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니, 놓아줘야지. 내 마음은 여전하지만.”
협의장에서 내내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카이엔이 서류에 서명을 마치며 그렇게 말했다. 아리아드네는 카이엔에게서 서류를 건네받아 서명하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전하께선 처음부터 저를 사랑하지 않으셨지요. 그러니 마음이 변하셨을 리 있겠습니까.”
서명을 마친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들었다. 턱을 괴고는 몸을 뒤로 기울인 카이엔이 혼잣말처럼 물었다.
“우리 중에 사랑을 한 건 그대뿐이다?”
여유를 가장한 저 속이 얼마나 들끓고 있을지 아는 것은 아리아드네뿐이다. 란데르에서 변한 제 모습을 보고도 카이엔은 믿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자신이 더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랑하지 않으니 파혼하겠다는 제 말을 믿을 수 없어 확인하러 나타난 거다. 당연한 일이다. 탑에 갇힌 자신에게도 그리 당당하게 굴었던 작자이니.
[당신은 결국 나를 찾게 되겠지. 부도, 명예도, 권력도 다 잃은 당신에게 남은 건 나뿐일 테니까. 기다리지. 당신이 내게 사랑을 구걸하는 그날을.]
갈색 눈동자가 마치 뱀처럼 가늘어져 아리아드네를 살폈다. 그는 아직도 믿지 못하고 자신에게 남은 감정의 찌꺼기라도 발견하려 발버둥이었다.
아리아드네는 반쯤 내렸던 눈을 들어 카이엔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나간 사랑이라 하나 그때 제 마음마저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랑이었으니 그리 어리석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 사랑이었다. 사랑이었으니 아팠고, 사랑이었으니 후회했다.
“그래서 더는 어리석게 굴지 않겠다…….”
카이엔이 아리아드네의 마지막 말을 곱씹듯 말꼬리를 길게 끌었다.
“그럴 리가요. 사람이 어찌 실수 없이 살며, 살면서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앞으로도 후회하는 순간을 살며,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될 겁니다. 제가 후회하는 순간에, 제가 하는 어리석은 선택에 전하가 없을 뿐입니다.”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아리아드네가 양손으로 치마를 잡고 예를 올렸다.
“제 남은 삶에 전하의 자리가 없을 뿐, 제 삶은 이제까지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아리아드네는 소회의실에서 몸을 돌려 나왔다. 굽 높은 신발이 바닥을 딛는 소리가 적막한 공간을 가득 채우다 이윽고 그 소리마저 사라졌다.
아리아드네는 소회의실에서 나와 녹주궁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은 궁은 낮과는 다른 정취를 뿜어내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손을 들어 아무 장식이 없는 제 손가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서늘한 바람이 손가락 사이를 기분 좋게 스쳐 지나갔다.
약혼반지를 하고 지냈던 것도 아닌데, 약지가 유난히 가볍게 느껴졌다. 자신을 누르던 족쇄 중 하나가 뚝 끊겨 나간 것만 같았다.
[당신과 있으면 평생에 얻지 못했던 행운들이 쏟아지는 것 같습니다. 다시금 청하건대, 저와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카이엔이 저에게 사랑을 맹세하던 날의 기억도.
[사랑? 그따위 너저분한 감정에 휩쓸리기에는 그대는 가진 게 너무 많았고, 나는 가져야 할 게 너무 많았지.]
변하기 시작한 카이엔이 칼처럼 쏟아 내던 말들도.
―그런데 아리아드네, 이번 일만은 그대 뜻대로 되지 않을 거야. 왕가와 공가의 결합이야. 그리 쉽게 끝낼 수 있을까?
변한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고 질척하게 들이밀던 빛바랜 약속도, 이제는 전부 끝난 일이었다.
자신을 옭아맸던 낡은 약속 따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자격을 갖추기 위해 얼마나 애를 태웠던가.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거야?”
서늘하고 낮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기분 좋게 울렸다.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들어 유진을 바라보았다. 비를 가득 머금은 구름 같은 회색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 파혼했다.”
아리아드네가 양손을 들고는 마치 자랑하듯 말했다.
“알아, 나도 봤어.”
피식 웃으며 가까이 다가온 유진이 아리아드네의 머리에 손바닥을 조심스럽게 얹었다.
“잘했어.”
애써 꾸민 머리가 흐트러질까 염려한 손은 무게도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조심스러웠다. 아리아드네는 두 손을 올려 제 머리에 얹은 유진의 손을 덮었다.
서늘한 감촉이 손바닥에 닿아 왔다. 서늘한 유진의 손이 닿으면 제멋대로 날뛰던 심장도 금방 진정되곤 했는데, 오늘은 도리어 그 반대였다. 마치 달리기라도 하고 난 것처럼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당신 손 차가워.”
“…….”
대뜸 손 운운하는 말에 유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뜻 모를 아리아드네의 말을 헤아려보려는 듯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껴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어둠과 대비되는 흰 피부는 유독 창백한 느낌을 주었다.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는 숨에 말을 섞었다.
“나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지금?”
아리아드네는 유진의 손을 제 양손에 가둔 채로 머리에서 끌어 내렸다. 그의 손이 아리아드네의 손에 매인 채로 따라 내려왔다.
아리아드네는 그대로 몸을 숙였다. 가지런하게 뻗은 손가락이 눈앞에 있었다.
“말했지? 이곳에서 약지는 영혼과 사랑을 품고 있다고.”
그녀는 길게 뻗은 유진의 손가락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네 번째 손가락에 입술을 눌렀다.
그의 영혼에 닿고 싶었다. 사랑을 품은 손가락이 제 것이 되었으면 했다. 이 사랑 또한 자신을 배신할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마음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후회하는 순간은 반드시 온다. 남은 삶에서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 마음을 외면하고 끝끝내 무시하여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룬다 해도, 그때는 이루지 못한 이 사랑이 후회로 남겠지.
그렇다면,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후회하게 될 거라면, 이 마음을 버릴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그런 일 따위 가능하지 않으니까.
제 머리는 심장을 제어하는 데는 소질이 없었다. 이성으로 심장을 제어할 수 있었다면 다시 사랑에 빠지는 일 따위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오직 하나뿐이다. 제 마음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 자격이 필요했다. 당신을 사랑할 자격이.
“나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것 같은데.”
제 입술과 닿은 자리가 뜨겁게 느껴졌다. 아니, 이건 제 몸이 지나치게 뜨거운 탓이다.
느슨하게 말아 올린 머리카락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불어오는 바람에 아리아드네의 옅은 금발이 흩날렸다.
새까만 하늘 위로 빼곡히 박힌 별들만이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 * *
아리아드네는 아래에 있던 제 손이 위로 올라오도록 뒤집어 손등을 내민 채로 유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 대답을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그런가?’
약지를 두고 한 고백에 대답하는 방법은 마찬가지로 상대의 약지에 키스를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물론, 거절 같은 것은 처음부터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아리아드네가 고민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알려 줘야 자연스러울지, 단지 그것뿐이었다.
‘손가락을 슬쩍 들어 볼까? 그건 너무 노골적인가?’
그녀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유진은 전혀 다른 이유로 당황했다. 그는 이런 상황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당황한 유진이 슬쩍 뒤로 물러났다.
아리아드네는 멀어지는 유진의 손을 붙든 채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유진은 아리아드네가 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자 포기한 채 반대쪽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왜 갑자기 그런, 아니, 방금 내가 들은 말이 그러니까…….”
적잖이 당황했는지 유진은 횡설수설하며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왜?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 이유가 필요해?”
아리아드네가 성큼 다가서서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손으로 미처 다 가리지 못한 얼굴이 붉었다.
“당신이 그런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백 개도 더 말해 줄 수 있어.”
이유를 붙이자면 끝도 없지만 그 모든 이유가 이 마음을 설명하기엔 부족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당신이 날, 좋아한다고?”
손에 가려진 얼굴이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유진의 손은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난 좀 당황스러운데……. 당신과는 필요한 걸 주고받는 관계라고 생각했어.”
“처음은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야. 당신도 그렇잖아.”
“내가?”
마침내 유진의 손이 얼굴에서 떨어져 나왔다.
당황으로 흔들리는 눈동자, 평소보다 붉어 온기가 도는 듯한 피부, 곧은 콧대와 그 아래 자리한 입술까지. 눈 감고도 그릴 수 있는 얼굴인데 왜 이토록 눈을 뗄 수 없을까?
유진을 두고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위험하고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는 제 취향이 아니라고.
그건 자신이 유진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유진이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 그 얼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유진이 제 선 안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아무것도 몰라서.
그래서 그렇게 자신할 수 있었던 거다.
“당신 좀 둔해? 당신이 날 대하는 태도가 정말 거래를 위한 것만이라고, 그렇게 생각해?”
먼저 흔든 건 그였으면서……. 아리아드네는 그가 아무것도 모르겠단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조금 억울했다.
마음을 먼저 깨달은 건 아리아드네 자신일지 몰라도, 유진 또한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거래만을 위한 것이라기엔 유진이 자신에게 한 행동들이 도무지 설명되지 않았다. 베아트리스도 알아챈 마음을 그는 정말 모르는 걸까?
“지금도 날 쫓아 나왔잖아. 날 걱정해서 따라온 거 아니야?”
소회의실을 나오며 아무도 따라오지 말라 이른 것은 유진이 곧 뒤따라올 것을 확신해서였다. 그리고 유진은 아리아드네의 확신대로 행동했다.
제 시선이 유진을 좇듯, 유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문득문득 시선이 마주쳤던 그 모든 순간이 우연이기만 할까.
아리아드네는 유진의 마음에 제 자리가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조급하고 초조했다. 어서 닿고 싶어서, 당당하게 마주 보고 싶어서, 그를 외롭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아리아드네의 곧은 시선과 닿은 유진이 천천히 그녀의 손을 떼어 냈다. 한 발짝 멀어진 유진이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난, 이런 관계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어. 더구나 난 언제 어떻게 이곳을 떠날지 모르는 사람이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처럼 구는 유진을 모르지 않았다. 그가 느끼는 고독도.
“나는 내가 누구인지, 이곳에 어떻게 왔는지 아직 아무것도 몰라. 내일 당장 연기처럼 사라질 수도 있어.”
시작을 알지 못하니 어디에도 뿌리내릴 수 없었다. 유진은 이곳이 제 끝인지, 아니면 지난 과거처럼 스쳐 지나가는 곳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곳의 인연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는 건 모든 걸 잃은 다음이어야 했다. 늘 그랬듯이.
그러니까 특별한 사람은 만들지 말아야 했는데, 누구에게도 특별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됐는데……. 늦었다면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했다.
유진은 아리아드네의 새파란 눈동자가 푸른 불처럼 느껴졌다. 가까이 가면 모든 걸 불살라 버릴, 재마저 남기지 않을 푸른 불꽃.
“이번에야말로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가까이 다가가면 다치는 건 자신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적당한 거리에서, 언제 떠나더라도 크게 슬퍼하는 사람이 없도록, 그는 늘 그 자리를 지켜야 했다.
아리아드네가 멀어진 유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곧은 눈동자는 어느 순간이든 피하는 법이 없었다.
“내 행복은 내 마음 가는 데 있어. 내가 감당해야 할 일까지 당신이 떠안을 필요는 없어. 당신이 내게 말해 줘야 할 건 당신 마음이야.”
아무리 도망쳐도 다시 끌려오고 만다. 저 푸른 눈동자에.
내내 한 발짝 먼 곳에서 안전하게 있던 자신을 광장 한복판에 내던져 어디에도 도망갈 수 없도록 장대에 꽁꽁 묶어 버리고 만다.
한 번도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 마음이 어떠하냐고 재촉한다. 녹슨 빗장을 마구잡이로 뜯어내는 것만 같았다. 그 속에 무엇이 있을지 저조차 알지 못하는데…….
웅크린 제 마음이 두려워 유진은 물러섰다. 물러서기가 무섭게 다가온 아리아드네가 얼굴을 가까이 붙이며 물었다.
“혹시 내가 별로야?”
색이 옅은 금발, 새파란 눈동자와 서늘한 눈매, 곧은 콧대와 모양 좋은 입술, 갸름한 얼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선명한 존재감.
“당신 살던 데는 미의식이 달라?”
대답 없는 유진이 의아했는지 아리아드네가 얼굴을 바짝 붙이며 되물었다. 묻고는 있지만 자신만만한 표정이 제 대답을 이미 확신한 얼굴이었다.
“아니, 그렇지는 않은데…….”
저 얼굴을 두고 빈말로라도 별로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냉큼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금 대답을 재촉했다.
“그럼 당신 취향이 아니야? 나 안 예뻐?”
“아니, 예뻐. 예쁜데…….”
아리아드네가 자꾸 얼굴을 붙여 오는 통에 유진은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코끝이 닿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거리에 유진은 간신히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어느 세계, 어느 시간에 떨어져도 마찬가지일 거다. 마치 하늘의 별을 모두 잡아먹은 태양처럼 우뚝 선 존재. 여자가 자리하면 공기의 질량이 달라진다. 누구든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타고나기를 세상의 중심으로 태어난 사람이다. 누구에게도 속하지 못하는 자신과는 존재부터가 다른 사람이었다.
유진의 대답을 갈취하듯 삼킨 여자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그래도 취향이라는 건 인정했으니…….”
혼잣말을 마친 여자가 활짝 웃으며 유진을 가리켰다.
“당신 마음에 내가 없다고는 생각 안 해. 당신도 잘 생각해 봐.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말을 끝으로 여자는 날듯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돌풍처럼 나타나 제 마음을 온통 휘젓더니 사라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남겨진 사람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제멋대로 움직였다.
유진은 이렇게 남겨진 것이 어이가 없어서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것이 밉다거나 이상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런 여자였다. 무슨 행동을 해도, 어떤 말을 해도,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게 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곧게 바라보는 눈길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된다.
늘 그랬다. 보고 있으면 복잡한 생각은 죄다 사라지고 그녀만 남는다. 가슴을 짓누르는 이 갑갑함도, 머릿속을 휘젓는 온갖 상념들도 모두 사라져 버린다.
그러고는 저 푸른 눈에 붙들리고 만다. 푸른 불은 족쇄가 되어 저를 휘감는다. 마치 묵직한 돌멩이가 발에 달린 것처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자신을 붙들어 주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여자가 입 맞춘 자리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유진은 저도 모르게 아리아드네가 입 맞춘 약지에 슬쩍 입술을 붙였다.
왼손 약지, 영혼과 사랑을 품는 손가락. 제 영혼도 누군가에게 속할 수 있을까. 서늘한 바람처럼 청량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웃음을 터트리며 말한다.
‘당연하지. 당신 자리는 여기야. 내 옆에 있어.’
오랜 시간 헤매다 돌아왔으나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남지 않은 땅에서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녀는 중력처럼 자신을 끌어당긴다. 마침내 돌아온 집에 몸을 누인 것처럼 안온하다. 자신에게도 정착할 곳이 있다면, 떠돌지 않아도 된다면, 그렇다면 제 마지막은 이곳이기를…….
반짝이는 별빛에 소망을 품어 본다. 오늘이 지나면 그대로 사라질 헛된 것일지라도.
하지만 꿈처럼 달콤했던 순간은 오래지 않아 깨어졌다. 불쾌한 감각이 등 뒤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 말고 그만 나와.”
유진의 낮은 목소리에 어둠 속에 웅크린 형상이 달빛 아래에 섰다.
“쥐새끼라니.”
비뚜름한 웃음을 건 남자였다. 남자가 붉은 기가 도는 금발을 쓸어넘기며 아리아드네가 사라진 어둠 속을 응시했다. 그녀가 있다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는 것뿐인데도 남자의 시선이 유진을 불쾌하게 했다.
유진은 이 불쾌함이 처음 볼 때부터 거슬렸던 저 남자 탓인지, 저 남자가 아리아드네의 약혼자였기 때문인지, 저 남자가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눈빛을 하고 있어서인지도 알 수 없었다.
“숨어서 염탐이나 하는 게 쥐새끼가 아니면 뭐지?”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리아드네가 떠날 때쯤 남자가 나타났다는 거였다. 조금 더 일찍 남자가 나타났더라면, 그녀가 제 마음을 말하던 그 순간 그 자리에 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더러웠다.
“불쾌하니까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
유진이 불쾌함을 짓씹듯 말을 내뱉고는 돌아섰다.
“거래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제 말을 들으면 결코 거절하지 못할 겁니다.”
오만한 목소리에 유진은 인상을 찡그리며 뒤를 보았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지?”
제 마음을 저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 널렸군. 뇌까리듯 중얼거린 유진이 남자를 힐끗 보고는 다시 돌아서려던 순간이었다.
“당신이 찾는 물건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까요. 이래도 거절하시겠습니까?”
카이엔의 제안에 유진이 으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세게 물었다. 그것을 지켜보는 카이엔의 한쪽 입꼬리가 비웃듯이 말려 올라갔다.
그의 생각대로였다. 유진은 결코 이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