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148)

* * *

산속의 밤은 유난히 춥고 쓸쓸하다. 새까만 하늘에는 촘촘히 박힌 별들이 빛을 내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산장으로 오는 외길을 주시한 채로 한 걸음 뒤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알버트에게 말했다.

“알버트, 곧 캐롤린이 올 거야.”

“……네.”

“살았을지 죽었을지도 모를 널 구하겠다고,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곳에 제 발로 걸어오는 거야.”

알버트는 제 팔을 내려다보고는 괴로운 듯이 눈을 감았다. 알버트의 얼굴을 붙든 아리아드네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도망치지 마. 캐롤린과 마주 보고 말해.”

“……네.”

아리아드네의 손에 막혀 도망칠 길이 사라진 알버트는 일그러진 얼굴로 괴로운 대답을 토해 냈다.

하늘이 한 마디쯤 옆으로 기울었을 때, 바스락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장식이 없는 보닛으로 단단히 얼굴을 가린 여자 하나, 호위로 보이는 기사 하나, 그리고 길렌이라는 이름일 두툼한 몸집의 남자 하나가 산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어슴푸레한 빛에 여자의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캐롤린이었다. 서두르느라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하면서도 캐롤린은 결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알버트는 그런 캐롤린을 지켜보면서 주먹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괴로운 얼굴을 하고도 그 모든 것에서 끝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통나무집 앞에 도착한 캐롤린이 문고리에 달린 레이스를 챙기더니 이내 집 안으로 사라졌다.

“쥐새끼가 도망가면 곤란하니까.”

길렌을 잡기 위해 숨어 있던 건물 뒤에서 몸을 내밀었지만.

“……잡았네?”

손을 쓸 새도 없었다. 캐롤린이 데려온 호위가 길렌을 제압한 채로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를 알아본 캐롤린의 호위 기사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여긴 어떻게…….”

“캐롤린이 시켰어?”

“네, 산 밑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자라 하시며 일이 끝나면 돈은 주되 아가씨께서 나오실 때까지 조용히 붙잡아 두라 하셨습니다.”

호위 기사의 말에 아리아드네는 쓴웃음을 지었다. 캐롤린이 과거와는 달리 카이엔의 함정에 쉽게 빠지지 않은 것은 어쩌면 자신이 달라졌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캐롤린의 배신에 자신이 놓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다. 또다시 마주해야 하는 과거의 악몽.

‘나는 대체 얼마나 많은 순간을 놓친 걸까. 캐롤린, 우리가 잃어버린 그 시간에 나는 온전히 다가갈 수 있을까.’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해도 제 마음까지 속일 순 없었다. 속을 모조리 비워 내고 얼음으로 채운 것처럼 온몸이 시렸다. 가끔은 이 모든 것에서 눈을 돌리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때, 서늘한 체온이 아리아드네의 손을 덮었다.

“표정이 왜 그래?”

유진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아리아드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음장 같다고 생각한 제 몸보다 그의 손이 더 차가웠다.

그런데 차가운 그 손이 닿아 오면 가슴이 따뜻해졌다. 어떤 순간에도 안심할 수 있었다.

“나? 내 표정이 어떤데?”

“처형장에 끌려가는 얼굴이잖아.”

시큰둥한 그의 대답에 아리아드네는 피식 웃고 말았다. 뭐가 재밌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린 유진이 길렌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아무도 안 죽게 해 줄게.”

거센 발길질로 산장의 문을 연 유진이 그대로 길렌을 집어 던졌다. 좁은 공간에 따닥따닥 붙은 사람들 사이로 보닛이 반쯤 풀려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캐롤린이 보였다.

‘캐롤린, 나 알버트 데려왔어. 그러니까 이젠 다 괜찮은 거지?’

천천히 고개를 든 캐롤린이 아리아드네를 확인하더니 다시 눈물을 쏟아 냈다.

“리아, 왜 여기 있어. 넌, 넌 여기에 있으면 안 돼.”

겨우 눈물을 그친 캐롤린이 아리아드네를 보자마자 꺼낸 말은 그것이었다. 보랏빛 눈에 담긴 것은 오직 걱정과 염려뿐이었다.

“그래, 그래서 말인데 우리 이젠 이야기를 좀 맞춰 볼까?”

아리아드네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의자를 끌어와 자리에 앉았다.

“아니, 리아. 지금은 이럴 때가…….”

이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캐롤린은 느긋한 아리아드네의 태도에 휘말렸다. 이제껏 캐롤린을 괴롭혔던 모든 불안이 자신만만한 아리아드네와 마주하자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또 울어? 이 울보야.”

맞은편에 앉은 아리아드네가 캐롤린의 눈물을 닦아 주며 놀렸다. 두 살이나 어린 주제에 늘 저런 식이었다.

“뭐야, 하지 마.”

캐롤린이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정리하며 투덜거렸다.

“조금 전에 그 말은 뭐야? 왜 내가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는 거야?”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캐롤린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리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아직은 짐작일 뿐이야.”

알겠다는 듯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끄덕이자 깊게 숨을 내쉰 캐롤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리아, 제레미만 죽은 게 아니야. 앤드류 델런, 앤드류가 죽었어. 그것도 제레미처럼 자살로.”

“앤드류? 앤드류 델런이 자살을 했다고?”

델런 백작가의 삼남, 앤드류 델런은 아리아드네의 첫 교제 상대였다.

아버지와의 불화로 가문을 뛰쳐나간 그는 아리아드네에게 자신과 함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자는 터무니없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자신을 구속하는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싶다던 남자는 실은 자기 자신밖에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앤드류는 결코 자살 같은 것으로 생을 마감할 사람이 아니었다.

아리아드네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자 캐롤린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면제가 든 술을 먹고 다리 위에서 떨어졌대. 그 아래 흐르는 강에 빠져서 익사했어.”

앤드류는 이기적이고 애 같은 구석이 있긴 했지만 재미있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아리아드네에게 거절당한 직후에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늘어놓긴 했지만, 후에 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해 오기도 했다.

[아리아드네, 넌 항상 반짝반짝 빛이 나. 내가 델런에 감사하는 유일한 것이 그거야. 그 이름을 가지고 잠시라도 네 곁에 설 수 있었다는 거.]

앤드류는 소심한 성격으로 누군가에게 큰 원한을 살 만한 사람도 되지 못했다.

“제레미는 널 좋아했고 앤드류는 네가 교제한 사람이잖아. 너와 연관된 남자들이 최근 잇달아 자살한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제레미와 앤드류, 그렇게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알버트가, 알버트가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머뭇거리던 캐롤린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쩌면 그게 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건 대체 무슨 소리야!’

벌떡 일어난 아리아드네가 알버트를 쳐다보며 죽일 듯이 눈을 부라렸지만 그는 다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가씨, 그게 대체 무슨…….”

당황한 알버트가 더듬거렸지만 캐롤린은 그것을 외면한 채 말을 이어 갔다.

“알버트가 너를 좋아한 거라면 너와 관련된 남자가 셋으로 늘어나. 제레미, 앤드류 그리고 알버트…….”

앞의 둘이야 그렇다 쳐도 자신과 알버트라니. 어쩌다 저런 오해를 하게 된 건지 짐작조차 가질 않았다.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짓다가, 유진과 눈이 딱 마주쳤다. 잠자코 캐롤린의 이야기를 듣던 유진이 아리아드네의 시선을 피해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 날 피했어?’

이성과의 교제는 페렌트의 사교계에서는 흔한 사교 행위 중 하나였다. 아무래도 유진이 오해하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해졌다.

억울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저 중에 사귄 건 하나인데!’

아리아드네의 속도 모르고 캐롤린은 처연한 표정으로 말을 보탰다.

“아마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희생자가 더 있을지도 모르지. 너와 관련된 남자들 중에.”

‘아, 캐롤린.’

아리아드네는 탄식 같은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아니, 그리고 뭐 연애 좀 한 게 대순가.’

아리아드네는 아무도 비난하지 않은 제 과거 연애사에 들리지도 않을 변명을 주워 삼켰다.

이제까지 만난 남자들은 아리아드네가 이전에 누구를 만났는지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사교계의 교제야 일상적인 일이니 굳이 그런 화제를 꺼낼 이유도, 그렇다고 꺼릴 이유도 없었다.

문화 차이가 이렇게 피곤한 일일 줄이야. 아리아드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불안한 마음에 알버트가 지내는 숙소를 뒤졌는데…….”

알버트를 힐끗 쳐다본 캐롤린이 작은 목소리로 숙소를 뒤진 것에 대해 사과를 했다.

“알버트의 숙소에서 네가 보낸 편지를 발견했어.”

‘편지는 또 뭐야.’

아리아드네는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거리의 치정극 같은 이야기에 머리가 아팠다.

“아가씨, 저는 그런―”

“캐롤린, 내가 보냈다는 그 편지 지금 가지고 있어?”

“여기 이거야.”

캐롤린은 알버트의 방에서 발견한 편지를 아리아드네에게 건넸다.

“잘 썼네. 내가 봐도 내 필체 같아.”

편지를 꼼꼼히 살펴본 아리아드네가 캐롤린에게 편지를 되돌려주며 말했다.

“캐롤린, 난 알버트에게 편지를 보낸 적 없어. 알버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난 네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알버트의 이름도 잘 몰랐어.”

성에서 일하는 고용인들과 달리 기사들은 얼굴을 마주할 일이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알버트같이 직급이 없는 평기사라면 더 그랬다.

캐롤린이 ‘알버트’란 이름을 처음 꺼냈을 때도 곰곰이 생각한 후에야 겨우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알아, 처음에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나도 필체만 보고 정말 네가 보냈나 생각했는데……. 내용을 봐.”

탁자 위에 편지를 펼친 캐롤린이 몇몇 문장을 손으로 짚었다.

“간단한 말을 구구절절 복잡하게도 썼네.”

“맞아. 네가 썼다기엔 지나치게 고아하고 유려해.”

아리아드네로서는 어쩐지 발끈하고 싶은 설명이었지만 한없이 진실에 가까운 것이라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캐롤린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더했다.

“내가 아는 넌 절대 이런 식으로 편지를 쓰지 않아.”

캐롤린은 아리아드네에 관해서는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카이엔 전하께 보낸 편지를 제외하고는. 네가 카이엔 전하께 보낸 편지를 대필해 준 사람이―”

의기양양하게 치켜든 캐롤린의 집게손가락이 자신을 가리켰다.

“바로 나야. 이 편지를 꾸며 낸 사람이 흉내 낸 건 바로 내가 대필한 네 편지야.”

직설적이고 명료한 편인 아리아드네는 현학적인 수사와 온갖 비유를 동원한 화법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화라면 그나마 낫지만 일방적으로 말을 만들어 내야 하는 편지는 정말 싫었다.

카이엔과 처음 만났을 무렵, 왕도에 있는 그와 어쩔 수 없이 서신 왕래를 해야 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아리아드네가 쓴 서너 줄짜리 편지를 서너 장으로 늘려 준 게 바로 캐롤린이었다.

그저 자신의 필체를 흉내 낸 것인 줄 알았더니 훨씬 더 정교한 음모가 숨어 있었다. 이 편지는 카이엔이 가진 아리아드네의 편지를 교묘하게 흉내 낸 모사품이었다.

“그래서 네 생각은 이 일을 꾸민 게 카이엔이라는 거야?”

아리아드네는 탁자 위에 놓인 편지를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고개를 끄덕인 캐롤린은 자신이 도달한 결론을 꺼내 놓았다.

“최근 네 변심으로 카이엔 전하의 입지가 위태로워졌어. 전하께 너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패야. 전하는 어떻게든 널 잡고 싶었을 거야.”

갑자기 변심한 연인, 연인의 변심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아무래도…….

“갑자기 변한 네 마음이 다른 남자 때문이라고 오해했다면?”

그런 것일 수밖에 없다. 제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건 비겁한 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해결책이니까.

“전하라면 너와 연관된 남자들을 자살로 위장해서 처리할 동기는 충분해. 전하께서 알버트가 널 좋아하는 걸 알게 되자 알버트에게 너인 척 편지를 보내서 메르디에스를 떠나도록 만들었던 거지.”

캐롤린이 제법 결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쩌면 곧 전하께서 이곳에 들이닥칠지도 몰라. 그러니까 넌 여기 있으면 안 돼. 어서 떠나. 여긴 내가 정리할게.”

캐롤린이 얻은 정보로 저것이 최선의 결론이라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아리아드네가 변심하지 않았던 과거에도 이 모든 일은 일어났다.

“아니, 캐롤린. 이 일을 벌인 건 카이엔이 맞아. 그런데 카이엔이 노린 건 그런 게 아니야. 카이엔이 정말로 노린 건.”

카이엔의 목적은 다른 것이었으니까.

“바로 너야. 캐롤린.”

캐롤린 리스벨, 이 모든 건 캐롤린을 위해 안배된 함정이었다.

“그게 무슨…….”

“카이엔이 내 주위 남자들을 해친 건 질투나 불안, 그런 감정 때문이 아니야. 캐롤린, 네게 보여 주기 위한 거야.”

“나? 내가 알게 되는 게 왜?”

캐롤린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렸다.

“너 손에 든 그거 뭐야?”

“아, 이거 여기 문고리에 레이스 조각이 있길래…….”

오른손에 레이스 조각을 쥐고 있던 캐롤린이 그것을 아리아드네에게 건네며 물었다.

“어쩌다 거기 옷이 걸렸어?”

레이스 조각을 받아 든 아리아드네가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물었다.

“그런 적 없는데? 내 거 아니야. 내가 지금 그런 거 차려입게 생겼어?”

엘바에서부터 아리아드네는 내내 셔츠에 바지 차림이었다. 아리아드네의 옷차림을 본 캐롤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거 카이엔 전하가 네게 선물한 옷에 달린 레이스잖아. 기억 안 나?”

아, 카이엔, 카이엔, 카이엔!

[예쁘다, 정말. 전하께서 이번에는 신경 좀 쓰셨네.]

[레이스 장식은 불편해. 조금만 움직여도 자꾸 찢어져.]

알버트가 엘바로 떠났던 봄의 끝자락, 카이엔이 섬세한 레이스가 겹겹이 장식된 드레스를 선물한 적이 있었다.

[이거, 꼭 들러리 옷 같지 않아?]

[그러게. 캐롤린, 네 들러리는 나야. 알지?]

카이엔이 선물한 옷이 도착했던 날, 캐롤린도 그 자리에 있었다.

[무슨 말이야. 리아, 네 결혼이 먼저잖아.]

[그럼 캐롤린 네가 먼저 해. 그럼 내가 네 들러리가 되어 줄 수 있잖아.]

[……싫어. 난 결혼 안 할 거야.]

[캐롤린, 무슨 표정이 그렇게 비장해. 꼭 전쟁터에 나가는 기사 같잖아.]

[차라리 가고 싶어. 전쟁터든 어디든.]

깨질 것처럼 웃는 캐롤린을 보고도 제 행복에 겨워 그 슬픔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캐롤린, 생각보다 일찍 왔네. 볼일은 끝났어?]

[……응, 대강. 리아, 일레체는 어때?]

일레체에서 며칠 늦게 합류한 캐롤린과 마주하고도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때, 캐롤린은 알버트의 시신을 확인한 곳에서 내 옷에 달린 레이스 조각을 발견하고 달려온 길이었을 텐데. 그런 일을 겪은 캐롤린의 얼굴이 아무렇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좋아. 즐거워. 너도 진작 왔으면 좋았을걸. 어제 정말 재미있었는데…….]

[어제?]

[캐롤린, 너 왜 그래? 다 흘렸잖아. 옷 갈아입어야겠다.]

[아, 잠을 설쳤더니 좀 피곤해서……. 리아, 나 네 옷 좀 빌릴 수 있을까?]

[얼마든지.]

간단한 것으로 갈아입겠다던 캐롤린은 좀처럼 드레스룸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직도 덜 갈아입었어? 마음에 드는 게 없어?]

새파랗게 질린 캐롤린의 얼굴을 보고도 그렇게 피곤하냐고 묻는 것이 고작이었다.

왜, 아무것도 몰랐을까. 그렇게 많은 전조가 있었는데.

[리아, 전하께서 선물하신 옷이…….]

[아, 어제 말을 탔더니 그새 찢어졌네. 고쳐야겠다.]

카이엔이 선물한 그 옷은 지금도 메르디에스 본성 어딘가에 레이스가 뜯어진 채로 처박혀 있겠지. 그 옷에 교묘한 장난질을 하는 건 숨 쉬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그건 애초에 카이엔이 선물한 것이었으니까.

[리아, 어제 이 옷 입었어?]

[응, 왜?]

[아까워서, 그렇게 예뻤는데…….]

[찢어진 거야 고치면 되지. 어서 갈아입고 나와. 여기 특산주가 맛있더라. 내가 너 주려고 챙겨 놨어.]

[리아, 어제, 어제 말이야…….]

[어제? 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왜 끝까지 묻지 않았느냐고 원망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때의 너는 이미 어디에도 없는데.

레이스를 꽉 움켜쥔 아리아드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캐롤린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아리아드네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숨을 크게 삼킨 아리아드네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을 골랐다.

“제레미와 앤드류는 네 의심과 불안을 키우는 미끼였던 거야. 내가 만난 남자 중에 제레미와 앤드류를 고른 것도 그래.”

아리아드네와 가벼운 교분이 있었던 남자들 중에 제레미와 앤드류를 고른 이유는 또 있었다.

“제레미의 보로스와 앤드류의 델런은 메르디에스와 가까운 세력이니, 메르디에스와의 유대를 흔드는 건 덤이었겠지. 제레미 다음 보로스 자작이 된 다니엘은 나보다는 카이엔과 가까웠고, 델런 백작은 그렇지 않아도 앤드류가 가문과 절연한 것을 두고 은근히 나를 원망했으니까.”

메르디에스와 엮인 고리를 흔드는 것. 그것이 카이엔의 또 다른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 귀찮은 일을 꾸민 궁극적인 목적은 오로지 하나였다.

“리아? 갑자기 그게 다 무슨…….”

“네가 내 옷에서 잘려 나간 레이스를 손에 쥐고 알버트의 시신과 마주하도록 할 작정이었던 거야.”

“그러니까 그게 왜?”

캐롤린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알버트를…….”

맴도는 말들이 마치 목구멍에 쑤셔 박은 솜뭉치처럼 걸렸다.

“알버트를 죽인 사람이 나라고 믿게 만들 속셈이었던 거야. 네가 내게서 등을 돌리도록.”

아리아드네에게서 캐롤린을 빼앗는 것. 카이엔은 오로지 그것을 위해 이토록 복잡한 음모를 꾸몄던 거다.

“지금 그 말은…….”

캐롤린은 대단히 불쾌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가 이내 빙그레 웃었다.

“리아, 내가 널 믿지 못하다니……. 말도 안 돼. 설사 전하의 목적이 그렇다 해도 그러면 한참 잘못 생각한 거지.”

질 나쁜 농담을 들은 것 같은 태도였다. 생각해 볼 가치조차 없다는 듯이.

“아니, 잘 생각한 거야. 우리는 꼼짝없이 당했을 거야.”

아리아드네는 고저 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날 못 믿어? 내가 작은 틈만 생기면 네게서 등을 돌릴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카이엔이 어떤 짓을 벌이더라도, 너를 향한 내 믿음은 변함이 없을 거라고 캐롤린은 여전히 확신하고 있었다.

그 견고한 믿음이 아리아드네의 가슴을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알버트가 죽었어. 알버트가 죽은 다음 날, 엘바로 떠난 내가 일레체에 버젓이 있는 걸 보고도 넌 날 믿었을까? 넌 그토록 쉽게 찾은 알버트를 찾지 못했노라 말하는 날.”

캐롤린에게는 그렇게 쉬웠을 이 산장을 찾기 위해 아리아드네는 죽을 만큼 노력해야 했다.

아리아드네로 위장한 리카르도 덕분에 나흘이라는 시간을 벌지 못했다면, 아리아드네와 유진으로 위장한 일행이 피터의 시선을 잡아 두지 못했다면, 아리아드네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던 피터라는 자가 산장을 드나들며 흔적을 흘리지 않았더라면, 이번에도 알버트를 구하지 못할 뻔했다.

“그러면 네게 물었을 거야. 혼자만의 의심으로 네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캐롤린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았을 그 믿음이 오히려 원망스러웠다.

“캐롤린, 알버트에게 메르디에스를 떠나라고 종용한 건 나야. 네가 사랑한 남자의 마음을 제 편할 대로 가지고 놀다 버린 내게, 이제껏 숨겨 온 알버트에 대한 네 마음을 밝힐 수 있었을 거라고 너, 정말 그렇게 생각해?”

캐롤린은 아리아드네가 쏟아 내는 말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간신히 알아차리고는 되물었다.

“리아, 아까부터 무슨 말이야? 그 편지는 네가 쓴 거 아니잖아.”

그런데 왜.

“몰라봤잖아. 내가 쓴 게 아닌데, 왜 몰랐어! 왜!”

아리아드네가 속에 쌓인 원망을 쏟아 내듯이 소리를 질렀다. 털어 버린 줄 알았던 원망이 넘치고 흘러내렸다.

“네가 쓴 편지를 흉내 낸 거라면서, 이번에는 그렇게 쉽게 알아차렸으면서…….”

그때는 왜 몰랐던 거야. 대체 왜…….

“리아, 진정해. 편지가 아니더라도 난 그렇게 생각 안 했어. 엘바로 떠나기 전에 네가 그랬잖아. 알버트 찾아서 내게 데려오겠다고. 네가 그랬잖아.”

캐롤린이 왜 그토록 쉽게 카이엔의 덫에 빠졌는지 모르지 않았다.

“아니, 난 몰랐어. 나는 여전히 네 마음 같은 건 조금도 모르고. 사랑에 빠진 멍청이라서 일레체로 초청한 카이엔과 희희낙락 놀았을 거야. 네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도, 네 괴로움을 알아주는 사람도 아무도 없어. 넌 혼자야. 알버트가 실종된 것도, 사라진 알버트의 비참한 시신을 목격한 것도, 알버트에게 떠나라고 말하는 내 편지를 가진 것도, 알버트가 죽은 자리에서 내 옷에 달린 레이스 조각을 발견한 것도.”

자신이 쓴 것을 흉내 낸 가짜 편지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모두, 모두 너 혼자만 알고 있는 거야.”

몰려 있었으니까.

[리아, 나…….]

[아, 캐롤린. 나 나가는 길이었는데 급한 일이야?]

[아니, 아무것도.]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아리아드네를 찾아온 캐롤린을 외면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넘쳐흐른 원망은 결국 자신을 향했다.

“그랬다면, 그때도 넌 나를 믿었을 거냐고 묻는 거야.”

아리아드네의 푸른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가득 차오른 눈물이 그대로 쏟아졌다.

캐롤린과 아리아드네 사이에서 우는 상대를 달래 주는 것은 언제나 아리아드네의 몫이었다. 지금 우는 아리아드네에게 다가가 눈물을 닦아 주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캐롤린은 지금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음을 직감했다.

“리아,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거야?”

“네 진심.”

“내 진심이라…….”

한숨을 작게 내쉰 캐롤린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설사 내가 널 못 믿는다 해도 달라질 건 없어.”

캐롤린에게 아리아드네는 믿음 이전의 문제였다.

“나는 너를 판단하지 않아. 네가 옳은지 그른지, 네가 하는 일이 잘한 일인지 못한 일인지, 그게 뭐가 중요해. 내가 할 일은 널 지키는 거야.”

제 의지로 아리아드네를 지키겠다고 맹세한 날, 캐롤린은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맹세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네가 옳지 않은 일을 했다고 해서, 네가 일을 그르쳤다고 해서, 설령, 네가 알버트를 버렸다고 해도……. 나는 너를 배신하지 않아. 내 믿음은 그런 게 아니야. 내 믿음을 의심하는 건…….”

상황에 따라 믿음을 세웠다 접는다면 그것은 맹세가 아니었다. 캐롤린이 한 것은 그런 가벼운 다짐이 아니었다.

그런 캐롤린의 믿음을 부정하는 것은…….

“리아, 그건 나를 모욕하는 거야.”

캐롤린의 보랏빛 눈동자가 아리아드네를 흔들림 없이 바라보았다.

“네가 메르디에스인 한, 내가 리스벨인 이상, 네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난 널 지켜.”

낮고 담담하던 캐롤린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거세졌다.

“그게 내 긍지야! 그게 내 삶이야! 그게 내 가치야!”

마지막은 내지르듯 쏟아 낸 캐롤린이 헐떡이며 아리아드네를 고집스럽게 바라보았다. 피하지 않고 담담히 그 시선을 받아 낸 아리아드네가 말했다.

“그런 너니까.”

캐롤린이 아리아드네를 믿는 만큼, 아리아드네도 캐롤린을 믿었다. 그리고 둘은 서로를 믿는 만큼이나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아는 캐롤린 리스벨은 그토록 고결하고 긍지 높은 사람이니까.”

어떤 순간에도 내가 아닌 너를 지키겠노라고 말하는 사람의 긍지가 낮은 것일 리가 없다. 그만한 각오가 얕은 것일 리가 없었다.

“그런 너니까 날 견딜 수 없었던 거야. 처음이야 억지로 네 마음을 붙들었겠지만, 벌어진 틈은 언제고 돌이킬 수 없게 갈라졌겠지.”

상처 입은 긍지는, 흔들린 각오는 결국에는 깨어지기 마련이었다.

“말해 줘, 캐롤린.”

언제나 청명한 하늘처럼 맑고 반짝였던 아리아드네의 눈동자가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그것은 어쩐지 오래전 마주했던 파시파에의 눈동자를 떠올리게 했다.

아무것도 살지 못하는 심해처럼 아득하고, 캐롤린조차 알지 못한 제 마음의 깊고 깊은 곳까지 샅샅이 파헤칠 것만 같았던 그 짙은 눈동자.

“내가 정말 그랬다면 넌 무슨 생각이 들었을지, 나는 그게 알고 싶어.”

제 밑바닥을 모두 들여다볼 것만 같은 그 눈동자와 마주한 캐롤린은 그제야 제 진심의 실마리를 간신히 붙잡을 수 있었다.

자신이 아리아드네를 배신하게 된다면, 절망의 끝에서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면…….

“그러면,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알버트가 내가 좋아한 남자라서가 아니야.”

그건 알버트 때문이 아니다.

“알버트는 메르디에스를 지키는 기사인데……. 알버트는 네가 위험하면 언제고 목숨을 바쳐.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죽어서 리아 널 살릴 수 있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죽을 거야. 그런데, 널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을 그렇게 여겨서는 안 되는 거잖아. 내가 내 목숨을, 내 인생을 건 사람인데 네가 그렇게 엉망이어선 내가 너무 비참하잖아.”

믿음이 사라진 자신 때문이다.

“알버트는 해가 뜨는 것보다 일찍 일어나. 아무리 아파도, 아무리 힘들어도, 그래도,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하루도 널 위해 노력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죽을 자리 정도는 있어야 하잖아. 이렇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누구도 모르게 죽게 하지는 말아야지. 고생했다, 고맙다 그런 말 정도는 들어도 되잖아. 그게 그렇게 큰 욕심이야?”

알버트의 죽음이 그토록 고통스러운 것은 주인에게 배신당한 동료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캐롤린의 죽음이었다.

“아니.”

물처럼 잔잔한 대답이었다. 언제나 캐롤린이 믿고 의지했던 아리아드네의 목소리였다. 그랬던 아리아드네를 믿을 수 없게 된다면…….

“네가 정말로 그랬다면, 내가 아무리 널 믿으려고 해도 내 손에 들린 모든 패가 널 가리켰다면, 내 세상이 무너졌을 거야. 내 남은 삶이 송두리째 사라졌을 거야.”

살아야 할 이유가 모두 사라진다.

생이 끝나는 것만이 죽음은 아니다.

삶의 목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사라진다면 살아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널 떠나지는 못했을 거야. 아버지가 계시니까. 아버지가 평생 살아오신 삶마저 부정하게 만들 순 없으니까. 리스벨이 메르디에스를 지킬 수 없어지면, 그건 아버지가 지켜 온 리스벨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거니까.”

[리아, 아버지가,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내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내게 남은 마지막 가족이었는데……. 내 아버지가, 죽었어.]

커티스는 캐롤린에게 남은 마지막 끈이었다. 캐롤린이 리스벨일 수 있게 하는.

[왜, 왜, 아버지 왜, 저는, 저는 어쩌라고, 왜! 왜 돌아가셨어요! 왜! 말씀 좀 해 보세요. 일어나서, 절 보고 말씀 좀 해 보세요!]

그때 캐롤린은 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

“리아, 너 정말 왜 그래. 왜 내게 이런 말을 하게 해.”

자수정 같은 보랏빛 눈동자에 서서히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툭, 눈물이 쏟아지고 설움이 봇물 터지듯 흘러내렸다.

캐롤린은 이제껏 쌓인 서운함을 모조리 쏟아 내듯 쉼 없이 눈물을 흘렸다.

[넌 내가 왜 이러는지도 모르지? 죽어서도 모를 거야, 너는.]

아리아드네는 마침내 그토록 갈망했던 잃어버린 시간에 닿았지만,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원망할 수도, 속죄할 수도 없었다.

왜 나를 믿지 못했느냐고, 너를 끝까지 원망하기엔 네가 겪어야 했던 그 모든 불행이 내 눈먼 사랑 때문이라서.

“난 내 의지로 널 선택한 건데……. 널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왜 내게 이런 말을 하게 해.”

하지만 이제 우리는 다른 선택을 했으니까. 네 배신을 용서하지는 못해도 이해할 수는 있으니까.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아리아드네는 마침내 제 속에 남은 모든 미련과 원망을 떠나보냈다.

“울지 마. 내가 미안해.”

캐롤린의 배신에 괴로워했던 날들도, 캐롤린을 믿기로 하고도 과거의 기억에 번민하던 날들도, 배신의 이유를 알지 못해서 스스로를 원망했던 날들도.

이젠 모두 끝이었다. 새까만 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들만이 과거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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