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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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메르디에스 공녀.”

    “환대에 저 또한 감사드립니다. 랭스턴 공작.”

    엘바에 정박한 배에서 내린 일행을 맞은 것은 랭스턴 공작, 시몬 랭스턴이었다.

    성화 속에 나오는 천사처럼 무해한 얼굴을 한 남자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선한 눈매가 보기 좋게 휘어졌다.

    “공녀 일행을 성으로 모셔라.”

    아리아드네가 해사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아뇨. 그 전에 엘바의 서쪽 숲에 들려야 할 것 같네요. 정화한 성물이 부정을 타지 않으려면 성녀께서 인도한 길대로 움직여야 함을 알고 계시겠지요?”

    그녀의 손에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주석잔 하나가 들려 있었다. 성녀 베아트리스가 정화한 성물 유기스였다.

    어떤 경로로 움직일지는 물론 베아트리스와 말을 맞춰 둔 다음이었다.

    “서쪽 숲은 이곳의 주민들조차 꺼릴 정도로 위험한 곳입니다. 가셔야겠다면 위험 요소를 충분히 제거한 다음에 가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시몬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마치 아리아드네의 안전을 염려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엘바의 서쪽 숲. 이곳의 주민들조차 꺼릴 정도로 위험하다지만 무엇 때문인지 그 이유는 알려진 것이 없었다.

    ‘말리는 이유가 정말 그곳이 위험해서인지, 밝혀지면 안 될 비밀이 있어서인지는 가 보면 알게 되겠지.’

    아리아드네는 대단한 사명을 짊어진 사람처럼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요. 그러다 기껏 정화한 성물이 정결하지 못한 것을 만나기라도 하면 어떡하나요? 전 지금 가야겠어요.”

    아리아드네가 제 옆에 선 성기사 하나를 붙잡고 가만히 바라보자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성물을 성 상티모니아의 땅에 안치하겠다는 어려운 결심을 한 귀인께서 바라는 일이라면 뭐든 모자람 없이 행하라는 교황 성하의 분부가 있으셨습니다.”

    성기사의 말에 시몬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공녀의 뜻이 이토록 확고하시니 어쩔 도리가 없군요.”

    “이 모든 것이 저를 이곳으로 이끄신 신의 뜻이지요.”

    시몬은 아리아드네 일행을 위해 말을 내어 주었다.

    이곳의 말은 육지의 말보다 발굽이 넓은 품종이었다. 모래가 많은 엘바의 지형 때문인 듯했다. 엘바의 말은 등자가 없어 발을 걸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예상외의 상황에 머뭇거리는 아리아드네에게 금발에 푸른 눈을 지닌 성기사 한 명이 다가왔다. 조금 전 시몬에게 아그네스의 말을 전한 그 기사였다.

    “저는 리카르도라고 합니다.”

    “리카르도 경, 제게 할 말이 있으신가요?”

    “공녀께서 말에 오르기 어려우실 듯한데 제가 도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리카르도라고 이름을 밝힌 기사는 호리호리한 체형에 곱상한 외모를 가진 남자였다.

    견장의 표식으로 보아 동행한 성기사 중 그의 계급이 가장 높았다. 적당히 친분을 다져 두면 나쁠 것 같지 않아 아리아드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주시면―”

    고맙겠다는 뒷말은 허공에 번쩍 들린 몸 때문에 그대로 삼켜야만 했다. 아리아드네는 제 허리를 잡고 그대로 들어 올린 유진 덕분에 가뿐하게 말 위에 오를 수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높아진 시야에 어정쩡하게 내민 리카르도의 손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다음에 부탁드릴게요.”

    리카르도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다른 말을 향해 걸어갔다.

    “왜? 말에 타려던 거 아니었어?”

    뭐가 문제냐는 듯 다른 말에 훌쩍 오르는 유진을 보며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고맙다고.”

    “이제까지 알뜰하게 써먹은 거에 비하면 이 정도야 뭐.”

    뻔뻔한 건지, 친절한 건지. 아리아드네는 피식 웃으며 멀어지는 검은 뒤통수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새하얀 모래가 깔린 해변은 햇빛을 받아 진주 가루처럼 반짝였다.

    서쪽 숲은 배가 정박한 항구에서 두어 시간 거리였다. 유난히 강렬한 햇볕에 아리아드네의 얼굴에도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간소한 차림을 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때, 시몬이 자신이 탄 말을 아리아드네 가까이에 붙여 왔다. 그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꾹꾹 눌러 닦으며 말했다.

    “뙤약볕에 공녀의 고운 피부가 거칠어지기라도 할까 걱정입니다.”

    “괜찮습니다. 뙤약볕이 무서웠다면 애초에 엘바에 발을 들이지 않았겠죠.”

    아리아드네가 점점 가까워지는 서쪽 숲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답했다.

    “저곳이 서쪽 숲인가요?”

    “숲 입구에서부터는 말을 탈 수도 없습니다. 숲 내부는 습지라 지금보다 훨씬 더 덥고 습할 뿐 아니라 온갖 벌레들이 들끓는 곳입니다.”

    이제라도 말을 돌리라는 은근한 회유에 아리아드네가 빙긋 웃으며 두 손을 모았다.

    “말을 탈 수 없다니 성녀께서 인도한 길에 더 가까이 갈 수 있겠네요.”

    가면 같은 시몬의 웃는 낯이 일그러지는 걸 기대했는데, 곱게 접은 눈가는 변함이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엘바의 풍경에 감탄하고 시종 재잘대며 기대와 흥분을 과장되게 표현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멎은 것은 서쪽 숲 입구에서였다.

    검푸른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서쪽 숲은 입구에 서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알버트를 찾아서 캐롤린에게 데려갈 수 있을까.’

    고삐를 쥔 아리아드네의 손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속이야 어떻든 긴장한 기색을 겉으로 드러내서야 곤란했다.

    아리아드네는 말갈기를 천천히 쓸어내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녀의 손길이 기분 좋은 듯 푸르렁 대던 말이 갑자기 몸을 굳혔다.

    그때, 황토색 말머리 너머로 검은 물체가 불쑥 나타났다.

    “안 내려?”

    어느새 다가온 유진이 제 어깨를 짚으라는 듯 고개를 까닥했다. 맹수라도 만난 것처럼 긴장한 말 위에서 아리아드네는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가 함께 있는 이상 저 숲속에 무엇이 있든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석상처럼 단단한 어깨는 안정감 있게 아리아드네를 받쳐 주었다. 허리에 감긴 팔은 그녀가 지면에 발을 딛자 담백하게 떨어져 나갔다.

    “고마워.”

    서쪽 숲에 시선을 고정한 유진이 귓가에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말했다.

    “조심해.”

    “뭘?”

    “내 눈이 닿는 곳에서 벗어나지 마.”

    아리아드네는 유진의 경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셈이었다. 어떻게 되찾은 삶인데, 카이엔의 숨통을 끊어 놓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 했다.

    “그럼 가 볼까?”

    아리아드네는 시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선두에 서서 서쪽 숲으로 진입했다.

    숲속은 한낮에도 어둑한 느낌이 들 정도로 빽빽한 나무들로 가득했다. 질퍽한 땅은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신발 밑창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아리아드네가 서쪽 숲을 의심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첫째, 서쪽 숲 끝은 폭포가 떨어지는 해안 절벽이었는데 그 아래는 거센 조류가 흘러 배가 정박할 수 없었다. 여러모로 접근하기 힘든 곳이니만큼 무엇을 숨기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둘째, 서쪽 숲은 메르디에스 상단원들의 사체가 처음 발견된 남쪽 해변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곳에서 반드시 단서를 찾아야 해.’

    아리아드네가 숲 가운데로 난 길을 걸으면, 뒤따르는 메르디에스와 교황의 기사들이 재빠르게 주위를 수색했다. ‘성물’과 성물을 가진 ‘아리아드네’를 호위한다는 명목이었다.

    숲 전체를 샅샅이 훑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 정도가 한계였다. 아리아드네가 숲을 걷는 동안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하지 못하면 수색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최대한 천천히 걸었지만 밖에서 볼 때와는 다르게 숲은 그다지 넓지 않은 규모였다. 어느새 해안 절벽에 다다른 아리아드네는 발밑에서 도도히 흐르는 거센 물줄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간을 더 끌 만한 방법이 없을까.’

    아리아드네의 속셈을 훤히 짐작한 듯 만족스러운 웃음을 띤 시몬이 과장된 손짓으로 걸어온 길을 가리켰다.

    “서쪽 숲의 구경이 만족스러우셨다면 랭스턴 성도 만족스러우실 겁니다.”

    “그것참 기대되네요.”

    아리아드네는 얼굴에 자꾸 들러붙는 날벌레를 손으로 쫓아내며 세 살배기 어린 애도 믿지 않을 거짓말을 태연히 뱉었다.

    “아, 신발에 가시가 박혔나 봐.”

    대놓고 시간을 끌겠다는 아리아드네의 억지에 시몬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흘렸다.

    “사람이 끄는 마차라도 대령해 드려야 하나, 이것 참.”

    “그래 주시겠어요? 제가 꼼짝도 못 하겠어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을 기세로 제자리에 선 아리아드네가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한숨을 내쉰 시몬이 제 시종을 돌아보며 무엇이라 지시를 내렸다.

    아리아드네는 꼿꼿이 서서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우려와 기대, 비난과 언짢음을 묵묵히 받아 냈다.

    ‘이럴 줄 모르고 왔던 것도 아니잖아.’

    저들의 비난이야 간지럽지도 않았다. 아리아드네가 정말 걱정되는 건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때, 주위를 살피던 유진이 다가와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다친 건 아니지?”

    아리아드네는 정말 몸이 불편하기라도 한 것처럼 유진에게 몸을 기댔다. 불안으로 들끓던 가슴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아리아드네는 관자놀이를 누르는 척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가린 입술 사이로 다급한 말이 쏟아졌다.

    “이젠 정말 시간이 없어. 뭐라도 좋아. 이상한 점 발견 못 했어?”

    “발밑이 빈 것처럼 울리는 곳이 있었어. 하지만 입구를 알 수 없으―”

    “잠깐.”

    유진의 말을 끊은 아리아드네가 그에게 몸을 기댄 채로 슬쩍 옆으로 이동했다. 아리아드네가 제 발치를 눈으로 가리켰다.

    유진이 시선을 내리자 그녀가 신발을 슬쩍 들었다. 그곳에는 붉은 반점이 찍힌 흰 깃털이 반쯤 잘린 채로 떨어져 있었다.

    “메르디에스에서만 사용하는 전서구야. 분명 여기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유진은 아리아드네의 발을 살피는 척하며 몸을 숙여 흰 깃털을 주우려 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실패했고 이것은 매우 중요한 단서였다. 반으로 잘린 줄 알았던 흰 깃털은 무언가에 잘린 것이 아니라 바닥 틈에 끼어 반만 드러난 것이었다.

    속이 빈 것처럼 울리던 땅, 좀처럼 찾을 수 없었던 입구.

    “찾을 수 없다면 만들어야지.”

    유진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아리아드네를 제 뒤로 숨기고는 풀멘을 꺼내 바닥을 겨누었다.

    탕―!

    곧 지축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화약 냄새가 피어올랐다.

    “이게 대체 무슨―”

    “죽기 싫으면 비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가온 시몬을 밀쳐 낸 유진이 얼굴로 튀어 오르는 진흙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바닥을 향해 풀멘을 조준했다.

    타앙, 탕탕탕! 귓가가 멍멍할 정도로 연달아 바닥을 때리는 굉음에 사람들은 모두 귀를 막고 멀찌감치 멀어졌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소리는 멎었지만 풀로 덮인 바닥은 흙더미가 튀어 오르고 바닥이 푹푹 파인 것이 전부였다.

    “대체 왜 그러십니까?”

    마침내 웃는 얼굴이 깨진 시몬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일그러진 발음으로 물었다.

    성 상티모니아에서 신의 현신으로 취급받는 유진이 저지른 일이니 랭스턴 공작인 시몬으로서는 뭐라 추궁하기도 어려웠다.

    “길이 막힌 것 같길래.”

    유진의 심드렁한 목소리 사이로 투욱, 툭, 툭, 뭉텅이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섞였다.

    “저, 저기 좀 봐!”

    “왜…… 허억! 저게 뭐야?”

    경악에 찬 사람들의 시선이 그가 풀멘으로 갈겨 댄 바닥으로 쏠렸다.

    투두두, 두두두둑― 숲의 바닥이 무너지며 피어오른 흙먼지 사이로 붉은 반점이 찍힌 흰 깃털들이 공중으로 팔랑 날아올랐다.

    흙먼지가 가라앉은 바닥에는 새까만 지하 동굴의 입구가 드러났다.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동굴 입구에는 사람의 손이 닿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카터!”

    아리아드네의 서슬 퍼런 부름에 조사단의 수장 카터가 재빨리 다가왔다.

    “내 눈에는 저게 틸레로 보여서 말이야. 네 눈엔 뭐로 보여?”

    아리아드네가 손으로 가리킨 끝에는 깃털이 볼품없이 뜯긴 비둘기 한 마리가 동굴 입구에 죽어 있었다. 방향으로 봐서는 동굴로 들어가려다 입구가 닫히는 바람에 깃털이 틈에 끼인 채로 죽은 모양이었다.

    동굴 입구로 내려간 카터가 죽은 비둘기를 품에 안아 돌아왔다.

    “맞습니다. 틸레입니다. 틸레는 메르디에스에서 특별히 개량한 품종으로, 본성에 구조 요청을 하는 서신을 전한 것도 틸레였습니다.”

    카터가 일부러 뜸을 들이며 말을 이었다.

    “틸레를 전서구로 사용하는 것은 메르디에스가 유일합니다.”

    카터의 손에 들린 틸레는 편지를 담기 위한 나무 대롱을 발목에 달고 있었다.

    아리아드네가 들고 있던 성물 유기스가 떨어져 바닥에 굴렀지만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어안이 벙벙한 사람들을 느긋하게 둘러보다 어느 한 곳에서 멈추었다.

    한층 짙어진 녹빛의 눈동자가 마찬가지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시몬을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랭스턴은 엘바에서 실종된 메르디에스 상단원들의 무사 귀환을 간절히 바라는 바이며,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을 약속한다. 메르디에스는 엘바에서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할 시, 이를 수색할 권한을 지닌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명료하고 냉랭한 목소리가 고저 없이 메르디에스와 랭스턴 공국이 체결한 협력 사항을 읊었다.

    “랭스턴 공작님, 수색을 개시해도 괜찮을는지요?”

    허락을 빙자한 아리아드네의 통보에 시몬은 마지못해 허락하면서도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메르디에스 상단원들이 출입이 금지된 서쪽 숲에 발을 들인 게 확인된다면 그 책임을 지셔야 할 겁니다.”

    “책임을 져야 할 일을 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누구든 마땅히 그 책임을 지게 될 겁니다.”

    새파란 불이 타오르는 것 같은 푸른 눈동자와 늦여름 늪지처럼 진득한 녹빛 눈동자가 부딪혔다. 진득한 녹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아리아드네를 가만히 바라보던 시몬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얼마든지. 그토록 궁금해하시니 안내해 드리죠.”

    성화 속의 천사처럼 무해하게만 보였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비틀린 미소는 비열한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시몬은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듯 느긋한 태도로 앞장서서 걸었다. 자신만만한 그의 태도가 아리아드네를 불안하게 했다.

    쿵쿵, 북을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에 정신이 소란스러웠다. 아리아드네는 그 소리가 제 심장에서 나는 것임을 한참 후에야 알았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쉬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충분히 각오하고 나선 일이었다.

    불안해서는, 불안해하는 걸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된다. 지금 이 자리에서 시몬을 상대할 사람도, 메르디에스의 사람들이 믿을 사람도 오직 아리아드네 자신뿐이었다.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었다. 그러니…….

    “잘했어.”

    그 순간, 마디가 불거진 손가락이 아리아드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요동치던 심장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아리아드네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던 고개를 틀어 제 어깨에 올려진 손을 보다가 그 손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쯤 비죽 솟은 남자가 단단히 뿌리박은 나무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시간은 내가 벌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걱정 안 해.”

    동굴 입구로 걸어가는 유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숲속을 어지럽혔다.

    아리아드네는 천천히 손을 뻗어 제 그림자와 그의 그림자를 겹쳐 보았다. 잠잠해졌던 심장이 다시 거세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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