점에 불과하니…….”

괜찮을 거란 말을 하려 했던가. 렉사는 제 어리석음에 고개를 저었다. 소멸을 눈앞에 둔 자신조차 고통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으면서.

―네가 리카서스의 아이냐?

―네, 루안이라고 합니다. 무렉스시여.

―내 마지막 계약자가 누가 될까 했더니.

―네?

―널 리카서스의 다음 주인으로 삼겠다. 무렉스의 호른은 이제 네 것이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루안을 처음 본 그날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바보 같은 얼굴로 선하게 웃던 내 마지막 계약자. 내 마지막 계약자가 그 아이인 것이 축복인지, 아니면 형벌인지 여전히 알 수가 없구나.’

렉사는 닳고 닳아 지친 유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사라지기 전에 너를 보게 되어 다행이다. 나의 이 기다림을 이해해 줄 존재는 너뿐이니까.”

유진의 눈에 비친 것이 정말 자신이 맞는지 이제는 렉사조차 자신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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