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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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리바 대신전에서 마련한 자리에 앉은 것은 셋. 세 번째 인물이 착석하자 엘바의 사후 처리를 위한 지루한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페렌트 국왕의 대리인인 정무 대신 뒤센 후작 베르닌과 메르디에스 공작의 대리인이자 메르디에스 기사단장인 리스벨 백작 커티스, 성 상티모니아의 교황 아그네스가 참석한 자리였다.

    한 명 더, 이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인 시몬의 친모 루이제 랭스턴이 있었으나 자리에 앉지도 못한 그녀에게 발언권이 있을 리 만무했다.

    “성 상티모니아는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성물의 수호자이자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대변자입니다. 마물이 인간의 변이체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숨긴 것은 대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야기의 포문을 연 아그네스는 조금도 거리낌 없는 태도로 성 상티모니아의 모든 결정이 대의를 위한 것이었노라 주장했다.

    “성물에 반발력을 가진 인간이 마물로 변하는 건 사실이란 말입니까? 허허, 거참…….”

    뒤센 후작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탄식했다.

    “그렇습니다만 생각하시는 것처럼 큰일은 아닙니다. 성물에 친화력을 가진 사람이 천 명 중 하나라면 성물에 반발력을 가진 사람은 백 명 중 하나입니다.”

    “그게 어떻게 큰일이 아닙니까?”

    뒤센 후작의 항변쯤은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이 아그네스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설명을 이어 갔다.

    “그중 마물로 변이할 가능성이 있는 것은 반발력을 가진 인간 백 명 중 하나. 즉 만 명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성물에 반발력을 가졌다 할지라도 대부분은 구토, 어지럼증, 발열, 두드러기와 같은 가벼운 증상에 불과하고 성물을 가까이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낫습니다.”

    아그네스의 설명에 뒤센 후작은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으로 득실을 따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대다수의 성물은 엄격히 보관되고 있으니, 자연 상태라면 반발력을 가진 이가 성물에 노출되어 마물로 변이될 확률은 극히 드뭅니다. 근래 들어 비정상적으로 늘어난 마물의 출현은 제외하고서 말이지요.”

    뒤센 후작 같은 자를 다루는 것은 어려울 것이 없다. 원하는 것보다 조금만 더 쥐여 주면 만족하고 돌아갈 인사이니.

    역시 골치가 아픈 쪽은…….

    “성 상티모니아는 보유 중인 성물을 일반에 공개하지 않았습니까?”

    메르디에스 공작의 대리인인 리스벨 백작이었다. 저런 인사는 세 치 혀로 설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제 기준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은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만한 무력을 가지고도 가신이나 하고 있지.

    “성물 공개 시 이루어지는 접촉 정도로는 변이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지속적이고 직접적인 접촉만이 변이의 요건이 됩니다. 하지만 엘바에서 벌어진 일은 이 모든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지요. 가벼운 반발력을 지닌 이들도 마물로 변이시킬 만큼 강력하고 자극적인 접촉을 가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것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비인도적인 방법이었음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까지 성 상티모니아는 인간이 마물이 되는 것을, 인간이 마물이 된 인간을 죽이는 것을 방조해 온 것 아닙니까? 성도들이 이를 알면 대단히 실망하지 않겠습니까?”

    뒤센 후작이 은근한 압박을 가해 왔다. 머릿속으로 모든 계산을 마쳤음이 분명했다.

    “말씀하신 대로 성 상티모니아는 그 모든 것을 알고 뼈를 깎는 심정으로 희생해 왔습니다. 마물이 된 인간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무해한 인간들이 마물에게 희생당하는 일이 없도록 누구보다 앞장서서 마물을 토벌해 왔습니다. 또한, 이와 같은 정보가 새어 나가 시몬과 같은 무도한 자가 생겨나지 않도록 노력해 왔습니다. 오히려 이 자리에 계신 분들께서 그 공을 인정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아그네스는 오히려 성 상티모니아의 공로를 주장하고 나섰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검은 속내를 품고도 마주한 얼굴은 이토록 태연하다. 아그네스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여유로운 태도로 물었다.

    “페렌트는 앞으로 어찌하시겠습니까? 이 모든 것을 널리 알리시겠습니까? 한 해에 인간이 마물로 변이하는 수와 마물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의 수를 모두 합쳐도 해마다 감기로 죽어 가는 사람의 수보다도 적습니다.”

    원래 정치를 하는 인간들이란 생명을 숫자로 판단하기 마련이다. 인간이 마물로 변이한다는 사실은 올겨울 제법 독한 감기가 유행할 거라는,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보다도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이것이 알려지면 그 혼란과 파장은 감당하기 힘든 수준일 겁니다. 뭐든 모르는 게 더 좋은 일도 있는 법이지요. 바로 지금처럼요.”

    정보는 독점할 때만이 그 의미를 지닌다. 모두가 아는 정보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제야 막 알게 된 이만한 정보를 놓치고 싶을 리가.

    “시몬 같은 이가 또 나타나면 어찌합니까? 마물로 군대라도 만들어 내면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성 상티모니아가 그 긴 세월 동안 이를 악용하고자 마음먹었다면, 겨우 살리바만 차지하고 있었겠습니까?”

    아그네스가 마치 눈앞에서 사탕을 흔들어 보이는 것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뒤센 후작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미끼를 물려는 순간이었다.

    “성 상티모니아는 시몬 랭스턴을 막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역시나. 그 긴 이야기가 무색하게 싹둑 자른 리스벨 백작이 서릿발 같은 어조로 물어왔다.

    “본교의 견제가 없었다면 시몬은 훨씬 더 많은 마물을 만들어 내 이미 세상에 풀었을 겁니다.”

    아그네스의 즉답에도 리스벨 백작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성 상티모니아는 이 일을 밝혀내지도 못했습니다.”

    “물론, 메르디에스 공녀가 큰일을 하셨지요. 하지만 성 상티모니아의 지원 없이 메르디에스 공녀가 엘바에서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었겠습니까? 성 상티모니아의 성녀를 움직인 게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말씀은 지금, 메르디에스 공녀를 미끼로 삼으셨단 말입니까?”

    무슨 말에도 태산처럼 흔들림 없던 사내가 마치 배를 집어삼키려는 파도처럼 사나워졌다. 참으로 넘치는 사랑을 받는 이였다.

    “선후 관계에 착각이 있으시군요. 성녀가 메르디에스 공녀를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엘바로 진입하길 원하는 공녀께 도움을 드린 것에 불과합니다.”

    아그네스는 아리아드네 옆에 리스벨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좀처럼 깰 수 없는 신뢰 관계라 제법 괜찮은 미끼일지도.

    “그러니 미끼로 삼았다는 말은 적절치 못하군요. 엘바의 진실을 알고자 하는 공녀께 할 수 있는 모든 지원해 드린 것이지요.”

    가만히 지켜보던 뒤센 후작은 이 연극이 지루했는지 마침내 마지막 장면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입은 피해가 얼마인데 이대로 넘어가기엔…….”

    “잘못을 한 자가 마땅히 책임을 져야겠지요. 엘바 또한 틀림없는 성 상티모니아의 땅, 그곳에서 일어난 일에 책임을 피할 생각은 없습니다.”

    지루한 협상의 끝이었다.

    “페렌트의 왕께서는 무엇을 원하십니까?”

    * * *

    릭센의 왕궁이 어느새 코앞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왕궁을 통과하는 다섯 개의 문 중 남문을 향하여 말머리를 틀었다.

    “알버트와 같이 메르디에스로 돌아가지 그랬어?”

    “아니야. 알버트는 치료를 받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지만 그만한 일을 너 혼자 감당하게 만들 순 없잖아.”

    알버트와 돌아가라는 말은 들은 척도 않더니 캐롤린은 끝내 아리아드네를 따라왔다. 파혼 따위가 뭐 대수라고.

    하지만 아리아드네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과는 별개로 저를 걱정하는 마음이 고맙지 않을 리 없었다.

    부드러운 얼굴로 아리아드네와 마주 본 캐롤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페렌트의 왕궁이 있는 방향이었다. 왕궁을 올려다본 캐롤린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카이엔 전하 얼굴도 보고 싶고.”

    드디어 왕궁의 남문이 보이자 일행은 말의 속도를 서서히 줄였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전하 뜻대로 됐다면 난 다 잃었을 거야. 알버트, 너, 아버지, 가문과 내가 자란 그 땅까지 전부 다.”

    땅의 문이라고도 불리는 남문에는 메르디에스 가문의 휘장이 펄럭이고 있었다. 왕궁을 통과하는 다섯 개의 문은 페렌트 다섯 가문의 문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봐야지. 보고 절대로 잊지 않을 거야. 알버트의 팔이 왜 그렇게 됐는지. 내가 지키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풍요가 지배하는 그 땅은 캐롤린에게도 고향이고 집이었다. 햇볕을 잔뜩 머금은 흙냄새, 사람 키만큼 자라는 풀과 하늘 끝까지 솟을 듯한 높다란 나무, 철마다 피고 지는 각양각색의 꽃, 가을이 되면 알알이 맺히는 곡식과 과일들. 평생을 보고 자란 풍경이었다.

    메르디에스가 그 땅을 다스리는 자라면 리스벨은 그 땅을 지키는 자였다.

    “알버트는 너무 걱정하지 마. 코라에게 소개장을 써 달라고 부탁해 뒀어. 소르체의 혈족에게 진료받으면 곧 나을 거야. 알버트는 엘바의 귀환자이기도 하니까 아버지께서도 적절한…….”

    아리아드네는 뒷말을 끝내 하지 못하고 삼켰다. 팔을 잃은 기사에게 무엇을 줘야 적절한 보상이 될 수 있을까. 아직도 이렇게 갈 길이 멀었다.

    “미안해.”

    아리아드네는 참담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왜 미안해.”

    “엘바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만한 사람들이 죽었는데, 난 아무것도 몰랐어.”

    다스리는 자리에는 책임이 따른다. 몰랐다는 것은 변명이 될 수 없다. 무지(無知)를 무기로 삼고 싶진 않았다.

    캐롤린이 아리아드네의 마음을 덜어 주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아니었다면 엘바에서 랭스턴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무도 몰랐을 거야. 리아, 시몬 랭스턴이 벌인 그 끔찍한 짓을 밝혀낸 건 너야. 네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야.”

    “지키지 못한 것도 잘못이야.”

    “자책은―”

    툭, 어깨를 건드리는 손길에 돌아보니 유진이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 지금은 지금 해야 할 일만 생각해.”

    닿았던 손은 온기도 남기지 않고 슬그머니 멀어졌다. 아리아드네는 제게서 멀어지는 손끝을 가만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당신 말대로 지금은 지금 해야 할 일만 생각할래.”

    그의 말대로 지금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그것을 위해 릭센에 온 것이 아니던가.

    “저는 왜…….”

    그때, 쇠에 긁힌 것처럼 거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는 성 상티모니아의 성기사 리카르도의 것이었다.

    “대체 제가 왜 릭센에…….”

    일레체에서 풀려날 줄 알았는데 어느새 릭센이었다. 대륙 일주라도 할 셈인가. 하지만 아리아드네 일행 중 리카르도의 간절함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메르디에스에서는 엘바에서의 보상 중 하나로 성 상티모니아의 교황에게 당신을 요구했어. 냉큼 주던데?”

    거액의 배상금을 요구한 국왕과는 달리 메르디에스는 성 상티모니아에 다음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엘바에서 실종된 메르디에스 상단원을 모두 찾을 때까지 메르디에스는 엘바에 머물 권한을 가진다.

    둘째, 마물의 변이와 관련된 사항을 함구하는 것은 1년에 한하며 추후 다시 협의한다.

    셋째, 배상금은 성기사단의 부단장 리카르도를 무기한 대여하는 것으로 한다.

    이 세 가지가 메르디에스의 조건이었다. 물론 성 상티모니아는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수용했다.

    첫 번째 조건으로 메르디에스는 엘바에 영구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실종된 상단원을 모두 찾을 때까지’라는 제한이 있긴 하지만 실종자를 모두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다음으로 마물의 변이와 관련된 사항을 1년에 한하여 함구하기로 한 것은 아그네스가 말한 것들이 사실인지 검증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조건은 아리아드네가 특별히 요구한 것이었다.

    “당신은 이제부터 나와 함께 당신이 외면한 진실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목도하게 될 거야.”

    “설사 성물에 대한 반발력을 가진 인간이 성물에 노출되어 마물이 되었다 해도 그것이 왜 성 상티모니아의 잘못입니까? 성물에 대한 친화력이 신의 은총이듯, 반발력 또한 신이 내린―”

    아리아드네가 입을 떼기도 전에 유진이 리카르도의 입에 풀멘을 박아 넣었다.

    “신이 내리는 것이면 뭐든 감내할 각오가 되어 있단 말이지, 지금?”

    “으브읍읍.”

    리카르도는 발버둥을 치며 풀멘을 치워 달라는 의사를 온몸으로 표현했다. 아리아드네가 유진의 손을 천천히 잡아끌었다. 유진이 아리아드네의 뜻에 따라 풀멘을 거둬들였다.

    아직도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리카르도를 바라보며 아리아드네가 말했다.

    “그런 말 들어 봤어? 멀리 있는 신보다 가까이 있는 돈이 더 무섭다.”

    리카르도가 격하게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주억이며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렇겠지. 우리 집 가훈이니까.”

    “언제? 언제 그런 가훈이 있었어?”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에 캐롤린이 고개를 갸웃대며 물었다.

    “방금. 내가 만들면 그게 가훈이지. 우리 집인데 뭐.”

    아리아드네의 태연한 대답에 캐롤린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도 참 이럴 때 보면 성주님 빼다 박았어.”

    “어쩔 수 없지, 뭐.”

    이래서 피가 무섭다니까. 아리아드네가 슬쩍 덧붙이며 작게 웃었다. 그러는 사이 일행은 남문에 도달했다.

    “드디어 왕궁이네.”

    캐롤린이 릭센의 왕궁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 아리아드네를 발견한 남문의 문지기가 나팔을 불었다. 나팔 소리와 함께 가시나무에 둘러싸인 방패가 그려진 녹색 깃발이 성벽에 빼곡하게 올라왔다.

    남쪽의 지배자, 풍요의 메르디에스가 왕궁에 들어왔음을 알리는 표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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