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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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성에서는 아무 연락도 없었어?”

    녹주궁에 거침없이 들어선 아리아드네가 물었다. 페렌트의 왕궁에는 케이루스, 메르디에스, 리카서스, 소르체, 리뮈르, 각 가문을 위해 마련된 궁과 문이 존재했고 각 가문의 직계는 언제든 이곳에 머무를 수 있었다.

    페렌트의 왕궁은 왕가만의 것이 아니었다. 카이엔이 쓰는 주각궁은 케이루스의 것이었으며 이곳 녹주궁은 메르디에스의 것이었다.

    “상단주님께서 와 계십니다.”

    여장을 풀던 아리아드네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신시아가?”

    그 말과 동시에 작고 통통한 체구의 중년 여자가 시녀들 사이를 헤치고 나타났다. 그녀가 양쪽 치맛자락을 잡고 아리아드네에게 예를 올렸다.

    “저하, 버넷의 신시아가 인사 올립니다.”

    “왜 이래? 무섭게.”

    좀처럼 보기 드문 신시아의 진지한 모습에 아리아드네가 부러 장난스레 대꾸했다. 하지만 신시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슴에 한쪽 손을 올린 채 더없이 진지한 태도로 말을 이어 갔다.

    “메르디에스 상단원 모두를 대표하여 감사드립니다. 저하께서 보여 주신 결단과 용기, 지켜 주신 목숨과 명예, 반드시 갚겠습니다.”

    신시아의 갈색 눈동자에서 굳은 결의가 솟구쳤다. 아리아드네가 피식 웃으며 가슴에 올린 신시아의 손을 끌어 내렸다.

    “아니, 나야말로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지켜 줘야지. 나 맹세라도 해야 해?”

    “이 한 몸 불살라 저하의 파혼을 반드시 성사시키겠습니다.”

    신시아가 아리아드네의 양손을 꽉 붙들고는 몹시도 열정적인 태도로 말했다. 그 기세가 어찌나 형형한지 카이엔의 궁에 당장 불이라도 지를 것 같았다.

    “내 파혼 따위에 그대 몸을 불사를 필요가 있을까?”

    정말 그깟 파혼이 뭐라고.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다들 신시아와 한통속인 듯했다. 이 자리의 모두가 신시아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그녀가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고개를 두 번, 세 번 끄덕이고 있었다.

    아리아드네의 여장을 풀어 주던 시녀들은 일하던 손마저 멈춘 채로 신시아의 말을 경청했다. 어딘가 감동한 표정은 덤이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하고 앉아.”

    아리아드네가 졌다는 듯이 두 손을 들고는 신시아에게 자리를 권했다.

    “신시아가 와 있다고 할 때부터 혹시나 했는데 아버지께서 보내신 거야? 아버지 대리인으로? 아버지 너무 세게 나오시는 거 아니야?”

    파혼은 양 가문의 대리인과 중재자, 셋의 합의로 이루어지며 당사자는 참석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중재자는 어느 가문에서든 내세울 수 있으며 상대는 이에 동의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 다만 거부할 경우 거부하는 쪽에서 중재자를 내세워야 한다.

    카이엔이 유진의 중재를 거부할 수는 있으나, 거부할 경우 합당한 자격을 갖춘 자를 중재자로 내세워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왕가와 공가의 파혼에 합당한 자격을 갖춘 다른 중재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 카이엔으로서는 유진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양 가문의 대리인은 항렬 높은 친척이 맡는 것이 보통이었다.

    메르디에스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어떻든지 간에 신시아는 메르디에스와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남작 부인에 불과했다. 왕가와 공가의 파혼에 대리인으로 내세운 것이 남작 부인이라.

    “카이엔이 열 좀 받겠는걸.”

    아리아드네가 빙글거리며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차를 올리겠습니다.”

    차를 가져온 시녀마저도 몹시 기쁜 듯 웃는 얼굴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란데르 별장에서 카이엔이 줄리에게 벌인 짓은 일파만파 퍼져 나가 메르디에스 고용인들 사이에서 카이엔은 인간 말종 취급을 받고 있었다.

    실제도 마찬가지이긴 했으나……. 마치 흠을 잡으려고 기다린 사람들 같다고 하면 지나친 생각일까?

    “아리아드네 님께서 파혼의 의지가 확고하시다고 들었습니다. 어차피 왕가와 잘 지내는 건 텄으니 확실하게 결딴을 낼 상대가 필요하다 하여 제가 지목되었습니다.”

    카이엔을 망신 주는 것도 그렇지만, 파혼을 협상이나 거래라고 치면 신시아만 한 이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상단주는 메르디에스 상단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메르디에스의 권력이 부(富)에서 비롯되니 메르디에스 내에서 신시아는 결코 낮은 위치가 아니었다.

    남편인 버넷 남작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상단주가 된 신시아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빠르게 상단을 장악해 나갔다. 그리고 상단의 유통망을 이용해 다른 것들을 사고팔기 시작했다.

    “그것만이야?”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신시아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위에 새 모양의 인장을 올려놓았다.

    “첫 번째 틸레를 아리아드네 님께 드리라는 성주님의 명이십니다.”

    틸레란 메르디에스에서만 사용하는 전서구의 품종이자 이것들이 나른 정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신시아가 새롭게 사고팔기 시작한 것은 바로 정보였다.

    그중에서도 첫 번째 틸레란 가장 은밀하고 신속한 정보를 일컫는 말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이제부터 레너드와 같은 수준의 정보를 보고받고, 아리아드네가 요청한 정보는 가장 신속하게 수집될 것이다.

    “엘바의 일 때문인가?”

    “네, 아리아드네 님의 생각대로 1왕자의 숨겨진 힘이 마물이라면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시몬과 카이엔이 유착 관계라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메르디에스 상단원들의 실종 사건을 조사하겠다며 엘바로 떠나 그곳에서 모든 것을 직접 보고 들은 아리아드네가 내린 결론이었다.

    레너드는 아리아드네의 의심이 ‘진짜’일 경우에 따라오는 위험을 간과할 수 없었다.

    “마물의 변이와 관련된 것을 1년간 함구한다는 약속도 처음부터 지킬 생각 없으셨던 거지?”

    “아직 확인하지 못한 부분이 많은 것은 사실이니까요. 확인할 시간이 필요하긴 하지요. 당분간은 자격이 되지 않는 자가 성물을 가까이하면 저주를 받는다더라, 그런 소문을 퍼트릴 작정입니다. 요는 1년간 메르디에스의 공식적인 입으로 그 일을 말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필요하다면 그것을 퍼트리는 것은 신시아의 몫이었다. 상인의 입처럼 발 빠른 것은 없으니까.

    “아그네스 교황 말이야. 만만히 볼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이번 일로 가장 많은 이득을 본 사람은 나도 아버지도 아닌 아그네스 교황이야.”

    시몬과 랭스턴을 일시에 치운 것은 물론이고 이번 일로 성 상티모니아 내 권력 구도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 일로 성 상티모니아 내에서 교황을 견제하던 세력이 말끔히 사라졌어.”

    20인의 추기경 중 다섯이 이번 일로 목이 날아갔다. 모두 시몬에게 우호적인 인물들이었다.

    “엘바에서 내가 한 모든 일이 어쩌면 아그네스 교황의 뜻대로였는지도 몰라.”

    엘바에서는 교황이 자신에게 귀찮고 위험한 일을 떠넘긴 거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무시할 수 없는 증인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좀 살펴봤는데 아그네스 교황이 즉위하고 마물의 발생 빈도가 이전의 삼분의 일 수준으로 줄었습니다. 성물의 적극적인 회수, 성물의 엄격한 관리, 마물 진압에 힘쓴 결과입니다. 무엇보다 아그네스 교황을 견제하는 세력은 주로 성 상티모니아에서 오래된 권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신시아의 설명을 들은 아리아드네가 명료한 투로 덧붙였다.

    “부패하고 타락한 자들이겠군.”

    적대할 이유가 없는 상대라면 굳이 날을 세울 필요는 없다. 하지만…….

    “손을 잡아도 되는 상대인지 알아봐.”

    아그네스는 적으로 돌리자니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한편이 되기에도 어딘가 찜찜한 상대였다.

    “네. 그렇지 않아도 성주님께서도 교황에 대한 자세한 조사를 명하셨습니다. 정보가 취합되는 대로 전달하겠습니다.”

    “레이먼드가 살리바에 남아 있어. 도움이 될 거야.”

    무언가가 떠오른 듯 나가려는 신시아를 붙잡은 아리아드네가 물었다.

    “신시아, 황금의 주인이라고 들어 봤어?”

    “아뇨, 들어 보진 못했지만 황금을 제일 많이 가지신 분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신시아가 말하는 그분이라면 아리아드네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스스로를 세계 유일의 부호라 거리낌 없이 칭하는 사람이 아닌가. 아리아드네는 멀리 있을 아버지가 떠올라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그런 게 아닌 것 같아. 신학자를 좀 알아봐 줘. 고대 신에 능통한 자로.”

    * * *

    당사자가 파혼 조율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고 하나, 어디까지나 그건 겉으로 드러나는 절차에 불과했다. 아리아드네의 의사를 확인하지 않고는 진행이 안 되니 꼼짝없이 서류와 사람들에 파묻혀 지내야 했다.

    더구나 당장 파혼하겠다고 해서 모두를 밤낮없이 일하도록 몰아붙인 건 자신이었다. 자신 때문에 눈 밑이 시꺼멓게 변한 사람들 사이에서 피곤하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며칠째 네 시간 이상 못 잤더니 글자가 종이 밖으로 기어 다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라 잠시 바람이나 쐬러 나온 참이었다. 잠시 눈을 감은 것뿐인데 아득한 곳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의식이 훅 꺼졌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서늘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햇볕도 딱 좋았다. 이대로 한 시간만 잘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번진 주황색 같던 눈꺼풀 너머의 세상이 그늘진 것처럼 어두워졌다.

    아리아드네가 천천히 눈을 떴다. 뚱한 표정의 남자가 아리아드네 위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피로하던 몸이 따뜻한 물에 잠긴 것처럼 풀어졌다. 가슴께에서 시작된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아, 반갑다.”

    아리아드네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동안 유진을 아예 보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메르디에스 손님으로 유진도 함께 녹주궁에 머무르고 있으니 오며 가며 얼굴 정도는 마주치곤 했다. 그런데도 눈앞에 서 있는 남자가 매번 반가운 자신이 새삼 신기했다.

    “반가운 게 휴식이야? 사람이야?”

    피로에 전 아리아드네가 안됐다는 듯 내려다보던 유진이 물었다.

    “휴식을 같이 나눌 동지는 언제든 환영이야.”

    아리아드네가 앉으라는 듯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잠시만. 곧 들어갈 거야.”

    변명처럼 덧붙이는 그녀의 말에 유진이 미간을 슬쩍 찌푸리며 자리에 앉았다.

    “나, 당신 잡으러 온 거 아니야.”

    “알아. 나 때문에 당신도 고생이니까 잠깐만 쉬어.”

    “뭐가 이렇게 복잡해? 파혼이야 한쪽에서 싫다고 그러면 끝인 거 아냐? 결혼을 억지로 할 것도 아니고.”

    유진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야 크게 고생한 것도 없이 사람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걸 지켜보는 게 전부였지만.

    “가문과 가문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니까. 나를 놓치고 싶겠어? 이해는 가.”

    반쯤은 장난으로 아리아드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유진이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사이로 초가을의 맑은 햇살이 비쳤다. 아리아드네는 두 손을 쭉 뻗어 그 사이로 비친 가을 하늘을 바라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새어 드는 햇살이 눈 부신 듯 서늘한 눈매가 가늘게 접혔다. 손등 위를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나뭇잎 그림자를 가만히 지켜보던 아리아드네가 말했다.

    “꼭 반지 같아.”

    그러고 보니 네 번째 손가락과 다섯 번째 손가락에 걸쳐진 그림자가 마치 반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기에서는 손가락마다 의미가 있다고 믿어.”

    “무슨?”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얼굴을 한 유진이 제 주위 풀들을 의미 없이 뜯어 날리며 물었다.

    “엄지는 신의와 믿음을, 검지는 꿈과 욕망을, 중지는 미련과 후회를, 약지는 영혼과 사랑을, 소지는 결단과 약속을―”

    아리아드네는 손가락을 차례대로 짚으며 각각의 의미를 설명했다. 다섯 개의 손가락을 모두 짚고 나자 약지와 소지에 걸쳐져 있던 그림자가 슬그머니 약지로 자리를 옮겼다.

    “품고 있다고 생각해.”

    “여기도 결혼반지는 약지 차지겠군.”

    아리아드네의 네 번째 손가락에 진 그림자를 가만히 쳐다보던 유진이 말했다.

    “당신이 살던 곳도 그랬어?”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유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 곳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곳에 그리운 사람은 없어?”

    아리아드네는 아무런 장신구도 하지 않은 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없어, 그런 거.”

    예상한 것만큼이나 담백한 대답이었다. 그곳에 아무 미련 없다는 것이 반가우면서도 우려스러웠다.

    “당신을 보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여름에도 녹지 않는 만년설처럼 단단히 얼어붙은 마음이 조금 무서웠다. 그리고 그동안 유진이 지내 온 시간이 짐작되어 안쓰러웠다.

    하지만 위로에도 자격이 필요하다. 사심이 섞인 것이라면 더욱더.

    “그럼 해.”

    “지금 말고.”

    그럼 가 볼까. 자리에서 일어난 아리아드네가 드레스를 정리하며 말했다. 따라 일어난 유진이 의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또 무슨 귀찮은 일을 시키려고 그래?”

    “별로 안 귀찮을걸?”

    귀찮은 건 다 내가 할 거니까. 속으로 뒷말을 삼킨 아리아드네는 한 걸음, 두 걸음 멀어졌다가 다시 돌아가서 유진을 올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그의 결 좋은 새까만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다. 겨울이 되면 담비 털로 된 외투를 선물하고 싶었다. 그의 머리카락처럼 윤기가 가득한 것으로.

    “당신이 신경 쓸 일은 없을 거야. 신시아가 알아서 할 거니까. 당신은 뭐랄까. 인장 같은 거라서, 가만히 있다가 마지막에 쾅! 찍어 주기만 하면 되거든.”

    “이제는 아예 인장 취급인가?”

    시답잖은 말장난에도 아리아드네는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를 가다듬은 아리아드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이 말 한 적 있었나?”

    유진은 가만히 쳐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고마워. 당신 덕분에 나 어제를 매듭짓고 내일로 나갈 수 있었어. 당신이 아니었으면…….”

    마땅한 중재자를 찾지 못했다면 제 손으로 카이엔을 죽여서라도 모든 관계를 끝내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만.

    “아, 빨리 홀가분해지고 싶어. 아직도 그 사람이랑 어떤 관계로 엮여 있다는 게 너무 끔찍해.”

    아리아드네의 내심 따위는 알 리 없는 유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곧 그렇게 되잖아.”

    “응, 당신만 믿을게.”

    아리아드네의 그 말에 유진은 피식 웃으며 불퉁한 투정을 늘어놓았다.

    “언제는 인장이라며?”

    “몰라? 인장이 없으면 다 무효인 거? 그게 제일 중요한 거라고.”

    새파란 하늘에는 새 모양의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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