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148)

* * *

완만한 입구를 지나 들어온 동굴은 계절을 잊을 만큼 서늘했다. 입구만 드러났을 때도 짐작했던 것이지만 이 동굴은 자연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 바닥은 걸리는 것 하나 없이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어디에나 있지 않습니까? 위기 시 일족이 몸을 숨길 공간 정도는.”

시몬은 눈꼬리를 늘어트리며 아쉽다는 얼굴을 했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막다른 곳이었다.

입구에 떨어진 틸레가 가고자 했던 곳은 어디였을까. 다른 곳으로 통하는 통로도 이곳에 메르디에스 상단원들이 있었다는 흔적도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눈먼 짐승이 어쩌다 길을 잃는 것은 드문 일도 아니잖습니까.”

만족스러운 듯 싱긋 웃는 시몬 뒤로 주위를 샅샅이 뒤지던 메르디에스와 성 상티모니아의 기사들은 하나같이 땀범벅이었다.

그들의 행색을 보고 아리아드네는 유진이 말한 ‘시간을 벌어 주겠다.’는 의미를 이해했다. 그녀에게는 십 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유진과 함께 동굴을 조사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으리라. 어떻게 만든 기회인데 이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작은 충고를 하나 하자면, 랭스턴 공작을 움직이고 싶을 땐 루이제 랭스턴만 한 먹잇감이 없답니다.

아그네스가 아리아드네를 배웅하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루이제 랭스턴, 선대 교황인 테오도로의 공식 정부였던 여자. 랭스턴의 적녀로 태어난 루이제는 아들이 랭스턴 공작이 된 지금은 랭스턴 대부인이라 불렸다.

“대부인께서도 눈이 제법 어두우시죠? 자식 된 마음으로 걱정이 많으시겠어요.”

성직자는 흔히 어둠을 밝히는 불로 비유된다. 사람들은 신에게 귀의한 성직자를 타락시킨 자들은 평생토록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고, 죽어서도 어둠을 헤매게 된다고 믿었다.

‘교황의 정부쯤 되면 신의 은총을 받으리라는 축복을 받는 일이 훨씬 더 많겠지만, 이 정도 비아냥을 아예 안 듣는 것도 아닐 텐데…….’

아리아드네야 나름대로 작정하고 꺼낸 말이었지만 이 정도로 시몬을 도발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오래도록 살아 주시는 것이 자식의 가장 큰 바람일진대, 강건한 어머니를 둔 제가 무에 걱정이겠습니까.”

그리고 예상대로 시몬은 별다른 동요 없이 병으로 앓다 죽은 아리아드네의 모친 파시파에가 떠오를 만한 말을 뱉었으나.

‘저기나 여기나 유효한 공격은 없었던 셈인가.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

아리아드네의 머릿속은 오로지 그런 생각뿐이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야지.’

아리아드네는 작은 기대를 품고 입을 열었다.

“하긴 선친을 그렇게 보내셨으니 건강이 염려되시겠지요.”

시몬의 생부인 선대 교황 테오도로가 성교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음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선친도 눈이 어두우셨겠네요.”

마치 지금에야 생각이 났다는 듯 아리아드네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테오도로는 타락한 성직자일 뿐만 아니라 수도원의 견습 사제를 타락시킨 자이기도 했다.

녹빛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분노로 달아올랐다. 아리아드네는 재빨리 근처에 있는 유진을 끌어당겼다.

‘이번에는 제대로 들어갔을까?’

아리아드네는 기대와 긴장으로 땀이 배어난 손을 꾹 말아 쥐었다.

“그만 나가실까요? 외인(外人)을 오래 둘 수 있는 곳이 아니라서.”

소매에 달린 커프스를 만지작거리던 시몬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실패했나? 하긴 이 정도로 발끈하는 게 이상한 일이…….’

그때, 마치 옅은 금빛 휘장을 두른 것처럼 주위 공기가 황금빛 입자를 품고 너울거렸다. 아리아드네는 바로 앞의 시몬이 저 멀리 있는 것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바닥이 훅 꺼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어딘가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금빛 휘장 너머 시몬이 기이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 * *

성도 살리바에는 세상의 모든 꽃이 모여 있다는 교황의 정원이 있었다. 아그네스는 정원 한가운데 놓인 카우치에 비스듬히 기댄 채로 붉은 장미를 손에 들었다.

“공녀가 엘바의 비밀을 밝혀낼 수 있을까요?”

성 상티모니아의 수석 사제 레지나가 화병을 탁자 위에 놓으며 물었다.

“시몬만 잘 긁으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 짖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미친개니까.”

정원 가위에 썩둑 잘려 나간 장미의 푸른 줄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구제할 길 없는 마마보이라는 걸 알려 줬으니, 그걸 어떻게 활용하는가 하는 건 본인 몫이지.”

“랭스턴 공작을 정말 버릴 생각이십니까?”

화로 위에 놓인 주전자 입구에서 뿌연 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레지나가 주전자에서 끓는 물을 따라 냈다. 쪼르륵 소리를 내며 펄펄 끓는 물이 넓은 그릇 위로 떨어졌다.

“시몬은 선을 넘었다. 지금 잘라 내지 않으면 살리바까지 집어삼키려 들 테지.”

사선으로 잘린 장미 줄기가 또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레지나는 아그네스가 손질을 끝낸 장미를 모아 뜨거운 물에 줄기를 살짝 담갔다 꺼냈다.

“그러다 일이 잘못되어 랭스턴 공작이 메르디에스 공녀를 해치기라도 하면 어찌합니까?”

레지나의 질문에 아그네스가 느릿하게 놀리던 손을 멈추었다.

“그거야말로 잘된 일이지. 랭스턴을 쓸어버릴 좋은 명분이니. 아니, 내가 나설 것도 없이 메르디에스가 미쳐 날뛰겠구나.”

피처럼 붉은 장미를 가만히 바라보는 아그네스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하지만 레지나는 아그네스의 얼굴에서 다른 기색을 읽었다.

“공녀가 마음에 꺼려지십니까?”

피식 웃음을 흘린 아그네스가 느슨하게 기대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다 가진 사람은 처음 보았다.”

아그네스는 손에 들린 장미 가운데서 덜한 것들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혈통, 재산, 지위, 권력, 그런 것들을 말하는 게 아니야.”

탐스럽게 피어난 장미가 하나둘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떤 고난과 절망도 그이 앞에선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할 거다.”

아그네스의 손에 남은 건 가장 탐스러운 한 송이뿐이었다.

“조금 질투가 나는구나.”

아그네스가 손에 들린 가위로 장미를 뚝 잘라 냈다.

“그렇다고 내 손으로 죽이고 싶을 정도는 아니지만.”

장미의 붉은 송이가 바닥에 흐트러진 줄기들 위로 하늘하늘 떨어졌다. 교황 아그네스의 정원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들이 모두 모여 있다고 한다.

* * *

두 발로 딛고 선 땅이 꺼지는 줄 알았더니 세상이 뒤집혔다. 땅이 솟구쳐 하늘이 되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이게 대체 무슨…….’

그때 바닥에 엎어진 흰 천이 천천히 일어나더니 아리아드네에게로 다가왔다.

“……괜찮, 으십니까?”

흰 덩어리처럼 보이던 것이 천천히 형체를 갖춰 가더니 아리아드네에게 안위를 물었다.

“리카…… 르도 경?”

앞으로 내민 손이 허공을 더듬다 힘없이 떨어졌다.

아리아드네는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손으로 머리를 짚으려 했다. 손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뭐 때문인가 하고 봤더니 누군가 제 팔을 붙들고 있었다.

“……어, 다행이다.”

팔을 붙든 사람이 유진임을 확인한 순간, 긴장이 탁 풀렸다.

“다행은 무슨…….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저지른 거야? 무슨 말인지 전부 알아듣진 못했지만 그놈 부모에 대해 비아냥거린 거 맞지?”

찌푸린 미간은 평소보다도 골이 깊었다. 유진이 추궁하듯 물었다.

“……뭐든 해야 할 거 아냐. 그 정도는 매끈하게 빠져나갈 줄 알았더니 의외로 쓸모가 있는 사람이었네.”

대답을 듣자마자 얼굴을 팍 찡그린 그의 서슬에 아리아드네는 슬쩍 눈을 피했다. 그대로 수색이 끝나면 아무것도 찾을 수 없을 것이 뻔했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기회를 만들어야 했다.

아그네스의 조언이 떠올라 큰 기대하지 않고 시도해 본 건데, 이렇게 쉽게 걸려들 줄이야. 아리아드네는 제 안에서 시몬에 대한 평가를 두 단계쯤 낮췄다.

“오늘만 살아? 왜 그렇게 겁이 없어? 왜 그렇게 자기 목숨 귀한 줄을 몰라.”

붙들고 있던 팔을 놓아준 유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목숨 귀한 걸 왜 몰라. 내가 내 목숨 얼마나 애지중지하는데…….”

꾸중 당하는 기분에 말끝이 자꾸 어물어물 말려들었다.

“그래서 당신 잡아당겼잖아. 당신 믿고 저지른 거지.”

유진이 없다면 좀 더 복잡한 방법을 강구했겠지만, 안전만 담보된다면 과감한 시도를 해 볼 만한 상황이었다.

“……그건 그나마 다행이네.”

찡그린 인상이 그나마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어쩐지 그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그렇다고 잘했다는 건 아냐.”

유진이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를 믿고 저지른 일이니까. 내 목숨줄을 쥔 사람이니 눈치를 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아리아드네는 제 상태를 그렇게 납득했다.

“곁에서 떨어지지 마.”

아리아드네의 손목을 쥔 그가 앞장서서 걸었다. 아리아드네는 손목이 잡힌 채 유진을 따라 걸으며 지끈거리는 머리로 조금 전 상황을 정리했다.

공기가 황금빛으로 물드는가 싶더니 갑자기 발을 딛고 있던 땅이 훅 꺼지며 세상이 뒤집혔다.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 간 거지? 아니, 사라진 건 다른 사람들이 아니야. 우리지.’

시몬이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외따로 떨어진 것은 아리아드네, 유진, 리카르도 세 사람뿐이었다.

‘공통점이라면 시몬 뒤쪽에 있었다는 건가.’

희미한 빛을 따라 세 사람은 말없이 들어온 입구 쪽으로 걸었다. 동굴을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입구로 나오는 것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입구로 나온 그들 앞에 펼쳐진 풍경은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한낮에도 어둑한 느낌이 들 정도로 빽빽한 나무로 가득했던 숲이 아니었다. 청보랏빛의 풀들이 발목 어림에서 흔들리는 넓은 들판이었다. 끈적하고 습했던 공기마저 적당히 시원하고 청량했다.

아리아드네는 자신들이 빠져나온 동굴 입구를 뒤돌아보았다. 저 동굴이 일종의 ‘문’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시몬은 ‘문’을 열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오후 내내 뙤약볕 아래에서 말을 타고 숲을 걸었더니 땀에 전 셔츠가 자꾸만 몸에 들러붙었다. 아리아드네는 찡그린 얼굴로 옷깃을 펄럭이며 주위 지형을 살폈다.

“찝찝해?”

“아, 괜찮…….”

이런 상황에서 예민하게 굴 생각은 없었던지라 괜찮다고 하려다 아리아드네는 하던 말을 멈추었다. 아리아드네보다 배는 움직였을 유진은 여전히 말끔한 모습이었다.

위화감을 느낀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기울이자 가까이 다가온 유진이 엄지와 중지를 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바람이 분다거나 상쾌한 기운이 감돈다거나 그런 전조도 없이 걸치고 있던 옷이 갓 세탁한 것처럼 깨끗해졌다.

“아, 맞다.”

아리아드네는 그제야 그가 가진 능력에 생각이 미쳤다.

사물의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더러워진 옷을 깨끗한 상태로 만드는 것쯤은 일도 아니겠지. 하지만 시간을 부린다는 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능력이라 대단한 일만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런 사소한 일에도 그런 능력을 쓸 수 있을 줄이야. 아리아드네는 새삼 눈앞의 유진을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당신 진짜 유용한 재주를 가졌구나.”

그녀는 깨끗해진 셔츠에 코를 묻고는 킁킁 냄새를 맡았다. 산뜻해진 옷에 기분이 좋아졌다.

“고마워.”

유진은 이런 것쯤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지만 뿌듯한 표정까지 숨기지는 않았다.

“그럼 슬슬 움직여 볼까?”

유진이 근처를 살피던 리카르도를 불렀다. 바닥에 쓰러졌던 리카르도의 새하얀 성기사단 제복은 구정물과 흘린 땀 때문에 엉망진창이었다.

아리아드네가 옷의 물기를 짜내는 리카르도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아리아드네의 시선에 리카르도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끔벅였지만 말끔해진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앞장서서 걸었다.

“여기가 엘바 안이긴 하겠지?”

조금 전에 본 서쪽 숲과는 판이한 풍경에 불안해진 아리아드네가 물었다.

“엘바가 맞긴 합니다.”

리카르도가 먼바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발톱 모양의 작은 섬이 있었다.

“저 섬은 보는 방향에 따라 그 생김이 달라 부르는 이름도 다릅니다. 엘바에서는 저 섬이 맹수의 발톱 같다 하여 웅굴라라고 부릅니다. 저 섬이 발톱 모양을 하고 있으니 이곳은 엘바가 맞습니다.”

서대륙이나 디움 산맥 너머의 땅은 아니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세 사람은 곧 오래된 신전에 다다랐다. 동굴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폐쇄된 지형일수록 신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기 마련이었다.

신을 모시는 사람들은 언제고 신이 이 땅에 다시 강림하여 자신들을 쫓아낸 인간들을 벌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때까지 신을 잊지 않고 모시는 자들만이 신에게 선택받을 수 있다고 했다.

‘언제 올지 알고 기다려.’

아리아드네는 흰 석조 신전을 무심히 둘러보며 신전 중앙에 위치한 조각상을 살펴보았다.

조각상에는 시간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났다. 세월에 마모된 조각상은 본래 모습을 알기 어려웠다. 온전했다면 긴 머리를 늘어트린 여자가 동물을 거느린 모습쯤 되었을까.

여자가 거느린 네발짐승은 상체가 부서져 무엇인지 알 수 없었고, 여자의 형상도 목 아래가 전부였다.

그나마 온전한 것은 여자의 발치에 새겨진 문구 정도였다.

「혼돈에서 태어나 이 땅의 질서를 세운 황금의 주인이시여.」

그 시작이 이른 신일수록 가진 권능 또한 강하다고 믿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신의 탄생을 말할 때면 최초니, 혼돈이니, 창세니 하는 말들이 붙곤 했다.

“리카르도 경, 이 신전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시나요?”

혈통으로 엘바의 자치를 인정받는 랭스턴은 추기경들의 투표로 선출되는 교황보다 더 오랫동안 권력을 이어 왔다. 엘바는 그런 랭스턴이 다스리는 땅이니 오래된 유적이 남아 있다 해도 이상하진 않았다.

리카르도가 아리아드네가 보고 있던 조각상을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

리카르도가 대답을 마치려던 찰나, 아리아드네 위로 그림자가 졌다. 사나운 칼날에 햇빛이 반사되어 아리아드네는 눈살을 찌푸렸다. 리카르도의 칼날이 아리아드네의 어깨를 지나 뒤쪽을 향해 있었다.

“이건 뭐야?”

등 뒤에서 들려 온 익숙한 목소리에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돌렸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벌벌 떠는 남자가 한 명 있었고, 유진은 그런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야?”

유진이 남자에게 다그치듯 물었지만 그의 이름을 말한 것은 남자가 아니었다.

“조셉?”

땅바닥에 주저앉아 벌벌 떠는 남자를 알아본 아리아드네가 그를 불렀다.

“아, 아리아드네 님…….”

조셉이라 불린 남자가 믿기지 않는 듯 눈을 깜박였다.

“아리아드네 님이 여긴 어떻게……. 어서, 어서 이곳을 떠나셔야 합니다.”

조셉이 허둥지둥 일어나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셉, 데리러 왔어.”

정신이 반쯤 나간 듯 주위를 맴돌던 남자가 아리아드네의 말에 움직임이 뚝 멎었다.

조셉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벌린 입에서는 입 안으로 바람이 지나가는 것 같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늦어서 미안해.”

조셉에게 다가간 아리아드네가 거친 두 손을 잡았다. 가문 대대로 메르디에스 상단에서 일해 왔다는 것은 조셉의 큰 자부심이었다.

조셉의 큰딸은 손재주가 좋아 결혼하기 전까지 아리아드네의 머리를 종종 땋아 주고는 했다. 그의 아들은 메르디에스의 정식 기사가 되는 것이 꿈인 청년이라고 했다.

사라진 이백 명 모두의 이름을 알지는 못하지만, 그중에는 아리아드네가 얼굴을 알고 이름을 아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알버트가 아니었다면, 마물이 아니었다면 그저 불행한 사고 중 하나로 또다시 그렇게 넘겼을지도 모른다. 아리아드네는 조셉의 통곡이 제 무심함을 꾸짖는 소리 같았다.

“미안해.”

아리아드네는 제 손에 절박하게 매달린 조셉을 향해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너무 늦어서, 미안해.”

엘바의 생존자 조셉은 꺽꺽거리는 숨만 몰아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한참을 통곡했다. 아리아드네는 그가 제 마음속 울분을 쏟아 내도록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아, 제가 감히…….”

겨우 진정한 그가 벌겋게 부은 눈을 거칠게 문지르며 붙잡고 있던 아리아드네의 손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미안해. 고생 많았지?”

“아니, 아닙니다. 이렇게, 이렇게 와 주신 것만 해도…….”

그는 아리아드네에게 사과를 받은 것이 어색하고 불편한 듯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몸은 좀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저, 저는 괜찮습니다. 저는, 이렇게 저 혼자만 남아서…….”

조셉은 다시 울컥했는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조셉,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줄 수 있어?”

“그, 게 그러니까…….”

조셉은 불안한 얼굴로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살폈다. 유진과 리카르도를 힐끗 쳐다본 조셉은 벌벌 떨면서도 비교적 침착하게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게…… 평소처럼 중립 지역인 카타라에서 물건을 팔고, 그 돈으로 서대륙의 물품들을 샀습니다. 서대륙 물건을 싣고 엘바에 들렸는데, 다른 때보다 경계가 느슨했습니다.”

이야기를 시작한 조셉은 행여나 중요한 단서를 놓치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 그러니까 엘바는 늘 경계가 삼엄해 상단원들 모두 행동거지를 조심하는 편이었습니다.”

그의 눈동자가 지난 일을 회상하듯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날따라 엘바의 주민들이나 경계를 서는 병사들의 태도가 느슨해서 거래량이 평소보다 부쩍 늘어서 다들 신이 났습니다. 저녁을 먹으며 주민이 건네준 술을 가볍게 마셨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다음 날 아침이었습니다.”

조셉은 그 술을 마시지 말았어야 한다며 한탄했다.

“그런데 밤사이 일부 상단원들이 사라졌는데, 사라진 상단원이 술에 취해 서쪽 숲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출입이 금지된 곳이니 크게 기대하지 않고 병사에게 말했는데, 병사가 잠깐이라면 찾아봐도 좋다고 해서 이곳에 들어오게 된 겁니다.”

이 대목에서 조셉은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게 틀림없다며 분개했다.

“수상한 동굴이 있어서 살피러 들어갔다가 나와 보니 이곳이었습니다. 아무리 출구를 찾아도 찾을 수도 없고……. 심지어 괴물들이 사람을, 괴물들이…….”

겨우 진정했던 조셉이 괴성을 지르며 온몸을 벌벌 떨었다.

“틸레가 서신을 달고 돌아왔어. 마물로부터 살려 달라고.”

“마크! 마크가 보냈습니다. 가지고 있던 틸레를 모조리 날려 보냈습니다. 날짐승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메르디에스에 돌아온 틸레는 한 마리에 불과했다.

“서신을 받고 기사들을 상단으로 위장해서 수색대를 보냈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어.”

“……추가 수색대도 다들, 다들 마물에 먹혀 버렸습니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조셉이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아리아드네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해가 지기 전에 어서 도망가셔야 합니다. 이곳은, 이곳은…….”

조셉의 두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마물을 사육하는 지옥입니다.”

아리아드네는 조셉의 말이 공포에 반쯤 미쳐서 하는 말인가 했다.

“마물을 사육한다니 그게 무슨…….”

“…….”

하지만 리카르도의 반응을 보고는 그것이 아님을 알았다. 마물을 사육한다는 기괴한 말에도 리카르도는 지나치게 침착했다.

“리카르도 경, 알고 있었나요?”

아그네스가 자신을 끌어들여 엘바에 보낸 것에 아무 계산이 없으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아그네스와 시몬 사이의 균형추를 무너뜨릴 만한 비밀이 엘바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이만한 일이면 사전에 언질을 주기 어려우리란 것도 납득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눈앞의 리카르도에게, 살리바에 앉아서 제게 어떤 기대를 품고 있을 아그네스에게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안전한 곳에서 관망하고 있을 뿐, 아무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다.

“아무리 폐쇄적인 섬이라지만 이곳 또한 성 상티모니아의 땅. 교황 성하의 눈이 닿는 곳이니까요.”

리카르도는 그것이 마치 대단한 자랑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알면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건가요?”

아리아드네가 추궁하듯 말하자 마치 투정 부리는 아이를 달래는 것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까지는 짐작일 뿐이었습니다. 살리바와 엘바의 상호불가침을 깨뜨릴 만한 직접적인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만한 규모의 성기사단이 엘바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성물을 지닌 공녀를 호위한다는 명목이 있어 가능했던 겁니다.”

리카르도는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덧붙였다.

“지금 여기서 확실한 증거만 잡으면, 엘바에 잠입한 살리바의 세력과 인근 해역에서 대기 중인 병력이 투입될 예정입니다.”

자신들의 땅에서 일어난 일에 타인을 끌어들여 해결하려 한 주제에, 공은 자신들이 독차지하겠다는 속내가 뻔했다.

리카르도는 제 말이 얼마나 계산적으로 들릴지 자각조차 하지 못하는 인사였다. 안심하라는 듯 가볍게 웃는 낯이 참으로 단정했다.

“몇 가지 확인 좀 하죠.”

아리아드네는 사무적인 태도로 입을 열었다. 리카르도를 상대하느라 감정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조셉의 말을 들어 보니 메르디에스 상단이 휘말린 건 사고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평소보다 느슨한 경계, 수면제가 든 술, 밤사이 사라진 사람들, 서쪽 숲을 지키는 병사의 허락.

그 모두가 메르디에스 상단원들을 출입이 금지된 서쪽 숲으로 유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최근 교황청에서는 랭스턴의 주요 자금줄 가운데 일부를 막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자금 압박에 시달린 랭스턴이 메르디에스 상단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메르디에스가 카타라를 통해 유통하는 서대륙 물품은 메르디에스 상단의 주된 수익 중 하나였다. 엘바에 체류한 메르디에스 상단이 가지고 있었던 물건을 돈으로 환산하면 웬만한 영지의 일 년 수입이었다.

‘결국, 그 많은 사람을 죽인 이유가 돈 때문이란 말인가.’

아리아드네는 벌벌 떠는 조셉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조셉, 이 섬에 마물이 있다는 것은 알겠어. 그런데 마물을 사육한다는 건 무슨 말이야?”

마물은 번식 방법이나 성장 과정 같은 기본적인 생태조차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생물이었다. 그런 마물을 사육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제가, 제가 본 것만 해도 십 종이 넘었습니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것이 태반이었고, 책에서나 봤을 법한 겨우 이름만 알 만한 마물도 있었습니다. 히드라, 마르티코라스, 메로우……. 아, 네우라와 밤피르, 자크루스도 있었습니다. 하늘을 나는 마물만 세 종이나 됩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분명, 이 섬에서 마물을 키우고 있는 겁니다. 사람을 괴물의 먹이로 주면서요!”

조셉은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며 횡설수설했지만, 그의 말마따나 저 많은 마물이 한곳에서 발견된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그것만이라면 마물을 사육한다는 근거로 부족할 수 있으나.

“교황청에서도 그렇게 생각한 데는 이유가 있겠죠?”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더 숨길 것도 없다는 듯이 리카르도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바에서 무언가를 키우고 있다는 것을 짐작한 지는 여러 해 되었습니다. 그런데 병사를 양성한다기엔 앞뒤가 맞지 않아 좀처럼 꼬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최근 사냥한 마물 가운데 일부가 이상 행동을 보였습니다. 미끼를 던져 사람을 유인하기도 하고, 속임수를 써 도망가기도 했습니다. 마치 잘 훈련된 동물처럼요. 그래서 엘바에서 키우는 것이 병사나 일반적인 동물이 아니라 마물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몇 가지 의심할 만한 정황이 더 있었지만 증거를 잡지는 못했습니다.”

‘훈련? 그렇다면 설마…….’

아리아드네는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간신히 삼키고 물었다.

“그렇다면 최근 엘바에서 일어난 잇단 실종은…….”

아리아드네의 생각을 짐작한 듯 리카르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물의 훈련을 위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막연한 짐작과 확신은 또 달랐다. 곁에서 둘의 대화를 듣던 조셉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덜덜 떨었다.

“살려 주세요, 아리아드네 님. 제발 저 좀, 저 좀 살려 주세요. 저 죽고 싶지 않습니다.”

조셉이 아리아드네의 다리를 붙잡으며 매달렸다.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은 공포로 가득했다. 조셉이 느끼는 공포가, 죽은 사람들의 목숨이 아리아드네의 어깨를 짓눌렀다.

“해가, 해가 기울기 전에, 제발 좀 저를 여기서……. 아들과 아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발, 제발 저 좀 살아서 돌아가게……. 제발……. 괴물이, 곧 괴물이 올 겁니다.”

아는 사람들이 하나둘 괴물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봐야 했던 조셉은 점점 기울어 가는 해를 보며 공포에 질려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때, 이제까지 가만히 지켜보던 유진이 입을 열었다.

“해가 기울기 전에 도망가야 한다고 했는데, 그 말은 해가 지면 마물이 나타난다는 말인가?”

눈물을 쏟아 내던 조셉이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유진이 누구인지 모르니 그럴 법도 했다.

아리아드네가 믿어도 좋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조셉이 떨리는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

“노을이 깔리기 시작하면 괴물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네?”

“반년.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요행만으로 반년 동안 혼자 살아남을 수는 없지. 아닌가?”

유진의 물음에 조셉은 괴로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마크가, 제가 살아남은 것은 모두 마크 덕입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이 신전 안에 있으면 괴물들이 눈이 먼 것처럼 눈앞의 사람도 몰라봅니다. 마크가 이것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다들 죽어 버려서…….”

“마크라면 틸레라는 새를 날려 보냈다는 그 사람인가?”

“맞습니다.”

“그자는 어디 가고?”

“마크는 해가 떠 있는 동안 섬을 살펴보고는 했습니다. 나갈 방법을 찾겠다면서. 하지만 보름 전, 신전을 나간 후로는…….”

조셉이 말을 마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해가 질 때까지 신전에 돌아오지 못한 마크가 어떻게 됐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갔다.

“해가 떠 있는 동안은 마물이 나타나지 않는다. 마물이 나타나도 이 신전 안에서는 그나마 안전하다. 그 말이군.”

담담한 태도로 알아낸 것을 정리한 유진은 고개를 좌우로 꺾더니 묵직한 신발로 바닥을 가볍게 찼다.

“좀 살펴봐야겠어.”

유진은 제 말에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아리아드네와 리카르도를 만류하며 말했다.

“당신들은 여기 있어. 같이 가 봤자 방해만 돼.”

그렇게 말하는 유진에게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조를 수는 없어서 아리아드네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래, 조심하고.”

해를 가늠하듯 하늘을 힐끗 바라본 유진은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올 거야.”라며 풀숲 사이로 훌쩍 사라졌다.

자리를 비운 건 고작 한 사람이고, 남은 건 세 사람인데 아리아드네는 마치 저 혼자 남은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아직도 쨍하니 하늘을 비추는 해가 거슬렸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차라리 해가 지고 마물과 마주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나마 냉정을 유지하던 유진마저 사라지자 남은 사람들 사이에는 침통한 적막만이 맴돌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한 리카르도는 호위하듯 신전 입구를 지키고 섰다.

아리아드네는 눈이 아플 정도로 쨍한 햇빛을 노려보며 이제까지 얻은 정보들을 머릿속으로 굴려 보았다.

아리아드네 생각대로 마물이 카이엔의 숨겨진 힘이었다면, 엘바에서 사육한 마물을 카이엔이 공급받았다는 말이 된다.

‘시몬은 내가 엘바에 올 것을 알고도 왜 이곳에 마물을 남겨 둔 걸까. 그에게도 마물이 중요한 전력이라 쉽사리 빼돌릴 수 없었던 걸까.’

알아야 할 것은 수없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궁금한 것은.

“엘바의 마물을 어떻게 섬 밖으로 운반한 거지?”

아리아드네는 제 목에 칼을 겨눈 사람에게 물었다. 햇빛을 받은 금발이 반짝 빛이 났다.

“이렇게?”

키득거리며 장난꾸러기 아이 같은 웃음을 매단 시몬이 답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