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148)
  • * * *

    한바탕 소요가 지나간 자리에는 어색한 침묵과 아리아드네와 캐롤린이 쏟아 낸 감정의 파편들이 떠돌아다녔다.

    “저, 아가씨…….”

    두 사람의 대화에 도무지 끼어들 수 없어 얌전히 지켜보던 알버트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펑펑 눈물을 쏟아 내던 캐롤린이 멈칫하더니 붉어진 얼굴로 다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그건 그러니까 내가 널 아끼는 걸 리아가 알아서―”

    “전 한 번도 아가씨의 마음을 의심하지 않았는데, 제 마음은 아가씨께 닿지 않은 건가요?”

    긴 눈매에 갇힌 갈색 눈동자는 부드러운 빛을 띠고 있었다. 다정다감한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눈이었다.

    멍하니 알버트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캐롤린이 퍼뜩 놀라 큰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너, 너 알고 있었어?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체 언제부터, 아니, 어떻게?”

    캐롤린에게 다가간 알버트가 그녀의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겼다. 알버트는 눈물 자국이 남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나요, 절 이런 눈으로 보는 사람은 세상에서 아가씨뿐인데…….”

    알버트의 그 말에 캐롤린의 눈에서는 다시 눈물이 후두둑 쏟아졌다. 알버트는 캐롤린의 눈물을 닦아 주려 팔을 들었다가 당황하여 허둥지둥 뒤로 숨겼다.

    캐롤린의 시선이 알버트의 팔이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움직였다. 그의 오른팔 팔꿈치 아래가 마치 인형극을 하는 나무 인형들처럼 덜렁덜렁 움직였다.

    마치 자신의 팔이 다친 것처럼 캐롤린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아, 전부, 전부 나 때문이야. 미안해, 미안해.”

    마치 온몸으로 통곡하는 것처럼 캐롤린은 바닥에 쓰러져 울었다.

    “내가 널 마음에 담아서……. 그래서, 그래서 전하가 널……. 내가 들키지만 않았더라면, 처음부터 내가 널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네가 이렇게 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밝게 웃고 있어도 알버트의 얼굴에는 사라지지 않는 그늘이 있었다. 그런 알버트가 아무런 그늘 없이 열중하는 유일한 순간을, 캐롤린은 알았다.

    “내가 대체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자신의 마음이 알버트에게서 그 순간을 앗아 버렸다. 알버트를 마음에 담았던 모든 순간이 미칠 듯이 후회스러웠다. 제 마음 따위가 뭐라고, 알버트의 미래를, 꿈을, 희망을…….

    “제가 검을 쥔 건 아가씨께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였어요.”

    알버트가 천천히 왼손을 들어 캐롤린의 손을 잡았다. 고개를 숙인 그가 캐롤린의 손등에 제 입술을 눌렀다.

    기사가 자신의 레이디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정중한 예였으나 그 예는 본디 오른손의 몫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저라도 아가씨께서 부끄럽지 않다고 하시면 종으로라도 아가씨 곁에 남고 싶어요.”

    천천히 고개를 든 알버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마지막 남은 희망을 말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캐롤린의 모습에 알버트가 잡은 손을 천천히 놓고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제가 너무 과한 욕심을 부렸어요.”

    알버트는 캐롤린을 곤란하게 만든 자신이 원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화들짝 놀란 캐롤린이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얼굴로 다급히 부정하며 알버트의 손을 붙잡았다.

    “아니, 아니야. 그게 아니라…….”

    당황한 캐롤린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숨을 몰아쉬다가, 알버트에게 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너, 너 그러니까 네가 말한 그분이 나였어? 리아가 아니라?”

    캐롤린의 물음에 알버트가 수줍은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그런데 아까부터 아가씨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전 정말 전혀 모르겠어요.”

    가만히 둘을 지켜보던 아리아드네가 툭 던지듯 첨언했다.

    “편지가 거짓인데 알버트가 날 좋아하는 것만 사실일 리가 있어?”

    금방이라도 툭 터질 듯이 발간 얼굴을 한 캐롤린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중얼거렸다.

    “아, 하지만 너한테는 못된 말만 하고…….”

    “언제요?”

    “그런 내색은 한 번도 한 적 없었잖아.”

    “아무것도 아닌 제가 너무 초라하고 부끄러워서…….”

    엘바의 수색대에 자원하면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거라는 사람들 말에 보기 좋게 걸려든 건 알버트를 내내 괴롭혀 온 초조함 때문이었다.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해도 각자가 가슴에 저마다의 후회를 품었다.

    “짐작도 못 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요.”

    캐롤린이 혼자서 괴로워하고 힘들어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어지지 못하더라도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만 있으면 괜찮을 줄 알았다.

    “미안해, 몰라서 미안해.”

    캐롤린은 또다시 눈물을 쏟아 냈다. 알버트는 팔꿈치 아래로 감각이 없는 제 팔을 쳐다보며 말했다.

    “울지 마세요. 아가씨께서 울면 전 너무 비참해져요.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겨우 울음을 삼킨 캐롤린이 알버트의 팔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차마 만질 수가 없어 허공만 맴돌았다.

    “많이 아파?”

    “아픈 건 더 아파도 괜찮은데……. 나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사실 정말 나쁜 생각도 했었어요. 검마저 쥘 수 없는 제가 너무 초라해서…….”

    알버트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치료하면 다 괜찮아질 거야. 그리고 설사 예전같이 움직이지 못해도 괜찮아. 살아 돌아왔잖아.”

    힘이 들어가지 않는 알버트의 오른손 위로 캐롤린의 눈물이 떨어졌다.

    “난 정말 네가 잘못된 줄 알고……. 다시는 보지 못할 줄 알았어. 이렇게 다시 볼 수 있으니까 그걸로 충분해.”

    알버트는 캐롤린이 쥐고 있던 제 왼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에겐 여전히 캐롤린의 손이 매달린 채였다. 알버트는 그녀의 손을 매단 채로 눈물범벅인 캐롤린의 볼을 쓸어내렸다.

    쓸 수 있는 손이 두 개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한 손으로 캐롤린의 손을 잡고도 남은 손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을 텐데.

    “울지 마세요, 제발.”

    캐롤린이 자신에게 주는 관심이 금방 질리고 말 가벼운 흥미라도 좋았다. 빌어먹는 처지에 무엇을 가리겠나 싶었다. 하지만 처음 맛보는 애정은 너무도 달콤했고, 끝내는 헤어 나올 수 없게 되었다.

    이대로 죽게 된다 해도, 아무도, 아무것도. 그러니 부디 당신만은 온전한 빛 아래에서 그대로.

    알버트에게 사랑이란 같이 진창을 구르는 고행이 아니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만은 영원토록 아름답게 빛나기를. 그것을 지켜보고 감내하는 것이 자신의 사랑이었다.

    * * *

    “다 해결된 건가?”

    유진이 산장 안쪽을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아니, 전혀.”

    두 사람이 재회의 기쁨을 만끽하도록 슬쩍 자리를 피한 아리아드네가 제법 선선해진 밤공기를 함뿍 들이마시며 대답했다. 폐부를 채우는 공기가 더없이 시원하고 상쾌했다.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지. 캐롤린은 여전히 명문가인 리스벨 백작가의 후계이고 알버트는 평민에 고아니까. 팔을 다친 이상 예전처럼 검을 쥘 수도 없으니 상황은 더 나빠졌어.”

    그런데 제 기분이 좋아서일까. 두 사람이 걱정되진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하늘의 별을 죄다 품에 안을 듯이 팔을 한껏 벌렸다. 내일이면 또다시 지겨운 싸움이 시작되겠지만, 아무런 걱정 없이 이토록 개운한 것이 얼마 만인가.

    “그렇지만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기 시작했으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어떻게 되지 않는다 해도 기회는 어떻게든 만들면 된다. 자신의 생각대로라면 페렌트는 곧 큰 변화의 시기를 거칠 테고, 그런 시기에는 영웅이 필요한 법이니까.

    알버트에게 마땅한 신분이 없는 것이 문제라면 그만한 신분을 만들면 될 일이다.

    “아니, 그거 말고.”

    캐롤린과 알버트의 앞날에 어떤 고난이 남았건, 그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애초에 신분 차이가 나는 연애라는 것이 어떤 일인지 잘 실감도 되지 않았고.

    “그럼 뭐?”

    빙글 돌아선 아리아드네가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당신, 당신 말이야.”

    그것을 묻는 유진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아리아드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나 말이야?”

    아리아드네는 아무렇지 않은 듯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보지 않아도 제게로 따라붙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당신. 당신 문제는 이제 다 해결된 거냐고.”

    그가 재차 같은 것을 물어 오자, 심장이 또다시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지 나는 잘…….”

    태연한 척 대답하려 했지만 아리아드네는 끝내 그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박차고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어졌다. 몰래 쓰던 비밀 일기장이 박물관 한복판에 전시된 기분이었다.

    “내내 도망가고 싶은 얼굴이었잖아.”

    “그게 무슨―”

    “그러고 싶으면 그래도 돼. 아무도 못 찾는 곳에 데려가 줄 테니까.”

    유진의 잿빛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담담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 눈에 자신은 모조리 들켜 버리고 만다.

    ‘왜 당신에게만 이토록 난…….’

    미치겠네, 정말.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린 아리아드네가 한숨을 내쉬며 발끝으로 풀을 짓이겼다.

    “당신이랑 있으면 나 좀 이상해지는 것 같아.”

    “뭐가? 평소랑 똑같은데.”

    “아니, 정말 이상해.”

    내가, 내가 알던 내가 아니게 된다. 날마다 낯선 나를 발견한다.

    치졸한 질투로 속을 끓이고, 누군가를 향한 당신의 마음이 연정이 아님을 알아차리고는 혼자 안도한다. 그런 내가 너무 싫어져.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이 두려워져 당신을 피해 다니고, 누구도 의지할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에 당신을 떠올린다.

    당신이 없는 잠시가 견딜 수 없이 쓸쓸해지고, 당신이 없는 순간을 견디느니 마물과 마주했으면,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한다.

    “피하고, 도망치고, 의지하고, 들키고, 그리고…….”

    아리아드네는 자신도 모르게 유진을 향해 뻗은 손을 천천히 내렸다.

    문득 닿고 싶어져, 당신에게.

    “그래도 돼.”

    “뭘 그래도 돼? 내가 뭘 할 줄 알고.”

    아리아드네가 피식 웃으며 답했지만, 자신의 속내를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남자는 여전히 담담한 낯으로 안이하게 말한다.

    “의지해도 된다고. 어차피 혼자서 다 끌어안고 사는 타입이잖아, 당신. 의지하라고 해도 결국에 저 혼자 다 해치우고 말걸.”

    “왜 나한테 그렇게 잘해 줘?”

    “그냥…….”

    당신의 친절이 내게만 특별한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당신의 친절은 나를 한없이 약하게 만든다.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잊게 만든다.

    “난 벼랑 끝에 매달린 것 같은 사람을 보면 눈이 가. 지나치질 못하겠어.”

    그 말을 하는 남자의 눈은 마치 닳고 닳은 노인의 것처럼 지치고 피로했다.

    “그런데 당신은 아니야. 당신은 어떤 순간에도 당신 힘으로 살아남을 사람이지. 무언가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야. 그런데 난 당신이 꼭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는 것처럼 느껴져.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어.”

    당신에게만 내 속내를 들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득 채운 물잔에 물 한 방울을 더하면 넘쳐흐르는 것처럼, 당신 앞에만 서면 나는 다른 감정을 숨길 수 없어진다.

    당신을 향한 마음을 감추는 것에 급급하여 다른 것은 모두 흘려 버리고 만다.

    “고백처럼 들리는데?”

    “쓸데없는 소리. 장난스럽게 넘기지 말고 좀. 조심하란 소리야. 혼자 다 끌어안지도 말고.”

    또다시 그런 눈이다.

    오랜 시간 헤매다 마침내 돌아왔으나, 아무도 남지 않은 땅에서 혼자가 되어 버린 버림받은 영광.

    “그러지 않아도 언제고 혼자인 순간은 와.”

    “지금 당신처럼?”

    “그래, 나처럼.”

    당신의 외로움에 닿고 싶다. 당신이 외로울 때 떠올리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다.

    당신의 외로움을 녹이는 유일한 존재가 나였으면 좋겠다.

    하늘의 태양이 하나이듯이.

    태양의 시혜로 사는 지상의 생물이라면, 태양을 피할 수 없다. 태양으로부터 달아날 수도 없다.

    당신으로부터 그토록 도망치고 싶었으나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사랑이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이라면 다시는 사랑에 나를 저당 잡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느닷없이 찾아온다. 예고도, 전조도 없이.

    내 의사는 깡그리 무시한 채로 무자비하게 밀고 들어온다. 내 여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참으로 잔인하게 나를 송두리째 뒤흔든다.

    나를 덮쳐 온 해일에 그대로 쓸려 가면서도 기꺼워 충만하다. 잔인하며, 아름답고, 비참하여 황홀하다.

    “왜?”

    “아니, 바람이 좋아서.”

    무자비한 폭군에게 굴복한 나는 마침내 항복을 선언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Heart to Heart : 마음이 닿다

    L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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