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148)
  • * * *

    아리아드네는 녹주궁으로 향하는 제 걸음을 재촉했다. 나중에는 뛰다시피 걸었다. 아리아드네가 녹주궁에 발을 딛자 기다리고 있던 고용인들이 다 같이 몸을 숙이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아리아드네 님, 축하드려요!”

    “신시아 님께 들었어요. 완전 멋있으셨다고!”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시장하실 테니 식사부터 하세요.”

    마치 등불을 보고 모여든 밤나방처럼 사람들이 아리아드네를 둘러쌌다. 주위 사람들을 훑어본 아리아드네가 물었다.

    “캐롤린은 어디 있어?”

    “리스벨 아가씨라면 방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큼성큼 계단을 오른 아리아드네가 캐롤린이 묵는 방이 있는 방향으로 빠르게 걸었다.

    “캐롤린!”

    아리아드네가 벌컥 문을 열며 들어서자 편지를 쓰고 있던 캐롤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동그랗게 뜬 눈이 아리아드네를 발견하고는 곱게 접혔다. 웃으며 다가온 캐롤린이 아리아드네의 두 손을 잡으며 테이블로 이끌었다.

    “리아, 왜 이렇게 늦었어? 기다렸잖아. 잘했어. 손은 왜 이렇게 차가워?”

    손이 시릴까 따뜻한 차라도 쥐여 주려는데 아리아드네는 차 따위엔 관심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나 오늘 어때?”

    도무지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없는 질문에 캐롤린이 눈가를 좁히며 되물었다.

    “어떠냐니 뭐가?”

    “괜찮아?”

    “아까부터 무슨 말이야?”

    마치 꼬리잡기하는 것처럼 대답 없는 질문만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답답한 캐롤린의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리아드네는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녹색으로 입을 걸 그랬나? 그건 트레인 때문에 혼자 걸을 수 없었어. 두 사람은 더 있어야 하는 옷이었어. 그럼, 붉은색? 아냐, 그건 너무 과했어.”

    “옷 말하는 거야?”

    겨우 질문의 끄트머리를 잡은 캐롤린이 그렇게 묻자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캐롤린이 아리아드네를 천천히 살펴본 다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예뻐.”

    그러고 보니 성장(盛裝)한 아리아드네를 보는 것이 제법 오랜만이었다. 타고난 외형이 화려해서 옷에 구애받지 않는 편이었으나 작정하고 꾸미면 또 달랐다.

    아무리 화려한 보석이나 드레스로 치장해도 그것이 과하다거나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머리는? 얼굴은?”

    다가온 아리아드네가 캐롤린의 어깨를 쥐고는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다 예뻐. 요즘 거울 안 봐?”

    “아니, 내가 봐도 나쁘지 않았어.”

    캐롤린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묻자 아리아드네가 기다린 것처럼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곧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좋다고 안 했지?”

    “응? 리아 너,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그쪽도 날 좋아하는 게 확실한데……. 신중한 성격인가?”

    캐롤린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리아, 너 연애해?”

    아리아드네가 조금 멋쩍은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연애는 아니고. 좋아하는 사람은 생겼어.”

    머뭇거리는 말끝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마치 만개한 꽃처럼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혼란스러운 캐롤린과 달리 아리아드네는 더없이 태연했다. 정작 아리아드네는 아무렇지 않은데 캐롤린은 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괜스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핀 캐롤린이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물었다.

    “너 설마, 그 사람 방문자님이야?”

    “어? 어떻게 알았어?”

    아리아드네가 줄곧 제 마음을 외면해 오긴 했지만, 명확한 형체를 갖출 만큼 마음을 키운 건 메르디에스를 떠난 다음이었다. 그런데 일레체에서 재회한 캐롤린이 단박에 알 정도라니…….

    “그렇게 티가 났나?”

    어쩐지 겸연쩍어 아리아드네는 괜히 시선을 돌렸다.

    ‘사랑과 재산은 숨길 수 없다더니.’

    아리아드네는 이번에도 자신이 만들어 낸 말에 스스로 납득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여전히 목소리를 낮춘 캐롤린이 속삭이듯 말했다.

    “아니, 내가 눈치챈 건 아니고 성주님이 자꾸 경계하셨잖아. 그래서 혹시나 했지.”

    아, 이번에도 아버지가 맞았구나. 아리아드네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터졌다.

    ―너, 너 역시 그날 운 게 그놈 때문이었던 게지? 네가 원하는 게 왕좌냐? 그놈이냐?

    그때는 정말 아니었는데. 아니, 그때도 반쯤은 넘어갔던가? 언제부터,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 저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야 내 주위 남자들은 죄다 경계하시잖아.”

    “아니야. 정말 경계하시는 거랑 그냥 해 보시는 거랑은 달라.”

    “그래? 그건 몰랐네.”

    “뭐야, 그게.”

    캐롤린과 아리아드네는 의미 모를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우스운지는 모르겠지만 가슴이 간질간질해서 웃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다행이다.”

    “뭐가?”

    “사실 카이엔 전하 일로 네가 많이 상심했을까 봐 걱정했거든. 네게 다시 사랑이 와서 정말 다행이야.”

    “다행인가?”

    눈먼 사랑 때문에 그만한 일을 겪고도, 또다시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걸 보면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 확실했다.

    다시 사랑이 온 게 다행인지는 몰라도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피하고 싶지 않았다. 유진과 함께 걷는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 가 보지 않은 이상 알 수 없는 게 당연하니까.

    “당연하지. 정말 잘됐어.”

    캐롤린이 눈물이 고인 눈가를 훔치며 정말 다행이라는 듯이 말했다. 과거의 기억에 묶여 지금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과거의 기억에만 얽매였다면 또다시 캐롤린을 잃었겠지.

    카이엔과의 기억 때문에 유진을 놓친다면 제 남은 인생은 평생토록 카이엔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 뻔했다.

    자신이 돌아온 이유는 제 남은 인생에서 카이엔을 지우기 위해서지, 평생토록 카이엔의 망령에 끌려다니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 분명 날 좋아하는 게 맞는데……. 왜 대답을 안 하는 거지?”

    아리아드네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너 정말 하나도 변한 게 없어.”

    “뭐가?”

    “예전부터 그랬잖아. 바다에 가면 발이라도 넣어 봐야 하고, 모르는 게 있으면 꼭 먹어 봐야 하고.”

    겁이 많은 캐롤린은 뭐든 덥석덥석 집어 드는 아리아드네가 신기했다.

    “당연하잖아. 눈앞에 바다가 있는데 왜 참고, 못 먹을 게 아닌데 왜 안 먹어. 맛없으면 다음부터 안 먹으면 되지.”

    카이엔과의 일로 적지 않은 상처를 받았을 텐데도 여전한 아리아드네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감히 꺾을 수도, 흠집 낼 수도 없는 사람. 아리아드네는 늘 그랬다. 어떤 과거든 아리아드네에게는 양분이지, 족쇄인 적이 없었다.

    다시 주위를 살핀 캐롤린이 마치 비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근데 리아, 왜 좋아? 어디가?”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에는 설렘이 잔뜩 묻어났다.

    “넌, 넌 알버트가 왜 좋은데?”

    이불을 뒤집어쓰고 비밀 이야기를 나누던 어릴 때처럼 둘은 의미 없는 수다에도 괜스레 목소리를 낮췄다.

    * * *

    그동안 머무는 사람이 없어 느긋했던 녹주궁의 아침은 요즘 들어 부쩍 분주해졌다.

    페렌트의 귀족들은 첫 끼를 정오에나 먹는 것이 보통이었다. 부지런한 편인 아리아드네도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열 시는 넘어야 일어나곤 했다.

    아리아드네 일행이 녹주궁에 도착한 다음 날, 유진이 여덟 시가 채 되기도 전에 아침 식사를 찾자 고용인들은 매우 당황했다.

    다행히 유진은 식사에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었고, 정찬처럼 제대로 된 요리가 아니라 간단한 요깃거리만 원할 뿐이었다.

    그 상황이 반복되니 분주하게 일하는 고용인들 사이에서 유진이 아침 식사를 하는 모습은 이젠 녹주궁의 고용인들에게는 익숙한 일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참 괜찮단 말이야. 잘생겼지, 힘도 세고, 지위도 그만하면 어디 가서 밀리지는 않을 테고, 대접이나 시중을 두고 생전 트집 잡는 일도 없지. 더구나 아리아드네 님께도 큰 도움을 줬다지?”

    잘생긴 데다가 교황과 동급이라는 ‘방문자’씩이나 되면서 소탈한 유진의 모습에 녹주궁의 고용인들은 은근한 호감을 품었다.

    유진은 자신이 자리에 앉자마자 차려진 ‘간단한 요깃거리’를 눈으로 훑었다. 어제 먹고 남은 빵이나 간단한 스튜 한 그릇 정도를 생각한 제 예상과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대파와 감자, 훈제한 햄을 넣고 뭉근하게 끓여 낸 포타주의 고소한 냄새를 맡는 순간 시장기가 돌았다.

    음식을 담아낸 그릇과 식기까지 적당한 온도로 데워져 있었다. 게다가 잘 익은 과일과 갓 짜낸 고소한 우유까지 테이블 위에 차례로 올라왔다.

    나무로 엮은 라탄 바구니에는 포타주와 함께 먹을 수 있도록 식빵을 잘라 튀겨 낸 것과 막 구워 낸 크루아상, 훈제 햄과 치즈, 싱싱한 야채로 속을 채운 샌드위치가 함께 준비되어 있었다.

    유진은 따뜻한 포타주에 식빵 조각을 띄웠다. 바삭한 식빵에 걸쭉한 수프가 배어들어 눅눅해졌다. 가볍게 포타주 한 그릇을 해치운 유진이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당신이 찾는 물건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까요.

    제 말을 들으면 결코 거절하지 못할 거라던 카이엔의 제안은…….

    ―당신도 잘 생각해 봐.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의 마음을 자신하는 듯한 아리아드네의 오만한 고백에 한참 밀린 상태였다.

    고백도 그 자신처럼 당당한 여자였다. 마치 고백을 한 사람과 받은 사람이 뒤바뀐 것 같았다. 그는 제가 고백을 하고 그 답을 기다리는 사람이 된 것처럼 마음이 복잡했다. 그렇게 휘저어 놓고 떠난 주제에 여자는 아무렇지 않았으리라, 유진은 확신했다.

    “포타주야? 시금치? 감자? 나도 한 그릇 줘.”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로 다이닝 룸에 들어선 여자가 유진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이 아침에 아리아드네를 볼 줄은 상상도 못 했던지라 당황한 유진이 들었던 샌드위치를 다시 놓고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포타주를 받아 든 여자가 한 숟갈 뜨며 유진에게 물었다.

    “잘 잤어?”

    “그럭저럭. 당신은?”

    아리아드네가 상쾌한 얼굴로 싱긋 웃으며 답했다.

    “모처럼 잘 잤어. 고대하던 파혼도 했고, 고민하던 것도 내 손을 떠났고.”

    이럴 줄 알았다. 그 뒤로 내내 한숨도 못 자고 뒤척인 건 유진뿐인 듯했다.

    “이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당신이랑 같이 식사하려고. 당신은 꼬박꼬박 아침 먹잖아. 이렇게 일찍 뭐가 넘어가?”

    한 그릇을 해치우고도 샌드위치를 덥석 베어 문 유진과 달리, 아리아드네는 좀처럼 먹기 힘든지 포타주를 느릿하게 휘저었다.

    식사를 마친 유진이 물잔을 들었다. 물잔 너머로 스푼을 쥔 가늘고 긴 손가락이 비쳤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이 아리아드네의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은 좀 해 봤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유진이 물을 뱉지 않기 위해 잔 안에 든 물을 모조리 삼켰다. 목구멍과 가슴이 뻐근해졌다. 유진은 겨우 진정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들어 유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직도 더 생각해야 해? 뭐, 기다려 줄게.”

    “연애가 하고 싶은 거라면―”

    덜컹, 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아리아드네의 어깨를 짚었다. 제 행동을 제지당한 아리아드네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다른 사람 찾아봐. 당신만 좋다고 하면…….”

    유진이 뒷말을 마저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아리아드네가 그것을 놓치지 않고 덥석 물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먹잇감을 발견한 고양이의 눈처럼 반짝 빛이 났다.

    “나만 좋다고 하면?”

    아리아드네가 벌떡 일어나 도망치듯 다이닝 룸을 벗어나는 유진을 뒤쫓았다. 그의 앞을 가리고 선 아리아드네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누구든 거절하지 못할 거란 말이야? 나 그 말에 설레도 돼?”

    유진이 낭패라는 듯 고개를 숙였다. 분명 머릿속에서는 거절의 말이었는데, 입을 거치니 찬사(讚辭)로 둔갑했다.

    “난 아니라도, 실제로 그렇다는 말이야.”

    유진이 어떻게든 무마하려 했지만, 아리아드네는 뿌듯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붉은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났다.

    그가 멈췄던 걸음을 재게 놀렸다. 처음부터 휘말리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아리아드네가 종종거리며 쫓아왔다.

    “아, 그래도 내가 먼저 좋다고 고백한 건 당신이 처음인데……. 그리고 아직 거절당한 것 같진 않지만, 혹시라도 당신이 나 거절하면―”

    순간 유진의 걸음이 느려졌다.

    “나 차이는 것도 처음이야.”

    아리아드네는 이 모든 것이 즐겁다는 듯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유진이 아무 말 없이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기려 하자 아리아드네가 덥석,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아, 가지 마. 나 할 말 덜 끝났어. 우리 약속한 거 있잖아. 당신도 날 도와줬으니까 나도 당신을 도와줘야지. 우리가 계약만으로 이루어진 관계는 아니라도, 계약은 성실히 이행해야지.”

    그렇게 말한 아리아드네가 유진을 잡아끌었다.

    “무렉스의 호른, 보러 가자.”

    “지금? 이렇게?”

    유진은 얼떨떨한 채로 아리아드네에게 끌려가며 물었다.

    “응, 사실 며칠 전에 연락 왔는데 일부러 말 안 했어.”

    당신이 도망갈까 봐. 톡톡, 꽃망울이 터지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다시금 공중에 울려 퍼졌다. 진득한 꽃향기에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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