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148)
  • * * *

    “폐하, 공녀를 만나시려거든 제게 말씀을 하지 그러셨습니까. 며칠 전부터 안절부절못하시기에 걱정이 많았습니다.”

    왕후가 제 품에 가둔 다그마르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파드득, 덫에 걸린 날짐승처럼 다그마르의 몸이 잘게 떨렸다. 다그마르는 왕후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 아니 그게 공녀와는 산책을 나왔다가 우연히 보게 된 것뿐이에요.”

    거짓을 말하는 다그마르의 눈동자가 불안으로 거세게 흔들렸다.

    ―메르디에스 공녀, 왕궁에 들었단 말은 들었어요. 내 긴히 공녀와 할 말이…….

    그렇게 다급한 기색으로 아리아드네를 찾을 때는 언제고, 다그마르는 자신이 아리아드네를 찾아온 것을 끝까지 숨기고 싶은 듯했다.

    무엇 때문인지는 뻔했다. 아리아드네를 만나는 것을 왕후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 그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그렇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칼의 음색은 몹시도 부드러웠으나 어딘가 가시가 돋친 것처럼 듣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런.”

    혀를 차며 갑자기 몸을 낮춘 칼이 다그마르의 발아래 구겨진 옷자락을 빼내며 소리 내어 웃었다. 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 우스꽝스러운 촌극이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곧 웃음을 멈춘 칼은 즐거운 기색으로 손수 다그마르의 옷자락을 정리해 주더니 몸을 일으키며 빙긋 웃었다.

    “말씀은 이리하셔도 폐하께서 공녀를 많이 기다리셨네.”

    다그마르는 칼이 제 마음을 알아준 것이 조금도 기쁘지 않은 얼굴이었으나 어쩔 도리 없이 고개를 얕게 끄덕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리아드네는 이 상황이 더없이 불편했다. 자신이 신분으로 누를 수 없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니 할 수 있는 것도 없는데, 마치 폭력을 방관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불쾌했다.

    “반가이 맞아 주시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아리아드네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이자, 다그마르는 어서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듯 만남을 정리하려 들었다.

    “그럼 이만―”

    “서서 이러지 말고 공녀와 차라도 나누는 게 어떠십니까?”

    다그마르의 적갈색 머리를 쓸어내린 칼이 손가락에 걸린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으며 다정하게 권했다.

    “아, 그럼 그렇게…….”

    다그마르는 다시 제 의지라고는 조금도 없는 줄 달린 꼭두각시 인형처럼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왕이 무엇이라 말을 끝맺기도 전에 다과를 준비하라는 칼의 명이 떨어졌다.

    계절이 바뀐 꽃들로 만발한 정원에 다과를 위한 테이블과 자리가 마련되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물을 채운 수반에 꽃송이를 띄운 장식이었다.

    물에 환장한 리카서스가 할 법한 장식이라 그런지, 리카서스가 주최한 연회에 참석한 기분이 들었다. 포인트로 사용한 장식들마저 모두 푸른 계열이라 더 그랬다.

    심지어는 준비된 차조차도 검푸른 빛깔이었다. 이쯤 되면 왕가가 리카서스인지, 케이루스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심신 안정에 좋은 차라 합니다. 폐하께서 많이 놀라신 듯하여 준비하라 일렀습니다.”

    칼이 다그마르의 잔에 직접 차를 따르며 권하자, 그녀는 힘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칼이 권하기 전에 잔을 들어 입술 끝만 축인 채 내려놓았다.

    칼은 음미하듯이 천천히 차를 마시며 탐색하는 듯한 눈초리로 아리아드네를 살폈다. 갑자기 카이엔과 파혼하겠다는 아리아드네의 내심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느긋한 태도로 아리아드네를 살피던 칼이 픽, 하고 가볍게 웃더니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공녀는 어찌 지냈는가? 공작께서도 무탈하시고?”

    그렇게 묻는 칼의 태도는 정말 반가운 이라도 만난 것처럼 거리낌이 없었다. 카이엔과 약혼한 이후로 칼을 위시한 리카서스 세력과는 사사건건 부딪쳤지만, 칼은 한결같이 저런 식이었다.

    사이가 좋지 않을 때도 겉으로는 친근한 척 굴던 작자였으니 아리아드네가 파혼하겠다고 나선 마당에 새삼 날을 세울 이유는 없었다.

    “제 근황이야 들으신 대로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늘 좋으시지요.”

    아리아드네는 담담한 태도로 대답하며 찻잔을 들었다. 레너드야 칼이 안부를 물었단 소식을 전하면 금방 안 좋아지겠지만.

    ‘그놈은 어째 죽었단 소식이 안 들리냐? 그놈 죽었다 소리만 들리면 내 만사 제쳐 두고 칠일 밤낮 불이 꺼지지 않는 연회를 열 터인데.’

    그리 말할 아버지가 상상되어 아리아드네는 이 자리가 조금 견딜 만해졌다.

    “메르디에스는 왜 이렇게 왕도에서 얼굴을 보기 힘든가. 공녀도 1왕자와 약혼한 지가 언제인데 어떻게 왕궁에 한 번을 안 오나.”

    선왕 크리스티안의 노골적인 견제에 질린 레너드는 메르디에스로 돌아가 한동안 성문을 닫아걸었다. 이후 선왕의 폐위나 다그마르의 왕위 옹립과 같은 사안에서도 침묵을 고수했다.

    디움 산맥의 경계를 지키는 것 외에는 관심 없는 리뮈르나, 200년 전 케이루스 왕가가 세워지고 난 후로 좀처럼 영지 밖을 벗어나지 않는 소르체야, 메르디에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다섯 가문의 결속은 이미 깨어진 지 오래였다.

    그렇게 중앙 정계에서 발을 뺀 아버지를 끌어들인 건 아리아드네였다. 아리아드네의 약혼 전후로 왕도를 다녀온 레너드가 진저리치게 싫어했던 일이 바로 칼을 만나는 것이었다.

    ―아주 제가 왕인 줄 알아. 왕후(王侯)면 왕후답게 공작 아랫줄에 있을 것이지. 빌린 위세가 어디 제 것이라더냐? 그놈 죽었다 소리 듣기 전에 다시는 내가 왕도에 발을 들이나 봐라.

    메르디에스가 왕도에 발을 들이지 않는 것이 왕후인 칼의 행태가 꼴 보기 싫어서라고는 할 수 없으니.

    “아버지도, 저도 먼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지라 그리되었습니다.”

    일 년의 절반은 대륙 곳곳을 누비는 레너드를 두고 하기에는 성의 없는 변명이었으나,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이나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그런 사람이 살리바로, 엘바로, 다시 릭센으로 힘들었겠군. 활약은 익히 들었네. 큰일을 했다지?”

    페렌트 국왕의 대리인으로 살리바 협정에 참석한 건 정무 대신 뒤센 후작이었다.

    뒤센 후작가는 칼의 외가였으며, 뒤센 후작은 칼의 외숙부였다. 뒤센 후작은 다그마르의 대리인이 아니라 칼의 대리인인 셈이다.

    “한 일보다야 해야 할 일이 훨씬 더 많습니다. 치사(致詞)는 모든 일이 끝난 후에 다시 해 주시지요.”

    굳이 겸양을 떨 필요는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가벼이 웃음을 터트린 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리하지. 이토록 영민한 약혼녀를 잃게 되어 왕자가 상심이 크겠어.”

    고개를 숙인 채로 이 자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다그마르가 놀란 듯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리아드네도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다그마르가 아리아드네를 만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카이엔과 파혼하려는 이유를 묻고 그것을 만류하는 것 외에는.

    다그마르가 떨리는 눈으로 애타게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고동색 눈동자에는 외면하기 어려운 간절함이 그득했다.

    하지만 그것이 카이엔을 받아 줄 이유는 되지 못했다.

    “저보다 더 좋은 인연을 찾으시겠지요.”

    다만 아리아드네는 제 눈을 내리깔고는 제법 공손한 투로 말했다.

    다그마르가 카이엔에게 가진 부채감을 알았다. 카이엔이야 찢어 죽여도 속이 시원치 않으나, 다그마르 앞에서 그 적의를 드러내 퍼붓는다고 시원할 것도 없었다.

    공손하기만 할 뿐 조금의 여지도 남겨 두지 않는 단호한 대답에 다그마르의 눈에서도 마지막 남은 희망의 불씨가 사그라들었다.

    다시금 칼이 물었다.

    “그대는? 공녀도 다른 인연을 찾아야 하지 않나?”

    그렇게 묻는 칼의 눈동자는 고개를 숙인 다그마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질문을 해 놓고 아리아드네의 대답은 안중에도 없었다. 칼은 바들바들 떠는 다그마르를 보며 배부른 듯이 웃었다.

    ‘진짜 상종 못 할 사람이로군.’

    아리아드네는 레너드가 느낀 불쾌함을 십분 이해했다. 권력을 위해 다그마르를 묶어 놓은 것까지야 그렇다 쳐도, 마치 피 흘리는 짐승을 손 위에 올려 두고 감상하는 듯한 저 태도는 뭐란 말인가.

    아리아드네는 칼의 물음에 대답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아, 유진은 지금쯤 돌아왔으려나……. 보고 싶다.’

    아리아드네는 잔에 담긴 검푸른 빛깔의 차를 보며 유진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떠올렸다. 마치 바다로 흐르는 강처럼 생각의 종착지는 늘 유진이었다.

    그때, 다그마르를 보고 있던 짙은 남색 눈동자가 아리아드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남색 눈동자가 가늘게 접혔다. 칼이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이며 속삭이듯 물었다.

    “그래, 루안은 어떤가?”

    아, 이번에는 정말 위험했다. 아리아드네는 침착함을 잃지 않은 스스로를 칭찬하며 싱긋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2왕자에게 나쁜 감정은 없으나 왕가의 사람이라는 것을 제외해도 저 칼의 아들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전하, 메르디에스는 향후 3대가 케이루스의 피를 이은 누구와도 혼인하지 않겠노라 약조할 참입니다. 그 정도는 되어야 저를 놓아주시지 않겠습니까. 다른 누군가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메르디에스의 힘이 쓰이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리아드네는 마치 왕도의 정치에는 조금도 관여하지 않겠다는 투로 말했다. 아리아드네의 진의야 ‘다른 누군가’를 왕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었으나 칼로서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니.

    “그거참 아쉬운 일이군. 공녀만 한 인물이 흔해야 말이지.”

    조금도 아쉽지 않은 어조로 그렇게 말한 칼이 다그마르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어느새 붉게 물든 하늘을 보며 말했다.

    “해가 저무는군.”

    칼의 얼굴 위로 석양빛이 내려앉았다. 지는 해를 한참 바라보던 칼은 하늘이 어스름하게 변하고서야 그 자리를 떠났다.

    * * *

    케이루스 왕가의 1왕자 카이엔과 메르디에스 공가의 공녀 아리아드네의 파혼 협의를 위한 협의장은 왕궁 내 소회의실로 정해졌다.

    양측의 대리인과 중재자, 각기 데려온 공증인과 서기. 소회의실에 들어선 건 단 일곱 명이었다.

    케이루스에서 대리인으로 내세운 건 레비에 후작이었다. 레비에 후작가가 전통 있는 명문가이긴 하나, 레비에 후작이 작위를 이어받은 건 불과 2년 전이었다.

    ‘서른도 안 된 애송이잖아?’

    신시아가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메르디에스 상단주가 아무리 거금을 움직이는 큰 손이라 하나, 버넷 남작가라면 혼자서는 왕궁도 출입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그런데 뭐? 파혼의 대리인? 대놓고 장사를 하겠단 속셈이군.’

    레비에 후작이 신시아가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며 웃어 보였다.

    “카이엔 전하께서는 약혼자로서의 신의를 성실히 이행하였고, 공녀의 명예에 흠이 되는 어떤 행동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런 일방적인 파혼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레비에 후작은 파혼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부터 꺼냈다. 이 자리에 앉은 것부터가 절반의 동의이면서 저렇듯 원론적인 이야기부터 꺼내는 것이 딱 귀족다웠다.

    “약혼을 유지하는 게 목적이십니까?”

    신시아의 물음에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레비에 후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약혼이란 결혼을 약속하는 일입니다. 공녀께 결혼할 의사가 없는데 말뿐인 약혼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는 약혼은 아무 무게가 없다. 어차피 하지 않을 결혼인데 약혼을 유지해서 뭣하냐는 물음에 레비에 후작이 목소리를 높였다.

    “약혼이 그리 가벼운 약속이더이까?”

    신시아는 부러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리아드네는 이 말을 하며 확신했다. 카이엔이 제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거라고.

    “공녀께서 1왕자께 전하라 하셨습니다. 애초에 사랑만으로 한 약혼이고, 더는 전하를 사랑하지 않으니 우리 사이에 남은 약속은 없노라고.”

    사랑하지 않으니 파혼하겠다. 도무지 그 뜻을 짐작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 효과만은 확실했다. 레비에 후작은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만 달싹였다.

    “전하의 답을 기다리지요.”

    신시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눈을 감아 버렸다. 레비에 후작은 사람을 보내 카이엔에게 아리아드네의 전언을 알렸다. 보낸 사람은 오래지 않아 돌아왔다.

    “전하께서 공녀의 요구를 수용하겠노라 하셨습니다. 대신 마지막 협의 시에 양 당사자가 참여하는 것이 전하의 조건입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이 또한 아리아드네가 말한 대로였다. 며칠 밤을 꼬박 새운 것이 무색할 정도로 협의의 끝은 간단하게 찾아왔다.

    * * *

    ―나 내일은 신경 좀 써 줘.

    ‘이렇게 되기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아리아드네는 화장대 앞에서 시시각각 변해 가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 너머로 확인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 말을 할 때 시녀들의 표정이 심상찮긴 했다. 자기들끼리 주먹을 꽉 쥐고는 결의를 다지는 것도 같았다.

    해가 뜨기도 전에 침실로 들이닥친 시녀들은 잠이 덜 깬 아리아드네를 욕조로 옮겼다.

    진한 풀잎 향이 욕실을 그득하게 채우고 있었다. 서늘하고 상쾌한 향기가 아리아드네의 피부에 스며들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동안에 머리를 감기는 손길이 분주했다.

    입욕이 끝나자 대기하고 있던 하녀가 아리아드네의 전신에 오일을 바르고 꼼꼼하게 문질렀다. 어깨와 목, 팔과 가슴 위쪽은 꿀에 율무 가루를 갠 것을 한 번 더 문지른 다음에 씻어 냈다. 유난히도 정성스러운 손길이었다.

    평소라면 한나절은 걸렸을 기본 준비가 해가 막 떠올랐을 무렵 모두 끝났다. 최대한 많은 인원이 오직 아리아드네의 시중에만 동원된 쾌거였다.

    기본 준비가 끝난 아리아드네 눈앞에 다섯 벌의 드레스가 놓였다.

    붉은빛이 선명한 첫 번째 드레스는 목을 감는 홀터넥 스타일로, 수백 개의 자잘한 다이아몬드가 목을 감싸고 있었다.

    두 번째는 어깨에서 가슴 위까지 사선으로 떨어지는 비대칭 드레스였는데, 선명한 코발트블루 색상이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했다.

    세 번째는 가슴 라인이 일자로 떨어지는 하늘색 공단 드레스로, 목을 감싸는 시폰 러플이 어깨와 팔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디자인이었다.

    네 번째는 황금색 드레스로 사선 무늬를 따라 금사로 감싼 다이아몬드가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마지막은 메르디에스를 상징하는 녹색 드레스였는데, 어깨에서 망토처럼 떨어지는 트레인이 사람 두 명 길이만큼 길게 늘어져 있는 디자인이었다.

    “이 중에 고르라고?”

    아리아드네의 말에 드레스를 들고 있던 시녀들이 저마다 제가 든 것을 골라 달라며 조금씩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내 말을 오해한 것 같은데…….’

    아리아드네는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열정적으로 빛내는 눈동자에 그만 뒷말을 삼켰다. 이후 일정을 고려하면 세 번째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리아드네가 세 번째 드레스를 선택하자 나머지 드레스를 든 손들이 실망한 듯 축 늘어졌다.

    “아리아드네 님이 입으면 정말 아름다우실 거예요. 사랑스럽고 화려하고!”

    세 번째 드레스를 들고 있던 시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드레스가 결정되자 드레스 색상에 맞추어 화장을 마무리했다.

    드레스를 입어 보기 전에는 몰랐는데, 시폰 러플이 가리는 것은 어깨와 목, 팔만이었다. 일자로 떨어진 가슴 위쪽과 목 아래까지의 피부를 자연스럽게 노출하는 디자인이었다. 등 쪽의 옷감이 비쳐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아리아드네가 예상하지 못한 노출에 허전한 목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목이 허전하시면 목걸이를 걸어 드릴까요?”

    시녀가 준비된 목걸이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드레스 색깔과 맞춘 푸른 사파이어 목걸이였다.

    “아니, 디자인이 복잡해서 목걸이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

    아리아드네가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 보며 목걸이를 물렸다. 목걸이를 들고 있던 시녀가 빙긋 웃으며 물러났다.

    마지막으로 머리는 자연스럽게 틀어 올렸다. 느슨하게 감은 다음에 사파이어와 다이아몬드가 장식된 머리핀으로 마무리했다.

    거울 너머의 모습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제대로 꾸민 게 얼마 만인지도 가물가물했다.

    “역시 가끔 기분 전환이 필요해.”

    아름다운 것은 좋다. 아름다운 것으로 치장한 자신의 모습은 더 좋았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적당한 무게가 실린 이 느낌이 좋았다.

    눈을 감고 조금 전 거울에서 본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눈을 뜬 아리아드네가 깊게 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리아드네 님!”

    치장을 도와준 시녀들이 아리아드네를 불렀다.

    “힘내세요! 이기고 오세요!”

    “저희는 아리아드네 님 편이에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결의에 차 응원하는 모습에 아리아드네는 웃음을 터트렸다.

    “나 싸우러 가? 그래서 고른 드레스들이 다 그랬어?”

    어째 색이나 디자인이 하나같이 강렬하다 했더니. 아리아드네는 마치 대관식 망토라도 되는 것처럼 길게 끌리던 드레스를 떠올렸다.

    “뭐, 이기고 올게. 내가 싸우면 지는 거 봤어?”

    아리아드네가 머리를 까딱이며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하자 주위에 있던 시녀들이 마치 합창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니요!”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 같이 까르르 웃었다.

    “리아, 준비 끝났어?”

    그때, 방에 들어온 캐롤린이 아리아드네를 가볍게 포옹하며 말했다.

    “다녀와. 기다리고 있을게.”

    “다들 너무 비장해. 어차피 파혼은 결정된 건데.”

    아리아드네는 담담한 얼굴로 주위를 빙 둘러보고는 아무 말 없이 방을 나섰다.

    녹주궁의 입구에는 준비를 마친 신시아와 유진이 아리아드네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리아드네가 유진을 마주 보고 섰다. 아리아드네도 작은 키가 아닌데 유진과 가까이 서면 올려다봐야 했다.

    “갈까?”

    유진이 아리아드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말을 타거나 휘청거릴 때 잡아 준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이렇듯 예의를 차려 손을 내민 것은 처음이었다.

    “웬일이야?”

    반가우면서도 놀라워 그렇게 되물었다.

    “신발이 불편해 보여서.”

    아리아드네의 반응이 머쓱했던지 유진이 내민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가자.”

    아리아드네는 유진의 손을 냉큼 쥐고는 환한 빛이 쏟아지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와 걷는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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