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148)
  • * * *

    드디어 첫 번째 파혼 협의일이 잡혔다. 카이엔은 예상외로 질질 끌지 않고 파혼 협의에 응했다. 메르디에스가 전방위로 가하는 경제적 압박에 맞서느니 차라리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신시아가 빳빳하게 주름 세운 옷을 세차게 털며 아쉬운 어조로 말했다.

    “아, 쥐새끼가 쥐구멍에 숨어서 안 튀어나오면 굶어 죽도록 돈줄을 마르게 하라고 하셨는데……. 기회를 안 주네. 눈치챘나?”

    불만스레 중얼거리는 말이 누구에게 들은 것인지 너무 뻔했다. 아리아드네는 투덜대는 레너드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정말 기회 안 준 거 맞아?”

    “조금! 정말 조금! 맛만 보여 줬어요. 아리아드네 님께서 일정을 급하게 당기시는 바람에 준비한 것 중에 십분의 일도 못 했다고요. 더 몰리기 전에 파혼에서 뭐라도 뜯어낼 심산이겠죠. 감히 누구를 상대로!”

    상인의 눈을 한 신시아가 매섭게 날을 세웠다.

    “다녀와.”

    “심심하시면 산책이라도 하세요. 왕궁은 처음이시잖아요.”

    신시아가 그렇게 당부하며 유진과 함께 녹주궁을 나섰다. 남들이야 모른다지만 아리아드네는 왕비로 산 기억이 있었다.

    익숙한 왕궁은 새롭지도, 신기하지도 않았다. 다만 주위에서 늘 북적이던 사람들이 훅 빠지고 나자 적막하고 쓸쓸한 기분이 들긴 했다. 혼자 보내는 시간은 마치 고인 물처럼 느리게 흘렀다.

    아리아드네는 의미 없이 뒤적이던 책을 덮고는 시녀 하나만을 대동한 채 왕궁을 정처 없이 걸었다. 제 기억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왕궁의 모습에 오래된 기억들이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흩어졌다.

    “시간이 너무 안 간다.”

    아리아드네는 한숨을 푹 내쉬며 투덜거렸다. 사랑을 자각하고 나니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심지어는 시간의 흐름조차도.

    시간의 흐름을 결정하는 것은 유진의 존재였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은 바람처럼 지나가고, 그가 없는 시간은 무거운 추라도 달린 것처럼 게을렀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어떠했는지 모두 잊은 것만 같았다.

    “중증이네, 정말.”

    그렇게 중얼거린 아리아드네가 그만 녹주궁으로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아, 이런…….’

    왕궁의 시녀들이 상체를 숙인 채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그 끝에는 붉은 기가 섞인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초조한 얼굴로 아리아드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전체적으로 우울하고 희미한 인상이었는데, 화려하고 높은 관을 쓰고 있음에도 고개 숙인 시녀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존재감이었다.

    여자는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뒤를 힐끔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메르디에스 공녀, 왕궁에 들었단 말은 들었어요. 내 긴히 공녀와 할 말이―”

    여자가 아리아드네를 향해 다급히 발을 옮기다 제 옷자락을 밟고 휘청인 순간.

    “제게는 말도 없이 어딜 가시나 했더니 상대가 메르디에스 공녀였습니까?”

    햇살 아래 비친 부분은 짙은 푸른색이고 그렇지 못한 부분은 마치 검은색처럼 보이는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남자가 여자의 한쪽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아…….”

    화들짝 놀란 여자의 입에서 짤막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제 품에서 터져 나온 소리에 남자의 짙은 남색 눈동자가 여자를 향했다.

    남자의 시선을 받은 여자는 마치 덫에 걸린 짐승처럼 빳빳이 몸을 굳혔다. 여자가 누구로부터 도망을 치던 중인지 알 만했다.

    이번 생에서 왕궁에 든 것은 처음이었으나 국왕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까지 처음은 아니었다. 국왕 부부는 메르디에스 영지에서 치러진 아리아드네와 카이엔의 약혼식에 참석했었으니까.

    아리아드네는 여자를 향해 몸을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하늘을 주관하는 케이루스의 제주(祭主), 페렌트 다섯 기둥의 수장, 가장 찬란한 영광 국왕 폐하와 왕후께 메르디에스의 딸 아리아드네 메르디에스가 인사 올립니다.”

    페렌트의 49대 국왕 다그마르와 현 페렌트의 최고 실권자인 다그마르의 왕후(王侯)―왕의 남성 배우자를 지칭하는 페렌트 왕가의 호칭으로, 부계 세습이 일반적인 국가에서 왕의 아내를 일컫는 호칭인 왕후(王后)와는 별개의 말이다.― 칼이었다.

    * * *

    1왕자 카이엔이 생활하는 주각궁은 요즘 들어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치는 것처럼 살벌한 분위기였다.

    궁의 주인인 카이엔은 사용인들에게 엄격하기는 하나 대체로 무난한 편이었다. 그런데도 궁의 사용인들은 카이엔 앞에만 서면 바짝 긴장하곤 했다.

    가끔 보여 주는 서늘한 얼굴이 좀처럼 마음을 놓을 수 없게 했다. 그들은 카이엔의 기분에 따라 발걸음 소리조차 달리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카이엔은 평소처럼 웃는 얼굴인데도 어쩐지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주각궁의 시녀는 1왕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차를 따랐다.

    찻잔을 든 여자가 보랏빛 눈을 접으며 입을 열었다.

    “전하, 미천한 소녀의 알현 신청을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리스벨 영애는 내 약혼녀가 가장 귀애하는 친우이지 않습니까.”

    카이엔은 정말 반가운 이라도 만난 것처럼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요. 저에게 리아는 제 목숨보다도 소중한 사람이랍니다.”

    “리스벨 영애 같은 사람이 아리아드네 곁에 있어 안심입니다.”

    그 말에 캐롤린은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네. 그렇지 않아도 그 말씀을 드리려고 전하를 뵙겠다 하였습니다.”

    카이엔이 눈썹을 까딱이며 반응했다.

    “더는 약혼자가 아니게 된다 해도 전하께서 리아를 아끼시는 마음이야 변함이 있겠습니까. 제가 리아 곁에 있으니 전하께서는 안심하셔도 될 듯합니다.”

    “그렇습니까?”

    카이엔은 캐롤린의 도발에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차를 마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캐롤린 역시 담담한 얼굴로 찻잔을 들었다.

    캐롤린은 유독 눈물이 많았지만 그것이 솔직하단 뜻은 아니었다. 캐롤린은 제 마음을 숨기고 감추는 데 능숙했다.

    그래서 그랬던가. 카이엔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아리아드네의 약혼자인데도 좀처럼 마음을 열지 못했다.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동류를 발견한 불쾌함. 카이엔은 캐롤린만큼이나 제 마음을 숨기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전하, 리스벨은 메르디에스를 지키는 방패로 살아왔습니다. 전장에서 방패는 방어구로만 쓰이지 않습니다. 때로는 가장 강력한 공격 수단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정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글쎄, 남의 손을 빌려 내 것을 지키는 성미는 아닌지라.”

    카이엔이 빈 잔에 다시 차를 채우며 말했다. 자연스러운 하대가 이어졌다.

    “영애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애초에 전하 것이었던 적도 없지 않습니까?”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지.”

    “전하 말씀이 옳습니다. 지켜보시면 알 일이지요.”

    그 말을 끝으로 캐롤린은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숙인 캐롤린이 그림 같은 자태로 예를 올렸다.

    “무례한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뿐사뿐 내딛는 발걸음은 우아하였으며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방에 홀로 남은 카이엔은 천천히 잔에 든 차를 비워 내다 그대로 잔을 집어 던졌다. 파삭, 깨어진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감히, 백작 영애 따위가! 누구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내 것이다. 내 것이야! 왕좌도, 나라도, 그 여자도 모두 내 것이다. 지켜보아라, 얼마든지.’

    거세게 자리를 떨치고 일어난 카이엔은 그대로 주각궁을 벗어났다. 그는 마치 미로를 헤매는 것처럼 길이 없는 숲속을 걸었다. 무언가를 가리듯이 빼곡한 나무로 둘러싸인 외진 궁에 이르러서야 카이엔의 발걸음이 멈췄다.

    나무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마치 어떤 노래처럼 들렸다. 카이엔은 버려지고 방치된 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궁의 정원에 사람이 있었다. 색이 바랜 듯 옅은 금발, 처연한 표정, 푸른 눈동자, 그리고 그 눈동자에 담긴 굴욕과 치욕.

    아니, 이것은 환상이다. 그리고 기억이다.

    금발의 사내가 카이엔을 무심히 바라본다. 하지만 그뿐. 그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카이엔이 아무리 사내에게 매달려도 사내는 알 수 없는 곡조를 노래하며 먼 곳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내 카이엔이 붙잡고 있던 사내의 손이 썩둑 잘렸다. 놀란 카이엔이 그 목을 껴안자 목마저 썩둑 잘렸다.

    사내의 목은 바닥을 데구르르 굴렀다. 잘린 목에서는 저주 같은 노랫소리가 이어졌다.

    카이엔의 모친이자 페렌트의 49대 국왕인 다그마르는 선왕 크리스티안의 여동생이자, 47대 국왕 프란츠의 네 번째 자식이었다.

    다그마르는 존재감 없는 왕녀였다. 지식도, 외모도, 검술도, 화술도. 가진 것은 오로지 신분뿐이었으니 그것이 다그마르의 불행이었다.

    그녀의 신분이 처음부터 불행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그마르의 사랑을 이루게 한 것은 그녀의 신분이었으니까.

    다그마르의 첫 번째 결혼 상대는 페렌트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아로스의 2왕자 케네스 아로즈였다. 외교 사절로 페렌트를 찾은 이웃 나라 왕자 케네스에게 한눈에 반한 왕녀는 어렵지 않게 사랑하는 남자를 얻었다.

    다그마르와 케네스의 결혼 생활은 잔잔한 물처럼 이어졌다. 그것이 가끔은 지루할 만큼. 그 지루한 평화를 깨트린 것은 페렌트 다섯 가문 중 하나인 리카서스의 장자 칼 리카서스였다.

    명문 후작가 뒤센을 외가로 둔 칼은 리카서스가 제 것임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의 후처는 한미한 자작가의 여자였고, 후처가 낳은 이복동생 알프레드는 너무도 모자랐다.

    하지만 리카서스의 주인을 선택하는 것은 리카서스의 성물. 리카서스의 성물은 다음 주인으로 멍청한 동생을 택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게 된 칼은 왕궁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국왕은 다그마르의 이복 오빠인 크리스티안. 왕인 크리스티안과 왕비인 샤를로테는 자신들의 딸이 새 시대를 여는 왕이 될 거라는 망상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케이루스의 성물이 내린 예언 때문이었다.

    ‘네 죽음이 그토록 고대하던 이 땅의 진정한 왕을 잉태하리니, 홀로 우뚝하게 선 왕은 우리의 오랜 염원을 이루리라.’

    크리스티안은 자신이 죽으면 그 후사를 이을 딸이 그토록 강대한 왕이 되리란 예언에 반쯤 미치고 말았다.

    다섯 가문의 수장이 아닌 ‘홀로 우뚝하게 선 왕’.

    이것은 케이루스의 오랜 염원이었다. 하지만 크리스티안은 그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딸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과업이다. 아비인 내가 기반을 만들어 줘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크리스티안은 메르디에스, 리카서스, 소르체, 리뮈르, 네 가문을 극도로 경계했고 이것이 크리스티안을 몰락하게 만들었다. 칼이 크리스티안의 실정(失政)을 이유로 폐위를 주장했을 때, 어느 가문도 그를 지켜 주지 않았다.

    선왕의 셋째 에드워드, 다섯째 티라가 모두 죽고 가장 존재감 없는 왕녀 다그마르만이 홀로 살아남았다. 칼은 다그마르를 왕으로 옹립하고, ‘불의의 사고’로 남편 케네스를 잃은 다그마르와 혼인하여 왕후(王侯)가 되었다.

    다그마르는 죽은 케네스의 아이를 배 속에 품은 채로 칼과 국혼을 치렀고, 왕위에 오른 지 여덟 달 만에 첫 왕자를 낳았다.

    1왕자의 이름은 카이엔, 왕의 적장자였으나 누구도 카이엔을 다음 왕으로 여기지 않았다. 칼의 혈통을 이은 2왕자 루안이 태어나기 전부터도.

    카이엔은 그렇게 왕실의 천덕꾸러기로 자랐다. 페렌트 왕실은 왕이 되지 못하는 왕족이라고 목숨이 위험한 곳은 아니었으나 왕후 칼이 문제였다. 칼이 케네스의 아들인 카이엔을 살려 둘 리 없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카이엔은 송곳 같은 얼음 절벽 위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날마다 대답 없는 질문을 되뇌었다.

    왜 아무도 자신을 지켜 주지 않는가. 왜 어머니는 왕이면서도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가. 왜 자신은 왕의 적장자임에도 왕이 되지 못하는가. 왜 케이루스는 왕가이면서도 다른 가문에 휘둘리는가.

    자신은 왜 죽어야 하는가.

    그렇게 생존에 대한 욕구로 시작된 권력에 대한 욕망은 점점 비대해지고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카이엔은 그날도 들끓는 분노와 원통함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주각궁 창으로 희끄무레한 형상이 비쳤다. 칼이 보낸 암살자인가 하여 이불을 뒤집어썼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된 뒤에야 카이엔은 그 희끄무레한 형상이 제 어머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카이엔은 그것이 결코 들추어선 안 되는 어머니의 비밀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왕궁에서는 비밀을 많이 알수록 노리는 자들 또한 많아진다. 비밀을 지킬 힘이 없다면 비밀을 알아서는 안 된다. 더는 궁금해하지 말아야 한다.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카이엔은 이미 몸을 숨긴 채 다그마르의 뒤를 쫓고 있었다.

    야음(夜陰)을 틈타 시녀 하나만을 대동한 어머니가 도착한 곳은 길도 없는 외진 궁이었다. 유폐한 죄인이나 둘 법한 참혹한 곳에 어머니가 걸음을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카이엔은 마침 불이 들어온 방을 몰래 훔쳐보았다. 어머니가 한 남자를 붙든 채 울고 있었다. 다그마르는 그 남자에게 키스하며 안기고 울다가 웃었다.

    마치 정신이 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아니, 정신이 나간 것은 평소 쪽이다. 혼이 빠진 인형처럼 무기력하던 어머니가 남자의 품에서 생생히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 보는 남자였으나 카이엔은 단번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던 제 생부, 아로스의 2왕자 케네스 아로즈. 그가 살아 있었다.

    마땅히 왕후(王侯)의 지위를 누려야 할 그가 마치 죄인처럼 숨어 지내고 있었다. 모두의 존경을 받아야 할 국왕 부부는 마치 간음하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서로를 탐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카이엔은 자신이 그 모든 것을 되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케이루스의 피를 이은 자에게 케이루스의 성물이 축복을 내려 주는 날이.

    카이엔 역시 케이루스의 성물로부터 한 가지 예언을 들었다.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비밀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제 비밀을 나눌 만한 사람이 없었다.

    카이엔은 무작정 생부를 찾아갔다. 케네스는 카이엔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케네스의 텅 빈 눈동자가 바라보는 것은 아득히 먼 곳이었다.

    ―넌 나를 조금도 닮지 않았구나.

    생부가 카이엔에게 남긴 말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아니, 그렇지 않았다. 처음 본 남자가 제 생부라고 단박에 알아차렸을 만큼 카이엔은 케네스를 그대로 빼닮았다. 카이엔은 아버지가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숨어 지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케네스가 이곳에서 나와 왕후(王侯)의 자리에 마땅히 서게 된다면 자신을 외면하지 않으리라. 그러면 케네스도, 카이엔도 모두 살 수 있으리라. 그런 저주 같은 예언 따위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모친에게 달려간 카이엔은 케네스의 복권을 주청했다.

    ―어머니, 왜 아버지를 저렇게 두십니까. 당신께선 이 나라의 왕이 아니십니까. 아버지를 복권하시어 왕가의 권위를 바로 세우십시오, 어머니!

    카이엔의 주청에 다그마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떨 뿐이었다.

    ―어,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알았니? 어떻게 알았어?

    그렇게 다그마르가 고장 난 오르골처럼 그 말만을 반복하던 그때였다.

    ―왕자가 알았습니까? 폐하. 그자를 살려만 준다면 바람조차 그 존재를 알지 못하게 하겠다, 제게는 그리 약속하시지 않았나이까.

    마치 저승의 심판관처럼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칼이 다그마르의 뒤에서 나타났다. 다그마르는 칼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칼, 아니에요. 아니에요. 카이엔은 아무것도. 제발 그이를, 그이를…….

    칼이 몸을 낮춰 벌벌 떠는 다그마르를 안으며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언제고 폐하의 뜻을 거스른 적이 있습니까?

    더없이 달콤한 어조에도 다그마르는 조금도 진정하지 못했다. 그건 카이엔도 마찬가지였다. 도망치듯 그곳을 벗어난 카이엔은 이후로 주각궁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그런 카이엔을 찾아온 것은 칼이었다.

    ―왕자, 아로스의 첩자가 잡힌 것을 알고 있나? 페렌트의 왕자라면 그만한 일은 직접 확인해야겠지.

    카이엔은 칼이 데려온 왕실 기사에게 잡혀 짐짝처럼 옮겨졌다. 공포에 질린 몸이 마구잡이로 떨렸다. 칼은 길이 없는 숲속을 거침없이 걸었다. 칼이 손짓하자 왕실 기사가 카이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아로스의 첩자가 왕궁에 숨어 있을 줄이야.

    밧줄에 묶여 무릎 꿇린 남자를 보며 칼이 비웃듯이 말했다.

    ―아, 수년 전 불의의 사고로 죽은 아로스의 왕자와 몹시 닮은 듯한데 혹시 본인인가? 첩자가 아로스의 왕자였다면 문제가 달라지니 말이네.

    ―아니오.

    케네스는 모든 것을 각오한 듯 담담한 얼굴로 부정했다. 카이엔은 재갈이 물린 입으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왜 말을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왕의 정당한 배우자라고, 아로스의 왕자라고, 아로스 국왕의 숙부라고, 그렇게만 말하면 모든 것이 다…….

    ―다행이군. 하마터면 아로스에 남은 그대 가족을 죄다 죽일 뻔했어.

    그렇게 왕후(王侯)는 아로스의 왕자이고, 왕녀 다그마르의 부군이었으나,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아로스의 첩자가 된 케네스의 목을 잘랐다.

    손수 케네스의 목을 잘라 낸 칼이 그 목을 다그마르에게 바쳤다. 다그마르는 공포에 질린 채로 칼이 바치는 목을 들었다.

    한 나라의 왕이 눈앞에서 제 남편이 죽어 가는데 아무것도,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벌벌 떨고만 있었다. 다그마르가 뒤집어쓴 관(冠)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이곳의 진정한 왕은 칼이었다. 그것을 목격한 카이엔의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생부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한 공포와 분노를 아득히 뛰어넘는 강렬한 감정이 그를 온통 휘감았다.

    아아, 바로 이것이었다. 그가 그토록 원하고 가지고 싶었던 무엇이.

    카이엔이 자라는 내내 탐했던 무언가가 그날 가장 완성된 형태로 그 앞에 툭 떨어졌다.

    칼이 보여 준 그날의 기억은 마치 노예의 낙인처럼 카이엔의 영혼에 새겨졌다. 너무도 달콤해 그것을 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카이엔은 자신의 것이어야 마땅한 것들을 앗아간 칼을 증오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카이엔의 증오는 동경을 먹으며 자라났다.

    카이엔이 그리는 이상은 언제나 칼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칼이 보여 준 압도적인 권력, 칼이 보여 준 비정함, 권력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집요함.

    그는 칼이 되고 싶었다. 아니, 칼조차 넘보지 못할 진정한 왕이 되고 싶었다.

    홀로 우뚝하게 선 왕. 이것은 카이엔의 염원이 되었다.

    그 염원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진창에서 구를 수 있었다. 가면을 뒤집어쓰고 자신을 파는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카이엔을 가장 비싸게 사 준 것은 메르디에스의 딸이었다.

    어떨 때는 자신이 권력을 갖고자 하는지, 권력이 자신을 집어삼키는지도 구분할 수 없어졌다. 그 여자가 주는 권력을 사랑하는지, 권력을 주는 그 여자를 사랑하는지도.

    어차피 상관없었다. 다 제 것이 될 테니까. 그것을 위해서라면 잠시 놓는 척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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