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148)
  • * * *

    녹주궁을 벗어난 아리아드네가 익숙한 걸음으로 왕궁 사이사이를 누볐다. 유진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아리아드네에게 손목이 잡힌 채로 끌려갔다.

    “왜 전에 무렉스의 호른에 관해서 말했던 거 기억나?”

    유진은 메르디에스의 서가에서 아리아드네가 보여 줬던 무렉스의 호른을 떠올렸다. 리카서스의 성물이라는 ‘무렉스의 호른’은 소라 껍데기처럼 생긴 뿔피리였다.

    “그 손바닥만 한 뿔피리?”

    성물이라는 게 왜 다들 하나같이 그 모양인지.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성물이라면 좀 더 엄숙하고 성스러운 그런 물건이어야 하지 않나?’

    성 상티모니아 최고의 성물이라는 카푸트는 잘린 머리였고, 마르지 않는 부를 준다는 메르디에스의 성물은 크고 거대한 돌이었다.

    그런데 바다를 다스린다는 성물마저 손바닥만 한 소라 껍데기라니. 좀 거대하기라도 하던가. 하나같이 엄숙하고 성스러운 느낌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유진의 어조에 담긴 황당함을 읽었는지 아리아드네도 작게 웃으며 말했다.

    “응. 그게 바로 리카서스의 성물인 무렉스의 호른이야.”

    몇 개의 궁을 지나 청람색으로 외벽을 칠한 궁 앞에서 멈춘 아리아드네가 느릿한 어조로 설명했다.

    “지금 국왕 폐하는 선왕의 동생이야. 선왕이 리카서스의 주도로 폐위됐거든. 당시 선왕을 폐위시키는 데 가장 앞장선 자가 바로 현 국왕의 배우자이자 당시 리카서스의 장자였던 칼 리카서스야.”

    왕후라는 남자의 초상화는 유진도 얼핏 본 적이 있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였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내의 눈동자였다. 그림일 뿐인데도 그 검은 눈동자에 넘쳐흐르는 음습한 야망과 집착이 느껴졌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종류의 인간이었다.

    “선왕이 실정으로 지켜 줄 세력을 잃자 칼 리카서스는 왕후(王侯)의 자리를 노리고 반정을 꾀했어. 결국, 그는 당시 왕녀였던 다그마르 폐하를 옹립하여 왕으로 만들었고, 왕과 혼인하여 왕후가 되었지.”

    아리아드네의 설명에 의아함을 느낀 유진이 걸음을 멈추었다.

    “리카서스의 후계자가 왜 왕후가 되려 하지?”

    다섯 가문의 연합체로 시작한 페렌트에서 다섯 가문의 수장은 그 무엇보다 공고한 위치였다. 설사 왕의 배우자나 직계 혈족이라 할지라도 네 공가의 주인에게는 머리를 숙여야 했다.

    칼이 리카서스의 다음 주인이었다면 그는 굳이 왕의 배우자라는 자리를 탐낼 필요가 없었다. 유진의 의아함을 짐작한 듯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칼이 리카서스의 공작 위를 이어받는다면 굳이 왕후가 될 필요는 없었지. 그런데 칼은 리카서스의 다음 주인이 아니었거든.”

    청람색 궁은 마치 호수 한가운데 떠 있는 섬 같은 모습이었다. 성 주위를 둘러싼 해자로 물이 흐르고 있었다.

    리카서스의 청석궁은 리카서스 영지에 있는 궁의 모습을 작게 축소한 형태였다. 청석궁을 이렇게 개축한 이는 바로 왕후(王侯)인 칼이었다.

    “창명(滄溟)의 리카서스, 리카서스는 바다를 다스리는 가문이야.”

    저것도 바닷물이야. 해자를 가리킨 아리아드네가 덧붙였다.

    “리카서스를 수호하는 성물 ‘무렉스의 호른’은 바다를 다스리는 신 테티스의 흔적이라고 해. 그리고 리카서스의 다음 주인을 선택하는 건 바로 리카서스의 성물인 무렉스의 호른이야.”

    유진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청람색 궁을 바라보았다. 떠나간 망령을 모시는 것으로도 모자라 망령이 산 사람을 지배한단 말인가?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다.

    “능력으로도, 세력으로도, 무엇 하나 밀릴 것 없던 칼이 후처의 아들에게 밀린 거지. 단지 성물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아리아드네가 먼저 해자에 놓인 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자 바닷물 특유의 짠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그런데 우습게도 리카서스의 성물은 다시 칼의 아들에게로 돌아왔어. 무렉스의 호른에게 선택받은 현 리카서스의 예주(隸主) 알프레드에게는 딸밖에 없거든.”

    “그게 왜?”

    당장 페렌트의 국왕만 해도 여자였고, 아리아드네도 메르디에스의 후계자였다. 여자라는 게 문제가 되나?

    “리카서스는 아들 상속이야. 무렉스의 호른이 남자만 선택한대.”

    청람색 궁의 정문에 선 아리아드네가 궁을 가리키며 말했다.

    “중요한 건 무렉스의 호른에게 선택받은 리카서스의 다음 주인이 지금 이곳에 있다는 거지. 2왕자 루안, 그가 무렉스의 호른을 보여 줄 거야.”

    미리 연락해 뒀다는 것이 사실이었는지 청석궁에서 사람이 나와 유진과 아리아드네를 안내했다.

    “전하께서는 곧 나오실 겁니다. 이곳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시종이 두 사람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청석궁은 나도 처음인데…….”

    응접실 소파에 앉으며 아리아드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청석궁의 응접실은 한 면이 통째로 수조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바닷물이 찰랑이는 수조에는 색깔이 화려한 물고기와 물풀, 고운 빛깔의 산호, 깨끗한 자갈들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담겨 있었다. 곳곳에 놓인 작은 어항에도 색색의 희귀한 물고기와 산호, 수초가 가득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짙은 남색 천이 응접실을 가득 채우고 있어 마치 이 공간 자체가 깊은 바다처럼 느껴졌다. 집요할 정도로 이곳이 리카서스의 공간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것 또한 칼의 의지였다.

    2왕자 루안은 다그마르와 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으니, 케이루스의 주각궁이나 리카서스의 청석궁 둘 중 어느 곳을 사용해도 무방했다.

    카이엔이 혼자 주각궁에 머무르는 것은 그가 1왕자라거나, 루안이 양보한 탓이 아니었다. 왕후인 칼이 제 아들이 청석궁에서 생활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왕후가 되어 국왕을 좌지우지하는 페렌트의 최고 실권자가 되고도, 칼은 여전히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제 것이었어야 할 리카서스를, 제가 누렸어야 할 마땅한 권리를 후처의 소생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제 아들이 무렉스의 호른에게 선택받았을 때, 칼은 마침내 리카서스를 되찾게 되어 기뻐했을까? 아니면, 끝내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억울해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비린내 나.”

    잔뜩 인상을 찌푸린 유진이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비린내?”

    리카서스답게 온통 물로 꾸며져 있었지만, 잘 관리된 터라 역한 냄새가 나진 않았다. 아리아드네가 유진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난 잘 모르겠는데……. 많이 불편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뒷말을 삼킨 유진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남자 한 명이 응접실로 들어섰다.

    단정한 검푸른색의 머리카락은 목을 덮지 않는 길이였고, 짙은 남색의 눈동자는 선한 빛을 띠고 있었다. 선명한 이목구비는 아니었으나 오밀조밀한 생김새가 호감을 주는 인상이었다.

    “메르디에스 공녀, 그리고 이계의 방문자님.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페렌트의 2왕자 루안입니다.”

    페렌트의 2왕자, 국왕 다그마르와 왕후 칼의 아들, 리카서스의 다음 주인, 그리고 카이엔의 이부동생인 루안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유진의 손을 가볍게 흔들었으나,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혼자 자리에서 일어난 아리아드네가 루안을 향해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전하.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네. 공녀께서도 평안하셨지요?”

    “물론입니다. 방문자님께서는…….”

    아리아드네는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유진을 뭐라 소개할지 잠시 고민했다.

    ‘비린내가 나서 불쾌해하신다고?’

    접객을 위한 응접실은 가장 공들여 꾸미는 공간이었다. 칭찬은 하지 못할망정 흠을 잡는 것은 대단한 모욕이었다.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한 아리아드네는 가장 무난한 대답을 골랐다.

    “원래 이러세요. 사교적이지 못하셔서.”

    아리아드네의 대답에 루안이 아,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거짓말은 아니니까. 들은 이야기도 있을 테고.’

    아리아드네는 유진을 힐끗 살피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녀에게 자리를 권한 루안이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그, 형님과 그렇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아, 제가 무례한 말씀을…….”

    근황을 물으려다 무심코 나온 실수였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던 루안이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단정하게 자른 검푸른 머리카락이 고갯짓에 따라 흘러내렸다.

    2왕자 루안은 작은 실수에도 머리 숙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성품이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마다치 않는 칼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카이엔과 약혼한 후로 루안과 마주한 것은 두세 번에 불과했다. 과거의 기억까지 모두 합쳐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언제나 선하게 웃는 2왕자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았다. 다만 아리아드네는 루안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루안은 알지 못하겠지만.

    과거, 아리아드네는 카이엔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루안을 이용한 적이 있었다.

    유진이 무량의 돌을 본 대가로 메르디에스 측 하객으로 참석했던 카이엔과의 결혼식 날, 선왕을 폐위하고 국정을 제 마음대로 주무르며 권력을 독식해 온 리카서스와 카이엔을 앞세운 메르디에스의 병력이 충돌했다.

    이 일로 아리아드네가 크게 다치자 메르디에스는 먼저 무력을 행사한 리카서스에 책임을 물었다.

    리카서스는 자신들이 벌인 일이 아니라고 항변했으나 메르디에스에는 페렌트 내 정세와는 전혀 무관한 증인이 있었다.

    이계의 방문자 유진의 증언으로 명분을 얻은 메르디에스는 영지 전을 일으켰다. 이 모든 것이 칼과 리카서스를 끌어내리기 위해 아리아드네와 메르디에스가 계획한 일이었다.

    루안은 그것도 모르고 리카서스와 메르디에스의 분쟁을 막고자 영지로 달려갔고,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던 메르디에스는 루안을 인질로 삼아 칼을 끌어내렸다.

    왕도 내의 리카서스 세력 또한 케이루스와 메르디에스 공세에 맥없이 밀려나고 말았다. 메르디에스에 억류된 루안은 칼의 몰락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피를 흘려 갈취한 권력이 어찌 좋게 끝나기를 바라겠습니까? 아버지께서는 제 나약함을 그토록 염려하셨는데 모두 무용한 것이 되었군요. 형님을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형님이 저를 잡지 않았다면, 아버지께서 형님을 죽이셨을 테니까요. 다만 아버지는 제 피와 살을 만들어 주신 혈육이니,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칼이 그토록 비정하게 권력을 탐하여 얻은 결실이었는데, 정작 루안은 그 누구보다 권력에 초연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카이엔의 즉위 1년 후, 메르디에스에 억류 중이던 루안이 독살당했다.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은 메르디에스 경비대 소속의 남자였다.

    카이엔은 메르디에스 공작 레너드가 자신과의 불화를 이유로 이부동생이자 제1왕위 계승권자인 루안을 독살하였다고 주장하며 이 일을 빌미로 메르디에스를 침공했다.

    왕후가 되고자 반정을 일으킨 칼, 왕이 되기 위해 계부와 이부동생을 끌어내린 카이엔, 카이엔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루안을 이용한 아리아드네. 이 중 마지막까지 승자였던 이는 누구일까?

    오히려 승자는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난 루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모든 것에서 벗어나 이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든 것을 무너트려야 이기는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아리아드네는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모든 것을 기억해야 했다. 제 억울함과 분노만이 아니라 제 탐욕과 이기심까지도.

    그래서 제 앞에 살아 있는 루안이, 여전히 선한 품성이 반갑고 고마웠다.

    “아니요. 뭐, 파혼이 별일인가요? 오히려 사과드려야 할 사람은 저인걸요. 갑작스러운 요청에도 흔쾌히 수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념에서 깨어난 아리아드네가 사과를 하자 루안이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공녀께서 이러시면 제가 민망합니다.”

    루안은 사과를 하려다 되레 사과를 받은 것이 몹시 불편한 모양이었다. 아리아드네가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할 겸 응접실 내부를 둘러보며 말했다.

    “마치 바닷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네요. 아름다워요.”

    “아름다운 분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신경 쓴 보람이 있군요. 란데르의 메르디에스 별장에 심어진 화초가 마치 산호와 같은 생김새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호 정원이라 부른다지요. 언제 한번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좀 전의 실례를 만회하려는지 루안이 의례적인 칭찬을 해 왔다. 대수롭지 않은 대화를 이어 나가던 그때였다.

    톡톡, 대화 사이에 으레 생기기 마련인 짧은 적막 사이로 마치 손톱으로 유리창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무슨 소리지?’

    아리아드네가 주위를 살피는데 방향조차 짐작하기 어려운 곳에서 쯧쯧, 혀를 차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저토록 안목이 형편없으니…….”

    “렉, 렉사!”

    이어진 말소리에 당황한 루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마디 비명처럼 누군가를 불렀다.

    “네? 그게 대체 무슨…….”

    ‘이 자리에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건가?’

    아리아드네가 주위를 살피던 것을 멈추고 루안을 돌아보며 물었다.

    “…….”

    놀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던 루안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입만 뻐끔대다 겨우 입을 열었다.

    “전, 아, 아무것도 못 들었는데……. 무슨, 소리를 말씀하시는 건지…….”

    루안은 끝끝내 아리아드네의 시선을 외면한 채로 다시 자리에 앉으며 어물어물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가 무슨 소리가 난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냈던가? 생각만 했던 것 같은데…….’

    찜찜한 기분으로 조금 전 나누던 대화를 떠올린 아리아드네가 적당히 대꾸했다.

    “전하께서 방문해 주신다면 기쁜 마음으로 응하겠습니다.”

    아리아드네가 아무 말 없이 대화를 이어 가자 루안은 눈에 띄게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이른 시간에 방문을 요청하여 곤란하셨지요? 죄송합니다.”

    이른 아침에 불러낸 것이 멋쩍은 듯 루안은 다시금 사과를 청해 왔다.

    “흥, 오라면 올 것이지.”

    또 그 목소리였다. 아리아드네가 눈가를 좁히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루안은 연신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도 끝끝내 모르는 척이었다.

    ‘뭐가 있긴 있는 것 같은데…….’

    아리아드네는 루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성물을 보게 해 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귀를 기울였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럼 무렉스의 호른은 오늘 볼 수 있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리카서스의 성물인 ‘무렉스의 호른’이 예주(隸主)가 있는 리카서스의 영지가 아니라 후계자인 루안이 거처하는 곳에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무렉스의 호른이 그러기를 원하니까.

    역대 리카서스의 주인 가운데에서도 루안은 유독 ‘무렉스의 호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또 하나, 올해가 가기 전 리카서스의 공작 위는 루안이 승계할 예정이었다.

    칼은 제 아들을 항상 카이엔의 윗줄에 놓고 싶어 했다. 하지만 카이엔이 1왕자, 루안이 2왕자인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루안이 왕이 되기를 기다리는 방법도 있겠으나 다른 방법이 있는데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었다.

    네 공가의 주인은 왕자나 왕의 배우자보다도 윗줄이었으니까. 왕의 아들인 카이엔은 리카서스 공작이 된 루안에게 고개를 숙여야 했다.

    하지만 과거, 카이엔이 리카서스 공작인 루안에게 고개를 숙인 것은 두 계절이 전부였다. 루안이 리카서스 공작이 된 이듬해 봄, 카이엔은 페렌트의 왕이 되었다.

    “그럼 전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될까요?”

    “아, 공녀께서도 함께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저도 함께요?”

    톡톡, 톡톡톡, 예의 그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자갈을 던지는 것도 같고…….

    “네, 성물께서 그러기를 원하셔서…….”

    “저야 괜찮지만…….”

    찰박찰박, 톡톡톡, 손가락으로 수면을 치는 것 같기도 한 소음이 끝없이 대화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곳에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척하기가 더 어려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루안의 모습이 너무 필사적이라 아리아드네는 일단 맞춰 주기로 했다.

    무엇보다 유진의 상태가 좋지 않은 터라 무렉스의 호른을 보는 대로 서둘러 돌아가고 싶었다. 비린내가 난다던 유진은 머리가 아픈지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꽉 누른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낮고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몸을 뒤로 젖힌 채로 눈을 감고 있던 유진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렇지 않아도 창백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가 이렇게 동요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쩌면 무렉스의 호른이 유진이 찾던 성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리아드네는 그만 입을 닫았다.

    “무렉스의 호른을 들이겠습니다.”

    루안의 부름에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온 시종이 천을 씌운 함 하나를 가져왔다.

    루안이 함에 씌운 천을 벗겨 냈다. 천 아래 있는 것은 물로 가득 찬 유리함이었다. 유리함에 담긴 검푸른 물은 마치 별빛을 녹인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반짝이는 물속에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석회질로 된 호른이 담겨 있었다. 루안이 함에 손을 넣어 호른을 꺼냈다.

    분명 물이 가득 담긴 함에 손을 넣었는데 그의 손은 물에 젖은 흔적조차 없이 말끔했다.

    “이것이 무렉스의 호른입니다.”

    책이나 그림으로 익히 봐 온 모습 그대로였다. 메르디에스의 성물인 무량의 돌이 그렇듯, 겉으로 보기엔 특별한 힘이나 성스러운 무언가가 느껴지진 않았다.

    “당신이 찾던 것 맞―”

    아리아드네는 하려던 말을 채 마치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괜찮아? 어디 아파?”

    유진은 마치 비라도 맞은 것처럼 땀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새하얀 얼굴은 이젠 푸른 기가 돌 정도였다.

    “왜, 왜 어디가 아픈데?”

    놀란 아리아드네가 유진의 얼굴을 만지며 물었다.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깨진 얼음 조각같이 날카로운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저것 좀 닥치라고 해.”

    “응?”

    아리아드네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유진이 말하는 ‘저것’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호른은 본디 소리를 내기 위한 물건이니까 ‘무렉스의 호른’에서 유진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나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리아드네로서는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루안이 땀을 흘리는 유진에게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저, 어디가 불편하신지?”

    “몰라서 물어? 비린내 나는 저 새끼 입 좀 막으라고.”

    “그, 그게…….”

    무슨 일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아리아드네와는 달리, 루안은 유진이 이러는 이유를 아는 눈치였다.

    “못 하겠으면 내가 하지.”

    자리에서 일어난 유진이 수조로 꾸민 유리벽을 연달아 내리쳤다.

    콰앙― 쾅! 쾅쾅쾅!

    “저, 이, 이러시면…….”

    당황한 루안이 유진을 만류하던 찰나였다. 쩍― 쩌어억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퍼엉! 소리를 내며 유리벽이 터졌다.

    아리아드네는 유리벽 너머를 가득 채운 물이 쏟아질 것을 예상하고 벽에서 물러섰다.

    쨍그랑, 툭툭, 투두두둑. 물을 막고 있던 두꺼운 유리가 깨지고 떨어져 바닥에 박혔다. 하지만 아리아드네의 예상과 달리 물은 조금도 쏟아지지 않았다.

    물을 막고 있던 유리가 조각나 바닥에 떨어졌는데도 수조 속 물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치 수조의 물이 그 자체로 하나의 덩어리인 것 같았다.

    “쫑알쫑알 온갖 저주를 퍼부을 때는 언제고 왜 지금은 닥치고 있어?”

    뚜벅뚜벅, 공중을 부유하는 물에 다가선 유진이 물속에 손을 집어넣더니 무언가를 꺼내 내던졌다.

    그와 동시에 찰랑대며 공중에서 부유하던 물이 그대로 쏟아졌다. 물론 그 속에 담겨 있던 산호와 물풀, 자갈과 물고기 따위도 함께였다.

    청석궁의 응접실은 깨진 유리와 그 위로 쏟아진 물, 자갈과 팔딱이는 물고기들로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아리아드네는 엉망이 된 응접실의 광경에 당황하여 다급히 상황을 파악했다. 보상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칼의 대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루안의 도움만 있으면 어떻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겠어.’

    겨우 한숨을 돌린 아리아드네가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낯선 감촉에 고개를 내렸다.

    유진이 던진 ‘무엇’이 공교롭게도 아리아드네 손바닥으로 떨어진 모양이었다. 새끼손가락만 한 것이 아리아드네의 손바닥 위에서 발버둥 치고 있었다.

    “놔라, 무엄하다! 인간 주제에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느냐!”

    ‘그것’의 노성에 루안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탄식했다.

    “아, 렉사…….”

    루안은 머리를 감싼 채로 몹시 괴로워했다. 아리아드네가 제 손바닥 위에서 발버둥 치는 물체의 머리를 집어 들었다.

    “이게 뭐야?”

    “이것이라니! 이것이라니! 메르디에스의 딸아, 네 오늘 그 언행을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야.”

    새끼손가락만 한 그것은 주둥이가 가늘고 길며, 머리는 바로 선 몸통에서 직각으로 내민 듯한 모습이었다. 몸통은 수많은 골판이 이어진 형태였으며 꼬리가 동그랗게 말려 있었다.

    말을 한다는 것만 빼면 아리아드네도 익히 아는 생물이었다.

    “해…… 마?”

    “해마라니, 해마라니! 감히 그따위 미물의 이름으로 나를 칭하는 것이냐!”

    자신을 가리킨 단어에 길길이 날뛴 그것은 어디를 봐도 해마였다.

    “이 몸은 그렇게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아리아드네 손바닥 위에서 마치 뽐내는 듯한 모습으로 바로 선 그것이 자신을 소개했다.

    “이 몸은 바다를 다스리는 위대한 신 테티스의 마지막 권속 무렉스이니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